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33) 제5공화국 : 전두환정부(1981년 2월 25일~1988년 2월 24일) 광주미국문화원방화사건(1980년 12월),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1982년 3월), 광주미국문화원2차방화사건(1982년 11월), 대구미국문화원폭발사건(1983년), 부산미국문화원투석사건(1985년), 서울미국문화원점거사건(1985년), 부산미국문화원점거사건(1986년)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한다."
■ 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14. 부산 미문화원 : 한국의 반미운동과 자주파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4.07. 08:11:51 최종수정 2021.04.08. 11:32:36
"교수님 같은 진보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에서도 진보 운동이 부활했는데…"
"진보 지식인들을 그리 과대평가 해주시다니요. 한국전쟁 후 진보 운동이 사라진 뒤 수 십 년간 진보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이 평생을 걸고 노력해도 못 이룬 진보 운동을 부활시킨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요?"
"전두환이지요."
"전두환이요?"
"네."
"아니 전두환이 왜?"
"그가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진보 운동을 단칼에 복원시켜주지 않았습니까? 반미의 불모지에서 반미 운동이 살아나고요. 사실 전두환이 진보를 부활시키기 위해 군에 위장 취업했던 북한의 프락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광주학살을 통해 반미 운동 등 진보 운동을 부활시켜 적을 이롭게 했으니 전두환에게 적용해야하는 진짜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지요."
부산의 중심가인 광복동 뒤쪽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 앞에 서자 떠오른 것은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쿠데타 등과 관련해 전두환을 감옥에 보냈던 1990년대 중반에 한 언론과 가졌던 이 인터뷰였다. 그렇다. 역사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와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두환의 1980년 5‧18 광주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학살은 우리에게 "국가란,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반미의 무풍지대에 거센 반미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82년 2월에 있었던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은 1999년 미문화원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만든 것으로, 부산미문화원 방화의 현장인 이곳에 서자 문제의 인터뷰가 생각난 것이다.


▲ 역사관에는 부산의 근현대사가 잘 요약돼 있다. ⓒ손호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전쟁 이후 사라진 반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광주였다. 첫 방화 사건은 부산미문화원이 아니라 광주미문화원이었다. 부산미문화원 사건이 일어나기보다 1년 3개월 전, 즉 광주항쟁이 처참하게 진압된 지 반년이 지난 1980년 12월 9일, 전남 농민 운동가들과 대학생들이 광주미문화원 직원들이 퇴근한 뒤 지붕에 구멍을 뚫고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광주항쟁 당시 부산 앞바다에 미국항공모함이 와있다는 보도를 보고 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군의 만행을 제어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쟁 지도부인 윤상원 대변인이 전화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에게 군부와의 협상 중재를 요청했지만 이조차 거절당하고 진압 작전에 의해 처참하게 사살 당하자, 분노한 생존자들이 반미 운동에 나선 것이다. 여론을 우려한 전두환 정권은 이를 단순 누전사고로 발표했다. 방화자들이 밝혀진 뒤에도 '부랑아들의 영웅심리'로 치부하고 쉬쉬했다.
15개월 뒤, 젊은 신학대 대학생이 부산미문화원 앞에서 통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통을 전해 받은 두 여대생은 문화원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다른 여대생들과 문을 깨고 실내에 잠입, 통에 있던 휘발유를 바닥에 뿌렸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준비한 방화봉에 불을 붙여 건물 안으로 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문화원은 불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휘발유통을 전해준 총지휘관 문부식은 건너편 2층 창가에서 이를 촬영했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가까운 국도극장과 유나백화점에서는 다른 대학생들이 창밖으로 구호가 적힌 유인물을 살포했다. 기이하게도, 구호 중에는 "전두환은 이미 북침 준비를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준비하고 있다"는 엉뚱한 것도 들어있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 나아가 미국과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특히 문화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 학생이 죽고 여러 명이 화상을 입자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문부식 등은 원주 최기식 신부를 찾아갔고 그의 주선 하에 자수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의식화시킨 김현장을 숨겨준 죄로 구속됐고, 방화 사건은 전두환 정권과 가톨릭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결국 김현장, 문부식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형을 받았고 민주화가 되자 1988년 출소했다.


방화라는 극단적 수단을 사용한 것과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긴 것은 소영웅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들이 어찌되건 극우 정권을 지원해온 미국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나아가 미국과 세계가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김현장은 2012년, 사건 30주년 인터뷰에서 담당검사가 "신미양요 이후 미국 코를 납작하게 해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해 줬고, 석방 후 만난 해외공관 무관은 "이 사건 이후 제3세계 관계자들이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해주더라"며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1982년),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1982년), 대구미문화원 폭발 사건(1983년), 부산미문화원 투석 사건(1985년), 서울미문화원 집단 점거(1985년), 부산미문화원 집단 점거(1986년) 등 반미 투쟁이 이어졌다. 1986년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동에서 대학생들의 전방입소훈련 시위 중 "양키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를 외치고 분신해 사망했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 학생운동, 나아가 오래 동안 민중 운동의 최대 정파로 활동해온 반미통일운동 중심의 자주파 내지 민족해방주의파(NL)가 이 방화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중 일부는 북한을 추종하는 반미주체사상파(주사파)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미국의 잘못된 대한 정책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가 이후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외세의 탓으로 돌리고 북한을 미화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풍문과 추측에 의존하던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타난 것은 1996년이다.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정보자유법을 통해 4천 페이지에 달하는 5‧18 관련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글라이스틴주한미국대사 5‧18 직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따라갈 것이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한 인종주의자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 등 극소수 비밀 팀과 만든 '체로키 파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공수부대의 이동을 몰랐다는 등 책임이 없다고 밝혀 왔지만, 셔록은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세월이 흐르며, 김현장은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아니라 자신의 대법원 재판의 판사였던 이회창을 지지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지지했다. 문부식은 방화로 학생이 목숨을 잃은 것, 동의대 사태 때 진압 경찰이 숨진 것 등과 관련해 '우리 속의 폭력', '우리 속의 파시즘'이라는 문제를 놓고 운동의 자기성찰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로 운동권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 같은 성찰은 필요하지만, 운동권의 폭력은 극히 예외적 현상이며 한국전쟁 이후 우리 운동의 주된 특징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테러가 아니라 분신, 투신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기 폭력'이었다는 점을 보지 못한 일면적 관찰이다. 다만 최근 나타나고 있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일련의 일탈을 보면, 민주화운동 세력의 자기성찰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에 역사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는 좋은 지역 역사관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근현대 한미 관계'에 대한 전시이다. 개화기인 '19세기 한미 관계'로부터 '미군정', '한국전쟁과 미국의 원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반환 운동'을 간단히 시기별로 설명하고 있고 미군정 관련 서적도 진열되어 있다.

기이한 것은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방화에 대해 "당시 일방적인 의존의 대상이었던 미국에 대한 반감 표시"라고 쓰여 있을 뿐, 정작 기폭제였던 5‧18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미문화원의 역사도 방화 사건과 1995년 시민단체의 미군부대 반환 운동, 1996년 문화원 폐쇄, 1999년 반환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곳이 해방 후 미군이 주둔했던 미군정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 사무실에서 미문화원으로 변신하고 반미 운동으로 불탔다가 시민들의 반환 운동 덕으로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부산근대역사관이 된 이 건물의 역사는, 복잡했던 한미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파쇼 정권을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정치적 기반도, 경제력도, 경찰력도, 군사력도 아니며, 바로 비정상적이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문부식이 38년 전 재판부에 쓴 탄원서의 일부다.

부산근대역사관을 떠나며 물었다. 민주화가 됐으니 이제 군사파쇼 정권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를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 그리고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그리고 이후 자주파들이 생각했고 일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1)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진짜 동기인 5·18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엉뚱하게도 반미 이슈가 부각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취재기자들에게 이 점을 신신당부했다. 문화원 진입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학생들은 언론사와의 필담에서 "우리의 진입이 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유인물에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의 진상과 그 책임자는 명백히 국민 앞에 공개돼야 한다. △광주사태의 주모자와 관련자들은 책임을 져라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민 앞에 정중히 사죄하라 △신민당은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고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고 주장했다."
■ 김민석 총리 후보자와 미문화원 점거 사건의 진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 |
▲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10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에 관련된 일을 정치권이 문제 삼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김민석 후보자는 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 실형을 받았다"라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총리직을 수행하며 한미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김문수 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지난 5일 대선 캠프 해단식에서 "아마 미국에서 굉장히 이걸 문제를 삼을 것"이라며 "그동안은 적당하게 넘어갔지만, 미국 정부가 자기 문화원을 점거한 이런 사건에 대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80년대 전반에 집중 발생한 미문화원 공격 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은 미국을 당황케 만드는 일일 수 있다.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1985년 5월 23일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의 공통점은 5·18 진상규명과 사과 촉구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자주 부각되면 미국이 곤란해질 수 있다.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환수(1994.12.1.)되기 이전인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벌인 일은 미국의 묵인 없이 불가능하다. 5·18 현장에 있었던 아놀드 피터슨 선교사는 미군의 시스템이 광주 현지에서 작동한 사실을 <5·18 광주사태>에서 증언했다.
체험록인 이 책에서 피터슨은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다음 날인 그해 5월 22일에 "송정리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서 일하고 있는 공군 하사인 데이브 힐이라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고 회고했다. 피터슨은 "그는 미 공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들어와서 양림동에 있는 미국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책에 썼다.
피터슨은 계엄군이 도청을 탈환하기 이틀 전인 25일에도 미군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미 공군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헬리콥터에 의한 미국인 구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통지한 사실을 증언했다. 이처럼 미군은 광주 현장과 무관치 않았다.
1980년대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이유
피터슨의 체험록에는 5·18과 미국의 관련성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 하나가 들어 있다. 한국군 최정예 부대이자 경기도 양평 주둔 부대인 육군 20사단이 어떻게 광주까지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언론보도를 근거로 "이 사단은 1980년 5월 16일에 미국 지휘하에 있는 한미연합사에서 탈퇴했었다"라며 "이 일은 위컴 대장이 협정에 따라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통보를 받고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피터슨 목사가 미군으로부터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필리핀 수빅만 기지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려 했었던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방향을 틀어 부산에 입항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예고한 그해 5월 24일 자 <매일경제> 'WP지 보도 미 항모 코럴시호 한국 수역에 출동'에 따르면, 23일 자 <워싱턴포스트>는 코럴시호의 한국 입항이 "한국 사태를 이용한 북괴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한 예비 조치"라고 전했다. 이 조치는 전두환이 북쪽을 염려하지 않고 남쪽 광주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의 배려였다. 5·18 북한 개입설이 아니라 5·18 미국 개입설이 규명돼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0년대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5·18 미국 개입설을 명확히 확인하고 미국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김민석 후보자가 관련된 1985년 5월 23~26일의 점거·농성도 마찬가지다.
'광주' 등이 적힌 대형 전단이 문화원 2층 창문에 게시된 사진과 함께 발행된 그달 23일 자 <동아일보>는 "23일 정오경 서울 중구 을지로1가 미국문화원 건물에 1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일시에 들어가 2층 도서관 안에서 오후 2시 현재 농성을 벌이고 있다"라며 "이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왔는가',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 등 2종의 유인물을 통해 광주사태를 묵인한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민 앞에 사과하라는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고 전했다.
당시 21세인 김민석 서울대 총학생회장 겸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은 문화원 바깥의 응원 집회장에 있었다. 1992년 2월호 <역사비평>에 기고한 '내가 겪은 사건: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서울대총학생회장 시절'에서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5월 23일 12시가 조금 지나, 농성 참가자들이 문화원 앞에서 숨을 죽이며 진입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서울의 동서남북 각 지역에서는 지역 내의 한 대학에 모여 전학련 주최의 연합집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부 지역에서는 숭실대에서 집회가 열렸다. 나 또한 집회에 참석하여 내심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집회가 진행되는 중 긴급 소식이 장내로 전해졌다. '서울 시내 5개 대학, 전학련 삼민투 소속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진입하여 농성에 들어갔답니다!' 순간 장내가 웅성거리고 곧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 |
▲ 1985년 5월 24일 대학생들이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며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그를 비롯한 전학련 지도부가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쟁위원회) 학생들을 문화원에 파견한 것은 '5월 투쟁'의 일환이었다. 위 기고문은 "1980년대 전반기에는 매년 5월이 되면 광주사태라는 풀릴 수 없는 주제가 서서히 제기되기 시작"했다며 "이러던 것이 1985년에 들어서는 2·12총선에서의 신민당 돌풍으로 정세가 급진전되고 학생운동이 전국적 조직을 갖춤에 따라 본격적으로 5월 투쟁이 계획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기술한다.
문화원을 점거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진짜 동기인 5·18 해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엉뚱하게도 반미 이슈가 부각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취재기자들에게 이 점을 신신당부했다. 문화원 진입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학생들은 언론사와의 필담에서 "우리의 진입이 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학생들은 미국만을 비판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과 전두환 정권뿐 아니라 야당인 신민당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이들 여럿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면 미국 관청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여러 세력에 전하고자 했다는 점은 그들의 유인물에서 확인된다. 위 5월 23일 자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유인물에서 학생들은 △광주사태의 진상과 그 책임자는 명백히 국민 앞에 공개돼야 한다. △광주사태의 주모자와 관련자들은 책임을 져라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은 한국민 앞에 정중히 사죄하라 △신민당은 국정조사권을 발동하고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고 주장했다."
김문수 전 후보나 권성동 원내대표 같은 이들은 미문화원 점거를 반미 사건으로 한정하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이 아니라 5·18이었다.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것은 5·18 미국 개입설을 확인하고 따지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5·18에 대해 원죄가 있다. 그래서 5·18 앞에서 움찔하는 나라다. 김문수 등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어두고 싶어 할 것이다. 미문화원 점거자들을 반미주의자로 몰아세워 이 이슈를 키우면 누구보다 불편한 것은 미국이다.(2)
<자료출처>
(1) 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pressian.com)
(2) 김민석 총리 후보자와 미문화원 점거 사건의 진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참고자료>
“1985년 서울 미 문화원 사건은…” 김민석 후보 57분 간담회 요약 [지금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