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고조선(2) 단군 왕검(BC 2333년-BC 2241년) (2) BC 2283년 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본문
1. 고조선(2) 단군 왕검(BC 2333년-BC 2241년) (2) BC 2283년 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대야발 2026. 2. 11. 18:02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
백민국은 용어의 북쪽에 있는데 몸빛이 희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다. 승황이라는 짐승이 있는데 모양은 여우같으나 등 뒤에 뿔이 나 있다. 타고 다니면 이천 살까지 산다.
白民之國在龍魚北 白身被髮有乘黃 其狀如狐 其背上有角 乘之壽二千歲
숙신국이 백민의 북쪽에 있다. 나무가 있는데 웅상이라 부른다. 성인이 대신 왕이 되면서 이 나무에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肅愼之國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 先入伐帝 于此取之
[해외동경海外東經]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칼을 찬다.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 큰 호랑이를 부려 옆에 둔다.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에 죽는다. 혹은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 혹은 조양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靑丘國在其北 其狐四足九尾 一曰朝陽北
[해내서경海內西經]
동호는 대택의 동쪽에 있다.
東胡在大澤東
이인이 동호의 동쪽에 있다.
夷人在東胡東
맥국이 한수의 동북쪽에 있어 연나라에 가까운데 그것을 멸하였다.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 滅之
[해내북경海內北經]
조선이 열양의 북쪽에,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개국이 거대한 연나라의 남쪽에 있고 왜의 북쪽에 있는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
蓋國在鉅燕南 倭北 倭屬燕
[대황동경大荒東經]
백민국이 있는데 제준이 제홍을 낳았고 제홍이 백민을 낳았다. 백민은 성이 소씨이고 네 종류의 새를 부리고 호랑이, 표법, 곰, 큰곰을 부린다.
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 白民銷姓 使四鳥虎豹熊
대황의 한가운데 불함산이 있고 숙신의 나라가 있다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愼氏之國
청구국이 있는데 여우가 있어 꼬리가 아홉 개이다.
有靑丘之國 有狐 九尾
[대황북경大荒北經]
대황의 한가운데 불함산이 있고 숙신씨국이 있다.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3)
[해내경]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르기를 조선 천독이라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 남을 가까이 하고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1)
‘조선’과 산해경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
입력 2005.07.07. 07:40 수정 2005.07.07. 07:40
[한겨레] 차이나땅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가 <산해경>(山海經)이다. 애초엔 우임금 때 나왔다고 한다. 이 때를 ‘배달나라’(단국)로 말하면 3세 단군‘가륵천왕’ 시대로 된다. 이 책 18권 ‘해내경’에 ‘조선’이 나온다.
“동쪽바다 안쪽, 북쪽바다 모퉁이에 나라가 있다. 그 나라 이름이‘조선’이다.”(이하 원문생략) 그쪽에서 말하는 동쪽바다는 이쪽에서는 서쪽바다이며, ‘북쪽바다 모퉁이’라면곧 오늘의 ‘발해만’이다. 발해만 위에 조선이 있다고 했으니, 이 조선이 ‘환인조선국’(桓仁朝鮮國)으로 보인다. 원문 아래에 주석이 많은데, 모두 차이나인이 쓴 것이어서 다 믿을 건 못 된다.
요하 물이 발해만으로 내려오니, 그 동쪽이 ‘조선’이다. 지금 만주에 ‘환인현’이 있다.
“대황 가운데 동쪽 들머리에 산이 있고, 그 산을 둘러싼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군자들이 사는 나라다. 이 나라 사람들은 옷을 차려 입고 머리에는 갓을 쓰고 허리에는 칼을 찼다.”(14권 대황동경) 세상에 도가 행하여지지 아니하니, 동이(東夷)가 살고 있는 군자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공자였다. 백두산을 둘러싼 군자 나라가 배달나라 ‘단군조선’이다.
“대황 가운데 산이 있다. 이름이 불함이다. 숙신씨가 다스리는 나라가있다.”(14권 대황동경) 요동에서 북으로 3천리 올라가면 만주땅 봉천(심양)에 이른다. 이곳에 ‘숙신국’이 있다고 한 것이다. 배달나라 ‘환웅조선국’을 숙신국이라고 말했던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열양 동쪽 연나라에 속한 고을이름이다. 바다 북쪽 산 남쪽에 있다.” 이 책 12권(해내북경)에 나오는 ‘조선’은 연나라 영역에 있는 고을 이름‘조선현’이다. 연나라 땅 안에 ‘조선현’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통쾌한 기록이다. 은나라 사람 기자(箕子)가 배달겨레가 사는 동쪽으로 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기자로 말하면 이 현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편안히 자기집에서 살아 갔다. 이것을 봉식읍이라고 한다. 이러니 사마천이 엮은 <사기> 조선열전에 ‘기자’라는 이름이 나오지 아니한다. 나올 자리가 아니기에 그렇다.(2)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2-2
조선에는 본래 여러 갈래의 사람들이 거주했었다. 그 주요한 종족을 보면 맥과 고구려, 그리고 한이다. 한은 후에 마한, 변한, 진한이 되었다. 그들은 여러 왕국들을 세웠는데, 가령 조선, 고려가 그것이다. 여기 고려를 잘못된 방식으로 발음하면서 우리가 부르는 코리아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이것은 후에 지금 현재 이(李)씨가 통치하고 있는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조선이라 불리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과거의 이름들이 여전히 쓰이기도 한다. 만주족은 조선을 '솔 호 코우론' 또는 '솔호'왕국이라 부른다.
2-6
조선인(여기서는 주로 고조선인<古朝鮮人>)은 B.C. 2357년 치세를 시작한 중국 요(堯)임금 때부터 B.C. 2188년 치세를 시작한 하(夏)나라 3대 제왕인 태강(太康)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속민이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라 천자 태강의 압정은 고조선의 저항을 가져왔다. 하지만 B.C. 1818년 치세를 시작한 하나라 마지막 천자인 걸(桀) 때 이르러서는 고조선은 중국에 다시 조공을 바쳤다. 그렇지만 걸(桀)의 폭정은 또 다시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이때 고조선은 일부 중국 영토에 침입하기도 한다.
2-7
하나라 걸의 제위를 찬탈하여 B.C. 1766년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상(商)나라 초대 제왕인 성탕(成湯)은 무력으로 고조선인들을 제압하고 고조선이 다시 조공을 바치게 만든다.
2-8
B.C. 1562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중정(中丁) 때 고조선은 중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고조선은 때때로 굴복하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속과 반란은 B.C.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제왕 무정(武丁) 치세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2-9
무정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자신들을 정복하여 분산시킨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그러나 주왕조 이전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은 알려진 게 미미하기에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기자 시대 이들의 왕정이 제대로 성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기자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한 주로 복속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2814년간 이어져 내려왔다.
2-10
기자(箕子)는 상조의 현명한 왕자였다. 그는 기자조선의 창건자이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조언은 당시 중국 상나라 천자이자 그의 조카인 주(紂)를 분노케 했다. 폭압으로 통치한 주(紂)는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기자의 조언을 따르기는 커녕 기자에게 죄를 물어 옥에 가뒀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천자가 되어 그를 풀어주기 전까지 그는 삼엄한 감옥에 있어야만 했고, 무왕은 상나라 마지막 제왕인 주(紂)를 죽여 B.C. 1122년에 주왕조(周王朝)를 세웠다.
2-11
즉시 감옥에서 불려난 후 기자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천자의 지위를 빼앗은 주무왕(周武王)의 지배권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는 고조선 지역이 자신의 목표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동쪽으로 갔다. 그리하니 주무왕이 이를 꺼려하지 않고 오히려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그의 주(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씻어주었다. 이는 기자조선이 주왕조에 복종하였기에 기자조선의 왕위가 기자에게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기자의 후손들은 B.C. 246년 경부터 중국을 통치한 진시황제에 이를 때까지 조선을 계속 통치했다.
2-12
시황제는 기자 가문으로부터 조선을 빼앗아 복속시켜 요동에 병합했다. 이후 기자조선의 왕족들은 후작 지위로 40년 이상을 이 지역 명목상의 주인으로만 남았다. 그들은 이후 왕족 후손 준(準)이 왕위를 되찾을 때까지 40여년간 기다려야 했다.
2-13
본래 북경 부근 출신으로 중국인들이 위만이라고 부르는 한 인물은 B.C. 206년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한고조 유방 시기의 초한내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2-14
그 후 많은 전쟁에서 기준을 패배시키고 위만은 조선의 지배자가 되어 조선왕의 칭호를 얻었다. 위만은 기자 가문을 폐하고 요동 지배하의 조선을 독립시켰다. 그러나 그가 중국 천자들로부터 자신의 왕위를 인정받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원전 122년부터 통치한 한나라 혜제와 그의 이름으로 섭정했던 여후는 요동태수를 역임했던 이의 조언을 수용해 조선왕이란 칭호를 허락하였다. 이는 위만에게 영토를 정복하여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점차 맥,고구려, 오환 및 다른 여러 종족을 그의 발아래 두었다.
2-15
위만의 손자 우거는 B.C. 110년 경 한나라 무제의 사신 섭하를 살해하고 한나라와의 위험천만한 전쟁을 일으켰다. 한무제는 양복과 순체를 보내 우거의 무례를 응징하여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곧 우거의 동료가 우거를 암살하여 스스로 황제에게 항복하니 한무제는 조선을 중국의 지방으로 편입한다. 곧 창해군이라고 칭했다. 황제는 정복지가 안정되자 복속된 조선 전역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개의 군으로 나눴다. 또한 한무제는 오환과 고구려 등은 3단계 등급의 지방 단위로 전락시켰다. B.C. 86년부터 통치하기 시작한 한나라 소제는 2개의 군은 폐지하고, 오직 낙랑과 현도 지방만 존속시켜 조선은 단지 2개의 군으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3)
고조선 대담①, 고고학과 사료의 만남, <요하문명>과 <레지 고조선 사료>
[서울경제]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런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대표적 <요하문명> 연구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상호보완해 이슈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 2월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1부이다.
◆ 현재 요하문명과 고조선의 접점을 찾고자 하는 대중들의 관심이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견해를 부탁드린다.
우실하 : 우선 ‘고조선’과 ‘단군고조선’을 구별해야한다. 아직도 ‘신화’ 취급을 받는 ‘단군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최초의 고조선이다. 1980년대 초부터 요하(遼河)의 중-상류 지역에서 지난 5000여년 동안 누구도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기원전 2333년에 건설되었다는 ‘단군고조선’의 실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요하문명 지역에서 새롭게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이 황하 문명과는 이질적일뿐 아니라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정희 : 사람은 누구나 전통 있고 유서 있는 오래된 그 무엇의 후손이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일례로 발굴된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과 어떤 식으로든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쪽에서 발굴된 유적 등과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고조선에 대한 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 그렇다면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한 두 분의 견해는 어떠한지 말씀 부탁드린다.
유정희 :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의 시원이거나 아니면 최소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료가 필요하다. 곧, 발굴된 요하문명과 일치하는 사료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현재로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치적인 기록이 아니다. 정치적인 사건의 기록은 <레지 고조선 사료: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 유정희 명명>, 일명 <레지 사료>이다.
<레지 사료>에는 소략하나마 고조선(레지가 Coree로 기록)과 중국 하(夏), 상(商)왕조와 전투 장면이 기록돼 있다. 내가 이를 백년 전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등이 쓰신 <신단민사/실기> 등과 사료 교차검증(cross-examination) 하였고, 다른 신문에서도 고맙게 언급해 주셨지만, 이를 더 나아가, ‘서경-후한서 동이열전-삼국유사-레지사료-신단민사/실기’ 등으로 사료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여 고조선 역사의 기본 틀과 큰 뼈대를 만들었다. (한국강사신문 2019. 2. 12. 고조선 논쟁, 역사학자 유정희, 살아나는 사료들 참고)
우실하 : 현재도 우리나라 중-고 역사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등이 분포하는 만주 일대를 ‘고조선 영역’, ‘고조선의 문화권’, ‘고조선의 세력 범위’ 등으로 가르친다. 요하문명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요하문명의 꽃’인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의 후기(BC 3500~3000)에는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고,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 2300~1600) 시기에는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고고학의 대부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7) 선생은 홍산문화 시기에는 ‘고국(古國)’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는 하-상-주와 같은 ‘방국(方國) 단계의 대국(大國)’이 존재했었다고 본다. 설지강(薛志强)은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夏)나라보다 앞서 건설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홍산문화를 바탕으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건설된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하나라 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설지강)’이 바로 ‘단군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 관련분야의 국내 연구 진척에 대한 두 분의 평가는 어떠한가.
우실하 : 나는 요녕대학교 한국학과 교수(2000.2~2002.8)로 있던 시기부터 20년 동안 요하문명 지역을 답사하고 요하문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논문과 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아직도 국내 고고-역사학의 주류학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재야학계에서 열광할수록, 오히려 주류학계에서는 멀리하는 내가 예기치도 않는 이상한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유정희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 한국고대사 관련 역사학계에서는 되도록 요하문명과 고조선이 연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러면 일단 검토를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검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슈화시킨 <레지 사료>는 요하문명과 고조선을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레지 사료>는 고조선이 유구한 나라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증명해줄 거의 유일한 ‘해외작성사료(historical record of Old Joseon produced by non-Korean writers)’이기 때문이다.(4)
고조선 대담④,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복원되는 고조선 역사
시사매거진 기자명 임지훈 기자 입력 2020.05.20 09:31

[시사매거진=임지훈 기자]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그리고 고조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뜨겁다. 작년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드라마가 제작된 것 역시 이러한 대중적 관심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 중심에는 국내 <요하문명> 최고 권위자인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 58)와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사료상호보완 해서 대중화시킨 역사학자 유정희(동양고대사 전공, 38)가 있다. 2020년을 맞이하여 때마침 이들의 대담이 성사 되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관련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다음은 이들의 ‘고조선 대담 총 4부작’ 중 ④부이다.
◆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거대한 <요하문명>이 발견된 이후 이미 반세기 가까이 지났는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 학교에서도 이를 가르쳐야 하는가?
우실하 : 현재 중국에서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2004-2015)’을 주도했던 중국고고학회 이사장 왕외(王巍)의 건의로 2015, 2016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두 차례에 거쳐서 ‘중화문명전파(선전)공정(中華文明傳播(宣傳)工程)’이 제안되어 있다. 그는 중국고고학회 이사장이면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고, 또한 인민대표이기도 한 역사-고고학계의 최고 실력자이다.
‘중화문명전파(선전)공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요하문명과 도사유적의 발견 등으로 중화민족 5000년의 역사가 증명되었으니, (1)관련 유물들을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하고, (2)초-중등-대학의 역사교재를 새로 쓰고, (3)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100부작 다큐멘터리, 100권의 소개 책 시리즈, (4)어린이들을 위한 30-50부 작의 만화영화와 100부작 만화책 등을 통해 중화문명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의 무게감으로 보면 조만간 새로운 공정이 시작될 것이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러 검인정 역사교과서 가운데 ‘홍산문화’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있는 것은 단 1종뿐이다. 그것도 본문이 아니라 참고 사항처럼 박스 처리되어 있다. 이것이 ‘요하문명의 꽃’으로 불리는 홍산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국내 역사교과서이다.
필자는 항공대에서 2017년부터 ‘요하문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나라 대학에서 요하문명과 관련해서 개설된 유일한 과목일 것이다.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상고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이제는 우리나라 초-중등-대학에서 요하문명에 대해서 가르쳐야 하고, 역사교과서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요하문명의 발견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fact)이기 때문이다.
◆ 요하문명을 중국 측의 일방적인 입장이 아닌 새로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우실하 : 요하문명을 중국인의 시조라는 황제족(黃帝族)의 문명으로 끌고 가려는 시각 변화는 한-중 간의 새로운 상고사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 고고학의 대원로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9) 선생은 요하문명과 황하문명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Y자형 문화대’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Y자형 문화대’ 이론은 요하문명과 중원과의 관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한반도와의 연계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필자는 ‘제10회 홍산문화 고봉논단’(2015.8.11.-12 내몽고 적봉대학)에서 「요하문명과 ‘A자형 문화대’」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A자형 문화대’ 이론은 요하문명을 ‘동북아시아 공통의 시원문명’으로 삼아서,
(1)요하문명 지역에서 서남방으로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
(2)요하문명 지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
(3)장강 하류 지역에서 해로(海路)로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연결되는 노선을 상정하고 있다.
필자의 이론은 발표 당시 많은 중국학자들도 동의하는 관점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자들은 아직도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필자는 ‘A자형 문화대’ 이론의 근거로,
(1)옥결의 분포,
(2)빗살무늬 토기의 분포,
(3)각종 적석총의 분포,
(4)비파형동검의 분포,
(5)치(雉)를 갖추 석성의 분포 등을 제시하였고 중국학자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요하문명은 중국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고 본다. 많은 요소들이 고대 한반도, 일본, 몽골 등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요하문명의 발견이 새로운 역사 갈등의 단초가 아니라, ‘동북아 공통의 시원문명’이라는 인식 아래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향한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 마지막으로 이건 본래 역사학자인 유(Yu) 선생에게 묻는 건데... 혹, 고조선에 대해 마지막으로 학계에 바라는 것이 있나? 또한 추가적으로 하고픈 말이 있나? 더불어 앞으로의 본인 계획은?
유정희 : 고조선에 대해 말인가?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는 고조선에 대해 주류 역사학계에 바라는 게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알고 보면 학계에 정말 착실하고 성품도 좋은 분들도 많다. 속된 말로 돈도 안 되는 것 하면서 누가 뭐라해도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하시는 점잖은 분들도 옆에서 많이 봐 왔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고조선에 대해 학계에 바라는 게 없다. 인정 받으려는 마음도 없다. 학계에 인정받아 뭐하냐? 학계가 노벨상, 퓰리처상, 필즈상 이라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당연히 바라는 것도 없다. 고조선에 대해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해서 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사실 ‘역사(history)’란 학문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헤이든 와이트(Hayden White) 교수의 말을 굳이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각색된 역사적 기록(사료)을 ‘plot’을 구성하여 ‘narrative’ 방식으로 살을 붙이는(beef up) ‘픽션(fiction)’인데1) 사료가 워낙 적은 고조선학(古朝鮮學)에 대해서는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긴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기초인 그 ‘뼈대’를 만드는 작업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고조선학은 사료가 극도로 적긴 하지만, 위서(僞書: forged books)들을 제외하고도 그 뼈대복원 정도는 가능하다.
가령 내가 이미 작업한 것처럼 300년전 <레지 고조선 사료(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 일명 ‘레지 사료’)>와 100년 전 김교헌 등의 <신단민사/실기>와 교차검증(cross-examination)하고, 이를 <삼국유사>, <후한서>, 더 나아가 <서경>의 기록과 상호 교차검증,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면 충분히 고조선학의 신실(信實)한 뼈대 정도는 살릴 수 있다.
사실 위의 우실하 교수님 주장이나 나의 주장은 누가 들어도 합리적인 주장이다. 흔히 masstige(대중적 명품)를 지향한다는 인문학, 그중 역사학에서 이 정도면 왜곡은커녕 과장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의아하기도 한 게 740년전 일연, 300년전 프랑스인 레지 신부, 100년전 독립운동가 겸 국학역사학자(國學歷史學者)인 김교헌 등 모두가 우리 고조선이 유구하다는데, 우리 특정학계만 자꾸 아니라고 한다. 몇 년전 지리산 근처 암자의 어느 스님이 지리산 폭포수가 절경이라고 극찬하더라.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연계되는 것은 크게 가치를 높이는 편이다. 그러함에도 고조선의 유구성은 도리어 우리나라 특정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요한 건 시간일 뿐이라고 최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중이나 합리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나나 우 교수님 주장을 납득 할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앞으로 계획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역사, 그 중 우리 역사를 순수하게 좀 더 연구해 보고 싶다. 꼭 고조선이 아니더라도 그냥 다른 고대사도 좋고, 중세사(고려)도 좋다. 고대, 중세면 아무거나 괜찮다.
- 이상으로 이들의 고조선 대담을 마친다. 추후 필요 시 2차 대담도 기대해 본다.
각 주
1) Hayden White, Metahistory: The Historical Imagination in Nineteenth-century Europ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5).(5)
"역사냐, 전설이냐" 남창희 군사고고학회 회장 국내 최초 강화도 정족산성 고조선 초기인 4000년전 축조가능성 제기
군사고고학연구회 회장 인하대(총장 최순자) 남창희 교수는 2일 강화도 정족산성(삼랑성)이 실제 고조선 초기인 4천년 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지난 5년에 걸친 동북아 고대 산성 비교 연구 과정에서 정족산성의 구조와 위치에 대한 군사학적 검토의 결과라는 것이다.
전등사가 위치한 정족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가파른 외측면 산세를 이용한 천혜의 군사기지로 알려져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위에서 둘러싼 능선에 산성을 쌓아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로 된 것을 말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격퇴할 정도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육군본부 자문위원이기도 한 남창희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정치군사모의분석(PolMil) 기법으로 위치, 지형, 규모 데이터를 입력하여 축성 시기를 추론한 연구 성과이다.
정족산성은 고려사에 고려시대에 처음 쌓았다는 기록이 없고 세종실족 지리지에도 전설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먼 과거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학계에서도 연대미상으로 학설이 분분한데 남 교수팀은 한성백제기와 3500년 이전이라는 두개의 군사학적 가설을 국내에서 최초로 제시했다.
군사지리적 위치와 수용 능력의 데이터를 결합하면 정족산성은 해양력이 발달한 북방 세력의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Base: FOB)로서 효용이 높다.
동시에 한반도 내륙의 전략적 가치 중심을 노리는 적대적 세력의 원정 상륙을 막는 방어기지로서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실제 1866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상륙 당시 수도권 주요 방어거점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방대 권태환 교수(육군 준장)와 남 교수팀은 기원전 8세기부터 한성백제 말기 475년 사이 약 1200년간의 28개 동북아 국제관계 주요 변동 시점에서 정치군사모의분석을 실행했다.
그 결과 한반도 강화도에 대형기지를 배치할 전략 및 작전적 소요는 기원전 8세기 이전과 한성백제 시기에 존재했다. 연구팀은 2800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한성백제 시기는 다소 약하다는 잠정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삼국시대 이전 해양력 발전의 지표는 천문기록과 바다 항해인데 두 가지를 만족하는 국가는 고대 동북아에 고조선 뿐이다. 중원 문화에 없는 고인돌의 별자리 새김문화와 신석기 시대 원양 어로(포경) 암각화 존재가 고조선의 앞선 해양력을 시사한다.
고조선 말기에는 제나라, 연나라 등 대륙세력의 위협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고조선의 남측 주변부인 강화도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고조선 세력으로 추정되는 요녕성의 기원전 16세기 조양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는 필리핀, 오키나와와 제주도에서 서식하는 카우리 조개화폐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남창희 인하대 교수 연구팀은 “무덤의 카우리 조개화폐는 쿠로시오 난류를 따라 서해로 북상하며 발해만의 고조선 중심 세력과 교역하는 남양의 이질적인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족산성은 기원전 23세기 경 고조선 초기 세력권이 한반도 남쪽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토착 해양세력과의 갈등의 흔적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또 남 교수 연구팀은 “고조선 초기에 서해의 섬 강화도에 군사기지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라고 추정했다.
이와 함께 남 교수팀은 두 차례에 걸친 중국 요서지역 산성 조사과정에서 한국 산성의 기원이 되는 3500년전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테뫼식 산성을 확인했다.
내몽고 적봉시 홍산은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하가점하층문화(BC22세기-BC15세기)의 상징인데 포곡식 산성 구조로서 능선에서 산성을 발견했으며 방어용 돌출부인 치(작은 雉城)도 발견됐다.
같은 시기, 성자산(城子山) 산성은 평평한 산정상부에 머리띠를 두른 것같은 테뫼식 산성인데 그 모형을 오한기(敖汉旗)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3500년 전의 포곡식 산성은 고구려 환도산성으로 이어지고 백제 공주산성과 사비성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정족산성과 동일한 구조의 산성이 이미 3500년 전에 축조된 사실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다.
김연성 고조선연구소 소장은 “정족산성이 4천년 전에 축조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유네스코 세계역사문화유산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남창희 교수는 “초대 단군 때 참성단과 삼랑성을 쌓았다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식 기록을 전설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권태환 교수는 “인천공항과 강화도를 잇는 다리가 개통된다면 동북아 허브공항에서 여행객들이 2시간 안에 즐길 수 있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6)
고조선의 변방, 강화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이를 알면 과거와의 소통, 공감이 훨신 잘 될 것이다.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청소년들이 감동적으로 우리 역사와 만날 수 있다. <인천in>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잘 어우러진 소설과 영화를 통해 [팩션 인천사]를 연재하며 청소년과 시민들의 역사 인식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 황해 문명권의 배꼽 강화도 참성단
- 정호일 <단군왕검>, 방영주 [우리들의 천국]
강화도에 있는 ‘참성단’이 단군조선 때 세워진 유적이라는 역서 서술이 여럿 보이는데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명확히 고증되지 않았다. 고려 말에 써진 [고려사]에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왕검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정족산성)을 쌓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 학계에서 참성단이 고조선 초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아직 정설로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다.

인하대 ‘군사고고학연구회’가 중국과 일본, 한국의 고대(古代) 산성들을 비교 연구하여 강화도 정족산성이 고조선 건국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단군조선이 건국되면서 강화도에 참성단을 만들었다고 보면 강화도 지역이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봐야 한다. 단군조선이 건국된 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사학계의 논란거리이기는 하지만 단군조선이 백두산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면 강화도는 고조선 강역의 최남단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수도에서 먼 변방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이유가 무엇일까.
강화도가 상고시대에는 황해를 둘러싼 해양문화권의 중심지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 지역은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으로 특히 강화도에는 이 황해문화권의 중심지답게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해 있다. 고인돌은 해양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고인돌에 별자리와 원양(遠洋) 해로가 암각화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이 해양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있었던 발해만 유역(랴오닝성)에서 필리핀이나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서 자생하는 카우리 조개 화폐가 대량 출토되는 것을 보면 황해 연안에서 남방 해양문화와 북방 유목문화가 만나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해 유역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문명 발생의 지정학적 요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발굴되고 있는 유물 유적들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이런 실증사학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 민족사의 왜곡 축소는 심한 것 같다. 단군조선과 배달국, 환국의 역사는 아예 지어낸 이야기 설화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다양한 상고사 연구 방법이 시도되면서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고학, 비교언어학, 천문학, 유전자학 등의 최신 연구 결과물들이 그동안 허구로 치부되었던 우리 민족 상고사가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을 건설한 예(濊)족과 맥(貊)족이 어느 민족을 말하는지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조선 건국설화로 전승된 ‘곰족’과 바이칼호 주변에 살고 있는 브리야트족이 동일하게 ‘곰족’이라 불리는 점과 ‘범족’의 토템 호랑이가 페르시아어로 ‘맥’이라고 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중앙아시아 천산(카자흐스탄 톈산)에서 발원한 유목민족에서 한민족이 갈라져 나왔다는 역사 기록을 단순 허구라고 하기 어렵다. 바이칼호 브리야트족의 풍속이 우리 민족 풍속과 닮은 점이 너무 많고 특히 바이칼호 알혼섬에는 심청전과 너무 흡사한 인당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등 여러 문화유산이 [조선상고사] 역사 서술과 일치한다. 중앙아시아와 만주, 한반도에서 발굴된 적석총 유적들도 이런 문화적 일체감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가면 거리에서 ‘단군’, ‘졸본’, ‘구려’와 같은 간판을 흔히 볼 수 있고, 터키 등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한민족 문화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민족 문화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널리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한반도 북방 광활한 지대에 살았던 여러 종족이 대부분 조선족 부여족의 일파이며 가깝게는 중국 대륙 동해안 지역과 일본 열도, 멀게는 몽골 터키 지역까지 우리 민족의 상고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단군조선 역사는 대부분 [삼국유사]에 근거한 서술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역사는 왕조 계보까지 익숙할 정도로 자세하게 배우지만 단군조선 역사는 신화로 배울 뿐 왕조 계보는 대부분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구려 왕으로 유리왕, 광개토왕, 장수왕 등은 많이 들어봤지만 단군조선의 왕으로 초대 단군왕검만 들어봤지 가륵, 구을, 달문, 아술, 노을 등 47대까지 단군 중 들어본 이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국, 환국의 역사까지 자세하게 서술한 역사서도 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 상고사는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라면 이 유구한 역사가 어떤 연유로 다 잊히고 말았는가.
기원전 7199년에 환국이 세워졌고 47대에 걸쳐 2096년 동안 단군이라 불렸던 왕이 조선을 다스렸다고 수치까지 명확하게 기록한 [환단고기]라는 역사책이 있는데 이 책은 위서(僞書)로 취급받아 우리 역사 교과서에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환단고기] 서술의 문헌 자료가 되는 [삼성기], [단군세기] 등은 고려말 공민왕 때 여진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조정을 이끈 행촌 이암 선생에 의해 집대성되고 그 분의 후손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한 책이라고 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상고사 역사책이 조선시대에 들어 왕조가 친명 사대주의에 빠지면서 불온서적으로 몰수를 당해 불태워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난은 계속되었다. 조선말에 나라가 망하고 일제는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시키기 위해 역사서를 대거 강탈해 갔다. 신채호 선생은 이런 현실을 애통해 하면서 [조선상고사]로 집필하셨다.
우리 민족 유구한 역사가 허구적인 이야기 신화(神話)로 치부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이웃 나라 역사 기록과 세계적인 상고사 석학들의 연구 결과물이 [환단고기], [조선상고사]의 역사 서술과 일치한다는 것이 차차 밝혀지고 있지만 아직 우리 역사 교육에는 반영되고 있지 않다. 우리 상고사 교육에 좀 더 큰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술된 역사소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우리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7)
<자료출처>
(1) 산해경, 장수철 옮김, 현암사, 2005
(2) https://news.v.daum.net/v/20050707074023851?f=o
(3) 유정희 · 정은우 해제,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아이네아스, 63-77쪽
(4) 고조선 대담①, 고고학과 사료의 만남, <요하문명>과 <레지 고조선 사료> (daum.net)2020.02.04
(5) 고조선 대담④, 〈요하문명〉과 〈레지 사료〉, 복원되는 고조선 역사 - 시사매거진 (sisamagazine.co.kr)
(6) "역사냐, 전설이냐" 남창희 군사고고학회 회장 국내 최초 강화도 정족산성 고조선 초기인 4000년전 축조가능성 제기 (daum.net)2017.08.02
(7) 고조선의 변방, 강화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이유는?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incheonin.com)2018-07-17
<참고자료>
단군조선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국가였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0/08/23
<2006 개천절 특집-고조선을 찾는 사람들>“단군조선 → 고구려 승계는 문헌상에도 명백” :: 문화일보 munhwa2006-10-02
<2006 개천절 특집-고조선을 찾는 사람들>동북공정 맞서 해륙사관 정립 앞장 :: 문화일보 munhwa2006-10-02
<2006 개천절 특집-고조선을 찾는 사람들>고인돌 성혈은 별자리… 한국과학사에 기원 제공 :: 문화일보 munhwa2006-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