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고려 - 거란전쟁(993년),
2차 고려 - 거란전쟁(1010년)
3차 고려 - 거란전쟁(1018년) ; 귀주대첩
■ 7전 7승 ‘고려의 이순신’ 양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선 강감찬도 조연[이기환의 Hi-story](117)
2024. 1. 15. 06:00
1차 고려 - 거란전쟁(993년),
2차 고려 - 거란전쟁(1010년)
3차 고려 - 거란전쟁(1018년) ; 귀주대첩
■ 7전 7승 ‘고려의 이순신’ 양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선 강감찬도 조연[이기환의 Hi-story](117)
2024. 1. 15. 06:00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양규)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인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이죠.
1254년 몽골의 잇따른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재위 1213~1259)은 ‘국난 극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면서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하죠. “세종대왕(世宗大王·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웠다”고 표현한 겁니다.
■고려판 이순신
또 한 분은 2차 고려-거란 전쟁 승리의 주역인 양규(?~1011) 장군입니다.
돌이켜보면 3차례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세 분이 있죠. ‘1차(993~994)=서희(942~998)’, ‘2차(1010~1011)=양규’, ‘3차(1018~1019)=강감찬(948~1031)’입니다.
이중 서희와 강감찬 등에 비해 2차 전쟁의 주역인 양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됐습니다. <고려사>에 양규 장군의 행적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한 1010년 11월 16일부터, 전사한 1011년 1월 28일까지 딱 2개월 10여일치만 남아 있습니다.
현종은 양규 장군에게 ‘공부상서’ 관직을 추증했고요. 부인에게는 해마다 벼 100곡을 제공하고, 아들(양대춘)에게도 관직(교서랑)을 주었습니다. 현종은 그때 양규의 공을 거론합니다.(<고려사> ‘열전·양규’)
“그대의 남편이…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로써 고려의 강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
양규는 1024년(현종 15)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까지 하사받았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은 ‘태조 왕건 때의 삼한공신 이후 공신각의 벽에 초상이 봉안된 공신’을 뜻합니다. 이런 분인데, 지금까지 홀대를 받았던 겁니다.
이번 드라마 덕분에 ‘양규=고려판 이순신’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고려 땅을 넘본 거란군을 끝까지 섬멸하고 전사한 양규 장군이죠. 이순신(1545~1598) 장군도 퇴각하는 왜군들과 최후 일전(노량해전)에 앞서 “이 원수만 무찌르면 죽어도 한이 없다(此讎若除 死則無憾)”고 외치며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몸과 뼈가 가루가 될지언정…
이제 역사서에 기록한 그대로만 ‘2차 고려-거란 전쟁’과 양규 장군 이야기를 해볼까요.
1009년 1월 고려에서 큰 정변이 일어나죠.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1010)가 목종(재위 997~1009)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겁니다. 강조의 정변입니다. 그러자 거란의 성종(재위 982~1031)은 “임금을 시해한 강조의 대역죄를 묻기 위해 직접 출정하겠다”(<고려사> ‘세가·현종’)고 선언합니다. 고려도 가만있을 수 없었죠.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진을 쳤습니다(<고려사> ‘세가 현종’). 11월 16일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거란 성종은 흥화진(평북 피현군 당후리)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등장합니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거란 황제가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는 도순검사(조정이 파견한 임시 군지휘관)가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흥화진성은 22일까지 7일 동안 펼쳐진 거란군의 거센 공세에도 끄떡없이 버텼습니다. 그 와중에 거란 성종이 항복을 권유하는 칙서를 잇달아 보냅니다. “역신 강조를 사로잡아 네 앞에 내보내면 철군할 것”이라고 한 겁니다.
양규 등은 그러나 흥화진 부사 이수화의 명의로 “(황제가) 군사를 돌려 자중해야 고려의 복종을 얻을 것”이라는 답서를 보냅니다. 거란 성종이 재차 “답서를 보니 귀순할 뜻이 없고, 내용도 불성실하며 문장도 겉만 번드르르하다”고 꾸짖었는데요.
이에 고려군은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고려의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라면서 결사항전을 외쳤습니다.
“거란 황제는 ‘고려군이 결코 항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읽고 흥화진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 황제는 20만 대군을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20만 대군은 통주로 진출했다.”(<고려사> ‘열전·양규’)
이 흥화진의 항전은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거란군의 7일 공세에도 끄떡없이 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의 40만 대군 중 절반인 20만명의 발목을 묶어둔 겁니다. 양규 장군은 지켜낸 흥화진을 기반으로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반격작전을 펼침으로써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난 강조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거란군의 다음 목표는 강조가 지키고 있던 통주성이었습니다. 전투는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벌어졌습니다. 강조는 성을 부하들에게 맡겨두고 통주성 남쪽(삼수채)까지 나와 거란군과 싸웠는데요. 처음엔 연전연승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의 총공세에 강조가 사로잡히고 고려군 3만명이 전사했답니다. 강조는 “내 신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고려 사람이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버텼고요. 결국 처형당했죠.
그렇게 강조 군대를 깨뜨린 거란군은 통주성으로 달려가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막아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통주성도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거란은 흥화진에 거짓으로 꾸민 강조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 겁니다.
거란군은 흥화진-통주성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곽주성 공략에 나섭니다(12월 6일).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됐습니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습니다.
그러다 10일 뒤인 12월 6일,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필살의 반격작전에 나섭니다.
흥화진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했고요. 밤중에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성을 공격한 겁니다. 불의의 기습작전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요. 양규 장군은 성안의 백성 7000여명을 구출해 통주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흥화진과 통주성을 사수하고, 빼앗겼던 곽주성마저 탈환하자 거란군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조해진 거란 황제
전쟁이 길어질수록 거란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요사>(병위지)는 “(원래 유목민인 거란은)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철군은 12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농사를 짓는 정주민(고려 등)의 경우 9월부터 추수를 끝내고 곡식을 저장하잖아요. 거란군은 전쟁 기간 중 군량을 현지 조달했거든요.
고려군은 그러나 백성과 곡식을 모두 성안에 들여놓고 결사항전하는 ‘청야술’로 맞섰거든요. 그러니 거란군은 고려 땅에서 조달할 군량미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12월이 지나면 말들을 다시 초원에 방목해야 할 시기가 되죠.
그런데 전쟁이 질질 늘어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란군으로서는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황제가 친정한 전쟁이니만큼 고려 현종의 무릎을 꿇려야 체면이 서는 건데요. 그렇지만 고려가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죠.
■고려의 거짓 입조 약속
고려 현종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흥화진-통주를 지켰고, 곽주도 재탈환하기는 했죠. 거란군의 남진은 계속됐고요. 서경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현종이 거란의 성종을 알현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합니다(<고려사절요>). 하지만 고려 현종이 쉽게 거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죠.
서경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16일간(12월 11~26일) 벌어졌고요. 결국 거란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돌진합니다. 급기야 12월 28일 현종이 개경을 떠나 피란길에 오릅니다. 피란을 권한 이는 예부시랑(정4품) 강감찬이었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있는) 강조가 이미 죽은 만큼 우려할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워낙 강성하므로 일단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고려사절요> 12월 28일)
이것이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나오는 유일한 ‘강감찬’ 기사입니다.
■‘입조했다’치고 철수
이때 고려는 하공진(?~1012)과 고영기(미상)를 거란 진영에 보내 강화를 요청합니다.(12월 30일)
“국왕(현종)이 진실로 와 뵙기를 원했지만 거란 군대의 위세가 너무 강성한 데다… 멀리 강남 지역으로 피란 가셨습니다….”
거란 측이 “고려 국왕이 어디 있냐”고 묻자 하공진은 “왕(현종)이 간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거란 성종은 철수를 허락하면서 하공진 등을 인질로 잡아갔습니다.(<고려사절요> 1011년 1월 3일)
<요사>는 “고려가 ‘요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입조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전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러나 현종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입조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란군이 철군합니다. 정식으로 강화가 성립됐는지도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아요.
하공진 등이 찾아오자 철군의 명분을 찾느라 골몰하던 거란 성종이 ‘옳다구나’ 싶어 덥석 강화를 받아들인 인상이 짙어요. ‘입조했다’고 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해버린 것 같아요.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그렇게 쫓기듯 철군하는 적군을 그냥 보내줬을까요.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정리해보죠.
1월 17일 귀주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1만여 수급을 베었고요.
18일부터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18일 양규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했다. 거란군 수급 2000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000여명을 구했다.”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하며 수급 2500여 급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빼앗았다.”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수급 1000여 급을 베고 남녀 1000여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28일 양규가 애전(의주)에서 거란의 선봉을 공격해서 1000여 급을 베었다. 얼마 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양규와 김숙흥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양규의 활약상을 제대로 정리합니다.
“양규는 후원군도 없는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 달 만에 7번 싸워 거란 군사들을 다수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만여명을 구해냈다”면서 “낙타와 말, 무기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고 전했습니다.
양규·김숙흥 장군이 전사한 뒤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이 그냥 압록강을 건너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반쯤 건너려 할 때 흥화진사 정성(미상)이 공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양규 장군은 한 달 사이 7전 7승의 신화를 이뤄냈고요. 그 휘하인 김숙흥과 정성 등도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거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이역만리 거란 땅에까지 끌려갈 운명이었던 포로 3만명을 구해낸 것은 천고에 빛날 양규 장군의 공적입니다.
■갈 때는 곱게 못 보내준다
또 “올 때는 그냥 왔지만 갈 때는 곱게 못 보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거란군도 그 꼴이 됐습니다. 오죽하면 송나라 사서인 <송사>의 ‘고려전’이 “고려 현종이 기이한 대책을 세워 침략한 거란군을 다 죽였다”고 평가했겠습니까. 황제의 체면에 엄청난 ‘스크래치’가 난 거란 성종은 어찌 됐을까요.
1012년 4월과 7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약속대로 친조하라”(<고려사>)고 재촉하는데요.
현종은 그러나 요즘 말로 “뭐래?”를 외쳤습니다. 고려는 “왕(현종)이 아프다”(<고려사>)고 점잖게 거절하는데요. 그러자 거란 성종은 “그럼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성까지 빼앗아라”고 불같이 화를 내죠. 고려가 그러나 왜 강동 6성을 내주겠습니까.
이번에 2차 고려-거란 전쟁을 다루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습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대부분이 생몰연대조차 알 수 없는 ‘뭇 영웅’으로, 겨우 이름 석 자만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름 석 자라도 남은 분들은 그나마 다행이죠. 이름도 빛도 없이 싸우다 스러진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백성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2)
TV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세간의 화제다. 모처럼 제대로 만든 사극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회를 거듭할수록 뒷심이 딸리는 것 같아 아쉽다는 감상평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고려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지채문·하공진·양규·강민첨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이 재조명된 것도 큰 소득이다. 그런데 이 전쟁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 고려와 거란은 왜 싸웠을까? 당시 고려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전쟁의 이유를 이해해야만 역사적 평가가 가능해진다.
■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거란 패권 넘볼 때 친송 외교 참사, 26년 전쟁 불러
고려·거란 세 차례 전쟁
「 송 치는 데 고려가 위협요소 판단 1차 전쟁 땐 서희 담판 영토 늘어
강감찬 3차 전쟁 대승 거뒀지만 4차 우려, 번국 자청 100년 평화
국제질서 전환기에는 전쟁 빈발 실리 꾀하는 중립 외교 펼쳤어야」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에 시작해서 1019년까지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거란이 침략하고 고려가 방어하는 전쟁이었다. 그럼 거란은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은 강대국도 커다란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상대방의 숨을 끊으려면 자기 팔다리 하나쯤은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현대 전쟁에서도 공자(功者)의 군사력이 방자(防者)의 세 배가 될 때 승률이 겨우 절반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만큼 전쟁을 먼저 일으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침략을 당한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나름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거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국 전쟁은 당대 세계 전쟁의 일부
거란은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시라무룬 강 유역에서 건국했다. 그보다 10년 전 당나라가 멸망하고 동아시아에 패권국이 없는 상태였다. 그 권력의 공백기에 여러 국가·부족들이 패권을 다투었다. 이 분열기를 중국사의 5대·10국 시대(907~960)라고 부른다. 거란의 건국도 이 분열기의 혼란을 틈타 가능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강대국의 기틀을 마련한 후 중원으로 진출했다. 그 사이에 송이 5대·10국을 통일하고 거란과 대립했다.
송과 거란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 싸웠다. 당 멸망 후 자신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여파가 고려에 미쳐왔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동아시아 세계 전쟁의 일부였다. 이 관점에 서야 눈앞의 전쟁보다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주변의 두 강대국이 싸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정해져 있다. 중립을 지키며 실리를 극대화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두 강대국이 서로 자기편에 설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려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망설임 없이 반거란 정책을 폈던 것이다.
태조 25년(942) 거란에서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와 친선의 뜻을 보였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 사신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 매어 굶겨 죽였다. 고려의 이 과격한 조치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고려사』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서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고, 실학자 성호 이익은 거란이 고려의 북진정책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일리가 있지만, 그보다는 거란이 그렇게 강해질 줄 몰랐을 것이란 설명이 더 와닿는다. 송과 거란이 싸우면 면적도 넓고 인구도 훨씬 많고 군사도 훨씬 더 많은 송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거란이 송에 승리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의 예상이 빗나갔다. 986년 송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로 전해에 송의 협공 제안을 거부한 일이 있던 고려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이 결국 빌미가 되었다. 거란이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를 침략했던 것이다. 고려와 송이 손잡을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략으로, 고려 외교의 실패가 부른 전쟁이었다.
곧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먼저 소손녕이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인데 너희가 침범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땅을 떼어 바치고 사신을 보낸다면 무사할 것이다.” 소손녕은 삼국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신라가 백제를 병합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당이 차지했으니 그 영토가 거란 것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고려의 친송 정책을 문제 삼았는데, 실은 이것이 핵심이었다.
서희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바로 옛 고구려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영토 문제를 따진다면 거란의 동경이 우리 땅이 돼야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고 하는가? 또 압록강 안팎이 우리 땅이지만 지금 여진이 그곳에 살면서 길을 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기보다 더 어렵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영토를 돌려준다면 어찌 (거란에) 사신을 보내지 않겠는가?” 역사계승 문제는 국호를 가지고 단박에 제압하고, 고려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조건으로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소손녕은 군대를 돌렸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영토를 얻고, 거란은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 1차 전쟁 후에도 송과 교류
거란은 송과의 전쟁에서 1004년에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이것은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100년 만에 거란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거란에 마지막 남은 숙제가 있었다. 바로 고려였다. 1차 전쟁 이후 고려는 송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고 때로는 군사적 협력을 시도했다. 거란은 고려가 적대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고려로서는 끝까지 송을 이용해서 거란을 견제하려는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거란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고려의 위상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거란은 2차, 3차 침략을 감행했다.
고려 거란 2차 전쟁은 양규와 하공진의 활약으로, 3차 전쟁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고려는 2차 전쟁 후 송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이 전쟁을 고려와 거란의 일대일 구도가 아니라 송·여진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 그림 속에서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의 거부로 공동 전선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단독으로 거란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3차 전쟁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었다. 거란군 10만 명 중 겨우 수천 명이 살아 돌아갔다고 할 정도이니, 고려의 승리, 거란의 패배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국제 질서 대응 따라 전쟁·평화 갈려
그런데 그 승리는 고려에 무엇을 남겼을까? 고려도 수많은 군인이 전사했고, 민간인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전쟁터가 된 국토는 황폐해졌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고려는 전후 복구에 매달려야 했고, 곧 닥쳐올 거란의 4차 침략을 걱정해야 했다. 거란은 힘들여 구축한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고려 침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고려가 단안을 내렸다. 귀주대첩 꼭 1년 뒤인 1020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고, 번국(藩國)을 칭하며,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패권국의 위신을 세워주며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전쟁이 역시 부담스러웠던 거란은 말 그대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고, 이렇게 두 나라의 전쟁은 끝이 났다. 이후 고려는 거란으로부터는 평화를, 송으로부터는 선진 문화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며 12세기 100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자신이 중심이 되는 국제질서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고려가 이 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 속의 전쟁은 대부분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일어났다. 수·당의 고구려 침략, 몽골의 고려 침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다 그랬다. 결국 국제질서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전쟁을 부를 수도, 막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지켜봐야 할 것은 고려가 얼마나 잘 싸웠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넓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면서 실리 외교로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평화를 지켰느냐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2)
KBS HD역사스페셜–천 년 전의 역사전쟁, 고려거란전쟁
https://youtu.be/8Nkf4wxRVGE?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KBS 역사스페셜 – 세기의 전쟁 2편, 강감찬의 귀주대첩
https://youtu.be/dUNKAOREROI?list=PLRAmvpNm4pmkdvoOHrBAtkvZLPWHkMMQs
(1) 7전 7승 ‘고려의 이순신’ 양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선 강감찬도 조연[이기환의 Hi-story](117) (daum.net)2024. 1. 15.
(2)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거란 패권 넘볼 때 친송 외교 참사, 26년 전쟁 불러 (daum.net) 2024. 3. 1.
'고려도경' 서긍은 간첩단 두목이었다…송나라 사신단의 ‘넘버4맨'[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4. 1. 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n분의1', 형제자매 평등상속은 고려 때부터의 전통이었다 - 경향신문 (khan.co.kr)2023.02.28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송 갈등 속…줄다리기 외교·무역으로 성장 | 생글생글 (hankyung.com)2021.11.2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고려시대 개경 8학군 - 경향신문 (khan.co.kr)201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