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조선

2. 조선의 강역 (4) 조선의 북계

대야발 2024. 8. 8. 22:57

 

 

 

 

 

조선의 강역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공험진부터 철령이 북계였습니다.

 

 

 

고려, 조선 및 중국 사료들이 말하는 고려의 북방강역. 지금의 요령성 진상둔진이 옛 철령이고, 흑룡강성 영안현이 공험진이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함경남도로 끌어내린 북방 강역을 100년째 추종하는 것이 이 나라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출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 서울신문 (seoul.co.kr))

 

 

 

 

태종은 재위 4년(1404) 5월 19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과 왕가인(王可仁)을 명나라 수도 남경에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선 획정을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때문에 왕국(고려)에서 말이 있다”면서 철령~공험진까지를 그대로 조선 강역으로 인정했다는 내용입니다.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19일 기미 4번째기사 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

본국에서 즉시 상항(上項)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陪臣)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조정(朝廷)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本部尙書) 이원명(李原明) 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王國)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흠차(欽差)하신 동녕위(東寧衛) 천호(千戶) 왕수(王脩)가 싸 가지고 온 칙유(勅諭)를 받들어 보니, ‘삼산(參散)·독로올(禿魯兀) 등처의 여진(女眞) 지역의 관민인(官民人) 등을 초유(招諭)한다.’ 하셨습니다. ......

이 때문에 지금 배신(陪臣)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주본(奏本)과 지형 도본(地形圖本)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하여 주달(奏達)합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405019_004)

 

 

 

태종실록 4년 5월 19일자, “공험진부터 조선 강역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출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daum.net)2018. 3. 20.)

 

 

 

태종 4년(1404) 10월 1일 국서와 지도를 가지고 명나라에 갔던 김첨은 영락제의 칙서를 받아 돌아왔습니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을 살펴보고 청하는 것을 윤허한다. 그래서 칙유한다.”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이 사는 요동땅이 조선 강역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도 철령과 공험진이라는 사실이 영락제에 의해 재차 확인되었습니다. 태종은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로 확정된 사실을 크게 기뻐하고 계품사 김첨에게 전지(田地) 15결을 하사했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그런데 현행 교과서는 모두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4군 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북방강역이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21년 3월 6일자 “본국(조선) 강역은 공험진부터 철령까지”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 북방강역이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라는 내용이 실록에 계속 나오는 대로 현행 국정, 검인정 교과서는 모두 이케우치가 조작한 설을 추종해서 선조들의 강역을 축소시키고 있다.

(출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daum.net)2018. 3. 20.)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조선의 북계가 공험진부터 철령까지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3월 6일 갑인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계품사 공조 참판 최치운에게 주본을 들려 북경에 가게 하다

 

계품사(計稟使)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 북경에 보내게 하였는데, 그가 싸가지고 간 주본(奏本)에 말하기를,

"정통 4년 3월 초4일 배신(陪臣) 최사의(崔士儀)가 싸서 받들고 온 칙유(勅諭)를 공경해 보옵고, 신이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와 여러 대의 반포해 내리신 야인을 처치하라는 칙유의 사리를 공경해 검사하옵고, 이제 이만주(李滿住) 등이 허구날조하여 주달(奏達)한 사유를 축조하여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하심으로 범찰(凡察) 동산(童山) 등을 예전대로 생업을 편안하게 하시어 변방 백성을 편하게 하옵시면 소국에 매우 다행하겠으므로, 삼가 갖추 주문(奏聞)하나이다.

1. 영락 2년 5월 사이에 흠차 천호 왕수(王脩)가 받들고 온 칙서에, ‘삼산(三散) 독로올(禿魯兀) 등 10처의 여진인만을 초유(招諭)하라.’ 하고, 신의 아비 선신(先臣) 공정왕(恭靖王) 아무개가 홍무 21년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으니, ‘공험진(公險鎭) 이북은 도로 요동(遼東)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철령(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라. ’는 사유를 허락하시매, 배신 김첨(金瞻)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주달하게 하였더니

(출처;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103006_002)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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