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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 고조선(3) 단군 왕검(BC 2333년-BC 2241년) (3) BC 2241년 천하의 땅을 새로 갈아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본문

고조선시대/고조선

1. 고조선(3) 단군 왕검(BC 2333년-BC 2241년) (3) BC 2241년 천하의 땅을 새로 갈아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대야발 2026. 2. 11. 18:04

 

 

 

 

 

정인보 《조선사연구》

 

중국에서도 '이'에 대한 통칭과 그것이 내포하는 '구이'라는 이름이 서로 구분된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알 리가 없었다. '조선'의 뜻은 모르더라도 그 사람이 '조선'사람이고 그 사적이 '조선'의 사적이면서 다른 호칭상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무엇보다도 '발조선'부터가 그러하다. '발(發)'은 고조선 겨레의 개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 밖에도 진번조선(眞番朝鮮), 예맥조선(濊貊朝鮮), 낙랑조선(樂浪朝鮮)등의 각 개체들이 모두 조선에 붙어서 사용되었다. 발도 조선이고 진번도 조선이며 예맥도 조선이고 낙랑도 조선으로, 이 모두는 우리 고조선의 강역 안에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 광대한 판도를 살펴보면 지금의 조선을 제외하더라도 개원(開原) 이북, 흥경(興京) 이동으로, 길림(吉林)과 봉천(奉天)에서 흑룡강성(黑龍江省)에 이르는 지역을 거의 전부 영유하고 중국과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강역이 광대하고 인구도 많은 데다 높고 깊은 산들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당시 조선 전체를 놓고 보면 풍속도 같고 언어도 같아서 특별한 차이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한 시조의 단일한 후손들이 갈라지고 번창하면서 외적 요인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전역에 걸쳐 무수한 소국을 만들고 이를 분할해서 통치하는 여러 명의 '한(汗)'【한(韓)과 간(馯)이 다 같은 발음으로 '군왕'이라는 뜻임】이 있고, 그 위에 최고 통치자가 군림하는 국가체제여서 법령이 지체 없이 잘 시행되고 문화가 두루 미쳤던 결과로 보인다.(1)

 

 

 

고조선은 최고의 '한'을 최고 통치자로 삼고 그 아래에 다시 두 '한'을 두어 최고 통치자인 '한'을 보좌하면서 여러 소국들을 분할 통치했는데, 진한이 조선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한'이라면 마한과 변한은 바로 그 아래의 두 '한'인 셈이다. 

 

'한'이 나라 이름이 아니라 '한(汗)'처럼 군장을 뜻한다는 사실은 청나라의 건륭제가 이미 〈삼한정류〉에서 제기한 바와 같다. 《삼국지》 〈삼한전〉만 보더라도 삼한이 다 진국(國)에 속해 있었다. 여기서 '진'은 이 삼한에 대한 통칭이며 이 삼한 중에서 진한이 으뜸가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진'이 포괄적인 국명인데도 진은 물론 변(弁), 마(馬)에까지 다 '한(韓)'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을 보면 이 '한'이라는 것이 나라를 부르는 이름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진수(陳壽)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사기 〈조선전〉에 대한 주석 부분에서 진번조선을 '진(眞)'이라고도 하고 '막(莫)'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진(辰)과 진(眞)은 발음상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번(番)과 변(弁), 막(莫)과 마(馬) 역시 한자는 다르지만 동일한 발음을 옮긴 사례들이다. 여기서 진(眞)은 '진(辰)'으로 조선을 뜻한다.

 

진번은 당시 진국 (國)에 속해 있던 변(弁)이고 진막(眞莫)은 당시 진국에 속해 있던 마(馬)인데 그 뒤에 다시 '조선'을 붙인 것은 같은 뜻의 단어를 중복해서 쓴 경우에 해당한다.(2)

 

 

리지린 《고조선연구》

 

우리 고대 국가들의 정치 제도는 특수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 부여, 진국에는 모두 《한국》(汗, 또는 韓)제도가 있었다. 이 《한국》들은 현존 문헌 사료상에서는 국가의 지방 행정 단위였다고 보여지나, 그것은 본래의 《한국》이 변질된 형태이며 본래 《한》이라고 칭한 통치자는 아세아적 공동체의 결합체의 대표자로서의 《소전제군주》이였다고 인정된다. 아세아적 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그 《한》은 국왕의 관리로 되었다. 본래 이 《한》들의 집단은 상당히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그 《한》들의 경제적 사회적 기초가 무너진 후에 와서는 그 권력은 약화되여 다만 국왕의 전제 권력을 어느 정도 제약하는 정도로 되었다. 필자는 조선 고대 국가들에 귀족 민주주의 제도가 오랫동안 계속 실시되였다고 인정한다.

 

이러한 제도는 군사 민주주의 단계의 제도의 유제로서 아세아적 공동체에 기초한 고대 국가의 초기를 경과하여 말기까지 존속되였다고 인정한다. 필자는 이러한 제도가 어찌하여 장기간 우리 고대 사회에 잔존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연구되여야 하겠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층 구조의 반작용이 우리나라 고대 사회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로서 제기되여야 하겠다고 인정한다.(3)

 

 

《사기 · 조선 렬전》에서는 진반, 조선, 림둔 등을 구별하여 쓰고 있다. 위씨 조선 이전 시기 《진반》은 고조선의 한 개의 행정 구역 혹은 《후국》이였다. 《진반》을 《진》과  《반의 두 개 지역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래에서 언급하기로 하자. 요컨대 《진반》과 《조선》은 고조선의 두 개의 지역이였다. 즉 《조선》은 고조선의 왕기王畿(왕이 있는 서울 부근) 지역이고 《진반》은 고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후국 혹은 한국)이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란 국가 령역 내에 경기 지방을 《조선》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후일 한4군 설치 이후 락랑군 내에 조선현을 설치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력사적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일의 락랑군이 바로 고조선의 왕기 지역이였으며 그 지역을 《조선》이라고도 칭했으며, 락랑군 설치 이후는 《조선》이란 명칭을 한 개 현의 명칭으로 삼았던 것이다. 종래 《진반》과 《조선》을 합쳐서 《진반조선》이라고 해석한 설도 있으나 필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4)

 

 

 

요컨대 군사 수장으로서의 《단군》의 토템 신화는 《위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위서》를 저작한 시기 즉 기원 3세기 중기 이전 2천 년경에 발생했다고 인정하여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고기》에는 《단군조선》이 기자 이전(기원전 12세기 이전)에 1,500년 간 존속되였다고 쓰면서 동시에 요와 동 시대 인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이 년대 계산은 우선 부정확한 것이며, 그 산출의 근거가 불명확하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론술할 바와 같이 《기자 조선》 전설은 위작이며 따라서 《단군조선》이 기원전 12세기에 종말을 지었다는 《고기》의 기록은 황당한 설이다. 

 

고조선은 첫날부터 망국 시기까지 단군 신화를 그 통치의 주요한 관념적 무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위씨 조선도 결코 단군 신화를 말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단군 신화는 세 개 단계를 거쳐서 체계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첫 단계에서는 씨족 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 토템이 생겼고,

둘째 단계에서는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 군사 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게 되었고,

세째 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아사달산에서 《땅의 지배자》로서 출현하게 된 것은 이미 둘째 단계에 해당되는  시기 즉 군사 민주주의 단계이며, 토템 신화의 발생은 아득한 옛날의 일일 것이다. 억단을 감히 해 본다면 그것은 기원전 12세기 이전 1500년 경 즉 기원전 27세기 경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5)

 

 

고대 조선 종족은 기원전 천 년경에는 이미 예, 맥, 한의  세 개 종족을 형성하였는 바, 이 세 개 종족은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진 동일한 족속의 세 갈래이였다.

 

그러나 그 이전 원시 시대에는 조이로 불리워진 원주민이 있었고, 예와 맥이 북방에서 남하하여 조이와 혼합하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천 년 전이였다고 인정한다.

 

예족은 고조선과 진국을 형성하고, 맥족은 첫 국가로서 고리국을 형성하였고, 그 후신국으로서 부여와 고구려가 형성되였다. 따라서 필자는 부여와 고구려를 결코 원시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한 첫 국가가 아니라고 인정한다.(6)

 

 

 

윤내현 《고조선연구》

 

지금까지 확인된 바와 같이 조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국명으로 사용되었고 고조선내에 있었던 역대 단군들의 직할국만을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인 난하 동부유역에도 조선이라 불리운 지역이 있었다.

 

이 조선지역에 기자 일족이 망명 와 거주하였고, 이 지역에서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웠는데 그 국명도 조선이었다.

 

이 난하 유역의 조선은 후에 낙랑군의 조선현이 되었는데 역시 조선으로 불리어졌다. 이러한 조선들과는 달리 고조선이 붕괴된 후 청천강 중류 남부유역 묘향산지역이 조선이라 불리어졌는데 그곳이 그렇게 불리어진 것은 그 지역에 고조선 단군일족의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은 여러 가지의 다른 의미로 문헌에 등장하기 때문에 사료를 읽을 때 거기에 등장하는 조선이 어느 조선을 의미하는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종래에는 그러한 분별없이 사료를 해석함으로써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고대문헌에 나타난 조선의 용례를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도 밝혀졌다.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후계세력이 아니었으며, 이들의 정권을 비롯하여 한사군의 낙랑군은 고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모두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 위치하여 고조선 후기로부터 말기에 걸쳐 고조선과 병존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기자정권은 고조선의 변방 거수(제후)가 되었으며

위만정권은 서한의 지원을 받아 고조선과 대치한 세력이었고 한사군은 중국 영토였던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을 고조선에 포함시키거나 위만조선과 한사군을 고조선의 뒤를 이은 정치세력으로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것이다.(7)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제왕운기』의 기록과 『시경』  「한혁韓奕 」 편의  내용 및 중국의 고대문헌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은 많은 거수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국가였다. 옛 문헌에서 확인되는 고조선의 거수국은 부여(夫餘) · 고죽(孤竹) · 고구려(高句麗) · 예(濊) · 맥(貊) · 추(追) · 진번(眞番) · 낙랑(樂浪) · 임둔(臨屯) · 현도 · 숙신(肅愼) · 청구(靑丘) · 양이(良夷) · 양주(楊洲) · 발(發) · 유(兪) · 옥저(沃沮) · 기자조선 · 비류(沸流) · 행인(荇人) · 개마(蓋馬) · 구다(句茶) · 조나(藻那) · 주나(侏那) · 진(辰) · 한(韓, 三韓) 등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渠帥國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중국의 서주시대에는 1,80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를 모두 확인할 길이 없으며, 이들이 춘추시대에 이르면 100여 개로 겸병되었고, 그 가운데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10여 개 정도였다. 고조선의 영토는 서주보다 좁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고대 중국의 상황은 고조선의 거수국 상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고조선의 거수국들은 고조선이 건국된 후 필요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있었던 각 지방의 정치세력들로서 종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에 통합되어 거수국이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들만을 통치하고 각 거수국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하여 간접으로 통치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거수들은 종교 · 정치 · 경제 등의 면에서 일정한 의무를 지면서 단군을 그들의 共主로 받들었다. 단군은 간접통치를 했던 것이다. 고조선은 단군으로부터 봉함을 받은 여러 거수국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고조선을 봉국제국가 또는 거수국제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국가구조를 좀더 구체적으로 거주형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고조선 국가구조의 기본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취락 즉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들은 그 마을이 갖는 정치적 위치와 기능에 따라 서울(또는 도읍), 큰마을(또는 국읍), 작은마을(또는 소읍)로 분류될 수 있다. 서울에는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인 단군이 그 일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전국을 통치하였고, 각 지역의 큰 마을에는 거수가 거주하면서 그의 거수국을 통치하였으며,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작은 마을은 고조선 국가구조의 기층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일반 농민(또는 下戶)들이 거주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을 구조적인 면에서 보면 '마을집적구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로써 고조선의 국가구조는 고대 중국의 국가구조와 비슷하여 그것은 동아시아 농경사회 국가구조의 일반모형이 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은 세 개의 조선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삼조선설'이나 서양의 고대국가와 같은 도시구가였다는 '성읍국가설' 등은 성립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여졌다. 고조선의 '삼조선설'은 사료를 잘못 읽은 데서 일어난 오류였으며, '성읍국가설'은 고조선의 국가구조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서양 고대국가의 특징을 일반화시켜 한국사에도 그대로 적용한 데서 일어난 오류였던 것이다.(8)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지식카페>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문화일보 2019-09-11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한민족 고고학

 

한족·맥족 혼인동맹 통해 출생한 단군이 건국… 예족은 자치권 가진 제후국으로 결합

도읍 ‘아사달’은 원래 나라 이름… 아침 뜻하는 ‘아사’·나라 뜻하는 ‘달’ 한자로 의역해 ‘朝鮮’

 

‘새’ 토템 ‘한’족의 군장국가 군장 환웅(桓雄)이 ‘곰’ 토템 ‘맥’족의 여군장(부족장)과 혼인동맹으로 그 사이에서 후손 ‘단군’(檀君)이 태어나 성장하자,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한 고대국가(나라)를 개국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으로는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壇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高(堯)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만을 간단히 기록했다. 한편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는 ‘단군설화’를 수록하면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곰 토템 부족 여족장)의 혼인에 의한 한·맥의 혼인동맹 사이에 출생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조선’(朝鮮, 古朝鮮) 개국을 기록했다.

 

 

중국 고문헌들에 나오는 ‘한맥’(한貊)도 새 토템 한족과 곰 토템 맥족의 결합에 의한 ‘고조선’과 한국원민족의 형성을 인지한 기록의 한 사례다. 범 토템 ‘예(濊)’족은 다른 방식에 의해 한·맥족과 결합했다. 예족의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양식은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제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예족에 관한 최초의 고문헌 기록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편 ‘예인’(穢人)이 나오고, 그 주에는 “예(穢)는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韓穢’는 한과 결합한 예 또는 한의 예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 토템족, 범 토템족, 이리 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동안의 청동장식.

 

 

한·맥·예 3부족 결합의 증거는 고고 유물에서도 보인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고조선 후기 커다란 새(독수리, 삼족오)의 지휘와 보호 아래서 곰과 범이 순종하고 있고 그 옆에 이리가 따르는 금도금 장식으로 조각 유물 2점이 출토됐다(위 사진 참조). 이 장식물의 동물은 부족 토템 상징으로서, 커다란 새는 한족의 토템이고, 곰은 맥족, 범은 예족의 토템이며, 이리는 후에 고조선 후국족이 된 ‘실위’족 등 유목민족의 토템이었다. 이 유물은 한족의 중심적 지휘 아래서 고조선이 한·맥·예 3부족이 연맹해 형성되고, 후에 이리 토템 족이 참여했음을 잘 증명해 준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종래 여러 가지 견해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

 

(1)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고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즉위년에 대해 무진(戊辰)년설과 갑진(甲辰)년설이 병존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서거정 편찬)은 무진년설을 택했는데, 구한말에 이를 서기 BC 2333년으로 환산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BC 2333년, 즉 BC 24세기로 보는 문헌학적 견해가 정립된 것이다.

 

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2) 고고 유물에서 보면, 고조선 건국 직후 고조선 이주민(중국학자들의 동이족) 소호(少호 또는 少昊)족의 유적인 산동반도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 상층 유물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조선 ‘뾰족밑 팽이형(변형) 민무늬토기’ 11점(파손분 포함)이 출토됐다. 이 11개 토기 술잔은 형태가 고조선 특유의 뾰족밑 팽이형 민무늬토기일 뿐 아니라, 토기 위의 잘 보이는 위치에 아사달문양까지 새겨 넣었으니(위 사진 참조), 이것은 고조선 건국 후 산동반도에 이주해간 고조선 이주민의 토기임이 명백한 것이다. 아사달문양 토기의 편년을 취하면,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00년∼BC 24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3) 북한 고고학자들이 1993년 강동읍의 단군묘를 발굴해 보니 남녀 한 쌍의 인골 잔편이 출토됐다. 두 기관에서 24∼30차 측정한 평균치는 bp 5011±267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이었으니, 이 뼈를 단군의 유골로 본다면 BC 30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사회과학원은 1996년 5개년 계획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결과,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夏)나라의 건국 연대를 BC 2070년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고조선 건국 연대 BC 30세기보다 9세기 뒤늦은 것이며, 가장 낮은 연대인 BC 2333년보다 263년 뒤늦은 것이다. 종합해 보면, 환웅 족의 ‘군장국가’ 시기를 제외하고서도, 단군의 고대국가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세기∼BC 24세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BC 30세기∼BC 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것이다.



고조선의 원래 나라 이름은 ‘아사(시)달’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와 고기는 고조선의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이것이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옛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古’(고)자를 붙여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항목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朝鮮’은 한자 이름인데,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는 한자가 아직 없었으므로, 순수한 고조선말 원래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위서와 고기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기록한 아사달이 바로 고조선의 나라 이름일 것으로 본 기존 학설에 필자는 찬동한다.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사’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朝’를 아사(아침)로 읽으며, ‘달’은 ‘땅·나라’의 뜻이니, 아사달을 뒤에 한자로 의역한 것이 ‘朝鮮’이라고 본 것이다. 고조선의 고조선말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대박산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고조선 나라의 대명사로도 사용됐다. 고중국에서는 밝달 아사달을 ‘發朝鮮’(발조선)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밝달’이 ‘發’로 음차표기되고, 아사달이 ‘朝鮮’으로 의역표기돼 합쳐진 것이다. 고조선 첫 도읍지 밝달 아사달의 밝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 대명사로서도 의미가 확대됐다. 그리하여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 고조선 민족을 밝달 민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후에 밝달을 한자로 번역할 경우에는 ‘倍達’(배달)로 음차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아시(사)달’(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이 ‘아시아’(Aisa: land of the sunrise)와 동일한 뜻을 가진 나라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서방후국들 사이에서 아사달은 상고음으로는 아시달로 발음되고 있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아시(사)달’이 있는 동방을 ‘아시아’로 이름 붙였을까? 서양인들도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사)달’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 하고, 옮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했다. 아사달이 밝달(백산, 白山)과 중첩 사용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밝달은 한자로 ‘白山’(백산), ‘白岳’(백악), ‘朴山’(박산), ‘朴達’(박달), ‘北岳’(북악), ‘檀’(밝달나무 단) 등 여러 가지 한자로 음차표기돼 왔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됐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개주지구 주위에 거대한 왕릉인 탁자식 고인돌이 지금도 10여 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다시 또 다수의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문화일보 8월 28일자 28면 6 회 참조)(9)

 

 

 

김운회의 신고대사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중앙선데이 입력 2011.01.22 23:53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각저총(角抵塚) 벽화. 두 장정이 씨름하는 왼쪽 구석에 작은 호랑이와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이어졌다고 주장하게 되는 유명한 벽화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토템이어서 이를 무조건 단군신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 벽화는 중국 측의 관리 소홀로 크게 훼손됐다(오른쪽 작은 사진). 김운회 교수 제공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247년,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에 병란을 겪어 평양성에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 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三國史記高句麗本紀東川王)고 적는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단군은 본래 한민족이 간직한 단군신화라고 볼 수 없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다. 삼국유사에는 “옛 기록(古記)에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내려와 곰과 교혼하여 단군이 태어나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세웠다고 한다(三國遺事 卷1)”고 기록돼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최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 그 이름은 단군이라.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竝與帝高興戊辰 …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라고 한다. 제왕운기는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한시(漢詩)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 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고기 등에 적힌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들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여 나타난 폐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安鼎福 東史綱目第1上)”라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도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했다는 것은 믿을 만한 문헌자료가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라고 하였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현재는 소실)에서는 “신라,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은 모두 단군의 자손(壽)”이라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이들 삼국이 그 스스로를 고조선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용비어천가에서도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 한다.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梁書 諸夷傳),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개모성(盖牟城)’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로 하여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을 지적하였다.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은 설화 수준으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10)

 

 

 

김운회의 신고대사 고조선 뿌리는 숙신, BC 2000년 이전 은나라 방계국가

중앙선데이 입력 2011.02.20 00:34


1 갈석산의 전경. 『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2 대릉하 상류. 고조선 영역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패수인데 사서들을 종합하면 패수는 란하 또는 대릉하다. 대릉하의 발원지 가까이에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인류문화 발상지인 홍산문화의 유적지가 있다. 3 고조선 영역에서 발견된 구멍무늬토기.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Ⅱ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고 나온다. 옥저는 현재 함흥·신포 지역, 매구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건녕 3년(896)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太祖紀)”고 돼 있다. 이때 조선은 한반도라기보다 고조선의 옛땅, 숙신은 만주 또는 한반도 중부, 변한은 한반도 또는 남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고조선 중심부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 “숙신은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돼 있다.

 


이처럼 숙신과 조선(고조선)이 혼용되는 사례는 많다. 고조선 혹은 그 일부를 숙신으로 보거나 조선과 숙신을 상호연결된 독립 주체로 보는 식이다. 이런 혼용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로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BC 2000년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나라 또는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발식신은 다른 용례를 찾기 어렵고, 가장 가까운 표현이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 =조선’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숙신이나 조선은 어떤 민족명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음차어라는 점과 고조선은 전설시대 때부터 중국민과 함께 존재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에 “주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한 후 숙신 사신이 왔다”는 기사(卷115, 東夷傳)와 일치한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형제국)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정비된 형태의 국가였으며, 숙신이 고조선의 전신이라면 은나라의 북부에 있던 숙신이 은나라 유민과 결합해 고조선이 발전적으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주나라 왕이 신하를 진나라에 보내어 한 말 가운데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후(BC 1100여 년경) 숙신·연·박이 주나라의 북쪽의 땅이 되었다(昭公九年)”고 한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고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이 박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劉子敏古代高句麗同中原王朝的關係). 이것은 이후 순자의 “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 사기의 “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5회 참고>).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사기(史記)에 “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살 맞은 매가 멀리 날지 못했을 것이니,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한나라 말기 양웅(揚雄·BC53~AD18)이 저술한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 사이”라는 말이 20회 이상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연의 경계 밖으로 더러운 오랑캐인 조선과 열수의 사이(第1)” “무릇 초목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북연과 조선 사이를 일컬어 초망(가시덤불)의 땅이라 한다(第2)” “연나라의 동북쪽과 조선, 열수의 사이를 일컬어 목근(무궁화)의 땅이라고 한다(第5)”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고조선을 낮춰 보는데 이런 경우는 중국을 괴롭힌 경우 많이 나타난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의미다. 방언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 북쪽에 연이어 있다. 이는 숙신과 고조선 영역이 일치함을 확인시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열수(列水)다. 지난 2000여 년간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사강목(東史綱目)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그런데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은 틀렸다. 대동강(또는 한강) 동쪽에 열양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다면 고조선은 현재의 함흥이나 강릉이다. 고조선은 이 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다.



사기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나 조선은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朝鮮列傳)”라고 한다. 그런데 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에 “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에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와 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11)

 

 

 

 

[대동재단] 한민족의 기원 및 형성과 고조선 문명의 탄생-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제18차 대동재단 포럼_180911

 

 

 

<자료출처>

 

 

(1)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167-168쪽

 

(2)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224-225

 

(3)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743-744쪽

 

(4)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325-326쪽


(5)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69-270쪽

 

(6)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742쪽

 

(7)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64-65쪽

 

(8)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484-486쪽

 

(9) <지식카페>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문화일보 2019-09-11

 

(10) https://www.joongang.co.kr/article/4962787

 

(11) https://www.joongang.co.kr/article/5080349

 

 

 

<참고자료>

 


단군조선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국가였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0/08/23

 

 

단군왕검이 부도에서 세계 최초로 연 첫 국제회의 (breaknews.com)2011/11/01

 

 

마침내 우표로 환생한 ‘단군왕검’|주간동아 (donga.com)2008.07.08

 

 

국내최대 ‘단군성전’ 모습 :: 문화일보 munhwa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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