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발해 (23)
력사를 찾아서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노태맹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

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합니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웁니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습니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

발해국의 고분은 주로 발해 5경(京)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상경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東京城)과중경현덕부가 있던 화룡현 서고성(西古城),그리고 발해 구국도(舊國都)인 동경용원부가 있던 길림성 돈화현의 오동성(敖東城) 주변의 고분군입니다.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주검을 묻은 고분이다. 발해의 고분은 지상이나 지하에 돌을 사용해 무덤을 축조하고 그 위에 흙을 덮는 이른바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이는 고구려 계통의 전형적인 무덤형태이다. 발해국의 고분은 주로 발해 5경(京)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상경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東京城)과 중경현덕부가 있던 화룡현 서고성(西古城..

이형구교수는 발해국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로 발해 5경(京) 가운데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인 동경성(東京城),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인 서고성(西古城),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인 청해토성(靑海土城) 등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 성곽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大祚榮)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震國)’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渤海)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업에 소홀했..

러시아 연해주 서남부 지역에서 발해의 말갈 지배 사실을 입증해주는 청동제 풍탁(風鐸)이 나왔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 8월 2일부터 한 달간 연해주 라즈돌나야 강가 구릉에 자리한 시넬니코보-1 유적의 보루(堡壘) 내부를 조사해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약 10㎝의 청동제 풍탁을 발견했다고 10월 19일 밝혔다. 시넬니코보-1 유적의 보루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풍탁. [문화재청 제공] 풍탁은 풍경처럼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으로, 말갈의 힘이 미쳤던 지역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 유물이다. 말갈은 만주족의 선조로, 만주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족지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는 청동제 풍탁 외에도 말갈과 발해의 ..

“연해주에 들어선 최초의 고대 국가는 발해(渤海)였다.” 2012년 10월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러시아 극동연방대 부총장이 산운 장도빈 선생 기념비 제막식 때 남긴 연설이다. 사실 연해주는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역사 강역이었다. 1일 러시아 연해주 콕샤롭카 발해 성터에서 김동훈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왼쪽)와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선사고고실장이 2014년 발굴된 ‘제사 유구’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위구르계 토기가 출토됐다. 콕샤롭카=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1일(현지 시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400km를 달리자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평원이 나타났다. 궁벽한 시골마을 콕샤롭카다. 가슴 높이까지 자란 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