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대일항쟁기) (23) 1920년 6월 6일~7일 봉오동전투

홍범도 장군은 대표적인 평민 출신 독립군 지휘관으로, 평생을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 친일 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군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민주 공화국 수호를 위해 싸웠던 독립군의 전통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군'은 이와 같은 홍범도 장군의 투쟁 역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던 독립군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기존에 알려진 '의병'이나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싸운 '민주적인 군대'로서의 독립군을 강조하는 것이 영화의 목표다.
■ 尹 정부가 부정한 홍범도 장군, '독립군'으로 바로 세운다[현장EN:]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흔적 지우기 행보를 이어가는 가운데, 광복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영화 '독립군'을 통해 홍범도 장군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광복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된 독립군 제작위원회는 15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광복회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독립군' 제작발표회를 열고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통해 대한민국 무장 독립 투쟁사의 궤적을 조명하고, 오늘날 국군의 정체성을 재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홍범도 장군은 대표적인 평민 출신 독립군 지휘관으로, 평생을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 친일 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군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민주 공화국 수호를 위해 싸웠던 독립군의 전통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군'은 이와 같은 홍범도 장군의 투쟁 역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던 독립군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기존에 알려진 '의병'이나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싸운 '민주적인 군대'로서의 독립군을 강조하는 것이 영화의 목표다.
특히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가 불거진 것은 물론 국가보훈부가 발표한 '이달의 독립운동'에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의 운동이 빠지고 친일파의 행적이 들어가는 등 역사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2대 이사장을 역임했던 우원식 국회의장은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다. 우리 역사의 자부심이고, 우리 국민의 자랑"이라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하는 것도 단지 홍범도 장군 한 분을 기리기 위한 것 아니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했던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역사 한 장면 한 장면이라도 더 발굴해 그분들(독립군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 바로 오늘의 이 자리"라고 짚은 뒤 "홍범도 장군과 동지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떤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고, 어떻게 극복하고 세워졌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을 두고 이념 시비를 일으키는 것과 관련해 3대 이사장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홍범도 장군은 이념을 떠나 독립이란 대의로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승리를 일궈냈다"라며 "좌도 우도 아닌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삶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단순한 다큐도, 특정 정치 성향의 다큐가 아닌 한 인간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극한의 기록이자 순국선열을 기리는 후손들의 헌정"이라며 "홍범도 장군을 아는 사람도 몰랐던 사람도 이 영화를 통해 이 시대 애국과 진정한 삶의 가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일제 치하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의 희망을 심어준 홍범도 장군과 독립 영웅들의 정신이 다시 한번 국민에게 깊이 새겨지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번 영화의 내레이션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단에 참여했던 배우 조진웅이 맡았다.
그는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독립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한 뒤 "많은 분과 함께 홍범도 장군을 기리고 그것이 초석이 되어 도대체 무엇이 기본이고, 무엇을 위해 이 땅을 지켜내야 하는지, 이 땅을 지킨 그분들의 땀과 피와 목숨을 딛고 서 있는 우리가 진실로 잘살고 있는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계기가 되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부끄럽다. 그리고 늦게 모셔 온 것이 죄송스럽다"라며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을 확고하게 지켜나가고 잘 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독립군'은 오는 8월 개봉할 예정이다.(1)
■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봉오동 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을 아시나요

1920년 당시 일본군은 아시아 최강이자 세계 정상급 전력을 자랑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 대열에 진입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당당한 승전국 지위를 얻어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1920년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최진동·홍범도·김좌진 등이 이끄는 대한민국 독립군 부대에 연패하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립군 승리의 요인으로는 부대들의 연합과 매복작전, 일본군의 자만심, 한인 동포 주민들의 지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독립군이 구한말 의병 수준이었다면 승리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몇 달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체코군단이 쓰던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해 정규군 못지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은 독립군 주력인 북로독군부 부대원들의 군복을 이렇게 기록했다. "병사들의 복장은 상하가 황색이고 모자 또한 같은 황색으로 태극 견장을 달았다. 예복에는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달고 헌병대는 오른쪽에 검은색 흉장을 달았다. 장교들은 모자와 견장에 금줄을 넣었다." 부대 편제와 장병들의 복식도 정규군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회영 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 양성의 요람 구실을 하며 청산리 대첩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독립군의 무장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주역이 만주 최고의 거부로 꼽히던 최운산 장군이었다는 증언과 연구 결과가 몇 해 전부터 속속 나오고 있다.
최운산은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1885년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중국군에 입대했고 장쭤린(張作霖) 군벌에서 공을 세워 토지조사사업 때 엄청난 땅을 불하받았다. 성냥·비누·국수·콩기름 등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는가 하면 축산업과 무역업에도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912년 최운산은 자위대를 구성했는데, 숫자가 점점 불어나 1915년에는 봉오동에 막사를 짓고 연병장을 닦아 부대원들을 훈련했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군무도독부란 이름의 독립군으로 재창설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병참을 책임지고 최진동과 최치흥은 각각 사령관과 참모를 맡았다. 이듬해에는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최운산은 1920년 5월 독립군 부대 통합의 산파역으로 나섰다. 북로군정서·대한국민회·군무도독부·대한신민단·광복단·의군부 6개 단체 대표는 봉오동에서 연석회의를 열었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사령관 격인 부장(府長)에는 최진동이 추대됐고 안무가 부관(副官)이 됐다. 홍범도는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에 임명됐다.

부대 운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의 보급은 모두 최운산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는 땅을 팔아 요즘 가치로 따지면 150억 원에 이르는 5만 원의 군자금을 마련했다. 1차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내전에 휘말린 체코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팔아 귀환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최운산의 자금력과 러시아 네트워크 덕분에 독립군이 이를 사들일 수 있었다.
1920년 들어 독립군들은 산발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그때마다 일본군은 추격전을 펼쳐 애꿎은 양민을 학살하는 일이 반복됐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박승길이 이끄는 신민단 부대 30여 명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급습하자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삼둔자까지 들어와 양민들을 살육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북로독군부는 산기슭에 잠복해 있다가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봉오동 전투의 서전을 장식한 삼둔자 전투였다. 이번에는 함북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6월 6일 밤 국경을 넘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왔다. 독립군은 유인작전과 매복작전을 적절히 구사하며 대승을 거뒀다. 임정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157명이 숨지고 300여 명이 부상한 반면 독립군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에 그쳤다.
청산리·대전자령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북로독군부가 일본군 부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고 독립군 부대 연합에 대한 열망과 기대도 높아졌다. 이는 그해 10월 항일투쟁 사상 최대의 승전보로 꼽히는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봉오동에 독립군 진지를 구축하고 독립군 부대 통합을 끌어내 승리의 기틀을 만든 최운산의 공로는 100년 가까이 묻혀왔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최진동의 동생으로 군자금 5만 원을 지원하고 이들 3형제가 합심해 도독부 및 독군부를 조직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히 기재돼 있다.
1945년 순국한 지 32년 만인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가 1990년 건국훈장 5등급에 해당하는 애족장으로 격상됐다. 최진동은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으나 최치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다가 국내로 귀환한 후손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씨 등의 노력으로 2016년 7월 4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최용규)가 결성돼 회원들이 해마다 학술 세미나를 열고 봉오동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된 제4회 세미나에서 이계형 국민대박물관 특임교수는 "국가보훈처가 2008년 최문무에게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그는 최운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지적했으며,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쓰인 독립군 무기와 당시 각국의 무기 체계를 소개했다.

최 장군의 순국일인 7월 5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는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100주년 최운산 장군 순국 74주기 추도식'이 열린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추도식을 올리는 것은 올해가 두 번째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는 해다. 그의 업적이 더 발굴되고 널리 알려져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처럼 최운산도 '만주 독립군의 대부'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민족센터 고문)(2)
■ 지휘관은 누구였나, 알고 보니 더 중요한 봉오동 전투
오마이뉴스 김경준기자 2024. 3. 1. 11:12
작년 여름 육군사관학교의 갑작스러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건국절 논란, 박근혜 정부 당시의 국정교과서 논란에 이은 세 번째 '역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전국 역사학도 서명운동·대통령실 앞 1인 시위·전통활쏘기대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에 저항했다(관련기사: 육군사관학교와 윤 대통령 때문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https://omn.kr/26vsz).
독립운동사 전공자로서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왜곡과 모욕은 내 공부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선양으로 맞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번에 그 첫 번째 결실을 이루게 됐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북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진동 장군(1883~1941)에 관한 학술논문이 나온 것이다.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이유
먼저 내가 최진동 장군에 주목한 까닭을 소개하고자 한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의 해' 선포 후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로 평가받는 '봉오동 전투'는 대한북로독군부 및 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에 산재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리고 최진동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끈 전투'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는 듯하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도 홍범도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하면서 전투를 홍범도 홀로 지휘한 것처럼 묘사된 바 있다.
사실 봉오동 전투 당시의 활약뿐만 아니라 최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홍범도에 비해 대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도 봉오동 전투 및 홍범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꾸준히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최진동에 관한 연구는 저조한 편이다.
다행히도 독립운동사·군사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최진동에 관한 연구가 너무 저조했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최진동에 관한 학술연구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나의 논문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이하 내용들은 본 논문의 일부를 요약·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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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 |
ⓒ 반병률 |
1920년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두만강 일대 국경 부근에서는 최진동의 사병 조직이었던 '대한군무도독부'가 주축이 되어 산발적인 교전이 이뤄졌다.
1920년 3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는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군사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로 침입하여 일본 경찰·군대와 교전을 치렀다(온성 작전).
비상이 걸린 일제는 온성 작전 당시 침투한 독립군의 수령이 최진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 일대에 대한 토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진동 부대의 온성 작전이 봉오동 전투를 이끌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일제의 움직임에 독립군들도 비상이 걸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봉오동 일대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모여있었는데, 일제와의 전면전에 대비하여 단일한 지휘체계에 대한 확립을 꾀하게 된다. 그 결과 1920년 5월 19일 군무도독부·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연합으로 최진동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가 성립됐다.
이어 합류한 홍범도 부대는 북로독군부 산하 북로정일제1군사령부(사령부장 홍범도)라는 조직으로 개편된다. 홍범도 부대는 명목상 북로독군부 아래 편제됐으나 일종의 '외번(外藩)'격으로서 지휘명령권이 북로독군부장이나 국민회장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독립군 연합이 성사된 직후인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 연합은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최진동 역시 북로독군부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직할 부대를 이끌고 한 고지를 맡아 전투를 수행했다. 그렇게 독립군 연합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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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3~6월 두만강 국경 근처에서 전개된 최진동 부대의 전투도. 일제가 당시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 위에 해당 전투 지역 위치를 표시했다. |
ⓒ 김경준 |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관은 누구였나
그런데 최근 학계 일각에서 '봉오동 전투 당시 실질적 지휘관이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기존 연구자들은 대체로 홍범도가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 '홍범도 단독지휘설'(박민영), 지휘권은 홍범도와 최진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보는 '홍범도·최진동 공동지휘설'(반병률) 등으로 설명해 왔다.
그런데 '사령관' 최진동이 전투를 지휘했고 홍범도는 휘하의 '연대장'에 불과했다는 1920년 12월 25일 자 <독립신문> 기사를 근거로 전투를 총지휘한 주체는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이라는 직책은 임시정부가 구상했던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편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제 이러한 편제로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홍범도는 편제상 북로독군부 산하에 편입되어 있긴 했으나 외번격으로 그 어디에도 명령권이 속하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신민단 사령관 박승길의 회고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직전 홍범도와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 단체들에 작전태세와 대기명령을 발했다 한다. 그런데 정작 신민단 군사들은 전투 도중 홍범도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 "우리는 다른 데서 온 군인들이다"라며 거부했다.
여러 사료와 증언을 종합해 봤을 때, 봉오동 전투 당시 지휘권은 최진동과 홍범도만 행사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의 지휘관들 각자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음을 추측게 한다.
이러한 결론이 최진동과 홍범도 두 사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걸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누가 총지휘관이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지휘체계가 불완전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기습해오자 하나가 되어 싸웠고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봉오동 전투 승리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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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미상의 최진동 장군 사진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최진동장군>에 수록) |
홍범도·최진동, 그들을 잊지 말아야
본 연구에서는 1920년 당시 북간도 지역 독립군이 얼마나 열악한 현실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룩했는지 다시 한번 조명했다.
다만 '1920년 북간도 지역'이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매우 한정된 범위만을 살펴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봉오동 전투 승리 후 최진동은 일본군의 간도 침공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1920년 이후 최진동의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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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동 장군 묘(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251번 묘). 2024년 2월 16일 장군의 묘역에 논문을 헌정하며 술 한 잔 부어올렸다. 이날 올린 술은 최진동의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의 주민들이 빚어마시던 '농태기'라는 술이다. |
ⓒ 김경준 |
여러모로 부실한 논문이기에 세상에 소개하기가 많이 민망하다. 그럼에도 굳이 부족한 논문을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최진동이라는 독립운동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윤석열 정권의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본 논문이 일반 시민들에게 홍범도 장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홍범도 흉상 철거 반대 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드러내 본다.(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115134804919
(2) https://v.daum.net/v/20190704090010616
(3) 지휘관은 누구였나, 알고 보니 더 중요한 봉오동 전투
<참고자료>
https://namu.wiki/w/%EB%B4%89%EC%98%A4%EB%8F%99%20%EC%A0%84%ED%88%AC
정철훈의 [월담] 비화 '홍범도 일지'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9.11.08
봉오동 전투의 영웅, 역사 논쟁의 중심에 서다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