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30) 최남선 < 문화/생활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30) 최남선

최영 장군의 20대손 근대적 글쓰기로 문장혁명 ‘한글’ 단어 처음 사용

ⓒphoto 최국주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한국 근대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자이다. 3·1 만세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최남선은 1908년에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의 창간인으로 어문일치의 글을 써서 현대글의 기초를 닦았다. 또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우리 문헌의 보존·간행 작업에 앞장서 한국학 탄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일제 학자들의 어용 ‘단국신화’에 맞서 동북아문화사를 아우르는 최남선 특유의 ‘단군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도전했다.

육당의 아우 각천 최두선은 중앙고교 교장·경성방직 사장을 거쳐 광복 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건국 유공자가 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사장에서 제3공화국 첫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정치 안정에 힘썼으며,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1000만 이산가족찾기운동을 북한적십자사에 제의하여 성사시켰다.

육당은 1890년 4월 26일 서울 중구 을지로2가 22번지에서 관상감(현 기상대장)의 기감을 지낸 최헌규(崔獻圭)와 진주 강(姜)씨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동주 최씨이며, 최남선은 고려시대의 팔군도통사 최영 장군의 20대손으로, 중인 계급이었다. 중인은 지금의 사무관, 기술관 같은 정부 각 기관의 실무를 맡아보는 사람이다. 최남선의 부친 헌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늦장가를 갔다.

“강원도 철원 근교로 낙향한 무관 통진부사 강위영이 과년한 딸에게 들어온 청혼을 거절했을 만큼 우리 집안은 어려웠다. 내 증조모가 된 그 딸의 ‘신랑 집의 가난이 어떻게 어린 신랑의 잘못인가?’라는 항변에 결국 허혼을 하긴 했지만, 혼례 후 새 내외가 서울 시집으로 떠나고서야 신랑이 놓고 간 빈 함을 열어 본 장모는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신랑감 내외가 동네 어귀 언덕에서 장모의 그 통곡소리를 들었다 하고, 덩달아 우는 신부의 손을 잡고 증조부는 재산을 모으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고 한다.”(최남선의 손자 학주씨 ‘육당 최남선’)

23세 때 과거에 운과(雲科) 지리학 전공으로 합격한 헌규는 관상감 기감을 거쳐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에 이르렀고, 관직 외에 농력(農曆) 출판과 당초재 무역으로 재산을 크게 일궜다.

“출사(出仕) 30여년 후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어린 두 아들에게 구국출판과 문장보국(文章報國)을 허락한 무렵에는 부의 규모가 기호(畿湖)에 만석거리 전답과 서울 사대문 안에 80채가량의 집과 가대(家垈)를 소유했을 정도다.”(‘육당 최남선’)

헌규가 근무하던 관상감은 중국 처자가 보내는 황력(皇曆·태양력)을 누구보다도 먼저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력을 농사에 맞게 농력으로 바꿔 목판 간행을 하면 저절로 돈이 되는 시대였다. 이렇게 해서 모은 종잣돈으로 중국 상인들에게서 약재를 받아 놓으면, 운 좋게 그 약이 필요한 역병이 돌아 약재값이 자꾸 뛰어 이문이 컸다. 그는 인품과 평판이 좋아 까탈 많은 중국 상인들도 그에게 많은 물건을 맡겼다. 무역을 통해 국제 정세에 눈뜨게 된 헌규는 같은 중인 출신 오경석과 유대치의 개화사업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고, 자신의 자식들도 그런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헌규는 자녀들에게 농부에게서 농산물을 살 때는 반드시 값을 더해서 사라고 일렀다. 며느리들에게는 음식 찌꺼기 하나도 하수구로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했다.

“조부께서는 엄동설한에 길을 가시다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덜덜 떨고 있는 걸인을 보시면, 거지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데려오시어 손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물을 따라 주시고, 헌옷가지라도 내어 주시며, 내일 아침부터라도 집의 대문채에서 하는 아침 대접을 받으러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그런데 이 걸인 대접도 큰 보답을 가져왔으니, 다름아닌 기미독립운동 때였다. 그들도 이 주인집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고 있었고 연락, 기타 물품의 운반 등 큰 활약을 하여 주었다.”(최남선의 차남 한웅씨 ‘용헌잡기’)

 

현진건의 조카딸과 결혼

 

최남선은 서당에서 글을 익히면서 12세 때에 황성신문에 투고했다. 역관 현정운(玄晶運)의 7자매 중 6녀 현영채(玄永埰)와 결혼한다. 개화기 소설가 빙허 현진건의 조카이다. 육당(六堂)이란 아호의 유래에 관해서는 ‘육당 연구’를 학위논문으로 쓴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생전에 들은 것을 전했다.

“그분의 이름자 중에서 성과 항렬을 빼면 남는 것은 ‘남(南)’ 자뿐 아닙니까? 북두칠성의 반대쪽에는 남두육성이 있으니까, 남쪽에서 가장 귀한 것을 택해 육당으로 하셨다고 해요. 서재필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과 애국계몽운동에 가산을 모두 쾌척한 이회영과 최남선 집안에, 국권을 회복한 정부는 마땅히 그 재산을 보상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최남선은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어를 배우기 시작해 석 달 뒤부터 대판조일신문을 구독하여 일어를 익힌다. 1904년에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소년반장으로 일본으로 가서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유학 석달 만에 자진 퇴학하고 귀국한다. 이어 황성신문에 일화(日貨)배척 투고로 필화를 입어,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 민병도와 함께 한 달간 구류된다.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여 대한유학생회보를 편집한다. 이해 6월에 열린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 문제가 의제로 되자 자퇴하고 귀국한다.

“유학 중에 일본의 근대적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공부보다 국민계몽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국을 살리는 길은 국민을 계몽해 근대적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국민계몽은 출판사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엄친 최헌규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했고, 내 증조부 최헌규는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17세에 지나지 않은 아들의 사업을 허락했던 것은 평소 갑신정변의 실패를 안타까워해서였다.…증조부 최헌규는 그의 아들이 하겠다는 출판을 통한 계몽구국운동으로 혁명에 필요한 인적 기반이 창출되면 갑신정변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학주씨)

부친에게서 거액의 자금을 받은 최남선은 일본에서 인쇄기와 기술자를 들여와 서울 상리동 21번지 맞은편, 지금의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터에 있던 집 두 채에 인쇄공장과 사무실을 차린다. 한 채에는 1층에 사무실, 2층에 편집실, 다른 한 채에는 인쇄공장을 두었다. 1907년 여름에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이 문을 열었다. 최남선의 집안 전체가 이 사업에 참여한다. 부친은 이익이라고는 거의 없는 신문관 사업에 16년 동안 계속 자금을 댔고, 장자 창선이 신문관 사주로 경영을 맡는다.

 

을지로 2가에 출판사 세워

신문관에서 이듬해 창간된 ‘소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다. 제호 ‘소년’은 요즘의 10대 소년이 아닌, 새로운 사상을 가진 새로운 세대를 뜻했다. ‘소년’은 근대 문물을 소개하는 잡지만이 아니었다. 도산 안창호와 최남선이 설립한 청년학우회의 기관지이기도 했다. ‘소년’은 4년 남짓 나오다 폐간된다. 최남선이 도산을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일본에서였다.

“도산 선생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한 시기의 역사의 배경은 독립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마지막 명운이 끊어지려는 위기에 처한 때였다. 당시 근대적 민족 자각으로서 진실한 독립국가를 찾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운동의 기운을 촉진시키는 ‘청년 이태리’ 운동이 우리의 모범이 되었었다. 이러한 이상과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미국에서 돌아오신 도산 선생을 도쿄에서 만나서 그의 지도하에 상의하였다.”(최남선 ‘진실정신’ 1954년)

이후 안창호가 먼저 귀국해 윤치호·이상재·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결성한다. 신문관이 설립된 해이며, ‘신민(新民)’ ‘신문(新文)’은 같은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교육진흥 민족사업육성 청년운동을 추진하는 청년운동 단체로 1909년 청년학우회가 출범했다. 청년학우회 결성에는 윤치호·차리석·이승훈·안태국과 함께 최남선이 참여하는데, 그는 다른 발기인에 비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약관의 젊은이였다. 최남선은 안창호의 부탁으로 청년학우회의 취지문을 작성한다.

 

첫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한번은 청년운동에 대한 슬로건, 즉 청년학우회의 취지서를 꾸며 보라는 분부였다. 그 내용의 말씀은 ‘우리 국가와 민족이 이렇게 쇠망한 근본 이유가 진실한 국민적 자각, 역사적 자각, 사회적 자각을 못 가진 데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청년운동(국민운동)은 어디까지나 진실을 숭상하여야 한다. 언변보다는 실행을, 형용보다도 내용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이다’ 로 청년학우회의 취지서를 초안하라는 명령을 하셨다.”(‘진실정신’)

‘거짓말 말자’로 압축되는 무실역행 정신을 실천하는 청년학우회는 청년운동을 통해 근대 국민을 형성하고자 했다. 최남선은 ‘소년’을 통해 청년학우회의 취지·강령·동향 등을 알렸고, 전국을 다니면서 순회강연을 할 때 도산은 젊은 최남선을 단상에 세우고 소개했다. 최남선은 ‘소년’ 명사로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지만 수난도 덮쳐왔다.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 다수를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학우회도 해체됐고, ‘소년’도 절간됐다. ‘소년’이 폐간된 후 최남선은 어린이 잡지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를 발행하다가 1914년부터는 ‘청춘’을 발간한다. 문예 중심으로 편집하는 성년 대상 잡지였다. 필진은 이광수·홍명희·현상윤·권상로·이상협·진학문·민태원이었다.

신문관 시절 최남선은 근대적 글쓰기로 문장혁명을 일으킨다. ‘국주한종(國主漢從)’ ‘언주문종(言主文從)’으로 요약되는 최남선의 ‘신문장 건립’ 운동은 ‘소년’부터 일관되게 추진되어왔다. 그는 ‘소년’에 우리나라 첫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우리말을 ‘한글’이라고 이름 붙인 최남선은 ‘어린이’라는 순우리말을 처음으로 창안해 쓰기도 했다. 1914년 ‘청춘’에 ‘어린이의 꿈’이란 시를 발표하는데, 방정환이 1920년 ‘개벽’에 발표한 ‘어린이 노래’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다. ‘아이들보이’ 제2호 10월호에서 쓴 ‘한글’이란 표현도 최초로 책에 쓴 것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그 경위를 밝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제마다 ‘우리말’ ‘국문’ ‘언문’ ‘반절’ ‘조선글’ ‘배달글’ ‘정음’ 등 다르게 부르고 있었는데, 조선광문회는 조선의 고유한 문자에 새 이름을 주는 문제를 토의했다고 한다. 이때 최남선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을 제의했다. ‘한글’의 ‘한’은 ‘크다’와 ‘나라 韓’을 같이 의미한다. 최남선의 제안에 조선광문회 소속 어문학자들이 동의했다. 주시경 사후 ‘한글모’(조선어학회)의 회장을 맡게 된 최남선은 ‘한글’이라는 새 이름이 널리 보급되도록 노력했다. 최남선은 한글 쓰는 법의 한 예로 가로풀어쓰기를 창안하여 후일 발명되는 한글타자기 원리에 맥을 잇는 선견지명도 보인다.

 

독립선언서 판을 짜다

할아버지 최남선 이야기를 하는 손자 국주씨.

 

최남선은 1910년 12월 살림집을 삼각동 굽은다리(曲橋)로 옮기고, 부친의 사랑채 2층에 조선광문회를 창립한다. 그는 일제에 의한 약탈 반출로 희귀한 고서적이 없어질 것을 염려해 우리 문헌과 고전을 쉽게 풀어 간행하며,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의 한문 고전도 간행한다. 최남선은 이곳에서 당시의 지성인들과 다양한 문예활동을 벌인다. 박은식·장지연·유근·이인승·김교헌·현채 등과 사라져가는 고전을 간행하며, 주시경·권덕규·김두봉·임규 등과 우리말 사전의 편찬에 착수한다.

안창호·윤치호·최광옥·옥관빈 등과 청년학우회를 설립하고, 이광수·진학문·심우섭·이상협 등과 문장보국(文章報國)과 언론사업을 함께 한다. 박한영 스님과는 조선의 불교를 토론하며, 최린·송진우·현상윤 등과는 3·1운동을 계획해 독립거사를 주도한다. 조선광문회는 전국의 문화인·학자·애국지사들의 연락처이자 안식처, 피난처가 되는 당시 조선의 양산박이자 아카데미 구실을 한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관에서 직접 독립선언서의 판을 짠다. 3월 3일 일제에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고 1921년 10월 가출옥되었다.

“할아버지는 밤에는 임규의 일본인 부인 고사와의 집에 숨어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낮에는 동지들에게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측과 교섭해 정주 오산학교의 설립자이자 기독교계 지도자인 남강 이승훈을 운동에 참여시켰다. 할아버지가 김도태를 정주로 보냈을 때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기독교계를 대표해 참가할 것을 쾌락했다.”(학주씨)

 

동명사 창립하고 신간회 주도

출옥 후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를 창립한다. 1922년 9월 주간지 ‘동명(東明)’을 창간한다. ‘동명’에서 최남선은 3·1운동 후 민족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체성 정립을 향한 조선학의 수립에 진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동명’ 제3호부터 ‘조선역사강화’를 20회에 걸쳐 연재하며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학을 세울 것’을 제창한다. 1924년 3월 일간지로 시대일보를 창간하나, 경영난으로 곧 물러난다. 이즈음 최남선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을 아우르는 단체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주도한다.

“할아버지가 민족주의 경향의 신석우와 사회주의 경향의 홍명희를 연결시켜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당신은 두 사람이 주도하는 것만으로도 신간회가 모든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학주씨)

이후 저술활동에 힘을 쏟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심춘순례’ ‘단군론’ ‘아시조선’ ‘백두산근참기’ ‘백팔번뇌’ ‘삼국유사해제’ ‘시조유취’ ‘조선유람가’ 등 역저들을 낸다. 1928년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며, 1939년에는 만주국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후일 친일논쟁의 빌미가 된다. 이후에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한 많은 글을 쓴다. 광복 후에는 일제하 친일 인물의 대표적 표적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처단법에 의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자열서(自列書)를 특별재판소에 제출하고 한 달 만에 보석 석방된다.

그 이후에도 국사사전 집필과 강의활동을 벌이다가 1955년 천주교에 귀의한다. 최남선은 1955년 10월 10일 서울 종로구 묘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양주군 온수리 선영에 안장된다.

최남선은 현영채와 사이에 4남1녀를 두었다. 맏아들 한인씨(장손 승계로 대를 이음)는 이선영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으며, 이들의 장남 학주씨는 김여애씨와 결혼하였고, 차남 동주씨는 김영열씨와 결혼했다. 최남선의 차남 한웅씨는 이무희씨와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다. 3남은 명주·국주·득주이며, 장녀 기주씨는 이주룡씨와, 차녀 혜주씨는 김중원씨와 결혼했다. 최남선의 3남 한검씨(재북)는 이영자씨와 결혼하였으며, 4남 한혁씨는 연주·정윤 자매를 두었다. 최남선의 장녀 한옥씨는 강건하씨와 결혼하여 2남4녀를 두었다. 2남4녀는 강호·강표 형제에, 옥임·덕임(박중현씨와 결혼)·복임·경임 4자매다.

 

 

 

최남선(崔南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남선(崔南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7월부터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