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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서 (8) 고려사

대야발 2018. 10. 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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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제후'로.. 조선이 '고려사' 고쳐 썼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2만2000원)에서 “역사학계는 ‘고려사’ 편찬의 직서(直書·그대로 씀) 원칙과 객관성을 과도하게 평가했고,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북한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 태조 왕건 상.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동아일보DB
 
 
 
 
 

노명호 교수, 신간서 '고려사' 분석.. '고려 황제' 부정 현재까지 이어져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가 사대명분론의 영향으로 고려의 황제국 제도를 제후국의 제도로 낮춰 서술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지식산업사·2만2000원)에서 “역사학계는 ‘고려사’ 편찬의 직서(直書·그대로 씀) 원칙과 객관성을 과도하게 평가했고, 고려의 황제제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고려사’는 조선 세종 대 편찬된 사서로 고려시대 연구의 기본적인 사료로 꼽힌다. 유교적 역사 편찬 방식인 ‘술이부작(述而不作·자료에 의거해 서술하며 편찬자의 작문으로 서술하지 않음)’에 따라 쓰여 사료집과 같은 객관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노 교수는 고려사 편찬 시 조선 조정에서 고려 황제제도의 서술 문제로 장기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데 주목했다.

 

 

세종은 고려 역사 편찬에서 직서 원칙을 추구했다. 정종과 태종의 사망으로 선대의 묘호를 황제제도인 ‘종(宗)으로 칭하는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 선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직서 원칙은 부분적으로만 적용됐다. 이미 앞서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시절에도 ‘고려 황제’ ‘고려 천자’는 금기어였다. 금기는 조선 건국 초에도 명나라와의 긴장관계 탓에 그대로 이어졌다. 정도전(1342∼1398)은 ‘고려국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황제’ 표현을 ‘참의지사(僭擬之事·참람하게 흉내 낸 사실)’로 보고 ‘종(宗)’을 ‘왕’으로 개서(改書·고쳐 씀)했다.

 

 

직서 원칙은 다수 신료들의 반발로 후퇴하기도 했다. 고려가 황제제도를 시행하던 시기 군주의 사면령에 대한 서술도 그 가운데 하나다. 신료들은 고려 사료에 ‘대사천하(大赦天下·천하에 사면령을 내림)’라고 한 것을 ‘대사경내(大赦境內·영역 내에 사면령을 내림)’라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고쳐 쓰지는 않고, ‘천하’ 두 글자를 삭제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이처럼 직서 원칙의 예외는 점차 늘어났다.

 

 

노 교수는 고려에는 황제제도가 있을 수 없다는 편견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고려의 궁중 의례용 속악(俗樂)인 ‘풍입송(風入松)’ 서두에 나오는 “해동천자당금제(海東天子當今帝), 불보천조부화래(佛補天助敷化來)”는 ‘제(帝)’와 ‘불(佛)’ 사이를 끊어 “해동천자이신 지금의 황제는, 부처가 돕고 하늘이 도와 널리 교화를 펴시도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제(帝)’와 ‘불(佛)’을 이어 붙여 해동천자가 ‘제불(帝佛)’이라는 잘못된 번역이 일부 논저에서 이어진다. 노 교수는 “‘제불(帝佛)’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면서까지 ‘고려 황제’를 부정하는 건 여전한 선입견 탓”이라고 말했다.(1)

 

동아일보, 조종엽 기자, '황제'를 '제후'로.. 조선이 '고려사' 고쳐 썼다, 2019. 6. 12.

 

 

 

 

 

336만 9천623자에 달하는 고려사 전체를 한 글자 한 글자 곱게 베낀 필사본 완질이 영국에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2014년 발주한 '구한말 해외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책임연구자 유춘동 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과정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에 고려사 필사본 완질 139권 19책이 보관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2015년 2월 16일 밝혔다.

 

 

 

 

 

 

"유희해·옹수곤 등 청대 고증학자들이 활용"

 

 

조사단의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가 찾아낸 이 고려사는 양장(洋裝) 제본에 'KAOLI SHIH'라고 표기됐다. 조사 결과 이 고려사는 괘선지에 해서체로 또박또박 고려사 전체를 필사한 것이며, 19세기 중국 학자들이 애장하며 돌려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주청 영국공사를 역임하면서 중국 고서를 전문적으로 수집한 토마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 1818~1895) 기증 도서다.

 

 

아울러 필사본에 대한 장서인(소장자가 찍은 도장)과 그에 적힌 문구 조사를 통해 이 필사본 고려사가 중국 청대 최고의 금석문 학자인 유희해(劉喜海.1793~1852)와 당시 중국 최고의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아들 옹수곤(翁樹崑.1786~1856), 그리고 장서가 고천리(顧千里. 1766~1835) 등이 활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첫 권 고려사 서문인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위에 찍힌 가음이장서인(嘉蔭이<竹 밑에 移>藏書印)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편저자인 유희해의 인장이다. 허경진 교수는 '가음이'가 그의 장서루 명칭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 아래에 유희해인(劉喜海印)과 유희해의 호인 연정(燕庭)이라는 도장이 확인돼 유희해 장서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진고려사전이 끝나는 부분에는 옹수곤이 적은 "1813년 12월부터 교열하면서 읽다가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문장이 있고, 권137 뒤에도 역시 그가 적은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라는 글이 확인됐다.

 

 

허 교수에 따르면 이 두 부분에는 각기 수곤상관(樹崑嘗觀)과 성원상관(星原嘗觀)이라는 도장을 찍혔다. 옹수곤은 옹방강의 여섯째 아들이며 성원이 옹수곤의 자(字)다.

 

 

따라서 이 필사본의 발견은 "청나라 금석학자들이 조선 금석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 그리고 조선금석문 연구를 위해 고려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구입하거나 필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다"면서 "나아가 19세기 한중(韓中) 학자들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재단은 평가했다.

 

 

 

 

 

 

 

이 고려사 필사본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관심거리다.

옹수곤은 추사가 북경에 가서 만난 스승 옹방강의 아들로 추사와 동갑내기 친구다.

 

당시 옹수곤과 유희해는 고려시대 금석문 연구에 몰두해 있던 때라 조선 사신이 오갈 때마다 탑본(탁본)을 부탁하고 이렇게 구한 탑본의 글자를 판독하고 고증하기 위해 고려사를 구해 열심히 대조해가며 읽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사 완질본을 구하기 힘들자 옹수곤은 김정희나 정조의 부마이자 당대의 문장가인 홍현주(洪顯周. 1793~1865), 문인 이광문(李光文.1778~1838) 등에게 빠진 부분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며, 자기 소장본과 유희해 소장본을 대조하다가 빠진 부분을 찾아냈다고 허 교수는 덧붙였다.

 

허 교수는 "이 책은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문 학자 유희해가 소장하고 옹수곤이 교감했다는 점에서 귀중하다"면서 특히 "유희해가 해동금석원을 편집할 때 이 책을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려사는 김종서·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1449년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 139권으로 완성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현재 대부분 목판본으로 전하고 금속활자본이나 목활자본이 그 다음으로 많다.

 

 

총 글자수 336만 9천623자에 달하는 고려사 중 필사본은 열전이나 지(志) 부분만을 필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사 전체를 필사한 것으로는 규장각 소장 61책과 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71책 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본처럼 전질을 정성스럽게 필사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허 교수는 말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방학연구소와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윌리엄 애스턴(W.G. Aston.1841~1911) 도서에 대한 전모를 파악했다고 재단은 덧붙였다.

 

 

애스턴은 구한말 주한 영국공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의 각종 문집, 세책(貰冊) 고소설류 및 한글 교재 등을 구입했다. 아울러 그는 한글을 재미있게 배우기 위해 '조선설화', '장화홍련전' 등의 고소설을 수집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두고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등 한일관련 다양한 전적도 수집했다.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는 그가 책을 구매하면서 적은 책 권수와 가격, 구매자, 특징 등을 기술한 목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자료 가치가 더 큰 것으로 평가됐다.

 

 

이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1893년 조선을 찾은 알레산드로 드류(Alessandro Damer Drew.1859~1926)가 수집한 성경책 등의 자료들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그가 모은 책은 대부분 조선에서 간행된 초기 성경책과 선교 관련 자료로서 그에는 그의 한국이름인 유대모(柳大模)라는 도장이 찍혀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2)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336만자 고려사 전체 베낀 필사본, 영국서 발견, 2015-02-16

 

 

 

 

 

 

 

 

<참고자료>

 

 

고려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고려사(高麗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고려사 - Daum 백과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 장군…별똥별이 떨어져 적을 공격했다? [오늘 이슈] (daum.net)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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