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16) 19대 광개토열제(광개토경평안호태황, 영락대제, 영락대왕, 광개토태왕, 광개태왕, 광개토대왕, 391년-413년) 연호; 영락, 392년 7월 백제 석현성 등 10여개 성 함락, 392년 10월 관미성 함락, 395년 패수 대승, 395년 거란족 패려 정벌, 396년 아리수 이북 58개성 점령 · 위례성 포위, 398년 숙신 정벌, 400년 신라에 침입한 왜군 격퇴, 405 · 406년 요동 점령. 본문
1. 고구려(16) 19대 광개토열제(광개토경평안호태황, 영락대제, 영락대왕, 광개토태왕, 광개태왕, 광개토대왕, 391년-413년) 연호; 영락, 392년 7월 백제 석현성 등 10여개 성 함락, 392년 10월 관미성 함락, 395년 패수 대승, 395년 거란족 패려 정벌, 396년 아리수 이북 58개성 점령 · 위례성 포위, 398년 숙신 정벌, 400년 신라에 침입한 왜군 격퇴, 405 · 406년 요동 점령.
대야발 2025. 11. 20. 16:31
「광개토대왕릉비」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열여덟 살(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다. (왕의) 은택은 하늘까지 적시고 위무(威武)는 온 세상에 떨치셨다. (왕이) □□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생업을 평안히 하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 살(412년)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일에 산릉(山陵)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원문: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卅有九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
395년 기사 :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패려(稗麗)가 사람들을 [붙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營)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 북풍(北豊), 오비□(五備□)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 원문: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 □城,力城,北豊,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이 문장 바로 다음의 해석은 논란이 있다. 논란 부분을 볼 것.
-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396년 기사 :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우리)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도성(위례성)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백잔군이)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아신왕)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포로)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히 여겼다. 이때 58개 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 원문: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 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398년 기사 : 영락 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숙신) 토곡을 순찰하도록 했다. 이때 막□라성(莫□羅城),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식신은)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
- 원문: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399년 기사 :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 원문: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400년 기사 :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경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왜병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관군이) 신라성, □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 ▨▨▨ 이하 71자 대부분은 글자 훼멸 때문에 알 수 없음.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에서 왜(倭)와 백제의 제(諸) 연합세력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 성과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 원문: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5]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5]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3][6]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404년 기사 :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잔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을 [동원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원문: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407년 기사 :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이 1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주성(□住城), □성, □□□□□□성을 격파하였다.
- 원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城.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우리) 군이 여성(餘城, 동부여의 도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대체로 헤아려 보니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천400개였다.
- 원문: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舉]國駭□□□□□□□□□. 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鴨盧.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1)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廣開土王)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 392년 05월 )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이름이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책립되었고, 9년에 왕이 사망하여 태자가 즉위하였다
백제의 10성을 빼앗다 ( 392년 07월 )
[즉위년(392)]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城)을 빼앗았다.
거란을 정벌하다 ( 392년 09월 )
〔즉위년(392)〕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 본국이 빼앗겼던 백성 10,000명을 불러서 이끌고 돌아왔다.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다 ( 392년 10월 )
〔즉위년(392)〕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이며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 왕이 군대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백제의 공격을 막다 ( 393년 08월 )
2년(393)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니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다 ( 393년 08월 )
〔2년(393) 가을 8월에〕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백제의 침공을 물리치다 ( 394년 07월 )
3년(394) 가을 7월에 백제가 침공해오니 왕이 정예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맞받아쳐서 패배시켰다. 살아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나라 남쪽에 7개의 성을 쌓다 ( 394년 08월 )
〔3년(394)〕 8월에 나라 남쪽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패수에서 백제군을 격퇴하다 ( 395년 08월 )
4년(395) 가을 8월에 왕이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패배시키고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후연에 사신을 파견하다 ( 400년 01월 )
9년(400)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보내 〔후〕연[燕]에 가서 조공하였다.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 400년 02월 )
[9년(400)] 2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몸소 군대 3만을 거느리고 습격하여왔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 등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넓히고 5천여 호를 옮기고 돌아갔다.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다 ( 402년 )
11년(402) 왕이 군대를 보내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후〕연[燕]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후연을 공격하다 ( 404년 11월 )
13년(404) 겨울 11월에 군대를 출병시켜 〔후〕연[燕]을 침공하였다.
후연의 요동성 침공을 물리치다 ( 405년 01월 )
14년(405) 봄 정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해왔다. 막 성을 함락시키려 하는데, 〔모용〕희가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짐(朕)이 황후와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군이〕성 안에서 방비를 엄히 할 수 있게 되어 〔후연의 군대가〕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누리 피해가 일어나고 가뭄이 들다 ( 406년 07월 )
15년(406) 가을 7월에 누리[蝗蟲] 피해가 일어났고, 가뭄이 들었다
후연의 목저성 침공을 물리치다 ( 406년 12월 )
〔15년(406)〕 겨울 12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거란을 습격하였는데,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되돌아가려 하였다. 드디어 군수 보급품을 버리고 병사들을 가볍게 하여 우리나라[고구려]를 습격해왔다. 〔후〕연의 군대가 3천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지치고 얼어서,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다.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궁궐을 증축하다 ( 407년 02월 )
16년(407)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북연왕 고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다 ( 408년 03월 )
17년(408)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지파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라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자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을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거련을 태자로 삼다 ( 409년 04월 )
18년(409)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나라 동쪽에 6개의 성을 쌓다 ( 409년 07월 )
〔18년(409)〕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옮겼다.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 ( 409년 08월 )
〔18년(409)〕 8월에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광개토왕이 사망하다 ( 413년 10월 )
22년(413) 겨울 10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이름을 광개토왕이라 하였다.(2)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책성(연해주)에 태조무열제의 공덕을 새긴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 연안에 을지문덕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 밖에 연개소문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턱에 동천제(11세)가 하늘에 기원하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 묘가 있고,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 묘가 있다.
......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나시어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 전쟁에 임할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돋우셨다. 말타고 순행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는데 이때도 천악을 쓰셨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 임천 · 와산 · 괴구 · 복사매 · 우술산 · 진을례 ·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셨다. 속리산을 지나시다가,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백제 · 신라 · 가락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쳤다. 거란과 평량이 다 평정되어 굴복하였고, 임나 · 이국 ·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옛날부터 큐슈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다.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때문이다.
영락 10년(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3)
《조선상고사》
■ 광개태왕 서토남정의 개시
『고국양왕의 태자인 담덕 즉 훗날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영민하고 용맹했다. 군사를 맡은 그는 항상 귀신처럼 빠른 전략으로 백제군을 기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누차 대패를 거듭한 진사왕은 결국 한강 남쪽의 위례성(지금의 광주 남한)으로 천도했다. 진사왕은 담덕의 군사 행동이 무서워서 감히 전쟁에 나서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한수 즉 지금의 한강 이북 지역은 거의 다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관미성 즉 지금의 강화도는 예나 지금이나 천연적인 요새로 알려진 곳이다. 이 역시 담덕의 해군에 의해 함락됐다.
《삼국사기》에는 위와 같은 전쟁이 기록된 데 반해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는 본래 고대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그런 기록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서들에 인용된 문장들을 볼 때 그런 기록이 편년체가 아니라 기전체임을 알 수 있다. 기전체는 연대를 확인하기 곤란하다.
그런데 김부식은 그런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연대를 착실히 조사하지도 않은 채 각 왕의 연대에 사실 관계를 아무렇게나 배분했다. 예컨대 그는 법흥왕 원년의 사건인 아라가야의 멸망을 진흥왕 37년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또 석현성 등의 회복과 과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에 훗날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 태자 담덕이 이룩한 성과인데도, 이것을 태자 담덕이 왕이 된 뒤에 이룩한 성과인 것처럼 잘못 기록했다. 《삼국사기》를 읽을 때는 이런 것들을 잘 판별해야 한다.』(4)
■ 광개태왕의 과려족 원정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태자 담덕이 태왕의 보위에 오른 뒤에도 과려족은 계속해서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담덕은 즉위 5년 뒤인 서기 359년에 원정군을 이끌고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가서 600에서 700개의 부락을 쳐부수고 소 · 말 · 양떼를 포획한 뒤에 귀환했다. 《수문비사》에 의하면 파부산은 음산산맥의 와룡이고, 부산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 있는 아랍선산이라고 한다. 염수와 관련하여, 《몽고지지》에 의하면 그곳에는 염분이 함유된 호수나 강이 많으며, 아랍선산 밑의 길란태라는 염수에는 물가에 항상 2척에서 6척까지의 소금 덩어리가 응집되어 있다고 한다. 이로써 태왕의 족적이 지금의 감숙성 서북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가장 먼 원정이었을 것이다.
위의 원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없고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에만 실려 있다. 어떤 이들은 비문에 나오는 과려족이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거란족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란족은 선비족의 후예이고 태왕 시대의 선비족은 모용씨나 우문씨 등으로 불렸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거란족이란 명칭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본기〉에 거란족이 나오는 것은, 후세 역사가들이 거짓으로 과려족을 거란족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과려족이 거란족이 아니면 어떤 종족일까? 《위서》나 《북서》에 의하면 흉노족의 후예인 연연이란 종족이 지금의 몽골 등지에 분포했으며 그들이 한때 강성했다고 한다. 과려나 연연은 자음이 '라라'이므로, 과려족은 흉노족의 후예다.』(5)
■ 광개태왕의 왜구 격퇴(백제의 천도)
『왜는 일본의 원래 명칭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왜와 일본을 구분한다. 왜는 북해도의 아이누족이고 일본은 대화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어에서 화와 왜가 발음상으로 동일하므로 일본이 곧 왜라는 것은 명백하다. 근세에 들어 일본인들은 조선 역사서나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왜'가 문화도 없고 흉포한 야만족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란 고유명사를 별도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은 '왜'와 같은 것이다.
왜는 백제 건국 이후에도 무지몽매한 나라였다. 일본의 세 개 섬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했을 뿐, 아무런 문화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백제 고이왕이 왜를 교도하고 의류 제작과 농경을 포함한 제반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또 박사 왕인을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쳤다. 또 '백제 가명' 즉 백제의 이두를 본떠 '일본 가명(가나)'문자란 것을 만들어주니, 이것이 이른바 일본문자가 되었다. 왜는 백제의 교화를 받고 백제의 속국이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침략을 좋아했기 때문에 도리어 백제를 침략했다. 이것이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더 심했다.
백제는 석현성 등 10여 지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것을 통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광개태왕 원년인 391년에 왕목과 진무를 보내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기습하는 한편, 왜와 친교를 맺고 대 고구려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자 광개태왕 5년인 395년에 태왕은 과려족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군을 보내 백제의 연해 · 연강 지경인 일팔성 · 구모로성 · 고모야라성 · 관미성을 함락하고 육군을 보내 미추성 · 야리성 · 소가성 · 대산한성 등을 함락했다. 또 그는 직접 갑주를 두르고 지금의 월당강인 아리수를 건너 백제 군사 8천여 명을 베었다. 곤경에 빠진 백제 아신왕은 동생 한 명과 대신 열 명을 볼모로 보내고 남녀 1천 명과 가는 비단 1천 필을 바쳤다. 또 '노객'의 맹서를 쓴 뒤 고구려를 피해 지금의 직산인 사산으로 천도하고 신위례성이라고 불렀다.
그 후 고구려가 북방 선비족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백제는 맹약을 파기하고 왜군과 힘을 합쳐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침입했다.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이 된 것에 분개하여 왜군을 앞세워 신라를 침략했다. 그러나 태왕은 귀신처럼 빠른 군대 운용으로, 북으로 선비족을 치는 동시에 백제의 기선을 제압하고 왜군을 기습했다. 태왕이 신라를 구원하고자 지금의 고령인 임나가야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신라 내물왕은 직접 태왕을 알현하고 예의를 갖추기까지 했다. 태왕은 407년에는 지금의 대동강에서 해전을 벌여 가장 절묘한 전공을 세웠다. 왜군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1만여 개의 갑주와 수많은 군사 물자 및 병장기를 획득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고구려가 무서워서 복종하고 다시는 바다를 넘어오지 못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의 남방은 오랫동안 평온했다.』(6)
■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태왕은 야심이 넘치고 군사 전략이 출중한 동시에, 동족에 대한 사랑도 많았다. 백제를 공격한 것도 백제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지, 영토를 탈취하고자 했기 떄문이 아니었다. 태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력한 선비족을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과 직예성 등지를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방과의 전쟁은 소극적 의미밖에 없었고, 북방과의 전쟁만이 적극적 의미를 띠었다.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과 희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진서》에서는 "고구려왕이 연나라(후연_옮긴이) 평주의 숙군성을 침략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도주했다"라고 한 것을 빼고, 그 외에는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 왜 이랬을까? 《춘추》에서 북적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것은 중국 사관들의 습성이다. 사실, 모용씨의 후연이 망하고 탁발씨의 북위가 강해진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 동진의 유유가 일어나 선비족과 강족을 꺾고 또 유송의 고조가 황제가 될 기반을 닦은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간접적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완고한 습성을 고수하느라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 5세기 초반에 중국 정세가 바뀐 실제 원인이 은폐된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태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왕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서》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 그런데 선비족 정벌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도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에 태왕의 비석을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간 적이 있다. 그곳 여관에서 만주족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났다. 그와의 필담에서 나온 비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비석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영희(만주족)가 이것을 발견했다. 그 비문에서 고구려가 영토를 빼앗은 부분은 모두 다 칼과 도끼로 도려내져 있었다. 그래서 식별 가능한 문구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뒤 일본인이 이것을 차지한 뒤 영리를 위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다. 이때 문구가 깎인 곳을 석회로 바르다 보니, 더욱 더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내용이 첨부됐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왕이 선비족을 정복한 전공이 비문에 없는 것은 그런 내용이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태왕이 평주를 함락한 뒤 선비족의 쇠락을 틈타 계속 진격했다면, 태왕이 개척한 영토는 그 존호 이상으로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후연 신하인 풍발이 후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후연에서 벼슬하던 후손 고운을 북연의 천왕으로 옹립하고 태왕에게 보고했을 때였다. 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면서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종족 간의 도리를 정하고 전쟁을 그쳤다. 이로써 태왕의 서진 정책은 종언을 고했다. 태왕은 백제 근구수왕이 즉위하기 전년인 374년에 태어나서 391년에 즉위하고 412년에 죽었다. 향년 39세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의 비문은 지금의 봉천성 집안현 북쪽 2리쯤에 있다. 높이는 약 21척이다. 서기 0000년에 만주족인 영희가 발견해서 (영희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1903년이다) 탁본해 보니 비문에 빠진 글자가 많았다. 그 뒤 일본인이 비석을 입수한 뒤 탁본하여 판매했다. 이때는 빠진 글자를 석회로 발라 덧붙였다. 학자들은 그것의 실제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7)
■ 고구려 목표는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 전쟁 방향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사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 목표는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따라서 남쪽으로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것도 고조선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 해안까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방향을 전환한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서기 392~412년)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지금의 요서 밖의 비려,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남쪽으로는 백제와 가야 · 왜구 등을 침공하여 신하나라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는 이미 전부터 신하나라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은 물론 그 밖까지 호령함으로써 형식적이지만 고조선의 천하질서는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를 안전히 병합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을 신하나라로 삼아 조공을 비치도록 했으니 고조선시대의 거수국과 비슷한 천하질서가 일단 이루어졌던 것이다.
......
고구려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졌음은 〈광개토왕릉비문〉으로도 뒷받침된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와 신라는 옛날에 속민이었다" 하였고,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사 사실과는 다르다.
광개토왕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동부여도 추모왕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구려시대가 아닌 그 이전 고조선시대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시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거주민이 고조선의 속민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단군의 후손이라고 믿었으므로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를 포함한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은 당연히 고구려 왕의 속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의식은 바로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다물이념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토만의 병합이 아니라 통치질서와 사상의 재건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1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염수의 비밀 / KBS 20000101 방송
KBS 역사스페셜 – 대고구려 2부 광개토대왕 정복루트를 가다, 미지의 장벽 대흥안령 산맥 / KBS 20000108 방송
<자료출처>
(1) 광개토대왕릉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567~619쪽
(4)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95~296쪽(제6편 고구려 · 백제의 충돌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 정책과 선비족 정복 1. 광개태왕 서토남정의 개시)
(5)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97~298쪽(제6편 고구려 · 백제의 충돌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 정책과 선비족 정복 2. 광개태왕의 과려족 원정)
(6)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95~296쪽(제6편 고구려 · 백제의 충돌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 정책과 선비족 정복 3. 광개태왕의 왜구 격퇴(백제의 천도))
(7)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295~296쪽(제6편 고구려 · 백제의 충돌 제3장 광개태왕의 서진 정책과 선비족 정복 4.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324-326쪽
<참고자료>
[열린세상] 태왕사신기 유감/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 서울신문 (seoul.co.kr)2007.11.26
[단독]광개토 태왕, 일본을 멸망시켰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7/08/23
역사추적 – 광개토대왕 청동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https://youtu.be/Ohe3EaKFb2c?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1부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제2부_팍스 코리아나, 고구려에 의한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