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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자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신채호는 영토와 국권(國權)을 확장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 즉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신채호는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나 조선인 이주지로 생각했을지언정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만주를 고토회복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저술에서도 만주수복론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를 주목한다면,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수적인 자강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류공동의 국제주의적 세계관 속으로 민족의식을 흡수하여 열려진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

그의 고조선 연구로 교과서에서 일제가 고조선 역사를 허구화하기 위해 만든 단군 '신화'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사군이 중국 허베이성의 난하(灤河)와 요하(遼河) 하류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써 고조선 때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한반도 북쪽에 가져다놓았던 한사군의 위치 지도가 교과서에서 없어졌다. 고조선의 영토가 현재의 요하에서 난하까지로 넓어진 것은 물론이다. 고조선을 서기전 2333년 세워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명확하게 기술하게 된 것도 의미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2009년 교과서에는 다시 단군신화라는 말이 등장했다. 지난해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나랏돈을 써가며 한사군의 위치를 조선총독부가 주장하던 대로 한반도 북쪽에 가져다놓은 영문판 역사책을 출판한 사실이 드..

정인보(1893년(고종 30)~미상)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온조왕조에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한국고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1..

유득공(1748년(영조 24)~1807년(순조 7))은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춘(柳瑃)이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
신채호선생님은 《한서》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한나라 낙랑군의 25개 현은 원래 낙랑국 소속의 25개국이었으며, 낙랑국은 지금의 평안·황해를 포함해서 강원·함경의 일부까지 소유했다고 보았습니다. ■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 옛 도읍 평양에서는 최씨가 등장해 주변 25개국을 복속시키고 하나의 대국을 이루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낙랑국이다. 마한은 낙랑이 분리해 나가면서 임진강 이북을 상실했지만, 이남의 70여 개국은 여전히 다스렸다.(1)■ 낙랑 25개국과 남삼한 70여 국 낙랑에 속한 국가 중에서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25개다. 조선·감한·패수·함자·점선·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루방·제해·혼미·탄렬·동이·불이·잠태·화려·야두미·전막·부조다. ..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과 중국 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골·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만주·터키·조선 네 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몽골제국시대에 상호작용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지명·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 겨레 력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목차 야발 편집 1. 통사 1.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 〈조선 민족의 구별〉 1.2 2007년 3월 13일 서울신문 〈“中 동북공정은 패권주의 역사관, 요동· 한반도 하나의 역사로 봐야”〉 1.3 2007년 3월 15일 헤럴드경제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 는 韓民族”〉 1.4 2007년 7월 31일 동아일보 〈中 동북공정에 영향 받은 역사학계 4가 지 새 인식틀〉 1.5 2007년 10월 16일 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 ‘발해문명’ 창조 주인 공은 우리 민족〉 1.6 2008년 2월 28일 플러스코리아 〈문헌으로 보는 동방문명의 뿌리 韓族〉 1.7 2008년 3월 31일 플러스코리아 〈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동북공정은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