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7) 정의부(1924년 11월~1927년 12월), 참의부(1924년 6월 ~ 1929년 10월), 신민부(1925년 3월 ~ 1929년 3월) → 국민부(1929년 4월 ~ 1934년)

대야발 2025. 5. 10. 18:29

 

 

 

 

 

 

오동진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

 

 

 

■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서울신문 손성진기자 입력 2019-10-14 17:38 업데이트 2019-10-15 16:34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13> 압록강 넘어와 일제 응징한 독립군사령관 오동진 선생

 

 

▲ 오동진 선생

 

 

 

“그분을 상면하니 저런 분이 어찌 왜놈의 군인과 맞서 선두 지휘를 하시며 혈전을 하셨나 할 정도로 외모가 잘생기셨고 그 풍채가 관후 유덕하시며 인자한 풍기가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주실 뿐 아니라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분이 무기형을 받고 마포로 수감된 후 왜놈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나 불허하므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처음 15일간은 물도 한 잔 안 먹었다. 소장이 병동에다 수감하고 왜놈 간수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매일 변기를 검사하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먹었으니 소변인들 나올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은 회고록에서 서울 마포형무소(경성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오동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가받는 오동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건국훈장 다섯 가지 가운데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0명인데 오동진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에 필적할 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없다. 옥중에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여러 번 단식투쟁을 했다. 마포형무소에서 한 단식 기간은 무려 48일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악랄한 일본인 형무소장도 그런 선생에게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으며 ‘가미사마’(神)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태어난 선생은 생후 반년 만에 생모를 잃고 후모(後母) 백씨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감이 남다르게 강했던 선생은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19세에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 일신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 서울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선생의 위패.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3월 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평생 온몸을 내던진 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선생은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이탁을 파견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됐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에서 장총 240여정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상원의원 일행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파괴 공작을 펴 이목을 끌기로 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과 친일 조선인 경찰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다.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했고 선천경찰서도 파괴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됐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

 
 
 
 

▲ 1935년 무렵 서울 공덕동 경의선 철교에서 바라본 마포로. 전찻길이 있는 도로의 오른쪽 먼 곳에 마포형무소가 있다. 왼쪽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이 겹쳐서 보인다(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나 무장 항쟁을 이끌던 선생은 밀정의 덫에 걸려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독립군 부하들의 양식 조달을 위해 지린에 농업공사를 만들었는데 운영난으로 그와 부하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를 본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믿은 선생은 1927년 12월 16일 창춘 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일제가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김에게 유인당한 선생은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취조에 자신이 지휘한 무장 투쟁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 선생의 활동만큼 일제가 붙인 죄목은 방대했고 수사·재판 기록은 쌓아두었을 때 높이가 5m가 넘어 3·1운동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와 같았다.

 

 

선생은 광인(狂人) 행세를 하고 1929년 11월부터 33일이나 단식을 하는 등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한번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 개인의 집안일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할 수는 없다”며 아내는 물론 어떤 면회도 거절했다. 부인과 아들은 옥 밖에서 통곡을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1928년 4월에는 부하 2명이 선생을 구하려고 경찰서로 잠입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 선생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1939년에 작성된 수형카드.

 
 
 

 

재판이 열린 신의주 지방법원 법정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려는 방청객들이 쇄도했다. 선생은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라고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또 “하느님의 명령”이라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선생의 광적인 행동은 일부러 미친 척함으로써 일제와 일인(日人)의 재판에 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 의사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는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기에 징역살이를 하며 또한 설혹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희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2년 3월 9일 선생은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도 무기징역이었다. 선생은 상고를 포기했으며 장기수를 수감하던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주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한 달이 넘는 단식도 이겨냈던 선생은 17년이 넘는 세월의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광복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그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선생을 체포하고 옥사하게 한 김덕기는 노덕술, 하판락과 함께 조선인 3대 악질 형사였다. 김은 16년 동안 일제 경찰로 일했고 평북경찰부 고등형사과장 자리에 올라 수많은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가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그중 20%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김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 해체로 감형된 뒤 6·25전쟁 중에 횡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 충남 공주 공산성 주차장에 있는 선생의 추모비.

 
 
 
 

오동진이 숨을 거둔 땅 충남 공주의 공산성 주차장 한쪽에 선생의 추모비가 덩그렇게 서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순국선열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30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데 선생의 위패도 있다. 선생의 묘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인의 행적도 알 길이 없다.(1)

 

 

 

 

■ 만주에서 독립의 불꽃을 피운 오석 김혁 장군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용인시민신문 김학민2025. 5. 8. 13:45
 
[기고] 신민부 창설 100년,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김혁 탄생 150년을 기리며

 

 

오석 김혁 장군은 1875년에 용인 농서동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23일 고향에서 생을 마쳤다. 김혁 장군은 1919년 용인 기흥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흥업단 부단장·대한독립군단 군사부장·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성동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1925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장이자 성동사관학교 교장을 겸임하며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신민부 창설 100년, 오석 김혁 장군 탄생 150년을 맞아 특별 기사를 마련했다. - 기자 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제하 무장 독립운동

 
 
  오석 김혁 장군 초상화
ⓒ 용인시민신문
 
 
 
 

1919년 3.1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에서 공화정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은 3.1운동으로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라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부터 시작됐다. 서울, 미국, 러시아의 연해주, 중국의 베이징·상하이 등지에서 분출돼왔던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3.1운동으로 가속화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 땅에서 민주 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주권 자치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제국주의 열강의 냉대, 임시정부 내의 파벌 갈등, 재정 부족 등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후방인 상하이에서 출범한 초기의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정부'로서 위계를 갖추는 '민정' 부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국이 적에게 침탈돼 이역만리 타국 땅에 '망명정부'를 세웠다면, 그 일차적 과제가 '군정' 체계를 구축해 적과 맞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취약했던 임시정부로서는 이를 수행하기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부 수립 5년 후인 1924년경에야 만주에서 활동하던 참의부와 정의부 등 무장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할 수 있었고, 1940년 광복군 창설로 임시정부의 직할 무력을 갖출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駐滿) 참의부'는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 단체이다. 이 단체는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을 받아 집안·무송·장백·안도·통화·유화 등지에 거주하는 동포 사회를 관할하며 일본 군경 습격, 일제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의 기세로 1925년 후반부터 세력이 위축되고, 1929년 조직을 이끌던 김소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해체됐다.

 

 

정의부는 1920년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 학살과 1921년 자유시 참변 등으로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분산·침체하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절실해 창설됐다. 1924년 7월 전만 통일의회 준비회가 소집되고, 대한통의부·군정서·광정단·의우단·길림주민회·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에 모여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그해 11월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가 탄생했다.

 
 
 
  오석 김혁장군 칠판 현판
ⓒ 용인시민신문
 
 


초기 정의부는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했지만, 1926년부터 독립운동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무력 행동을 삼갔다. 흥업실업사 설립, 농민조합·농민호조사 등 지방행정 조직 강화, 화흥중학교·동명중학교·화성의숙 등 일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 및 사상문화 계몽에 힘을 쏟았다.

 

 

신민부 창설 주도한 오석 김혁 장군

 

1925년 초,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는 '부여족(扶餘族)통일회의'가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되고, 이 회의가 발전돼 1925년 3월 10일 영안현에서 통합 독립운동체 '신민부'가 결성됐다. 이 결성대회에는 대한독립군단(김좌진·최호·박두희 등)과 대한독립군정서(김혁·조성환·정신 등) 대표를 주축으로 각 단체 대표 및 여러 지역의 민선 대표와 국내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신민부의 창립과 진로를 천명하는 선포문과 기관 명칭·제도·사업 방침·군사·재정·교육·헌장 등 12개 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신민부는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해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 참의원(입법기관), 검사원(사법기관) 등의 근대적인 삼권분립제로 조직됐다. 1924년에 창립된 참의부와 정의부가 '군정'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한 데 비해, 신민부는 북만주 지역을 통할하는 '임시정부' 같은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신민부 창립 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김혁과 조성환·김좌진 등 9인을 위원으로 선출했다. 참의원은 원장 이범윤과 의원 김이윤·양재헌 등 15인, 검사원은 원장 현천묵과 검사원 강규상·노호산 등 10인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참의원과 검사원은 현실적으로 운영이 어려워 가동되지 못했고, 중앙집행위원회가 모든 조직을 관장하였다.

 

 

김혁은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1기 출신으로, 참여자 중 가장 연장자인 데다 정규군 장교 경력이 있어 이견 없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됐다. 김혁은 1907년 일제가 구한국군을 해산시키자 1년여 동안 무장독립운동을 벌일 근거지를 찾아 북만주를 답사했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대종교에 입교, 이름을 '김학소'에서 '김혁'으로 바꾸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인들을 만나 군자금을 모아 1919년 3.1운동 후 만주 무송현으로 망명했다.

 
 
 
 
  일본군에 체포된 김혁 장군을 비롯한 신민부원을 호송한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 1928년 3월자.
ⓒ 용인시민신문
 
 
 
 

신민부는 창립 이후 지역 조직을 확장·강화하는 한편, 총기로 무장한 500여 명의 별동대와 보안대를 편성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 김좌진의 통솔하에 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그 뒤 항일전에 대비할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500여 명의 졸업생을 독립군 간부로 배출했다. 이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김혁이 모두 관장했다.

 
 
 

신민부는 둔전제를 실시, 관할 지역의 모든 장정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항일전 준비 및 상비군을 구축하려 했다. 1927년에는 이중삼 등 특수 공작대를 국내에 밀파하여 일본 군경의 배치 상황과 작전 지도를 작성했고, 수시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또한 해림 지역의 초대 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 등 북만주 지역의 친일파 및 친일 단체를 습격, 응징했다.

 

 

신민부는 농촌의 계몽과 교육 및 산업 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인 자녀의 의무 교육을 목표로 50여 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마을마다 노동 야간 강습소를 설치, 운영했다. 1925년 4월 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해 문맹 퇴치와 항일 독립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산업의 진흥을 꾀해 실업부를 설치하고 공농제 실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 설치, 부업 장려 등을 권장했다.

 

 

그러나 현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일제 경찰의 공격을 피해 가기는 쉽지 않았다. 1926년 12월 모연대장(募捐隊長) 황일초 등이 하얼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고, 1927년 2월에는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유정근 등 주요 간부들이 체포됐다. 신민부는 결성 이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 통합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내부의 갈등과 김혁 등 주요 간부의 체포로 세가 급속히 약화돼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김혁 장군 탄 150년을 기리며

 
 
  64세로 순국한 김혁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돼 있다.
ⓒ 용인시민신문
 
 
 
 

오석 김혁 장군은 1875년 10월 6일,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에서 법부 참서관이었던 아버지 김태식과 어머니 윤현숙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태어나 장년기까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지은 '학소(學韶)'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12년 대종교에 입교한 후에는 김혁(金赫, 또는 金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장군은 어린 시절 용인향교에서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선생에게서 배운 후 1898년 6월,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했다. 김혁 장군은 1년 6개월가량 교육과 훈련을 마치 후 1900년 1월 육군 보병참위로 임관했다. 그해 7월 황실 직속의 친위 제1연대 제1대대에 부임한 후 이어 고종황제를 근접 보위하는 시위 제1연대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

 

 

1907년 일제의 강압적 군대 해산으로 육군 정위로 퇴임하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장군은 만주로 떠났다. 장군은 만주 땅을 근 1년여 동안 답사하면서 같은 뜻을 갖고 활동하는 지사들을 만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1912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혁 장군은 용인의 만세운동을 이끌어 기흥지역에서도 일제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해 5월, 장군은 가까스로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봉천성 무송현으로 망명해 그해 8월, 윤세복, 김호 등의 동지와 수백 명의 애국청년을 규합해 흥업단을 조직했다. 흥업단은 겉으로는 산업을 진흥시키며 동포 간 친목을 도모한다고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기지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0년 장군은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 북로군정서로 확대했다. 1921년 1월에는 밀산현 부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대일항쟁을 총지휘했다. 1922년 8월, 장군은 노령 지역에서 다시 만주로 돌아와 대한통의부를 결성, 군사부감으로 취임했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4년에는 현천묵, 조성환, 나중소, 김규식 선생과 함께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해 활동했다.

 
 
 
 
  기흥구 구갈동 김혁 공원에 설치된 오석 김혁 장군 독립운동기념비
ⓒ 용인시민신문
 
 
 

김혁 장군은 1925년 3월 영안현 영고탑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결성하고 최고 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또 신민부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장군은 교장, 김좌진은 부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위하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살왜단(殺倭團)'을 조직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혁 장군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28년 1월 25일, 석두하자에서 신민부 총회를 개최하던 중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된 것이다. 장군은 1929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1935년 5월 26일 병세가 위중하여 출옥하였다. 1939년 4월 23일, 김혁 장군은 오랜 감옥 생활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64세로 순국했다.(2)

 

 

 

 

국민부는 1929년 4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일부가 통합하여 설립한 단체로, 창립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재만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일종의 자치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장한성이 쓰보이에 발사한 모제르 권총 두발..체포작전 실패"

오마이뉴스 김병기기자 2022. 6. 8. 15:06
 
국가보훈처,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금 별동대 '국민부 모연대' 문건 최초 공개

 

 

  장한성의 쓰보이 사살 사건 관련 신문기사
ⓒ 국가보훈처 제공
 
 
 

"1929년 11월 30일 새벽, 추격대가 모연대장 장한성의 출몰장소 등에 대해 밀정에게 사전보고받은 내용을 근거로 장한성이 머무는 여관, 동지들의 집 등을 차례로 수색한 후 장한성이 평소 자주 찾는 요리점으로 가던 도중 장한성과 쓰보이가 맞닥뜨렸다. 총격전 도중 장한성이 쓰보이에 발사한 모제르 권총 두 발이 무릎과 이마를 명중함에 따라 쓰보이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다른 일경들이 총을 쏘며 추격하였지만 신출귀몰한 장한성에 대한 추격대의 체포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명, 쓰보이가 사망한 사건. 1929년 12월 6일 간도총영사관 경찰서장이 간도총영사에게 국민부 모연대에 대한 수사경과를 보고한 11쪽짜리 기밀문서에 적시된 기록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 북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을 했던 단체의 활약상을 파악할 수 있는 문건이 최초로 공개됐다. 특히, 이 문건에는 그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은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8일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최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인 국민부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북간도로 파견했던 모연대(模捐隊)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고 밝혔다.

 

 

간도지역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독립군은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 등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1920년 간도지역 한인을 대거 학살한 간도참변을 일으키면서 독립군은 지지기반을 잃고 무장투쟁 자금을 직접 마련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당시 남만주를 일대로 무장투쟁을 수행하던 국민부는 설립 직후인 1929년 5월에 북간도에서 친일 부호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할 별동대로 모연대를 조직했다"면서 "모연대를 통해 모집된 군자금은 국민부의 군대인 조선혁명대의 무기 구매와 의식주 해결 등 군수보급 비용으로 사용됐다"고 밝혔다.

 

 

국민부는 1929년 4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일부가 통합하여 설립한 단체로, 창립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는 등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재만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일종의 자치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료는 보훈처가 올해 4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독립운동 관계자료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것으로, 1929년 12월 6일 간도총영사관 경찰서장이 간도총영사에게 국민부 모연대에 대한 수사경과를 보고한 11쪽짜리 기밀문서이다.

 

국가보훈처는 "자료에서 일본경찰은 그들이 파악한 모연대의 조직체계, 군자금 모집방법, 모연대원의 인적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 당시 비밀리에 활동했던 모연대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면서 "특히, '군자금 모집 상황표'에는 모연대가 다녀간 지역, 방문횟수 및 인원, 납부명령 금액 및 실제 모집액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1929년 5월~11월 국민부 모연대(대장 장한성)의 군자금 모집 상황표
ⓒ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는 특히 "문서의 마지막에는 검거대상인 모연대원 등 일본경찰이 불령선인(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분류한 39명의 명단을 첨부하였는데, 현재까지 포상되지 않은 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발굴을 위한 공적 확인에 유의미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는 장한성이 이끄는 모연대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경찰이 작성한 행동경로, 부대편성, 수색전략 등 세밀한 체포작전과 함께 야간과 새벽을 가리지 않고 펼쳐진 일본경찰과 모연대원의 긴박한 대치상황이 시간대별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채영국 전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무력이 만주로 급속히 뻗쳐오는데도 불구하고 남만주를 무대로 한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의 무장활동이 북간도에서 끊이지 않고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남궁선 국가보훈처 보훈예우국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오로지 조국독립을 위해 치열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면서 "앞으로도 국외 독립운동 사료를 지속적으로 발굴·공개하여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하고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3)

 

 

 

 

<자료출처>

 

 

(1)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 서울신문 (seoul.co.kr)2019-10-14

 

 

(3) https://v.daum.net/v/20220608150608455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9j1341a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5019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3s2722a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6303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https://search.seoul.co.kr/index.php?keyword=%EC%86%90%EC%84%B1%EC%A7%84%EC%9D%98%20%EC%9A%B0%EB%A6%AC%EA%B0%80%20%EC%9E%98%20%EB%AA%A8%EB%A5%B4%EB%8A%94%20%EB%8F%85%EB%A6%BD%EC%9A%B4%EB%8F%99%EA%B0%80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