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8)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1925년 3월 24일 ~1925년 7월 7일)

■ 습관성 탄핵이라고? 100년 전 이승만 탄핵을 위해 분투한 독립투사들이 있다
아주 긴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많은 이들의 전망처럼 만약 이번 주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된다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실로 믿지 않을 수 없겠다. 100년 전인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면직안을 통과시켰으니 말이다. 박정희조차 '눈이 어두운 독재자'라며 손절했던 이승만에 대해 윤석열은 이승만기념관에 성금을 내는가 하면, 3.1절 기념식장에 이승만 사진이 없다고 질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 윤석열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한 이승만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 .다 국힘은 야당에 대해 '습관성 탄핵', '줄탄핵', '탄핵 남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19년 9월 임시대통령 이승만 선출 당시부터 1925년 3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줄기차게 이승만 탄핵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100년 전 이승만 탄핵을 위한 분투를 되새겨 봄으로써 100년 후 지금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헌신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고자 한다.
신채호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
이승만 탄핵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3.1운동 직전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주장한 사실을 듣고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이라면서 1919년 4월 10일~11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도 '이승만은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제창하던 자'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절대 독립'을 주장했던 이동휘 역시 이승만을 '썩은 대가리'라고 부르며 위임통치 청원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1919년 9월 11일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신채호는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이승만 반대를 이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임시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에 남아 있으면서 구미위원부 설치·공채발행·애국금 폐지 등 독단을 일삼자, 청년 지식인 그룹이라 할 수 있는 국무원 차장단(윤현진, 김립, 정인과, 김희선, 이규홍, 김철 등)은 1920년 5월 "신성한 독립사업에 불신성한 인물이 수위(首位)에 있음이 신성불가"라면서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으면 '동맹사직'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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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1920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이승만, 좌측이 이동휘, 우측이 안창호다. |
ⓒ 독립기념관 |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은 1920년 12월 부랴부랴 상하이에 부임하여 1921년 5월까지 불과 6개월간 머물렀지만 반대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공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박은식, 원세훈, 최동오, 김창숙 등 15명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게 된다.
1921년 4월에는 김원봉, 김창숙, 이극로, 박용만, 서왈보, 신숙, 신채호, 장건상 등 54명은 또다시 <위임통치 청원 성토문> 발표한다.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이승만, 정한경 등이 대미위임통치 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들어 그 죄를 성토하노라 (중략) 독립의 대방(大防 - 규율)을 위하여 이, 정 등을(중략) 주토(誅討 -죄 있는 자를 토벌)치 아니할 수 없도다."
1921년 5월 박용만, 신숙, 황학수 등 17명이 참여한 <대조선공화국군사통일회의 성토문>은 한층 더 강력하게 이승만을 성토한다.
"금일에 제2의 이완용과 제2의 송병준이 다른 이름으로 이미 왜적에게 팔아먹은 국가 민족을 또다시 미국인에게 전매하고자 함이라. (중략) 아아 이것이 과연 우리 민족의 자결심이며, 또 우리가 일찍이 이 사명을 이승만 등에게 위임하여 왜적의 노예를 미국에 전매하라 하였더냐. (중략) 오호라! 이를 국적(國賊)이라 아니하면 장차 무엇을 가리켜 민적(民敵)이라 하겠는가?"
역시 1921년 5월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던 김동삼을 비롯해 무장독립군의 유력한 근거지의 하나인 서간도에서는 서로군정서, 한족회의 주요 간부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여준과 이탁, 곽문 등 4명은 연서로써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확실한 이상 이 행위의 주창자는 퇴거를 명령할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의 탄핵 사유는 무능과 독단
그동안 개별적 또는 임시정부 외곽에서 목소리를 내던 이승만 퇴진 요구는 마침내 1922년 6월 임시의정원(오영선, 안정근, 조상섭, 양기하, 차리석 등) 차원에서 대통령과 국무원 불신임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다. 대통령 불신임의 이유로는 내정을 통일하지 못하고, 외교에 실패했고 내각을 조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무정부 상태를 우려해 불신임안은 임시의원정이 스스로 결의를 번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외교독립론을 가장 강력히 주장한 이승만이 심혈을 기울인 워싱턴회의(1921.11~1922.2)에서 아무런 성과도 못 내자 이승만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점점 사라져 갔다.
1923년 2월 조덕진 등 9명의 의원은 3개 항의 <대국쇄신실행안>을 제출하였는데 3항이 바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한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4월에는 조덕진 등 12명의 의원은 탄핵안을 다시 제출하였고, 탄핵안을 심사할 특별위원으로 최창식을 비롯하여 5명의 의원을 선정하였다. 탄핵안 발의 사유는 5가지인데 한마디로 이승만은 무능한데다가 독단적이라는 것이다.
① 공무도 없이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지체시키고 시국을 수습하지도 못함
② 국무원(國務院)의 동의나 국무원(國務員)의 연서도 없이 교령을 남발함
③ 행정 부서를 정돈하지 못하고 법률을 준수하지도 못하면서, 또한 준수하도록 만들지도 못함
④ 구미위원부와 그 직원, 주미공사를 독단적으로 설치함
⑤ 외국공채 사용과 구미위원부의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함
1924년 6월 16일 조상섭, 김붕준, 최석순 등 의원 8명은 <임시대통령 유고 문제에 관한 제의안>을 제출해 그날로 가결됐다. 대통령이 4년이나 임지를 떠나 있음은 용납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으로 이승만이 상하이로 돌아올 때까지는 대통령 유고이므로 국무총리가 임시대통령의 직권을 대리하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임시헌법 제17조 "임시대통령이 유고한 시는 국무총리가 대리"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국무총리 이동녕에 이어 국무총리 박은식이 대통령직을 대리하게 된다. 이로써 직무가 정지된 이승만에 대한 탄핵은 속도를 내게 된다.
1925년 3월 13일 곽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강창제, 강경선, 나창헌, 김현구, 임득산, 채원개 등 10명의 의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대통령 탄핵안은 3월 18일 밤 회의에서 통과되었고, 나창헌을 위원장으로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을 심판위원으로 선정하여 이승만의 위법 사실을 조사하도록 결정하였다. 심판위원회의 심리를 거치면서 '탄핵'이 '면직'으로 바뀌었고, 3월 23일 이승만 대통령 면직안이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통과되면서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파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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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호외 1925년 3월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사실을 알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호외가 최초로 확인됐다.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미발굴 사료다. [장자크 홍 푸안 씨 소장자료/촬영=국사편찬위원회] |
ⓒ 국사편찬위원회 |
<심판서>
• 주문
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
• 사실 및 이유
대한민국 7년 3월 18일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에 의하여 이 위법된 사실을 조사한 바 (중략)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여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여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둠은 대업의 진행을 기약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제현의 명목(暝目)지 못할바이오, 살아있는 충용(忠勇)의 소망이 아니라. 그러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임시대통령 이승만심판위원장 라창헌, 동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2024헌나8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2024년 12월 14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통과된 대통령 윤석열 탄핵안에 의하여 이 위법된 사실을 조사한 바 (중략)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헌법에 의하여 선거를 통해 취임한 대통령이 부정선거 운운하며 선관위를 부인하고 심지어 헌법 전문에 명시된 독립, 민주, 평화통일 정신을 무시함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둠은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민통합을 기약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선열을 볼 낯이 없으며 이는 국민 다수의 소망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 주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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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탄핵 과정 이승만 탄핵(면직)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은 줄기차게 활동했다. |
ⓒ 방학진 |
[참고문헌]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Ⅰ-상해시기」,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이재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1.
민족문제연구소, 「이승만, 그는 과연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나」, 역사다큐 '백년전쟁Ⅰ- 두 얼굴의 이승만' 관련 자료집, 2013.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식지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다.(1)
■ [박정호의 시선] 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의 유언
독립운동 분열 비판한 임정 수반
유학자서 혁명가로 끝없는 변화
사욕만 챙기는 '가짜 지사' 질타

“독립운동은 오족(吾族·우리 민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別·구별)이 없어야 된다.”
독립신문 1925년11월 11일 자에 실린 백암 선생의 유언이다. 백암(白巖)은 독립지사 박은식(1859~1925)의 호다. 기사가 실리기 열흘 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타계한 백암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을 불러 이런 뜻을 남겼다. 최후의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이 묵직하기만 하다.
백암의 또 다른 호는 ‘겸곡(謙谷)’이다. 그의 삶과 사상을 압축한 단어로 보인다. 『주역』의 ‘겸괘(謙卦)’에서 나온 말로, ‘땅 아래에 산이 있는 것이 겸(謙)이니, 군자는 많은 데서 덜어 적은 데에 더해 주어 사물을 저울질해 고르게 베푼다’는 의미다. 요즘 우리 사회 화두인 공정과도 통한다.
역사학자 노관범 교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풀이가 흥미롭다. 그는 “박은식은 편파성과 편중성을 없애는 이 말을 평천하(平天下)의 중요한 길로 봤다”며 “겸곡이 생각한 평(平)은 고통받는 인민과 탐학한 양반 사이의 평이자 재래의 구학문과 외래의 신학문 사이의 평이었다”고 설명했다.

시대의 명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로 이름난 겸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1919년 어렵게 출범한 임시정부가 내부 균열로 깊은 수렁에 빠지자 1925년 3월 23일 면직된 이승만에 이어 2대 대통령에 올랐다. 반면 재임 기간은 채 넉 달이 안 됐다. 그해 7월 개정 임시헌법에 따라 통치권이 국무령(이상룡)과 국무회의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대통령이 8개월 재임한 것과 견준다면 겸곡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짧은 임기를 마친 셈이다.
‘박은식 대통령’의 행적을 임기로 따질 일은 아니다. 나라를 잃었던 100년 전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오늘을 직접 비교할 순 없다. 그런데 지치(至治·가장 잘 다스려진 정치)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겸곡이 임정 마지막 대통령으로 출발한 첫날의 마음가짐은 내년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이 새길만 하다. 그가 취임 당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오늘날 우리 독립운동의 제일 요소는 각방(各方)의 인심을 통일하여 내부의 결속을 견고케 함이라. (…) 내부 결속이 박약하면 서로 원수로 여겨 죽이는 참극까지 연출케 되나니 (…) 3·1운동 이후에는 각방의 단체가 우후춘순(雨後春筍)과 같이 발생하여 경제의 곤란으로 운명이 장구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독립이란 대명제 앞에서 분열한 여러 세력을 비판한 글이다. 한 세기 전의 외침이건만 지금 우리의 눈앞을 짚어보는 데도 유용하다. 정당의 1차 목표가 집권인 것은 분명하나 여야 없이 볼썽사나운 비방과 모략이 득실대는 현실은 정치에 대한 혐오만 증폭시킬 뿐이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마저 나올 지경이다.

겸곡의 화살은 내부로만 향하지 않았다. 세계정세에 대한 통찰을 촉구했다. 그는 1925년 7월 7일 임시 대통령에서 물러나며 인류 역사는 세계주의를 향하는 시대이기에 한국의 독립운동도 민족 단독으로 한정 짓지 말고 세계 민족과 연합주의로 행동해야 한다는 고별사를 남겼다. 노관범 교수는 “독립운동이 국권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등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혜안”이라고 평했다.
노 교수의 신간『유학자 겸곡 박은식』은 시사성이 크다. 30년 전 대학생 시절 겸곡과 처음 만난 저자가 그간의 연구와 생각을 정리해 박은식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되살렸다. 황해도 시골 선비로 태어난 겸곡이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 파란의 세월을 거치며 언론인·역사학자·독립운동가·혁명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망라했다.
겸곡의 삶은 한마디로 한국 근대사 자체였다. 노 교수는 특히 겸곡의 세계성을 주목했다. “박은식은 세계인이었고, 그의 역사서는 세계사였다”고 정의했다. 조선의 멸망과 독립운동을 각각 다룬『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또한 동아시아 혁명의 역사, 군국주의와 인도주의가 대결하는 세계사의 극적인 발현이었다고 해석했다.
책 내용 가운데 ‘구유(拘儒)’와 ‘통유(通儒)’란 단어가 확 들어왔다. 각각 시무(時務)에 어둡고, 밝은 유생을 가리킨다. 과거에 갇힌 자와 미래에 열린 자의 대비다. ‘가지사(假志士)’도 눈에 띈다. 대한제국 말기 유행한 말인데, 겉으론 국민·국가를 외고 다니지만 속으론 제 잇속만 채우는 이들을 말한다. ‘구유’와 ‘가지사’를 솎아내는 시민들의 혜안이 절실한 요즘이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지혜는 성경에만 나오는 비유가 아닐 것이다.(2)
<자료출처>
(1) 습관성 탄핵이라고? 100년 전 이승만 탄핵을 위해 분투한 독립투사들이 있다
(2) [박정호의 시선] 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의 유언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