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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 1911년 105인 사건과 신민회

대야발 2025. 4. 30. 16:39

 

 

 

 

 

 

 

일제는 이와 같은 신민회의 항일적인 성격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식민통치의 장애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목표 아래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혐의'는 1910년 12월에 압록강 철교준공 축하식에 데라우치가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암살을 모의했다는 터무니없는 조작이었다. 이와 같은 각본을 꾸민 일제 경찰은 1911년 9월 윤치호ㆍ이승훈ㆍ양기탁ㆍ유동열ㆍ안태국 등 전국에서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 투옥하였다.

 

 

 

■ '105인사건' 날조하여 애국자 탄압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18. 10. 15. 16:06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24회] 일제가 사상전향을 위해 꾸며낸 첫번째 사건

 

 
▲ '안악사건' 동지들 백범이 환국한 후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동지들과 함께 찍은 모습. 앞줄 왼쪽이 김홍량
ⓒ 기록사진
 
 
 
 

흔히 '안명근사건'ㆍ'안악사건' 또는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일제가 본격적으로 우리 애국자들을 검거하여 갖은 악형과 고문으로 사상전향을 위해 꾸며낸 첫 번째 사건이다.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자.

1910년 12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안명근은 서울 경무 총감부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과 문초를 받았으며, 이 계획에 참여한 배경진ㆍ박민준ㆍ한순직 등도 검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의 무관학교 설립 계획을 빌미 삼아 황해도 지방의 배일 민족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일제는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금 운동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금사건으로 날조하여 관련 인사는 물론 이 사건과는 무관한 민족진영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때 검거된 주요 인사는 김홍량ㆍ김구ㆍ최명식ㆍ이승길ㆍ도인권 등 주로 안악지방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를 중심으로 문화 운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무관학교 설립 계획과 결부시켜서 더욱 확대, 날조하면서 잔인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이들에게 강도 및 강도미수죄, 내란미수죄, 모살미수죄 등의 혐의를 씌워 안명근 종신징역, 김구ㆍ김홍량ㆍ배경진ㆍ이승길 징역 15년, 도인권 징역 10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이들은 감형과 특사로 출감하였으나 혹독한 고무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제 경찰은 안악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드러난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간부들을 역시 데라우치 총독 이하 일본 요인의 암살음모사건으로 날조하여 검거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초에 안창호ㆍ신채호 등이 독립사상의 고취, 국민역량의 배양, 청소년 교육, 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자체의 실력양성 등을 기본 목표로 설립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평안ㆍ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화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반일 애국 계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서북지방의 기독교 신자 및 교사,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회장은 윤치호ㆍ부회장은 안창호가 맡았다.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평양에 도자기회사, 평양과 대구에는 출판활동을 위한 태극서관을 세워서 운영했으며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발간했다. 신민회는 또한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해외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하고자 했다.

 

 

일제는 이와 같은 신민회의 항일적인 성격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식민통치의 장애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목표 아래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혐의'는 1910년 12월에 압록강 철교준공 축하식에 데라우치가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암살을 모의했다는 터무니없는 조작이었다. 이와 같은 각본을 꾸민 일제 경찰은 1911년 9월 윤치호ㆍ이승훈ㆍ양기탁ㆍ유동열ㆍ안태국 등 전국에서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 투옥하였다.

 

 

일본관헌은 이들에게 야만적인 악형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이들 중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판결을 내렸고, 전원이 항고하자 대구복심원에서는 105인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ㆍ양기탁ㆍ안태국ㆍ이승훈 등 6명에게 징역 5~6년형을 선고하였다. 이로써 사건의 날조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김근형 등 2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불구가 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선우훈은 뒷날 <민족의 수난>에서 고문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음력 12월 8일 돌집으로 된 형구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심문관이 넷인데 우도(宇島)라는 경시는 조선말 잘하는 40세 된 자요, 상내(常內)라는 자는 키가 작고 얄미운 자요, 헌병 한 놈은 키가 크고 수염 많은 심술 사나운 놈인데 이 네 놈이 밤낮 30여일 간 혹형을 계속했다. 묻는 말을 부인할 적마다 네 놈이 달려들어 때리고 찼다. 두 엄지 손가락을 포승으로 결박하고 한편 팔은 앞으로 돌려 어깨 위로 올리고 한편 팔은 뒷등으로 돌려 두 손이 서로 닿을 만큼 하고 매어 다니 몸이 오척 가량 공중에 달렸다.

 

 

두 놈이 두 자 가량 되는 대막대기 두 개를 마주잡고 옆구리에서 허리까지 쭉쭉 훑으니 몸이 두 동강이 되는 듯 하체의 힘은 쭉 빠지고 전신의 기력이 없어진다. 다른 놈이 채찍으로 머리부터 다리까지 숨쉴 틈 없이 난타하니 땀은 낙수물 같이 쏟아지고 호흡은 하늘에 닿고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훅 훅 쏟아진다.

 

 

금시 목숨이 끊어질 듯 사지가 떨리고 눈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슴이 터질듯하다. 이러기를 약 20분만에 전신은 동태같이 얼고 감각도 없어졌다. 눈은 곧아지고 혀를 빼어 물고 숨소리가 사라지자 이때는 맥박도 끊어져 죽는 것 같이 되는 때라 한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의 기운이 명치 끝에서 계란만하게  뱅뱅 돌다가 점점 졸아들어 동전만큼 되는 때에도 청신경은 아직도 의식이 있었다.

 

 

악귀들은 감각이 남았는가 보기 위하여 회젓가락으로 다리를 지지고, 담뱃불로 얼굴을 지져보고, 벌린 입 속에 담배연기를 뿜어도 본다. 얼굴에 물을 뿌린 후 백지를 발라 봉창을 한다.

 

 

호흡이 통하지 않음을 보고 "아부나이 아부나이(위태하다)" 하면서 줄을 늦추고 채찍질을 두 차례 하고 가슴과 머리를 치고 배를 걷어차고 돌바닥에 메쳐놓고 귀와 머리카락을 끌고 다니면서 돌바닥에 메친다. 그리해도 돌과 같이 뭉친 밤알같은 숨덩이는 풀어지지 않는다. 이윽고 맥박이 살아나니 온몸이 바늘이나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다.

 

 

그래도 호흡이 터지지 않으니 코에다 물을 부어 두 주전자가 들어가니 가슴이 터질듯 하다. 엎어치고 젖혀도 호흡이 안 트이더니 부어넣은 물이 쏟아지는 동시에 호흡이 열렸는데, 그동안 30~40분은 걸렸을 것이다. 웃옷 한 조각만 입고 하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터지고 상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를 석탄제 위로 끌고 비비니 얼굴이나 몸뚱이가 가히 사람 꼴이 아니다.(1)

 

 

 


1911년 일제 총독부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다. 총독부는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체포, 그 중 105인을 투옥한다. 흔히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고, 신민회 회장 윤치호 등이 친일 경향으로 돌아서며,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하지만 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105인 사건은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왜 일본 총독부는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했을까? 당시 신민회가 전국 최대의 항일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1907년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구, 이동녕, 박은식, 이희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등 독립협회 청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 결사단체이다.

 

 

 

■ 왜 일제는 하필이면 '신민회'를 탄압하려 했을까

오마이뉴스 정만진기자 2018. 5. 3. 14:03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의 후손 구찬회 지사

 

 

 

뒷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약하는 이상룡은 조상 대대로 물려져온 안동 임청각(국가 보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가족들과 함께 걸어서 추풍령까지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만주로 망명했다. ⓒ정만진

 
 
 
 

1911년 일제 총독부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다. 총독부는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체포, 그 중 105인을 투옥한다. 흔히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고, 신민회 회장 윤치호 등이 친일 경향으로 돌아서며,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하지만 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105인 사건은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왜 일본 총독부는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했을까? 당시 신민회가 전국 최대의 항일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1907년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구, 이동녕, 박은식, 이희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등 독립협회 청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 결사단체이다.

 

 

일제가 신민회를 특히 탄압한 이유

 

신민회는 입헌군주국을 지향한 독립협회와 달리 공화정 체제를 추구했다. 회원끼리도 서로 알 수 없게 점조직으로 꾸려졌음에도 1910년 들자 주요 애국계몽운동가의 거의 대부분이 가입했고, 군 단위까지 지부를 두었다. 평양 대성학교 등 국내에 많은 학교를 세웠고, 국외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新興)무관학교의 신흥은 '신(新)민회가 나라를 부흥(興)시킨다'는 의미였다. 일제 총독부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막강한 항일 단체가 바로 신민회였던 것이다.

 

 

 

구찬회 생가를 찾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 회원들 ⓒ정만진
 
 
 

 

신민회의 최연소 회원은 대구 서변동 출신 구찬회(具璨會, 1890.1.27.∼1910.5.13.)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울산 서생포 전투 등지에서 공을 세웠고, 류성룡의 군관으로도 활약했던 구회신(具懷愼)의 12대손인 구찬회는 (당시 주소로)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서변동 1111번지(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로3길 47-12)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던 구찬회는 15세였던 1906년 3월 신학문을 학습하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융희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16세 되던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09년 신민회는 비밀간부회의를 통해 독립군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의한다. 이 방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안동의 이상룡(1858∼1932)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임청각(보물 182호)을 팔아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을 들고 1911년 1월 5일 안동을 떠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3세였다.

 

 

일주일 내내 걸어서 추풍령에 도착하는 이상룡 가족

 

이상룡 가족은 일주일 동안 계속 걸은 끝에 1월 12일 추풍령에 닿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이상룡은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무릎을 꿇고 종이 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한다. 안동을 떠나고 한 달 뒤인 2월 7일, 이상룡 가족은 먼저 만주로 망명한 처남 김대락의 거주지 횡도촌에 당도한다. 그 날 이후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활약하는 등 1932년 병사할 때까지 줄곧 항일 투쟁에 매진했다.

 

 

이상룡 소개 이유


본래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령제였고,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미국의 조선 위임 통치를 주장하자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했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취임했다. 그 후 임시정부의 대통령제는 국무령제로 바뀌었고, 이때 이상룡이 취임했다.

이 글에서 신민회 주요 인사 중 이상룡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은 그를 기려 세워진 '이상룡 구국 기념비'가 대구 달성공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만주 벌판에서 고령과 병으로 말미암아 고단했던 74세의 삶을 마감했지만, 구찬회는 불과 20세에 이승을 떠났다. 1909년 이래 만주로 간 그는 각종 독립운동 독려 문서들을 자필로 옮겨 국내 인사들에게 배포하던 중 1909년 12월 일제에 체포되었다. 

 
 

19살 독립지사에게 배후를 추궁한 일제

 

그의 나이가 겨우 19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일제는  '배후 인물을 실토하라는 잔혹한 고문'을 했다. 그러나 지사는 '굴하지 아니하고 악형을 받았다. (결국) 1910년 5월 13일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권대웅 <달성의 독립운동가 열전>)'

 

 

정부는 그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외세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스무 살 젊은 청춘, 그의 생가터에서 답사자는 그저 애잔할 뿐이다. 무엇으로 그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으랴! 땀을 쏟고 피를 흘리고 마침내 스무 살 새파란 생명까지 바쳐 얻은 독립인데, 오늘날 두 동강 난 유일한 나라로 지구상에 남아 있으니….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이 두문불출의 조상 구홍을 기려 세운 사당 표절사. 구찬회 생가터에서 동화천을 건너 동변동으로 들어서면 산비탈에 서 있다. ⓒ정만진
 
 

 

 

울창한 나무와 잡다한 건물들에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10대이던 무렵에는 생가에서 동화천까지가 그냥 물가였을 터,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구회신이 두문불출로 이성계를 거부한 8세조 구홍(具鴻)을 기려 세운 표절사(表節祠)가 눈에 들어 왔으리라.

 
 

 

조상은 왕조를 뒤엎은 세력도 거부했는데, 어찌 바다를 건너온 일본 세력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가. 비록 이상룡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무릎을 꿇고 종이 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한 때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지 여덟 달 뒤의 일이지만, 구찬회는 진작 그 말을 듣고 또 가슴에 새겼으리라. 

 

 

구찬회의 고려말 조상 구홍과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을 섬기는 재실 송계당. 구찬회 생가 바로 뒤에 있다. ⓒ정만진

 

 

"머리는 내놓아도 무릎은 꿇을 수 없다"

 

구찬회 생가와 표절사 사이를 흐르는 동화천은 대구에 남은 유일한 자연 하천이다. 아래로 동화천을 굽어보며, 구찬회 지사와 같은 선열들의 뜨겁고 올곧은 정신이 이 땅에, 우리들의 마음에 굳건히, 영원히 남아 있기를 소망해 본다.(1)

 

 

 

<자료출처>

 

 

(1) '105인사건' 날조하여 애국자 탄압 (daum.net)

 

 

(2)  왜 일제는 하필이면 '신민회'를 탄압하려 했을까 (daum.net)

 

 

 

 

<참고자료>

 

 

일제강점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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