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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1993년 10월26일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현(宮崎縣) 난고손(南鄕村) 주민들이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겁니다. 뜬금없죠. 왜 남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그것도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낸단 말입니까. 1993년 12월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물구덩이에서 확인된 금동대향로. 백제멸망의 순간을 증언해주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일본 난고손 주민들의 고유제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다들 백제가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고들 배웠겠죠. 그러나 백제는 3년을 더 버팁니다. 결국 663년 백제·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여 패하면서 거셌던 백제 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됩..
백제왕궁박물관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미륵사지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산 아래 구릉 사이에 자리하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미륵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에 창건 기록이 전한다.미륵사지석탑미륵사지 석탑은 사역의 서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국석탑의 시원(始源)이다.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師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던 중 용화산 밑 연못가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해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회랑을 각각 3개소씩 만들었다. 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선 미륵사가 백제의 국력을 모은 국가적 가..
백제왕궁박물관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일반현황유적명 :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1998. 9. 11 지정)지정면적 : 216,862㎡유적 내에 국보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인근지역에 동쪽으로 익산 제석사지 2㎞, 북서쪽으로 익산 미륵사지가 약 4.8㎞ 거리에 위치함.연혁백제 30대 무왕(武王 : A.D.600 ~ 641)대에 조성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됨1965년 : 석탑 해체보수1976년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시굴 조사1989년 ~ 현재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 왕궁리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 부여 나성 1500년 세월을 견뎌낸 사비백제의 역사의 흔적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여 나성' 따라 길을 걷다 보면 백제 수도 사비도성이 자연친화적 공간조경을 지닌 성곽도시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서에서 남으로 흐르는 백마강은 시가지를 품고 자연해자 역할을 했고, 북쪽과 동쪽에는 외곽성인 나성이 백마강을 마주보며 초승달 형태로 시가지를 감싸고 있습니다. 부여 나성 전경 1500년 세월을 견뎌낸 사비백제의 역사의 흔적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여 나성'따라 트레킹에 나서보자. 부여 나성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떠밀리면서 무너지기도 하고 근래 농경지 정리로 사라진 구간도 있다. 그러나 길을 걷다 보면 백제 수도 사비도성이 자연친화적 공간조경을 지닌 성곽도시였다는 사실을 떠올..
■ 부여 관북리유적 충남 부여에서 40년 넘게 진행돼온 백제의 마지막 왕궁지 발굴이 2단계 사업에 접어들었습니다. 부여는 웅진성(지금의 공주)에서 천도한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있던 곳입니다. 사비성은 부여읍 부소산성과 나성 일대를 가리킵니다. 사비백제 왕궁지로 알려진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지, 1982년부터 42년간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왕궁의 중심은 왕이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입니다. 의례 등이 열리던 건물 터가 발굴된 만큼 정전도 곧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합니다.” 2024년 4월 29일 아침 부소산 자락 관북리 유적지에서 만난 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16차 발굴지를 가리키며 “정전 발굴이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16차 발굴지에선..
[부여=뉴시스] 충남 부여왕릉원. (사진= 부여군 제공) 2024.11.0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출처; https://v.daum.net/v/20241101093349569) 중앙과 동·서로 나뉜 부여 왕릉원에는 적어도 20여기의 왕과 왕족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답니다.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고분을 포함한 동·서고분군은 왕은 아니고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답니다.이미 복원 정비된 중앙고분군 7기의 무덤이 사비백제 시대의 왕릉으로 보인답니다. 사비백제 왕과 왕족의 무덤이 모인 백제왕릉원(능산리고분군)의 동고분군에서 새로운 왕릉급 고분이 확인됐다. 백제왕릉원 구역에는 20여기의 왕릉급 무덤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고분은 왕족이 무덤을 추정된다.|백제왕도 ..
2021년 9월 14일부터 2022년 3월6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이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으로 연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전에서 금동 신발 등 왕릉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발굴 이래 최초로 모두 꺼내놓았습니다. 최초로 전시장에 공개된 무령왕의 금동 신발. 발굴 당시 형태가 으스러져 원형을 찾기 어려웠으나 최근 보존 복원 작업을 거쳐 왕비의 신발과 함께 처음 선보이게 됐다. 1500년 전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의 발에 신겼던 큰 금동 신발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구려에 패해 망한 것이나 다름없던 왕조를 웅진(공주) 땅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제왕이었다. 신발은 22년간 재위하며 눈부신 치적을 쌓은 왕이 죽자 슬퍼한 왕족들이 주검에 신겨 무덤에 넣어준 껴묻..
백제역사유적지구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약 700여 년간 존속한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 하나이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 후기(475~660)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웅진시기」는 공주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비시기」 는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부여 나성, 「사비후기」 는 익산 왕궁리유적과 익산 미륵사지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백제역사지구는 과거 백제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중국-백제-일본을 이어주는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류를 통해 불교의 확산과 예술, 건축 기술 등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세계유산적 가치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Ⅱ)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
■ 익산 왕궁리유적 2012년 11월 26일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사적 제408호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북쪽의 후원(後苑) 공간으로, 보도(步道)시설이 잘 남은 북동쪽 성벽과 후원의 중심부를 경계 짓는 환수구(環水溝), 추정 원지(苑池), 곡수로(曲水路)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시기에 조성된 왕궁성(王宮城)으로 지난 1989년부터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 발굴이 이뤄졌으며 이번 조사지역은 2009년부터 발굴하고 있는 유적 북쪽의 후원(後苑) 공간이다. 【대전=뉴시스】박희송 기자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연못으로 추정되는 원지(苑池)와 수로 등이 발견됐다.(출처; https://v.da..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