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구려(20) 23대 안원왕(531년-545년), 24대 양원왕(545년-559년) 540년 09월 우산성에서 백제에 승리함, 547년 07월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함, 548년 01월 독산성에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패배함, 550년 01월 백제에게 도살성을 빼앗김, 550년 03월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고 신라에 두 성을 빼앗김, 552년 장안성을 쌓음. 본문
1. 고구려(20) 23대 안원왕(531년-545년), 24대 양원왕(545년-559년) 540년 09월 우산성에서 백제에 승리함, 547년 07월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함, 548년 01월 독산성에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패배함, 550년 01월 백제에게 도살성을 빼앗김, 550년 03월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고 신라에 두 성을 빼앗김, 552년 장안성을 쌓음.
대야발 2025. 11. 25. 15:05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안원왕(安原王)
안원왕이 즉위하다 ( 531년 05월 )
안원왕(安原王)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7척(尺) 5촌(寸)이고 큰 도량이 있어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531)에 세상을 떠났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양(梁)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관작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북위가 안원왕을 책봉하다 ( 532년 03월 )
2년(532) 봄 3월에 〔북〕위[魏]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으로 책봉하고, 의관과 수레 깃발의 장식을 내려주었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2년 04월 )
〔2년(532〕여름 4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2년 06월 )
〔2년(532)〕6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2년 11월 )
〔2년(532)〕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평성을 태자로 세우다 ( 533년 01월 )
3년(533) 봄 정월에 왕자 평성(平成)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3년 02월 )
〔3년(533)〕 2월에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동위가 안원왕을 책봉하다 ( 534년 )
4년(534)에 동위(東魏)가 조서를 내려 왕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과 같게 하였다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4년 )
〔4년(534)〕 사신을 보내 〔북〕위[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5년 02월 )
5년(535)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홍수가 나다 ( 535년 05월 )
〔5년(535)〕여름 5월에 나라 남쪽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잠기고,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지진이 나다 ( 535년 10월 )
〔5년(535)〕겨울 10월에 지진이 났다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다 ( 535년 12월 )
〔5년(535)〕 12월에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가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다 ( 536년 )
6년(536)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휼하였다
누리가 발생하다 ( 536년 08월 )
〔6년(536)〕 가을 8월에 누리[蝗]가 발생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6년 08월 )
〔6년(536) 8월에〕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왕이 순행하면서 백성을 구휼하다 ( 537년 03월 )
7년(537) 봄 3월에 백성이 굶주리자 왕이 순행하면서 어루만지고 구휼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7년 12월 )
〔7년(537)〕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39년 05월 )
9년(539)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우산성에서 백제에 승리하다 ( 540년 09월 )
10년(540)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에워쌌다. 왕이 정예기병 5,000기를 보내 공격하여 그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기상이변이 일어나다 ( 540년 10월 )
〔10년(540)〕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0년 12월 )
〔10년(540)〕12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1년 03월 )
11년(541)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에 가서 조공하였다.
큰 바람이 불다 ( 542년 03월 )
12년(542) 봄 3월에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다.
우박이 내리다 ( 542년 04월 )
〔12년(542)〕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2년 12월 )
〔12년(542)〕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3년 11월 )
13년(543)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4년 11월 )
14년(544)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안원왕이 사망하다 ( 545년 03월 )
15년(545) 봄 3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이름을 안원왕(安原王)이라 하였다이때는 양(梁) 대동(大同) 11년, 동위(東魏) 무정(武定) 3년이다. 『양서(梁書)』에는 “안원왕이 태청(太淸) 2년(548)에 죽었고, 그 아들을 영동장군(寕東將軍) 고구려왕(髙句麗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1)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양원왕(陽原王)
양원왕이 즉위하다 ( 545년 03월 )
양원왕(陽原王)은혹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이 평성(平成)이고, 안원왕(安原王)의 맏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용맹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안원왕 재위 3년(533)에 세워 태자를 삼았으며, 15년(545)에 왕이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태자가 즉위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5년 12월 )
〔원년(545)〕 겨울 12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배나무가 가지를 서로 잇다 ( 546년 02월 )
2년(546) 봄 2월에 왕도(王都)의 배나무가 가지를 서로 이었다.
우박이 내리다 ( 546년 04월 )
〔2년(546)〕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6년 11월 )
〔2년(546)〕 겨울 11월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 547년 07월 )
3년(547) 가을 7월에 백암성(白巖城)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을 수리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7년 )
〔3년(547)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독산성에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패배하다 ( 548년 01월 )
4년(548) 봄 정월에 예(濊)의 병력 6,000명으로써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구원하였으므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환도에서 가화를 바치다 ( 548년 09월 )
〔4년(548)〕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서 가화(嘉禾)를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8년 )
〔4년(548)에〕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파견하다 ( 549년 )
5년(549)에 사신을 보내 동위(東魏)에 가서 조공하였다.
백제에게 도살성을 빼앗기다 ( 550년 01월 )
6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침략해 와서 을 함락시켰다.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고 신라에 두 성을 빼앗기다 ( 550년 03월 )
〔6년(550)〕 3월에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인이 그 틈을 타서 두 성[도살·금현성]을 빼앗았다.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다 ( 550년 06월 )
〔6년(550)〕 여름 6월에 사신을 보내 북제(北齊)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제가 양원왕을 책봉하다 ( 550년 09월 )
〔6년(550)〕가을 9월에 북제(北齊)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勾麗王)으로 삼았다.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다 ( 551년 05월 )
7년(551) 여름 5월에 사신을 보내 북제(北齊)에 가서 조공하였다.
신성과 백암성에서 돌궐에게 승리하다 ( 551년 09월 )
〔7년(551)〕 가을 9월에 돌궐(突厥)이 와서 신성(新城)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白巖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게 하여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신라에게 10성을 빼앗기다 ( 551년 )
〔7년(551)에〕 신라가 와서 공격하여 10성을 빼앗아갔다.
장안성을 쌓다 ( 552년 )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웅천성에서 백제에 패배하다 ( 554년 )
10년(554)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일식이 일어나고 물이 얼지 않다 ( 554년 12월 )
〔10년(554)〕 12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고, 물이 얼지 않았다.
왕도에서 호랑이를 잡다 ( 555년 10월 )
11년(555) 겨울 10월에 호랑이가 왕도(王都)에 들어오니, 사로잡았다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 555년 11월 )
〔11년(555)〕 11월에 금성[大白]이 낮에 나타났다.
북제에 사신을 파견하다 ( 555년 11월 )
〔11년(555) 11월에〕 사신을 보내 북제(北齊)에 가서 조공하였다.
양성을 태자로 세우다 ( 557년 04월 )
13년(557) 여름 4월에 왕자 양성(陽成)을 세워 태자로 삼고, 내전(內殿)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환도성에서 간주리의 반역을 진압하다 ( 557년 10월 )
〔13년(557)〕 겨울 10월에 환도성(丸都城)의 간주리(干朱理)가 반역을 일으키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양원왕이 사망하다 ( 559년 03월 )
15년(559) 봄 3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이름을 양원왕(陽原王)이라 하였다(2)
《조선상고사》
■ 신라의 10개군 기습과 신라 · 백제 동맹의 파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했다는 기사가 없고, 그래서 양원왕이 장안성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없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선생은 '이때 백제 달솔인 부여달기가 정예병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하자,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그리로 천도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천도한 장안성은 지금의 봉황성일 것이고, 봉황성이 당시의 신평양이라고 보았다.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에 천도한 기사는 양원왕이 도읍을 옭겼다가 곧바로 평양으로 환도한 뒤 평원왕이 다시 장안성 즉 신평양에 천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왔다고 보았다.
『서기 548년, 고구려 양원왕이 예족 군대를 거느리고 한강 이북에 있는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했다. 진흥왕은 동맹의 약속에 의거하여 장군 주진이 정예병 3천을 데리고 고구려군을 격퇴하도록 했다. 당시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으로 인해 모두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럼, 위에서 말한 한강 이북은 어느 땅일까? 이것은 지금의 양성 한래의 북쪽을 가리킨다. 독산성은 지금의 수원과 진위(지금의 평택시에 진위면이 있다_옮긴이)의 중간에 있는 독산고성인 듯하다.
신라가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양원왕은 대군을 동원해서 더욱 깊숙이 침입했다. 이듬해에 고구려군은 지금의 충청도 동북 일대로 진입했다. 고구려군은 도살성(지금의 청안)에 주둔하고 백제군은 금현성 즉 지금의 진천에 주둔한 상태에서 , 1년 좀 넘게 혈전이 벌어졌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한 사이였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듬해인 서기 551년 돌궐족이 지금의 몽골로부터 동진하여 고구려의 신성 및 백암성을 공격했다. 병력을 나눈 양원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도록 했다. 이때 백제 달솔인 부여달기가 정예병 1만 명으로 평양을 기습해서 점령하자,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그리로 천도했다.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곳이 평양이라면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났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장안성은 지금의 봉황성일 것이다. 봉황성은 당시의 신평양이니, "안동도호부(지금의 요양)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는 800리"라고 할 때의 평양은 바로 이곳이다. 〈고구려본기〉에서는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에 천도했다고 한다. 양원왕이 도읍을 옮겼다가 곧바로 평양으로 환도한 뒤 평원왕이 다시 장안성 즉 신평양에 천도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왔을 것이다.
만약 신라가 동맹의 우의를 지키고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쳤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증오했다. 그래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결과적으로 백제가 강성해져 신라가 대적하기 힘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흥왕은 가만히 백제의 뒤를 기습해서 백제의 신 점령지를 탈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병부령 이사부가 지금의 충청도 동북부로 출병하는 한편, 대아찬 거칠부가 구진 · 비태 · 탐지 · 비서 · 노부 · 서력부 · 비차부 · 미진부 등 장군 여덟 명을 거느리고 죽령 이북으로 출병했다. 백제는 이것을 동맹에 의한 출병으로 판단하고 매우 환영했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고 충청도의 충주 · 괴산 등지도 고구려의 강역이 되었다. 그런데 근세에 정약용 · 한진서 선생 같은 분들은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을 단 한 발짝도 밟은 적이 없다면서 《삼국사기》를 공격했다. 하지만 도살성 점령 사건을 보면, 고구려가 한강을 넘지 못했다는 말이 어떻게 잠꼬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구려는 이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황해도까지도 항상 백제의 땅이었다. 그러니 충북 지역을 고구려 땅으로 만든 《삼국사기》에 오류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3)
<주>
(3)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시공사, 347~350쪽(《조선상고사》 제8편 삼국 혈전의 개시 제2장 조령 · 죽령 이북 10개군의 쟁탈 문제- 고구려 · 백제 · 신라 백년 전쟁 및 수나라 · 당나라 침략의 기원 4. 신라의 10개군 기습과 신라 · 백제 동맹의 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