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38)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집단지도체제) 제4대 주석 양기탁(1933년 12월 30일 ~ 1935년 10월)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 항일 언론부터 무장투쟁까지 이끈 전천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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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⑭ 우강 양기탁
우강(雩岡) 양기탁은 1871년 평양 소천에서 한학자인 부친 양시영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양시욱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1886년 제중원 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상경한 후 영문·제약·의술 등을 배우다 퇴교하고 독학으로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원산에서 선교사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게일은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고 기독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던 연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맡았다.
선생은 서재필 등이 1896년 설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1898년에는 제국주의 침탈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인 만민공동회 간부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일본과 미국에 체재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된다(시기와 체제국에 관련해선 다른 기록도 있음). 1902년에는 민영환·이준·이상설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개혁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04년부터 궁내부 예식원 번역관보로 일하면서 일본의 침략계획을 목도하고 ‘보안회’ 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등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다.

열강의 세력다툼에 휘말리던 대한제국은 대외에 국내사정을 알릴 수 있는 영자신문 발행을 위해 영국인 기자 베델을 발행자로, 선생을 실무책임자로 선정해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예식원을 사직하고 신보 발행에 전념하게 된다. 선생은 당대의 논객인 박은식·신채호 등을 논설위원으로 초빙해 반일 논설과 기사를 과감하게 실었다. 신보는 을사조약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파기를 요구했고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즉각 전재했으며 의병활동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구국언론의 중심축이 되었다.
일제의 침탈이 강화되던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고 국권회복과 공화제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신민회’ 조직에 나선다.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담당 전덕기, 회원자격심사 집행원 안창호를 선임하고 언론·기독교·교육·실업계와 무관 출신 인사 등을 망라해 조직이 결성되었다.
선생은 신민회 활동을 이끌었고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관지이자 본부역할을 했다. 일제는 본격적인 대한매일신보 탄압에 나섰다. 발행자 베델은 통감부에 의해 영국 영사관 재판에서 근신형에 이어 감금형을 받았다. 이어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게 되자 1908년 통감부는 횡령혐의를 조작해 선생을 구속했고 영국측과 외교문제로 확대되자 석방했다.
1909년 신민회는 선생을 중심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키로 뜻을 모으고 이동녕·이회영·이상룡 등이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우선 망명했다.

대한제국은 대외에 국내사정을 알릴 수 있는 영자신문 발행을 위해 영국인 기자 베델을 발행자로, 양기탁을 실무책임자로 선정해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16호. [사진 위키백과]
그러나 1911년 1월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명근이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다 적발된 ‘안악사건’으로 신민회 회원 등 16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고 선생도 별도 체포되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일제는 다시 ‘105인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 인사들을 대거 투옥·기소해 선생 등 6인은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집단망명과 독립군기지개척 사업은 타격을 받게 된다.
1915년 4년 만에 출옥한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서 은신하다 유하현 고산자에 정착해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바 선생은 애국지사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통합운동을 전개했고 안동여관을 거점으로 광복회의 의열투쟁도 지도해 나갔다. 이후 1917년 연해주 ‘한인신보’ 창간 편집인으로 추대되면서 연해주와 만주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1918년 만주 일대의 동포사회를 아우르는 통일기관으로 고려국 건립 계획을 추진하던 선생은 천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중국거류 금지와 2년간의 유배처분을 받게 된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세워 사회단체와 신문사 설립을 허용하면서 선생은 동아일보의 고문 겸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1922년 만주독립운동계는 선생의 만주 망명작전을 성공시킨다. 이후부터 선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주창하고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 남만주 단체가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산재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추진되었고 선생은 ‘남만촉성회’ 회장을 맡아 통합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만주지역 통합단체로 ‘통의부’가 출범하면서 선생은 최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통의부는 통의부의용군을 조직해 군사활동에 나섰으나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선생과 군주정을 주장하는 복벽주의간 내부갈등이 계속 되어 대한의군부와 육군주만참의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선생도 통의부를 탈퇴하게 된다.
선생은 1923년 길림으로 이주해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해 고문으로 길림·장춘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다시 추진했다. 1924년에는 만주 한인의 교육, 경제자립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기 위해 손정도와 함께 ‘동우회’를 결성한데 이어 통의부·광정단·서로군성서 등 남만주지역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1924년 ‘정의부’를 결성하게 된다.
정의부는 신민부·참의부와 함께 만주 3부를 형성했고 한인들의 자치행정과 항일군사활동을 통할하는 남만주 최대 군정부로 등장했다. 정의부 결성을 주도한 선생은 원로이자 최고고문으로서 전면에 나서기보다 단체들간의 교섭과 조정, 동포들의 생활터전 마련과 생활 향상을 위해 진력했다. 이후에도 선생은 참의부·신민부 등 만주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에 나섰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만주·연해주 동포 생활 향상에도 심혈

1925년 임정 요청으로 정의부·신민부 인사들이 임정에 참여키로 하고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후 6개월 만에 사임하자 1926년 선생이 후임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정과 정의부의 갈등으로 취임하지 않게 된다. 1926년 선생은 정의부, 천도교 인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해나가기 위해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했으나 국내와 만주에서 간부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고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면서 이듬해에 해체된다. 1929년 만주의 정의부·참의부·신민부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나 일부 세력이 결집해 국민부를 결성했으나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함께 추진하던 민족유일당 결성이 결렬되자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주의계열의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연로해진 선생은 이듬해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한국독립당 이사장을 맡아 민족대당운동에 나섰고 한국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 등과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러나 내부갈등 끝에 탈당한 후 민족대당운동에 진력하던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강소성의 고당암으로 들어가 투병 끝에 이듬해에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68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은 수차례 옥고를 겪으면서도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고 국내를 비롯해 만주·중국·러시아를 넘나들며 독립투쟁에 나섰으며 독립운동계의 통합에 일생을 바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중 수교 후 1993년 강소성에서 묘소를 확인했고 1998년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1)
양기탁은 1930년 가을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사임으로 후임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절하였다. 1934년 1월 중국 진강에서 실시한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된 후 제10회 의정원에서 다시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임정의 활성화와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무령 시절 독립운동 관련 정당, 단체의 대통합을 목표로 삼고 활동하였다. 1934년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의 실현강령을 채택하고 1935년 7월 마침내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한 민족단일당으로 '민족혁명당'의 결성을 이끌었다.
■ '대한매일신보' 창간, 임정국무령지낸 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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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강 양기탁선생 어록비 |
ⓒ 이승철 |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은 평양에서 아버지 시영(時英)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의종(宜鍾), 아호는 우강(雩岡) 또는 운강(雲岡)이며 필명은 우강(于岡)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가 되던 해 상경하여 평북 위원출신으로 유림의 명망가 나현태를 만나 심오한 학문과 높은 인격에 감화를 받고 식견을 넓혔다. 또한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여 일찍이 서양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1895년 미국인 게일(한국명 奇一)이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 주관의 만민공동회에서 부총무장으로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출옥 후 게일의 소개로 1900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힌 후 33세이던 해에 귀국하였다.
1902년 이상재·민영환·이준·이상설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여 혁신운동을 추진하다가 피체되었으며 출옥 후에는 한 때 한성전기의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1904년 3월 황실의 외교 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의 영어통역관을 지냈으며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운동에 참여하고 그 후속단체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해 7월 영국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과 제휴하여 국한문혼용체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한국인의 민족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외세의 침략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문발행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내탕금과 이용익·민영환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한 것이다.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 역할을 하였다. 제작진은 주필 박은식을 비롯하여 신채호·최익·옥관빈·변일·장도빈 등이고 영업진은 임치정·안태국 등이었다.
신문은 이듬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라는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영국인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는데 사옥 밖에는 일제 관헌의 사옥 출입을 금하는 방(榜)- '일인불가입(日人不可入)'을 내붙였다.
신문은 1907년 1월 16일자로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한 친서가 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 등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크게 보도하는 한편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전재했으며 영문판에는 영어로 이를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사실을 호외로 보도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의 신문지법(新聞之法)에 의한 제약으로 보도하지 못했다. 또한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으로는 이 신문이 유일했다. 이 신문은 통감부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개설, 보상금 모금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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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경과 양기탁 유동열 등의 합작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35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현정경이 남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기탁, 유동열 등과 연락을 취해 합작한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기사를 썼다. 현정경이 당시 독립운동상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사다. |
ⓒ 동아일보 |
일제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위해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양기택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사장 베델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2개월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5월 23일자로 이 신문은 한문을 해독치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판을 발행하였는데 1908년 현재의 발행부수는 한글, 국한문, 영문판을 합하여 13,4000부였으며 지사(支社)는 1907년 11월 현재 모두 23곳이다.
그는 또한 대한자강회, 광무사(光武社), 서우학회, 서북학회, 국문연구회 등에 참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 창설위원은 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이다. 신민회의 총감독은 그가 맡았다.
1909년 봄 신민회는 국외에서 독립군 창설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양기탁은 이듬해 8월 직접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지역을 답사했다.
일제는 안명근 군자금모집사건, 안악사건 등을 기화로 해외독립군기지 건설을 탄압하기 위해 '보안법위반사건'을 조작하여 그를 포함, 16명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 뒤이어 '데라우치 총독암살음모사건'(일명 '105인사건')을 조작,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항소심에서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2월 석방된 후 다시 평남 강남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하다가 천진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1918년 2월 고국으로 압송, 전남 거금도에 2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12월 유배에서 풀려나고 이듬해 8월 미국 의원단의 동양3국 순방을 기회로 '미국의원시찰단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서울역에 내릴 때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친이 충격으로 작고하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 방면된 기회를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1923년 10월 편강렬·남정 등과 의성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 봉천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앞서 1922년 오동진·김동삼 등과 통의부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11월에는 지청천·김동삼 등과 통의부,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군정서 등 남북 만주에 산재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통합, 정의부를 창립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기관을 공격케 하였다.
1928년 그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를 통합하여 1929년 5월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1930년에는 남경으로 가서 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김규식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양기탁은 1930년 가을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사임으로 후임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절하였다.
1934년 1월 중국 진강에서 실시한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된 후 제10회 의정원에서 다시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임정의 활성화와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무령 시절 독립운동 관련 정당, 단체의 대통합을 목표로 삼고 활동하였다. 1934년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의 실현강령을 채택하고 1935년 7월 마침내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한 민족단일당으로 '민족혁명당'의 결성을 이끌었다.
그러나 5당합당 이후 당내 분열이 발생하자 1937년 8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 등과 조선혁명당을 새로 결성,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무렵 중일전쟁(1937. 7. 7)의 발발로 대일결전이 임박하자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과 대한인독립당 등 재미(在美) 6개 독립운동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과 특히 5당합당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중국 강소성 담양현 길당암에서 요양 중 1938년 4월 19일 6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50215000244975
(2) https://v.daum.net/v/20241229143900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