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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덕수궁에 다녀왔습니다.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습니다.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20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최장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윤형원 국립부여박물관장, 윤근일 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왼쪽부터)이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을 배경으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주 낭산(狼山)은 예부터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神遊林)이 있던 상서로운 곳이다. 20일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을 거쳐 선덕왕릉에 다다르자, 낭산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숲길을 10분쯤 내려갔을까.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폐사지 한 곳이 보였다.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다.2006∼..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5개 지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온조왕조에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국고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1..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때(BC 37년) 졸본(광개토태왕릉비에는 '홀본') 현 랴오닝성 환인 오녀산성에 첫 도읍을 하였고, 2대 유리왕 때(3년)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10대 산상왕 때(209년)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 때(427년)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해서 3번 천도했다고 합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온 것입니다. 출처;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신동아 (donga..
고구려는 여러나라시대에 BC37년부터 668년까지 존속했던 우리 겨레의 가장 강력했던 왕국이었습니다. 왕국이 아니라 제국(Empire)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강역은 어디까지였을까요? 우리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강역 지도가 아래와 같습니다.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고 하기에는 왠지 작아보이는데요.과연 고구려의 전성기 강역이 이 정도였다는 것이사서 기록과 맞는지 궁금합니다. 7차 교육과정 고구려 전성기 지도. 국정 국사 교과서의 지도가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고구려 전성기 강역 지도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와 똑 같습니다. 고구려의 전성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에는 하북성 지역(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은'조선시대의 서울'(상설전시 1존),'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상설전시 2존),'일제 강점기의 서울'(상설전시 3존),'대한민국 수도 서울'(상설전시 4존),'도시모형 영상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서울'(상설전시 1존)은'조선의 건국과 수도 한양','한양의 변화','한양의 번영','한양도성 안 마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조선전기 문신 김사형·이무·이회가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포함하여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현전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한국 천문학 최고의 자랑거리인 문화재로, 현재까지 발견된 천문도 중 관측연대 기준 세계..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 1867~1935년)는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미 1910년 이전에 한반도에 상륙해 각종 고건축 조사를 벌였으며, 일본강점기에는 조선고적조사연구회를발판으로 경주와 평양 일대 등지의 한반도 고고학 조사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세키노 조사단은 1911년 9월 30일 점제현 치지 발견,1911년 10월 15일 장무이묘 발견,1911년 10월 15일 며칠 후 대방군 치지 발견.1913년 9월 23일 낙랑군 치지 발견,1913년 9월 26일 점제현 신사비 발견,그리고 1923년 10월 22일 효문묘 동종을 발견하였습니다.이러한 유적, 유물 등을 근거로 일본은 낙랑군재평양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2011년 2월말에 SBS에서 방영한 '3.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 4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낙랑군 및 고조선의 갈석산과 습수, 열수, 산수, 패수의 위치 ‘낙랑 1’은 심백강과 김봉렬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하북성설’입니다.‘낙랑 2’는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난하설’입니다.‘낙랑 3’은 신채호와 정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낙랑군 재요동설’입니다.‘낙랑 4’는 노태돈과 송호정 등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입니다.(1) 신채호선생은 한사군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
'여러나라시대'는 '열국시대'라고도 쓰고요, 기존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대체하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사실상 고조선(위만조선 포함) 멸망 후 여러 왕국들이 등장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러나라(왕국)시대'라고 봅니다. BC108년 위만조선이 한漢에 멸망하여 그 자리에 한漢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세워 집니다.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인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또 위만조선이 기자조선, 고조선의 영토를 완전히 점유했는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한사군 중 가장 핵심적인 낙랑군이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합니다. 『한사군의 위치를 중국의 요동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한반도 중·북부 및 남만주 일부에 걸쳐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