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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36)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집단지도체제) 제 1 · 2 · 5 · 6대 주석 이동녕(1927년 8월 19일 ~ 1933년 3월 5일, 1935년 11월 ~1940년 3월 13일)

대야발 2025. 5. 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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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줌인] "대동단결" 호소… 독립운동 헌신한 임시정부 '큰 어른'

대전일보 김재근 선임기자2025. 1. 22. 18:56
 
② 임정의 정신적 지주 석오 이동녕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청년기부터 국내는 물론 중국·러시아 오가며 활동
임시정부 의장 3회·주석 4회 등 순국 전까지 온힘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 위치한 석오 이동녕의 생가와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임시정부하면 여러 인물이 떠오른다. 김구, 여운형, 조소앙,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회영, 이시영, 조완구, 신채호, 양기탁, 이동휘, 박은식, 홍진 등….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도 임시정부와 닿아 있다.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혔듯이 임정은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1897년 세워졌다가 1910년 일제에 병합돼 사라진 대한제국을 딛고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임정의 상징인 백범 김구 못지않게 일생을 독립에 헌신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석오 이동녕이다. 석오는 임정의 정신적 지주, 웃어른, 큰어른, 구심점 등으로 불린다. 힘들고 궁핍하고 암울했던 상황에서 임정의 중심을 잡고 온갖 이견과 갈등, 분열을 극복해냈다. 그의 호는 돌 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석오(石吾)'이다. 큰 바위처럼 묵직한 겸양의 자세로 통합과 단결을 도모했다.

 

석오는 사회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임시정부 요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았고, 종교도 기독교와 대종교를 섭렵했다. 이처럼 폭 넓은 인생역정을 관통한 것은 대한독립이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

 

 

 

이동녕은 1869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24살 때 응제진사(임금의 특명으로 치르는 임시 과거)에 합격, 진사가 됐다. 그러나 석오는 전통적인 유학에 머무르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격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과 서구문화, 기독교 등을 접하면서 국권수호, 민권, 개화, 개혁, 민주, 평등, 평화, 민족의식 등의 가치관이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국가 건설이 일생의 과제로 자리 잡았다.

 

 

□ 청년기부터 사회운동, 교육, 언론 참여 독립운동

 

청년기에서 50세까지 석오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893년 원산에서 부친이 운영하던 광성학교(광명학교)에서 육영사업을 벌였다.

1896년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를 개최, 민권과 국권 수호, 부패 무능 관료 해임, 외세 축출, 신분차별 철폐 등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이준, 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이종일이 운영하는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론을 역설했다.

1902년에는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펼쳤다.

 

 

 

1935년 무렵의 임시정부 독립운동가 사진. 앞줄 왼쪽부터 송병조 이시영 김구 이동녕 조완구.

 

 

 

석오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조약 파기를 주장하다 2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이 되자 1906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 의지를 불어넣었다.

 

 

귀국 후에는 신민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도왔으며,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신민회는 각계각층 800여 명이 참가한 비밀결사로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대중계몽, 교육과 산업 진흥, 독립군 양성 등을 추진했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했고 여러 인사들이 검거돼 감옥에 가고 옥사했다. 신민회는 훗날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토대가 됐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석오는 만주 서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 학교 출신의 독립군은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국 본토의 의열단,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등의 주축을 이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거처를 옮긴 석오는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 붙잡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를 만들고,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18년에는 길림에서 대종교 김교헌를 비롯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등과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석오는 임정 시절 백범 김구와 가장 가깝게 지냈고 늘 그와 함께 했다. 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사진=독립기념관

 

 


□ 임정 의장 3회, 주석 4회, 국무총리 6회 지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석오는 임시정부에 헌신한다. 임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 국가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분립 체제를 갖췄다.

 

석오는 임정 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돼 4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승만이 행정의 수장인 국무총리로 선출됐으나 미국에서 오지 않자 권한대행을 맡는다.

임정이 대통령제로 바뀌자 이승만이 대통령, 석오는 내무총장을 맡아 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국내와 연계한 연통제의 조직과 운영을 담당했다.

이듬해 이동휘가 이승만과 갈등으로 국무총리를 그만두자 총리 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했다.

 

 

1923년 임정의 내부 갈등과 투쟁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를 구성하여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4년에는 국무총리로 취임했으며, 이승만의 오래 자리를 비우자 대통령 직대를 맡았다.

 

 

이처럼 석오는 임시의정원 의장 3차례, 주석 4차례, 국무총리 6차례(서리와 대리 포함), 대통령, 내무총장, 군무총장 등으로 일하며 임정을 지켰다.

 

출신지와 이념, 투쟁 방법론 등에 따라 갈라질 때도 그는 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공정하고 청렴하고 온후했던 까닭에 반대세력도 석오를 존경했으며 임정이 위기에서 처할 때마다 중책이 맡겨졌다. 임정 요원 중에서 석오처럼 핵심 요직을 두루 많이 거친 사람이 없다.

 

 

백범 김구는 석오에 대해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했다"고 회고했다. 백범이 어려울 때마다 늘 상의하고 의지한 게 석오였다.

 

백범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이동녕의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석오는 1932년 김구, 이유필 등과 계획을 세워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추진했다.

 

 

석오의 생가 옆에 세워진 석오 이동녕 기념관. 김재근 선임기자

 

 


□ 순국 순간까지 독립 위한 "대동단결" 호소

 

석오는 임정이 상하이, 항저우, 난징, 창사, 치장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단 한번도 임정을 떠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와 함께 한국국민당 대표로 여러 정당 및 단체와 통합을 추진했으며, 1939년 네 번째 주석을 맡아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서안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하였다.

 

 

노구를 이끌고 백범과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력하다 급성폐렴으로 쓰촨성 치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1940년 3월 13일, 그의 나이 71세였다.

 

운명하는 순간까지 석오는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꼭 통합하라며 단결을 호소했다. 석오의 유언대로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 출범, 충칭 임시정부 시대를 이끌게 된다.

 

 

 
 
 
 
 

"작은 산골 물이 바위를 뚫는다(山溜穿石 산류천석)"는 뜻으로 끈기 있게 노력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의지가 담긴 석오의 친필이다.

 

 

석오의 71년 삶의 지향점은 오직 하나 대한독립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분열하고 다툴 때 그는 "싸우려면 왜놈하고나 싸워라"고 호통치며 묵묵히 임정을 지켰다. 강하고 직선적인 백범 김구 곁에서 그는 늘 자신을 뒤로 한 채 양보하며 타인을 보듬어 안았다. 겸양과 소통으로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 100여년 전 임정의 기둥으로 올곧게 서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삶·정신 널리 알리도록 노력"

 

서문동 석오 이동녕선생 선양회 상임대표

 

 

"석오 선생의 업적이 너무 낮게 평가돼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의정원(국회)의 의장을 3차례나 지냈고, 주석 4차례와 대통령을 역임하는 등 국가수반을 5차례나 역임하셨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공적 자료가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서문동 상임대표(남서울대 행정지원처장)는 2019년 창립 이래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녕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석오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는 행사도 열고, 근래에는 서훈을 올리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 대신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독립유공자 중 대한민국장 서훈자는 33명, 대통령장 90, 독립장은 822명이다.

 

 

 

"석오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하고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등 민주국가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백범 김구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석오를 꼽았습니다."

 

 

 

서훈 상향을 위해 서문동 대표는 박상돈 천안시장과 함께 2023년 출범한 서훈상향민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지난해 말까지 시민 7만 3000명의 서명도 받았다.

 

 

"석오는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대동단결을 강조한 선생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1)

 

 

 

 

■ 상해 임정 세우고 끝까지 지켰다, 독립운동계 화합의 멘토

중앙선데이 입력 2024.11.23 00:06 업데이트 2025.03.10 15:52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⑪ 석오 이동녕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은 1869년 천안 목천에서 명문가의 후예로 군수 등을 지냈던 이병옥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와 부친, 8촌 이장녕, 사위 이살음 목사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유년시절 한학을 수학했고 20대 초 응제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접한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구국운동의 길로 나서게 된다.

30대 초부터 독립협회회원으로 만민공동회, 내정개혁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언론사 제국신문 논설위원도 맡았다. 

1903년 스크랜턴 목사가 설립한 상동교회 엡웟청년회에 가입해 이동휘·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구국활동에 나서게 된다. 

 

을사늑약 후 1906년 이상설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설립해 항일민족교육에 나섰으나 일제의 압박과 재정난 등으로 이듬해 서전서숙이 폐쇄됐고, 이후 귀국해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고 총서기를 맡았다.

 

과거시험 합격했지만 구국활동에 투신

‘임시정부의 큰 별’ ‘정신적 지주’라 불렸던 석오 이동녕 선생. [사진 대전지방보훈청]

 

 

일제가 대한제국 병탄을 가속화하자 선생은 이상설·이회영 등과 함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논의하고 남만주 일대를 답사한 뒤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를 기지로 선정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12월 이회영 6형제에 이어 선생은 신민회회원 등과 함께 삼원보로 망명했다. 이듬해 삼원보 대고산에서 선생이 임시의장이 되어 민단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했고 이상룡이 사장, 선생이 재정부장을 맡았다. 

 

이어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초대 교장을 맡았고, 1913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해 신흥무관학교로 확대·개편하게 된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제가 선생과 이회영·이시영 등을 체포·암살 하려하자 선생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당시 연해주에서 최재형·홍범도·이상설 등이 ‘권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었고 선생은 권업회 특별총회에서 의사부 임시의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14년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춰 선생과 이상설·이동휘 등 권업회 핵심 회원들이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일동맹이 이루어지자 연해주 독립운동단체들은 해산하게 되고 선생도 니콜스크(현 우스리스크)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상설은 서거하고 임종을 지킨 선생이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해 스위픈강에 뿌렸다. 이 시기에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해 광복투쟁을 계속한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수립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어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4월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가 각각 임시정부로 수립됐다. 

 

중국에서도 선생 등 39인은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상해에서 임시정부수립에 나선다. 먼저 국내외 각 지역 대표 29인으로 최초의 의회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선생이 초대 의장으로 선출됐다.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행정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공포함으로써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한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상동교회 머릿돌. 이곳에서 이동녕 선생은 본격적인 구국활동을 시작한다. [사진 김석동]

 

 

선생은 법규와 체제를 정비해 임정의 기초를 닦아나갔으며 국무총리 이승만이 미국에 체재하면서 상해로 오지 않은 사이 국무총리대리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국내외 임정통합을 주창했고 마침내 1919년 9월 11일 ‘상해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임시정부’가 통합해 한민족 대표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된다. 

 

통합임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임시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선출했다. 선생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어 행정·사무를 총괄하면서 국내에는 행정조직망인 ‘연통제’를, 국외 지역에선 ‘거류민단’을 조직하는 등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체재하다 1920년 12월 상해로 부임했지만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직하는 등 임정 내부갈등이 계속되자 선생은 국무총리대리 겸 내무총장으로 다시 임명되어 이승만을 보좌하면서 임시정부의 정상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승만이 1921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내각이 총사임 하는 등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졌지만 선생은 임정유지를 위해 진력했고 1924년 4월 선생이 국무총리로, 김구가 내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임정은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해 9월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선생이 임시대통령 직무대리를 맡았고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탄핵 의결 후 1925년 개헌을 통해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구성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한다. 

 

 

개정헌법에 따라 이상룡·양기탁·안창호 등이 차례로 국무령으로 선임되나 내각구성이 난항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재차 위기에 처한다. 선생은 1926년 다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되어 김구를 국무령으로 선출한다. 

 

이듬해 선생과 김구는 제3차 개헌에 나서 국무령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수반인 주석이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다. 이후 선생이 주석, 김구가 내무장을 맡아 임시정부 기능을 회복시킨다.



1930년 선생과 안창호·김구 등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은 독립운동계 단결과 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안창호·이시영·김구 등이 이사에 선임됐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나서게 되는데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국무위원으로 ‘한인애국단’ 결성을 주도한다. 

 

한인애국단 단장은 김구가 맡아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일제는 선생과 김구 체포를 위해 현상금을 걸었고 중국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군대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일청년이 능히 달성했다” 극찬했고 임정을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안시에 있는 석오 선생의 생가지. [사진 천안시]

 

 

이후 독립운동계의 분열이 이어지고 한국독립당이 해산하면서 임정은 다시 해체위기에 직면했지만 1935년 선생이 주석, 김구가 외무장이 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고 ‘한국국민당’이 결성되면서 기능이 회복된다. 

 

 

중일전쟁과 일제 탄압으로 임정은 1940년 중경으로까지 8년간 대이동을 하게 되는데 선생이 주석을 맡으면서 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으로 옮기게 된다.

 


1940년 선생은 기강의 임정청사 내 침소에서 지병으로 7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임정은 독립운동방향에 대한 노선차이와 내부갈등, 독립운동단체의 분열 등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선생은 독립운동 진영의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과 단결을 이룩하기 위해 20년 세월을 모두 바쳐 끝까지 지켜내었다. 선생은 고결한 인품과 강직한 성품으로 분열과 대립 가운데서도 임정을 굳건히 지킨 임정의 큰 지도자로서 ‘임시정부의 큰 별’ ‘정신적 지주’라 불린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인사들조차 선생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선생 서거 후 민족진영 3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 이후 좌익진영도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명실상부하게 한민족 대표 의회와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선생은 김구의 정신적 지주로 오랫동안 함께 임시정부를 지켰고 김구는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된다”고 회고했다.

1948년 김구는 선생의 유해를 기강에서 국내로 모셔와 사회장을 치르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천안 옥천에는 생가지가 정비되고 기념관이 세워졌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122185632237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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