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6) 1911년 중광단 → 1919년 정의단 →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 1921년 대한독립군단

대야발 2025. 5. 3. 16:00

 

 

 

 

 

 

■ '3월의 호국인물'은 서일 독립군 총재

경향신문 박성진 기자2015. 2. 27. 09:56
 

 

전쟁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서일(1881.2∼1921.8) 독립군 총재를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7일 밝혔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0년 동만주로 망명해 청일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한인 자녀를 교육했다. 대종교에 입교해 만주로 들어오는 망명 의병을 규합해 독립군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서일 독립군총재

 

 

1918년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듬해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체코군의 도움으로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이후 정의단을 무장독립군단을 보유한 항일단체이자 북간도 전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는 행정부를 겸비한 군정부로 재편성했다.

 

군사훈련과 무기구입 등의 활동을 벌이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정부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면서 총재에 취임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 안무군, 광복단 등의 여러 부대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1921년 8월 수백 명의 도적에게 야습을 받고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해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1)

 

 

 

■ '청산리 전투 영웅' 서일 선생..서거 100주년 행사 추진

연합뉴스 윤태현기자 2021. 8. 14. 09:00

 

"실질적 독립군 지도자..업적 조명하는 계기 되길"

 
 
독립운동가 서일 선생 [서일총재기념사업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 강점기 '청산리 전투'로 일본군을 대파한 독립군의 지도자 서일 선생을 조명하는 행사가 추진된다.

광복회 인천시지부 연수구지회는 독립운동가 서일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를 다음 달 28일 개최할 방침이라고 14일 밝혔다. 이 행사는 서 선생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넋을 기리고 업적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애초 이달 26일 연수구청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구청사 강당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다음 달로 연기됐다.

지회는 현재 코로나19 상황을 살피며 행사 개최 장소를 찾고 있다. 후보지로는 인천 송도 컨벤시아와 서울 광복회 본회 등이 거론된다. 장소가 결정되더라도 코로나19 상황이 악화하면 행사 일정은 재차 연기된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서일(徐一) 선생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한 농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8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경성 성일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했으며 이후에는 후학 양성에 전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5세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을, 30세 때에는 우리나라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사건인 '경술국치'를 겪었다.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하던 그는 31세가 된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해 무력 항쟁 체제 구축에 나섰다.

 

아울러 한반도에서 기원한 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해 포교에 나섰으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10만여 명의 교우를 모았다.

 

이어 교우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교우 1명당 1원씩 거둬들여 자금을 마련하는 등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고 대일항쟁을 준비했다.

 

1918년에는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동지 39명과 함께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1919∼1920년 중광단을 1천500여 명 규모의 독립군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확대·개편해 이끌었으며 소련(현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총기 등 3만여 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최대 전과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다.

이 전투는 북로군정서가 1920년 10월 만주 허룽현 청산리 등지에서 다른 독립군인 '대한독립군'과 함께 독립군 토벌에 나선 일본군을 10여 차례의 전투로 거의 몰살시킨 사건이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이,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이 지휘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서 선생은 북로군정서 등 10개 부대를 규합해 3천500여 명 규모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에 올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의 외교 압박을 받은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한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발발, 대한독립군단이 와해하고 동지들이 희생되자 서일 선생은 1921년 8월 27일 자진 순국하며 41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 부대원들 기념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형철(77) 광복회 인천시지부 연수구지회장은 "서 선생은 인천에 연고가 없지만, 손자인 서만섭(92)씨와 증손자 서희우(63)씨가 인천 연수구에 오랫동안 거주해 연수구지회에서 이번 행사를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김좌진·홍범도 장군은 독립투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질적으로 독립군을 이끈 서일 선생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며 "이번 행사로 서 선생을 알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후손들이 도움을 받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2)

 

 

 

 

<자료출처>

 
 
 
 

 

 

(2) https://v.daum.net/v/20210814090011397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3695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132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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