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조선

1. 조선 (8) 19대 숙종(1674년~1720년), 21대 영조(1724년~1776년), 22대 정조(1776년~1800년)

대야발 2024. 5. 30. 10:2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부인, 신하, 백성을 이렇게 죽게 한 임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정 2020.06.05 11:29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 원래 기소로는 ‘정2품 이상의 문관에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태조(이성계)께서도 60에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이유를 대며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다. 이 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뒤 제작한 화첩이다. 1720년 완성됐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숙종대왕 호시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조 숙종의 서거 300주년을 맞아 6월28일까지 개최하는 테마 특별전의 제목이다. ‘호시절(好時節)’은 말 그대로 ‘좋은 때’이므로 숙종의 치세가 그만큼 편안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영조(52년·1724~1776년)에 이어 두번째로 긴 만 46년(재위 1674~1720) 조선을 다스린 군주다. 숙종은 특별전에서 소개하듯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대동법, 백두산정계비, 상평통보…

숙종은 새롭게 개발된 농토 등 변화상을 반영하는 토지대장을 작성해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또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의 범위를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넓혔다. 대동법은 국가에 납부할 세금을 쌀(혹은 무명이나 면포)로 통일한 제도다. 대동법에 따라 쌀로 일괄 납부하다보니 국가는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사들였고, 그에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 보다 편리한 유통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고, 1678년(숙종 4년) 상평통보를 찍어냈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1712년·숙종 38년)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한 것도 특기할만 하다. 또 울릉도를 조선의 실질적인 영토 관리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숙종대에 설정된 국토경계는 지금까지도 강역의 기본틀이 됐다.

 

그러한 점을 평가한 것일까. 이번 테마전에서는 태조를 ‘창업의 군주’로, 숙종을 ‘중흥의 군주’로 꼽았다. 전란(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조선 후기 중흥의 시대를 연 임금이라는 것이다.

 

 

제갈량을 그린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숙종은 1695년 중국의 명재상 제갈량(184~234)을 주제로한 ‘제갈무후도’를 그릴 것을 지시한 뒤 이 그림에 직접 글을 지었다. 숙종은 이 글에서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현신과 명군의 만남으로 묘사하면서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독려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0만명이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숙종은 과연 중흥군주였으며, 숙종이 지배한 조선의 46년이 ‘호시절’이었을까. 필자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소빙하기는 17세기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71년)에 이어 숙종 연간인 1695(을해년)~1696년(병자년) 사이에 덮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699년 전국의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141만 6274명이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배가 고파 인육까지 먹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됐다.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경기 광주의 백성 수백명이 점거폭력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 백성들이 대궐 앞서 관리들의 출근을 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다…수어사(남한산성을 지키는 관리) 이세화(1630~1701)의 집에서 밤샘 점거농성을 벌이며 군관을 집단구타하고….”(<숙종실록>)

 

1712년 숙종의 명에 따라 축성된 북한산성을 그린 ‘북한지’(1745년). 수도방위를 위해 도성 인근에 쌓은 성이다. 천혜의 요새라는 명성에 걸맞게 북한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요승 여환, 장길산, 검계, 명화적까지

 

요승 여환과 장길산, 명화적(떼강도), 검계(폭력조직)이 나타났거나 극성을 부린 것도 숙종 때였다.

 

요사스러온 자(여환)가 자칭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徒黨)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숙종실록> 1688년 8월1일)

 

여환에 퍼뜨렸다는 괴서에는 “9~10월 쯤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장길산이라는 도적이 중국인 승려 무리와 결탁해서 조선과 중국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횡행했다.

 

“운부라는 중국인 중이 장길산의 무리와 결탁해서…조선과 중국을 평정하여 정씨 성(조선)과 최씨 성(중국으로 왕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숙종실록> 1697년)

 

폭력조직인 검계가 들끓었고, 그들 가운데는 포도청 수감 중 칼로 가슴을 베는 등 자해공갈의 패악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숙종실록> 1684년) 지금의 떼강도 격인 명화적 때문에 “장사꾼의 발길조차 끊어졌다”(<숙종실록> 1703년)고 토로하는 기사도 여럿 등장한다.

 

특별전에서 ‘숙종의 치적’으로 지목한 북한산성 축조도 달리 봐야 한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년) 4월 북한산성 수축 후 “이제 도적과 비도(匪徒)가 감히 다가올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여기서 ‘도적’과 ‘비도’라는 표현이 심상치 않다. ‘외부의 적’ 보다는 ‘내부의 적’을 근심한 나머지 북한산성을 축조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도그럴 것이 당시 외침(外侵)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의 치세가 안정적이었고, 조선과도 우호관계도 유지했다. 그런 정세를 반영해서 1702년(숙종 28년) 좌의정 이세백(1635~1703)은 “지금 남북에 근심이 없지만 도적이 치성하고 있으며, 천재가 심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다”(<비변사등록>)고 언급했다.

 

이상이변과 전염병, 사람고기까지 먹어야 했던 굶주림, 점거 농성 폭력 시위, 폭력조직인 검계와 떼강도인 명화적, 그리고 장길산까지…. 단 4년 만(1695~99년)에 무려 140만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주조한 상평통보. 늘 똑같은 가치를 지니라는 뜻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이름 붙였다.

 

 

■3번의 친위쿠데타…죽어나간 관리·선비들

 

그렇다면 숙종의 정치술은 어떨까.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이것은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현종비·1642~1683)가 중전(인현왕후·1667~1701)에게 귀띔해준 아들의 들쭉날쭉한 성격이다. 과연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걸핏하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3번이나 정권을 바꿨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1680년 경신환국(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1689년 기사환국(희빈 장씨의 중전 책봉과 남인정권 재등장)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 등…. 이 3번의 친위쿠데타, 즉 ‘환국’ 정치를 두고 혹자는 숙종의 노련한 정치전략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말마따나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분출되는’ 죽끓는듯한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자·정치인·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는가. 과연 이 시대를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명문화하면서 세운 백두산정계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놓고 부인 흉 본 못된 남편

 

그 뿐인가. 못된 남편(숙종) 때문에 부인들이 줄줄이 핍박 당했다. 남편 때문에 먼저 피눈물을 흘린 이는 인현왕후와 귀인 김씨(영빈 김씨·1669~1735)이다. 만 14살의 나이로 숙종의 두번째 정부인이 된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서인 민유중(1630~1687)의 딸이었다. 자연히 서인 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인 숙종이 궁인 장옥정(희빈 장씨·1659~1701)와 사이에 아들을 낳자 상황이 급변했다. 9년간 계속된 서인정권에 슬슬 염증을 느낀 차에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씨가 귀한 왕자를 생산했으니 시쳇말로 눈이 뒤집힌 것이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 새해 벽두부터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혈안이 됐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은 “정비(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서 적자를 계승자로 삼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때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 무렵 숙종은 군주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대놓고 부인을 흉본 것이다.

 

“희빈(장씨)이 처음 숙원(내명부 종4품)이 되자…중전(인현왕후)이 나에게 꿈 이야기를 말했다네.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뵈었는데…두 분이 ‘숙원(장씨)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궁중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경신년(1680년 경신환국) 뒤에 뜻을 잃은 사람(남인)들과 결탁해서 망측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 했다는군.”(<숙종실록> 1689년 4월21일)

 

 

숙종은 이어 “중전이 질투하는 마음에 나를 공갈하니…그 간교하고 앙큼함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서인 정권을 쫓아내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되찾은 남인계 신하들마저 숙종의 ‘부인 험담’에는 반기를 들었다. “부부의 불화를 자식같은 신하들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지 10년이 되도록 무슨 실덕(失德) 있었기에 이런 하교(험담)를 내리시느냐”는 것이었다.

 

1667년(현종 8년) 숙종을 왕세자로 임명할 때 제작한 옥인과 죽책, 죽책을 담은 함이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서 임금이 됐다. 숙종은 조선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7명 중 한사람이다. 숙종은 이러한 완전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철권을 휘둘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버선발로 쫓겨난 부인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가까운 귀인 김씨(서인 김수항의 종손녀·1690~1735)마저 ‘험담의 도마’에 올렸다.

 

“아 글쎄. 내가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놓아두었는데, 귀인이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들켰다네.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귀인이 ‘버리는 휴지인줄 알았다’고 변명하더라구.”

 

숙종은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며 국가에 반드시 화난이 있을 것”이라고 침소봉대했다. 숙종은 일사천리로 중전의 폐위절차를 진행했다. 4월22일 중전과 친한 귀인 김씨를 우선 폐출시켰다. 마침 23일인 중전(인현왕후)의 탄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중궁전에 들어온 생일선물까지 “내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국모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페출 전교를 내렸다. 3일 뒤인 26일에는 날마다 중전에게 들이던 음식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굶으라는 얘기였다. 뭐 이런 박정한 남편이 있단 말인가.

 

1689년(숙종 14년) 5월4일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났다. 민씨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 유생 수백 명이 길 아래에 엎드려 통곡했다. 중전 민씨의 폐출 장면을 생생한 필치로 소개한 <인현왕후전>은 “상감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흰 명주보로 덮은 보통의 가마가 서둘러 내전에 들어갔는데, 왕후께서 벌써 내려와 걸어왔다”고 기록했다.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버선발로 부인을 내쫓은 못된 남편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폐위교서에서 “왕비 민씨는 원래 화순한 성품이 부족하고 조신한 덕이 적었다”면서 “책봉되던 때부터 조심하고 삼가지 않았고, 질투하는 허물이 많았다”고 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결정한 뒤 지은 시와 이듬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완성된 성곽을 둘러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북한산성은 숙종이 구상한 도성중심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남편 탓에 평생 속이 문드러진 인현왕후

 

폐비 민씨의 생활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1690년(숙종 16년) 9월 정언 송정규(1656~1710)는 상소문에서 폐서인이 되어 쫓겨난 인현왕후의 불쌍한 하루하루를 고발한다.

 

“폐비가 집으로 돌아간 뒤로 친척과 이웃에서도 감히 문안하고 왕래하지 못합니다. 문을 잠가서 뜰에 풀이 가득하고 적막하며 양식과 땔나무가 군색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숙종실록>)

 

남인 정권의 실세들조차 “민씨를 별궁에 모시고, 달마다 녹봉 형식의 쌀을 주면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이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못된 남편의 면모가 다시 유감없이 발휘된다.

 

처음엔 “그러자”고 허락했다가 곧 그 명을 취소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되겠다. 죄악이 가득차서 폐출한 지 반 년도 안되는 폐비를 대우했다가는 뜻을 잃은 무리(서인)가…‘옳다구나’ 하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숙종실록> 1689년 9월24일, 10월18일)

 

이 정도로 박정한 남편이었으니 인현왕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현왕후는 폐위 5년 만인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의 꿈을 이뤘지만, 변덕스런 남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을 쉬이 풀지 않았다. 그해 4월9일 숙종은 폐출된 중궁(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며 별궁으로 모시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숙종은 자신의 어찰을 인현왕후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죄인이 어찌 외부 사람을 만나 어찰을 받겠느냐” “죄를 지은 아내가 답장을 올릴 수 없다”면서 거듭 복위를 사양했다. 인현왕후가 고집을 꺾고 대궐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할 때도 “죄인이 무슨 낯으로 전하를 뵙겠느냐”고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숙종이 친히 가마문을 열어 주렴을 걷은 뒤에야 왕후가 내려왔다. 왕후의 예절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달리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감과 복수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복위된지 7년 만에 승하하고 만다. <숙종실록>은 숙종의 말을 빌어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탓에 죽었다는 뉘앙스로 기록한다.

 

하지만 과연 희빈 장씨의 책임이 100%일까. <승정원 일기>등에 따르면 승하한 인현왕후의 병명은 옹저였다. <동의보감>은 “기가 막혀 생기는 옹저는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생기는 병”이라 풀이했다.

 

돌이켜보면 만 14살에 왕비가 된 이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22살에 폐위됐으며 27살에 복위된 이후 불과 7년을 더 살았다. 궁궐로 들어온 14살 이후 20년 내내 느꼈을 불안감, 분노, 억울함 등이 겹쳐 발병했고, 그 때문에 승하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춘도첩’, 태조가 타던 말 여덟 마리를 그린 그림과 관련된 글을 모아 엮은 화첩이다. 숙종은 세종 대 안견이 그린 팔준도가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그리게 하고, 직접 글을 지어 태조의 업적을 되새겼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반대파들까지 “너무하십니다” 동정

 

그렇다면 희빈 장씨의 삶은 어떨까. 장씨는 인현왕후가 쫓겨난지 불과 4일만인 1689년(숙종 15년) 5월6일 꿈에 그리던 중전이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 즉 새로운 중전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5년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1693년(숙종 19년) 숙원 최씨(훗날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책봉된 것이다. 숙종의 마음은 이제 최씨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694년(숙종 20년) 3월29일 숙종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을 듣게 된다.(<숙종실록>)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복관시킨다. 이것이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도 급전직하한다. 고변 사건(3월29일) 이후 10여 일이 지난 4월12일 사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아무리 임금이 제멋대로 하는 지존이라지만 5년 전 본부인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서둘러 중전으로 올린 여인을 불과 5년 만에 다시 내쫓다니….

 

“왕비 민씨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녔다.”(<숙종실록> 1694년 6월1일)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숙종의 반성문을 보면 기가 찬 노릇이다. 언제는 ‘부덕하고 질투심이 많은 칠거지악의 여인’이라며 쫓아냈다가 이제와서는 ‘예법을 잘 지키고 아름다움을 지닌 왕비’라고 치켜세우다니….

 

여기서 다시 숙종의 못된 버릇이 또 나온다. 5년전 인현왕후를 험담하던 숙종이 이번에는 희빈 장씨를 천하의 몹쓸 여자로 폄훼한 것이다. 1701년(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그러자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 중 대부분의 대소신료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결정한 뒤) 끝없는 후회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의 처분도 순간적으로 격분한 감정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세자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역대 국왕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 중 숙종의 어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희빈 장씨의 일갈, “정치 똑바로 하세요.”

 

그러자 숙종의 못된 버릇이 나온다. 이번에는 희빈 장씨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 사람(장씨)은 (희빈으로 강등된 후) 한번도 중전(인현왕후)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았다네. 왕후에게 혹은 ‘민씨(閔氏)’, 혹은 ‘민가(閔哥)’, 혹은 ‘요사스런 사람’으로 일컫기도 했네.”

 

신료들은 “그렇다고 이런 깊은 밤중에 ‘종이 한 장’(비망기)으로 세자의 어머니(희반 장씨)를 죽이려 하느냐”고 ‘워~워~’를 당부했다. 그러나 숙종은 “그 뿐이냐.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으로) 신당(神堂)을 대궐 안팎에 몰래 설치하고 흉악한 물건들을 묻고는 2월부터 기도했다”고 험담을 이어간다.

 

어찌 그렇게 5년전 인현왕후의 폐출 때와 똑같은 장면이란 말인가. 그런데 인현왕후는 폐서인으로 끝났지만 희빈 장씨는 끝내 자진하고 만다. 인현왕후의 일대기인 <인현왕후전>을 보면 사약을 내동댕이 친 희빈 장씨에게 전 남편(숙종)의 한마디는 모질기 이를데 없었다.

 

“네 얼굴을 보기가 더러워 약을 보내니…. 이 약은 네게는 상인줄 알고….”

 

그러면서 숙종은 희빈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되는 사약을 들어부었다. 숙종은 본부인마저 버선발로 쫓아내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새 부인(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면서 이렇게 재촉했다.

 

“빨리 먹이라!”

 

희빈 장씨의 마지막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전하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인현왕후전>의 필자는 “장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불쌍한 감정을 갖게됐지만 주상(숙종)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 아닌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숙빈 최씨와 귀인 김씨

따지고보면 어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뿐인가.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됐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된 귀인 김씨(훗날 영빈 김씨) 역시 더는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전 숙종에게 ‘내가 죽거든 희빈 장씨를 복위시키지 말고 귀인 김씨를 왕비로 세우라’는 청을 올렸다”고 전한다.

 

숙종의 총애를 얻어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 역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숙종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여인들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실 문헌자료와 역사서의 한 부분만 보고 전체 역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마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전체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측면이라면 숙종 치세의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 확대실시와 백두산정계비 등과 같은 숙종의 업적은 당연히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각종 문헌자료와 <숙종실록>에서 정리되지 않은 당대의 생생한 이야기들도 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쯤에서 다시한번 묻고싶다. 숙종은 조선의 중흥군주인가, 숙종의 치세는 호시절이었는가.(1)

 

 

 

 

■ 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기자 2023. 12. 25. 08:00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손자 정조(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에 쓴 영조의 어제시(아래 그림).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정조의 장서인 중 ‘탕탕평평평탕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은 사력을 다해 탕평책을 썼던 정조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너의 소임이거늘(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하여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는 내용입니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짓고 있습니다.

전시기획자는 “영조가 탕평을 반대하는 무리에게 ‘주제를 모르고 나서지 말고 네 본분을 지키라’고 비판했다”고 해석했어요. 이것이 혹시 아전인수의 해석이 아닐까요. 마침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다룬 논문이 있네요.

삽살개는 원래 래원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영조의 ‘어제시’가 유명하지만 그림 또한 생동감 넘친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영조는 ‘계해(1743년) 6월 초하루 다음날(2일)’ 김두량의 그림에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보면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 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이 보입니다. 김두량의 <고사몽룡도>에는 “먹을 쓰는 법이 기고(奇古·기이하고 고아)하여…주상(영조)께서 ‘남리’라는 호를 하사했다”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발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영조의 사랑을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러한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보면 참 생동감 넘치게도 그렸습니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얼마나 사납게 짖어댑니까.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같은 김두량의 ‘흑구도’에 표현된 개는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습니다. 노곤한 모습이죠.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품에도 ‘삽살개’처럼 사납개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김두량에게 ‘짖는 개 좀 그려’하고 명하고는 ‘(신하의) 본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붕당의 다툼’을 꼬집었다는 해석이 나온 겁니다.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탕탕평평평평탕탕’ 등을 새긴 정조의 ‘장서인’을 봅시다.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여러가지 인장(장서인)을 찍은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이면서 정조의 별호이기도 한 ‘홍재(弘齋)’가 우선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거죠.

 

 

김두량의 또다른 개그림인 ‘검은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모든 장서인 중 ‘고갱이’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이 장서인을 얼핏보면 아무리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탕탕평평평평탕탕’이라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죠. 그런데 서화연구자가 단번에 알려주더라구요.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을 보라”는 겁니다.

그 ‘〃(땡땡)’이 반복부호라는 겁니다. 아! 그렇게 해서 읽으니까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얼마나 ‘탕평’을 갈구했으면 이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침전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개그림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암의 ‘모견도’ 등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개가 사납게 짖는 모습은 좀체 표현되지 않았다.

 

 

 

■약을 조제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홍범’은 ‘홍범구주’의 준말이고요. 하나라 우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한 ‘9개 조목(九疇·구주)의 큰 법(洪範·홍범)’을 가리킵니다. 그중 5번째 조목인 ‘황극(皇極)’에 ‘탕탕평평’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17세기 후반 소론의 영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황극의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같이 크고…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4일)

 

 

정조의 ‘장서인’ 중에는 ‘만기(萬機)’가 많다. ‘만기’는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는데서 유래됐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나왔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결국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왕권 강화’의 방편이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다른 정파의 ‘쓸만한 인물도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조제하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이것은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되어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다.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종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연루?

영조의 탕평책을 보죠.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그와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서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21·24일)

왕세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요. 겨우 왕대비인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무려 20만명이 반란에 가담했는데요.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정조는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 현판을 걸어두었다.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써서 창문 위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소통방안을 마련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책의 편찬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를 평정한 내용을 담은 <감란록>이 눈길을 끄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박았습니다. 영조는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18일자) 신하가 임금 후보자를 미는 형세이니 패배자측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영조는 경종 승하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강력 부인하고 당신의 입장을 밝힌 <어제대훈>을 펴냅니다. 영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여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이어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

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영조는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를 설득으로, 힘으로 해결한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을 이뤄나가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를 담았습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탕평비)이라고 했죠.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승정원일기> 1764년 5월14일)고 재차 훈계했습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 이복형인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있었다. 와병중인 경종에게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함께 올리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 먹어서는 안되는 인삼과 부자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펼쳐갑니다.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1785년(정조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도목정사(都目政事)’는 해마다 2~4차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일종의 인사위원회입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하고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힌다. 또 ‘게장 사건’과 관련해서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림을 보면 ‘인사위’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절대 당색에 빠져 공정한 마음을 잃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이번 특별전에서 정조는 즉위 300주년을 맞이한 영조에 주연자리를 비워주고 ‘주조연’으로 내려 앉아야겠죠.

그래도 신하들과 격의없이 주고받은 편지정치와 관련해서는 그냥 넘길 수가 없겠습니다.

정조가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눈에 띄는데요. 심환지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의 죽임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노론 벽파의 영수였죠. 그래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2009년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주고받는 내밀한 편지가 공개되었답니다. 이 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그중 1798년(정조 22) 1월11일 밤에 보낸 편지를 볼까요.

 

 

 

1785년(정조9) 12월 정조는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인사위원회(도목정사) 에 직접 참여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엎드려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명분을 삼는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

정조의 편지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고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임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정조가 69세의 노정승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47세의 정조가 69세의 노재상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왜 입조심 하지 않으냐.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는 등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이번 특별전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정조는 신하들을 두고 ‘주둥아리’니 ‘호로자식’이니 하는 막말로 호칭하는 등 신하들을 완전히 틀어잡았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보다 15년전인 1755년(영조 31) 영조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걸리거나(나주 벽서사건), 그런 내용을 답안지로 제출한(과거시험장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요. 영조는 ‘이인좌의 잔적’이라면서 소론 500여명을 소탕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영·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과 준천(하천 준설사업)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또한 물 흐름이 자주 막혀 범람하기 일쑤였던 도성내 하천의 준설공사도 펼쳤다. |국립중앙박물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뜻은 이뤄진다”

그렇다고 ‘탕탕평평’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권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 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이었습니다. 1751년(영조 27) 양인(16~60세)이 군복무 대신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준 겁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줬죠.

 

 

 

영조는 준설공사 후 제작한 <준천첩>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를 써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정비된 지 오래되어 물 흐름이 막히거나 넘치는 일이 번번했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차례 현장지도에 나선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 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가 담여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월드컵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영조가 <시경>과 <서경>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 그림’.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된다(유석암암)”는 것과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외민암)”는 의미가 담겨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석암암(維石巖巖)은 <시경>에 실려있다네(詩經攸載)’, ‘고외민암(顧畏民巖)은 <서경>의 훈계라네(書傳訓戒)’라는 글귀를 담은 그림인데요. ‘유석암암’은 <시경> ‘절남산’, ‘고외민암’은 <서경> ‘소고’의 구절입니다. 요컨대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되네.(유석암암)”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고외민암)”

영·정조의 ‘탕탕평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말아야 할 것 같아요.

 

(이 기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경 학예연구관·허문행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근호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정은 국립해양박물관 선임학예사가 자문을 해주었습니다.)(2)

<참고자료>

이수경·허문행·명세라·이현숙,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근호,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2016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2

김영진·박철상·백승호,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이정은, ‘영조 어제로 본 김두량 삽살개 연구’, <문물연구> 30권 30호,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16

백승호·장유승·박철상·진재교·안대회·이상하·김문식·임형택, <정조어찰집>, 성균관대 출판부, 2009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등록 2009-07-08 15:04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

조선사편수회 거쳐 사학계 주류로‘상공업 중심 개혁론=노론’ 왜곡 등조작된 국사교과서 바로잡을 필요

 

서인은 국왕 축출의 명분이 필요하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진정한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쿠데타가 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논리였다. 서인들은 인조반정 때 체제 내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남인들에게 뜻밖에도 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도륙했다. 죄 없는 남인들을 역모로 꾀어 죽인 정치공작에 반발한 서인 소장파가 소론이 되고, 당을 위한 행위라고 옹호한 서인 노장파가 노론이 된다.

 

노론은 경종 때 소론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던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 멸망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 노론 일부 세력은 외세에 맞서 성리학 사회를 수호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에 가담했지만 다른 일부는 일제에 협력해 망국에 가담했다. 이런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이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에도 한국 사학계 주류가 됨으로써 국민들은 여러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다.

 

 

탑골(파고다)공원 전경. 조선 후기 이 일대에는 백탑파라 불렸던 박지원 이덕무 등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노론 뿌리 이이 ‘십만양병설’은 허구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현재 국민적 상식 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현재도 일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대관>에서 “양병십만론의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金長生) 소찬(所撰)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설령 그의 만년의 일이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연월이 미상한데’ 어떻게 ‘임란 전 10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의 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임란 10년 전인 선조 16년 4월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이이는 선조 16년 2월 “양민(養民)을 하지 않고서 양병(養兵)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창할 수는 없었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김장생은 또 ‘정철 행록’에서 정여립의 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委官: 수사책임자)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정철이 유성룡에게 왜 노모와 아이까지 죽였느냐’고 따졌다고까지 적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형벌을 받은 날짜는 선조 23년(1590) 5월 13일인데, 유성룡은 그해 4월부터 휴가를 얻어 안동에 내려갔다가 5월 20일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를 군위에 장사지내고, 5월 29일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6월에 서울로 올라와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을 때 유성룡은 서울에 있지도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은 인물은 유성룡이 아니라 정철이었다.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은 정여립의 옥사 자체를 서인 정철 등이 동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실제 그랬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주제지만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아 수많은 동인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김장생은 정여립 사건으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죽은 데 대한 비난 여론을 유성룡에게 전가하기 위해 사실을 날조했던 것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103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필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년) 등의 저서는 차치하고라도 송시열이 효종의 정적이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너무나 많다.

 

효종 8년(1657) 올린 <봉사>(封事)에서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라고 효종의 치세를 전면 부인한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송준길은 사사건건 효종의 발목을 잡았던 효종의 정적이었음에도 국사 교과서는 효종의 충신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이 현종 말~숙종 초의 2차 예송논쟁으로 실각하자 사방에서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란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횡행하자 예송논쟁 때 그와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의 사형을 반대했다.

 

그러나 허목은 이 차자에서 송시열을 중종 때 사형당한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비교하면서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며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뒤늦게 형량을 가중해 사형시키는 것은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효종의 ‘정적’ 송시열 충신 탈바꿈

 

국사 교과서는 또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주창자들에 대해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며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고 서술했다. 이 기술에 따르면 유수원은 노론 출신이 되지만 유수원은 노론은 커녕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노론에 의해 능지처참 당하고 온 집안이 도륙난 인물을 노론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이 국사 교과서 서술 구조이다. 남인들이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주창한 데 맞서 ‘상공업 중심 개혁론’은 노론이 주창한 것으로 둔갑시키려 한 노론 후예 학자들의 조작이었다.

 

청나라를 배우자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노론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었다. 그 주창자인 홍대용·박지원은 현실에서 소외되었던 양반 사대부였고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은 모두 서자들이었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노론’이란 서술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는지 2007년도 국사 교과서부터는 ‘노론’이란 말을 삭제했다.

 

그러면서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주창했다는 사실도 빼버렸다.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부근의 경기 지방에서 활약한 남인 출신이었다”(2003년)는 내용을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2007)라는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노론이 주도했다는 거짓 서술이 문제가 되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제기했다는 ‘맞는 사실’까지 빼버린 것이다. 남인들만 실학을 주창한 것으로 써줄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런 식으로 교과서를 서술하니 국사 교과서가 흐름을 알 수 없는 누더기 조각이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다양성의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미래의 주역들이 언제까지 사대주의와 폐쇄적 획일주의 속에서 과거 퇴행을 지향했던 노론의 가치관을 학습해야 하겠는가? 언제까지 국사 교과서의 일부가 일제 식민사학과 노론 당론 교재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방치해야 하겠는가? 국사 교과서 서술 체제에 대한 전사회적인 논의의 틀이 필요한 시점이다.(3)

 

 

 

 

<자료출처>

 

 

(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6020600001

 

 

(2) 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 이기환 기자2023. 12. 25. 

 

 

(3)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hani.co.kr)

 

 

<참고자료>

 

 

청계천서 발견된 상평통보 600닢 꾸러미 (chosun.com)  2007.11.01. 

 

 

“서울, 17C 후반부터 근대 움직임 있었다” (hani.co.kr)2007-11-14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펴낸 고동환 교수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704110700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8091022001

 

 

어린 정조의 삐뚤한 손글씨, '개야 짖지 마라' 적힌 차사발 보셨나요? (chosun.com)2020.03.19.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가 입은 저고리 등 보존처리 공개 - 경향신문 (khan.co.kr)2020.02.03

 
 

 

‘조선의 노마드’ 박지원 따라 중국유람 (hani.co.kr)수정 2019-10-19 등록 2008-03-21 

 

 

 

 

조선 실학자 유수원을 아시나요 (hani.co.kr)2007-10-17

 

 

 

조선 후기 학자·관료들의 백가쟁명 '國富증진 프로젝트' (daum.net)2007. 12. 7. 

 

 

 

[인문사회]“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仁政이 가장 급하옵니다”|동아일보 (donga.com)2008-06-07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5030500001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hani.co.kr)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3100600001

 

 

 

177년된 태안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조선시대 군인명부 쏟아졌다 (daum.net)  2020. 6. 4.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1024050000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801141900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6270900001

 

 

 

3천 년 이어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 그 자체 (daum.net) 2019. 1. 17. 

 

 

 

“숙종시대 군인 18%가 마맛자국”:2008-03-13 

 

 

<시론>10세 소년병과 면 30겹 갑옷 :: 문화일보 munhwa2008-04-18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