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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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樂浪國) 또는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은 1세기경인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비정되는 국가이다. 추정하는 위치나 이름으로 인해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과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국 왕의 존재로 편의를 위해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
역사
[편집]서기 14년,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것을 기화로, 낙랑 역시 신라를 공격하였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낸다.[2] 신라 본기에 따르면 37년에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사가 있어, 32년으로 기술한 위의 기록과 멸망 시점이 엇갈린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 대무신왕#낙랑 정벌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낙랑과 낙랑군
[편집]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가 낙랑의 위치로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국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랴오닝성 지역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의 고분 및 유물들이 모두 낙랑국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5] 또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6] 동예 일대에 위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7]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김부식 (1145) 남해 차차웅 조(條)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 知賊衆乃止” (즉위 11년(14년)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 동쪽에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서 적의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중지하였다.)
- ↑ 《삼국사기》에는 이 멸망 기사 이전에도 백제 및 신라가 그 초기에서부터 낙랑과 군사적 갈등을 겪은 기사가 꾸준히 등장하나, 대부분은 낙랑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다만 위의 멸망 기사는 최리를 태수가 아닌 낙랑의 '왕(王)'으로 칭하고 있어 '낙랑'의 성격이 모호해진다. '왕'으로 칭하고 있으니 한나라의 군인 한사군은 아니며 또 다른 나라, 즉 낙랑국이 존재한다는 설이 있다.
- ↑ 권오중,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 ↑ 문안식,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전통문화연구》5, 1997
- ↑ 《역사연구》, 조선사회과학원 민족문화연구소 (정확한 권호수, 필자, 연도 등은 불명)
- ↑ 신채호, 《조선상고사》 / 박선희 교수,
- ↑ 〈출토 옷감서 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브레이크뉴스》, 2011년 12월 5일
참고 문헌
[편집]
신채호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 옛 도읍 평양에서는 최씨가 등장해 주변 25개국을 복속시키고 하나의 대국을 이루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낙랑국이다. 마한은 낙랑이 분리해 나가면서 임진강 이북을 상실했지만, 이남의 70여 개국은 여전히 다스렸다.
얼마 뒤 중국과 흉노의 침공을 피해 북방에서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불 조선 유민이 날로 많아졌다. 그러자 마한은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00여 리를 떼어 신조선 유민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치 조직을 만들어 진한부(辰韓部)라고 명명했다. 또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또 다른 부분을 불조선 유민들에게 떼어주고, 역시 자치 조직을 세운 뒤 변한부(卞韓部)라 불렀다. 변한에는 신조선 유민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변진부(卞辰部)라고도 불렀다. 진한·변한과 더불어 마한을 남(南)삼한이라 한다.
마한이 굳이 진·변 두 한을 세운 것은, 삼신 사상에 따라 삼한이란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대단군왕검의 삼한 제도에서는 신한이 중심이고 말·불 두 한은 보조자였다. 하지만 남삼한에서는 말한, 곧 마한이 최강국 즉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약소국 즉 소속 국가가 된 것은, 이주민의 계통에 따라 명칭을 지은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삼한은 각각의 왕을 다들 신한이라고 했다. 마한의 왕은 말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했다. 이로써 신한이 세 개가 되었다.
삼한이 각기 존재한 것은 왕검 때 지은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고, 신한이 세 개가 된 것은 삼조선 분립 이후 저마다 신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진한·변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직했기 때문에 이름만 있고 실질은 없었다. 이것은 남삼한 때 처음 생긴 일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에서 특히 논쟁이 많은 존재다. 기존 학자들은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삼한 즉 남삼한에 의거해서 삼한의 위치를 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삼한 명칭의 유래와 삼한 체제의 변혁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비록 공은 많이 들였지만, 북방에 있었던 원래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삼한 내부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밝히지 못했다.
깊이 읽기 마한·진한·변한에 속한 국가의 수
이번 장의 앞부분에서는 “마한 50여 나라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이 있었다”(A)고 한 데 비해, 여기서는 “마한은 낙랑이 분리해 나가면서 임진강 이북을 상실했지만, 이남의 70여 개국은 여전히 다스렸다”(B)라고 하여, 두 개의 언급이 일견 일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A에서는 마한에 50여 국이 속했다고 했고, B에서는 마한에 70여 국이 속했다고 했다.
《삼국지》 〈동이 열전〉에 따르면 마한연맹에 속한 나라는 56개였다. A문장은 이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진한과 변한도 각각 연맹체를 이루기는 했지만 마한의 통할을 받았다. 《삼국지》 〈동이 열전〉에 따르면, 진한과 변한에 속한 국가는 총 24개국이었다. B 문장은 진한과 변한도 마한의 일원이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마한·진한·변한에 속한 국가의 합계는 《삼국지》 〈동이 열전〉에 따르면 80개였다.(1)
낙랑 25개국과 남삼한 70여 국
낙랑에 속한 국가 중에서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25개다. 조선·감한·패수·함자·점선·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루방·제해·혼미·탄렬·동이·불이·잠태·화려·야두미·전막·부조다. 이들 25개국은 《한서》 〈지리지〉에 한나라 낙랑군의 25개 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의 《한서》 본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입하기 전에 신하와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조선의 옛 땅이 거의 다 중국의 영토였다며 역사를 조작하고자 이전 중국 역사책에서 조선과 관계되는 글을 상당 부분 고쳤다. 이윽고 낙랑국 소속의 25개국을 낙랑군 소속의 25개 현으로 고쳐서 〈지리지〉에 넣었다.
25개국 중에서 ‘조선’과 ‘패수’는 평양에 있었다. ‘조선’은 곧 ‘말조선’의 옛 땅이었기에 이것이 나라의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낙랑의 종주국이 되었다. 패수는 ‘펴라’로 읽는데 24개 속국의 하나였다. 조선국과 패수국의 관계는 평양감사(평안도 관찰사)와 평양부윤의 관계 같았다. 그리고 소명국은 지금의 춘천 소양강에 있었고, 불이국은 뒤에 동부여가 된 나라로 지금의 함흥에 있었다. 그러므로 낙랑국은 지금의 평안·황해를 포함해서 강원·함경의 일부까지 소유했다.(2)
윤내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씨낙랑국이었다.
대동강 유역의 낙랑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보는 일부 학자들은 그 근거로 고대 중국 문헌에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과 《수경주》에서 지금의 대동강을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로 단정한 기록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 문헌에 낙랑군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평양이었다. 원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읍 또는 도읍을 의미하기 때문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경주》에서는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은 한사군의 낙랑군 땅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낙랑군 안에 있었던 패수를 찾음으로써 당시 패강으로 불렸던 대동강을 낙랑군의 패수로 단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수는 여러 곳에 있었던 강 이름이므로 고구려의 도읍이 낙랑군 땅이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낙랑군의 패수를 찾은 것은 잘못이다.
고대 중국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삼국사기》에서는 대동강 유역에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두 개의 다른 낙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난하 유역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고 다른 하나는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씨낙랑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한국 문헌과 중국 문헌에 보이는 낙랑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잘못 인식하고 그 위치가 대동강 유역이었던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임이 이 글을 통해서 밝혀졌다.
최씨낙랑국은 난하 유역에 있었던 낙랑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에 위만조선이 서자 동쪽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였다. 그런데 위만조선이 서한에게 멸망되고 난하 유역의 낙랑 지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됨에 따라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이 낙랑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병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낙랑국은 건국 초에 고구려와는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북변을 여러 번 침략하였다. 일시적으로는 그 영토를 지금의 춘천 지역까지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씨낙랑국은 서기 32년에 예상하지 못했던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약화되어 서기 37년에는 나라를 잃는 고충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잃은 지 7년 뒤인 서기 44년에 동한 광무제의 도움으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당시에 동한은 동쪽에서 성장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최씨낙랑국의 재건을 도왔던 것이다. 동한은 최씨낙랑국의 재건을 도운 뒤 그곳에 행정연락처와 무역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곳은 주로 한사군의 낙랑군과 행정연락을 했던 것 같다. 낙랑군에서 보낸 공문을 봉인했던 봉니들이 대동강 유역에서 많이 출토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일본인들이 이른바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로 발표한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은 최씨낙랑국이 남긴 것들이다. 그곳에서 출토된 중국 유물은 최씨낙랑국이 재건된 뒤 그 지배귀족들이 중국에서 예물로 받은 것들과 당시에 그곳에서 거주해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동한에서 최씨낙랑국 영토 안에 설치했던 행정연락처나 무역기지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한이 멸망한 뒤로 중국은 삼국 · 양진 ·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어 밖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씨낙랑국은 재건된 뒤에도 국력이 약하여 그 활동이 미약했던 것같다. 서기 300년에 대방국과 더불어 신라에 귀복하여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그 활동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첫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의 백제가 낙랑군의 변경을 습격했다는 기록과, 분서왕 7년조의 백제가 낙랑의 서부 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들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던 것처럼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백제는 지금의 난하 서부유역인 북경과 천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던 낙랑군을 쳤던 것이다.
둘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조의 화려 · 불내의 두 현 사람들이 신라를 쳐들어왔다는 기록이다. 낙랑군에는 화려와 불이라는 현이 있었는데, 불이는 불내와 통하므로 이 기록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신라와 가까이 있었던 것처럼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화려와 불내는 최씨낙랑국에 있었던 지명이었다. 최씨낙랑국은 난하 유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건국했기 때문에 원래 그들이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이 많았다. 낙랑이라는 나라 이름부터가 그러했다. 화려와 불이도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었는데, 그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그곳은 현의 이름이 되었고, 그곳에서 최씨낙랑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최씨낙랑국 안에서 화려와 불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당시에 패강으로 불리던 대동강을 낙랑군에 있었던 패수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당서》에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인데 그 남쪽이 패수에서 끝났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의 편찬자는 《당서》에 나오는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당서》에 나오는 평양성은 난하 유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낙랑군이나 그 안에 있었던 패수는 난하 유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그곳은 낙랑군이 있었던 곳임에 틀림없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서 그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인지 아닌지 결정되는 것이다. 유적과 유물 자체에는 그곳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고 기록된 것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3)
박선희
출토옷감서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특별기고>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많은 양의 누에천(실크)이 출토되었다. 직물은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복식유물의 한 구성부분으로 출토되었는데, 누에천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출토된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자료는 당시의 사회와 경제수준을 가름할 수 있게 해 줄 뿐 만 아니라, 무덤 주인의 국적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기존의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본 평양설과 북한학자들에 의해 대두된 요동설, 그리고 요서지역에 위치할 것으로 보는 난하설로 구분된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복식유물에 관한 분석은 비교적 소홀히 되었고, 복식유물 가운데 직물에 대한 비교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직물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일제시대 교도섬유대학에서 처음으로 평양 낙랑구역에 위치한 왕우무덤, 채협총, 토성동 486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진 누에천을 실험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광무덤이나 정백리무덤과 마찬가지로 이 무덤들이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유적일 것으로 분류되어 출토된 직물의 문화적 성격도 당연히 중국 한나라의 생산품일 것으로 단정되었다.
이처럼 일본 학자들이 한국 고대 누에천에 대해 단순한 분석의 틀을 가지는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일본학자들은 대동강유역을 낙랑군의 위치로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하였고, 또한 고조선에서 누에천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고 믿어왔다. 종속적 해석의 연구 경향은 요즈음 신진학자들의 연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은 서기 전 12세기 말경 箕子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정론처럼 통용되었다. 그 까닭은 문헌자료인 漢書와 後漢書에 기재된 서로 다른 내용을 무분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중국에서 사직물 생산은 서기전 2700년경부터였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인 서기전 2209년경부터 중국과 계속 우호적인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 시기에 중국은 500년 이상 축적된 양잠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도 양잠기술을 수입하지 않고 있다가 서기전 12세기경에 와서야 비로서 箕子로부터 양잠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양잠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므로 기자에 의하여 고조선에 양잠기술이 전달되었다는 후한서 「동이열전」에 나오는 기록은 기자의 치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된 것이었다.
고대 한국은 중국에서 누에천을 생산한 시기인 서기전 2700년보다 앞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이미 야생누에로부터 누에천을 독자적으로 생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요령성 동구현 后洼유적에서 누에의 조소품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자들은 이 유적의 연대를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으로 밝혔다. 홍산문화에 속하는 내몽고 파림우기 나사태유적 등에서도 옥으로 만든 누에가 출토되었다. 또한 고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통잎뽕나무 조각무늬가 새겨진 질그릇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한민족의 거주지역에서 메누에로부터 토종 뽕누에로 순화된 시기가 신석기시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학자 조희승이 평양의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고조선시기의 누에천을 실험‧분석한 결과 고조선에서 생산했던 누에천의 독자성과 고유성이 확인되었다.
조희승은 해방 전후시기에 낙랑구역 11개 무덤들에서 출토된 누에천을 실험 분석하여 그 특징을 정리하였다. 또한 이를 근거로 일본 교도섬유대학에서 진행한 무덤들의 분석결과는 한민족이 생산한 누에천의 특징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누에천의 특징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의 누에품종이 중국의 넉잠누에가 아닌 석잠누에라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이 평양일대에서 출토된 누에천은 조선 토종의 석잠누에로 부터 뽑은 것이 틀림없지만 그 연원은 중국의 산동일대에서 넘어 온 중국계통 석잠누에라고 한 주장을 반박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 출토된 絹직물(가공하지 않은 누에실로 짠 천)과 縑직물(가는 누에실을 겹쳐 촘촘히 짠 천), 羅직물(누에실로 성글게 짠 천)에 대한 분석 내용을 중국 누에천과 비교하면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에 속하는 직물이 출토된 평양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한민족이 생산한 석잠누에의 누에천 만이 출토되었다.
둘째는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누에천들은 같은 시기 중국의 것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독창적인 직조방법과 염색기술 등을 갖는다.
셋째는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위 표에 보이는 직물들이 생산된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2세기까지의 기간에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위치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낙랑구역의 직물들이 보여주는 여러 사실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종래의 통설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는 직물과 함께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만들어진 유물도 있지만 한민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석암리 212호 무덤유적에서는 요녕성과 한반도 지역의 특징적 청동기인 세형동검과 함께 검자루 맞추개가 출토되었고, 고조선시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마구장식과 청동단추, 청동방울, 잔줄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낙랑구역 정백동의 부조예군무덤에서는 고조선 유물의 특징인 여러 개의 청동방울과 함께‘夫租薉(濊)君’이라고 새겨진 銀印이 출토되었는데, ‘부조예(예)군’은 고조선과 위만조선에서 사용했던 관직명이었음이 이미 밝혀진바 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구결과와 함께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사직물이 고조선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밝혀져 이를 뒷받침한다. 왕우무덤(석암리 205호 무덤)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永平 12년”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영평 12년은 東漢 明帝시대로서 서기 69년이다. 이로 보면 왕우무덤이 조성된 연대는 서기 69년 보다 이르지 않을 것이다.
토성지역에서는 ‘樂浪禮官’·‘樂琅富貴’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에 낙랑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것이 출토되어 이 지역을 한사군의 낙랑군지역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지역에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기 때문에 낙랑예관 · 낙랑부귀 등의 명문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문은 이 지역이 반드시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기와의 명문은 서예사적인 연구에서도 중국과 구별되는 한민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기와 명문의 필획에 나타나는 특징에서 볼 때 중국의 기와명문이 명문을 중심으로 문양과 독립적으로 발전한 데 비하여 낙랑의 기와명문은 문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문양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즉 낙랑 기와명문에서 나타나는 필획이 문양화되고 점획이 圓點化하는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자를 주된 장식 수단으로 하는 중국미술에 비하여 문양을 주된 장식수단으로 하는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채협무덤(남정리 116호 무덤)에서는 목찰이 출토되었다. 木札의 내용은,“비단 3필을 옛 관리인 조선승 전굉이 아전을 보내어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에 대하여 북한학자 손영종은 조선승 전굉이 그 부근에 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오히려 전굉이 채협무덤 피장자 밑에서 복무하다 먼 곳인 낙랑군으로 가서 조선승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재물을 보냈다고 해석해야 할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일제시기 토성지역에서는 약 200개의 봉니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위조품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인들이 대동강유역에서 발굴한 유적에서 낙랑과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자 그것들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에 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대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에는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러면 이시기 평양의 낙랑구역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살았을까?
고대 문헌에 나타난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시대 최리왕이 다스리던 낙랑국이 있었다.
일찍이 이익과 신채호가 한사군과 다른 최리의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밝혔다.
즉 이익은 낙랑을 낙랑군과 낙랑국으로 나누고 낙랑군은 요동지역에, 낙랑국은 대동강유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낙랑을 남낙랑과 북낙랑으로 나누고, 남낙랑은 대동강유역의 낙랑국으로 최리왕이 다스렸던 나라이고, 북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라고 했다.
이후 리지린과 윤내현이 그 연구 내용에서 조금씩 차이를 갖지만, 대동강유역에 있었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인 것으로 밝힌 바 있다.
최리가 다스렸던 낙랑국의 위치에 대한 다음의 문헌 기록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조(서기전 3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에 놀러 갔다 낙랑국의 최리왕을 만나 나눈 대화가 있다. 최리왕이 호동에게,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가 북쪽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물었다. 최리왕이 대화에서 고구려가 북쪽 나라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 영토의 남쪽 경계는 어디까지 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당시 고구려는 “4년(서기 57년)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 경계를 개척하여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무신왕 이후 태조대왕 시기까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변화가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대무신왕 때 남쪽 국경도 살수 즉, 청천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 위치는 청천강 이남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예전에는 예의 서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고, 한전에서는 마한의 북쪽에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 왜와 가깝게 있다고 하였다. 마한이 당시 북쪽으로 황해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앞의 후한서 「동이열전」에 설명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그 위치는 대동강유역으로 고구려의 남쪽 경계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 서술한 羅직물은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한 것이었다. 이 시기 실제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로 한다. 낙랑국의 존속기간을 살펴보면,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은 가장 이른 기록이 서기전 28년에 보이고 있어 건국은 이보다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 15년(서기 32년)에 낙랑왕 최리의 공주가 왕자 호동의 지시로 적이 나타나면 알려주는 鼓角을 부수게 되어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차츰 약화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나 서기 37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 다시 서기 44년에 낙랑국은 동한 광무제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서기 300년 대방국과 함께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존속했다.
위의 내용으로부터 낙랑국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경에 건국되어 서기 300년까지 존속했으므로 표에 보이는 서기전 1세기 전후한 시기에 속하는 羅직물과 絹직물 및 서기 2세기경에 속하는 縑직물들은 낙랑국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낙랑국이 대동강유역에 위치하였으므로, 한사군의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에게 축출되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보았을 때 다음의 사실이 정리된다. 즉 서기 300년에 멸망한 낙랑은 최리왕의 낙랑국으로 대동강유역에 위치해 있었고,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한사군의 유적과 유물로 해석한 낙랑구역에서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은 최리왕의 낙랑국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랑구역의 여러 무덤에서는 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칠기는 서한무덤과 흉노무덤 등에서 출토된 칠기와 비교한 결과 황실용으로 낙랑군의 관리나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음도 밝혀진바 있다. 그리고 일본학자들은 서기 1세기 초에 속하는 석암리 9호무덤에서 출토된 용무늬금띠고리의 금세공기술도 이미 중국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중국 漢문화로 볼 수 없다고 분석한바 있다. 또한 낙랑구역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의 분석결과 이웃나라의 것과 달리 산화연을 유리의 주원료로 사용한 연유리와 소다유리, 회분유리등으로 한민족 유리의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대동강유역 유물들에 관한 다양한 분석내용은 낙랑유적의 금속유물들이 중국의 것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 견해와 함께 복식방면에서도 종래의 잘못된 견해를 수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복식재료를 자료로 평양 낙랑지역 문화의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것은 복식이 고고학적 유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이기 때문이다. 복식의 특성 연구는 곧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밝히고, 복식양식과 자료의 고유성에 관한 분포 연구는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를 파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평양낙랑 유적의 복식유물도 그 재료적 특성과 직조기술을 통해서 그 지역 거주 민족의 정체가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었음을 추적할 수 있다. 복식유물의 국적을 알게 되면, 해당 복식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 주민들의 국적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복식이 민족적 정체성을 증언하는 시각적 기호이기 때문이다.(4)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하도겸 칼럼] 낙랑국과 대방, 그리고 말갈의 역사
등록 2014.12.18 15:25:35수정 2016.12.28 13:50:06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뜻으로 보는 삼국유사’ <5>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한서 지리지에 설명(주)을 단 응소(應邵)는 낙랑군이 ‘고조선국’이라 했다.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싶었나 보다. 죽어도 고조선을 지배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은 몇 번이나 패배했던 그들의 열등감의 표현인가? 그래선지 ‘신당서’도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주를 달았다. 당연한 사실이라면 왜 이리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회장은 내가 “회장이야” 또는 “내가 전에 네 상사였지!”라고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
낙랑이라고 하면 고조선 관련 문헌만 있는 게 아니다. 신라 사람들도 스스로 낙랑이라고 했나 보다. 지금 우리 고려(高麗)에서도 그쪽 출신 부인들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부른다. 태조(太祖) 왕건이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낼 때도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는 기사도 있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에 죽담성(竹覃城)이 있었다. A.D. 27년 대방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 낙랑과 대방 둘 다 전한 때 설치한 군(郡)이다. 그 후에 참람되게 나라(國)라고 하더니 이때에 와서 항복했다.
남대방(南帶方)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때 남대방군(지금의 南原府)을 뒀다. 대방의 남쪽에는 천리나 되는 바다 한해(澣海)가 있다. A.D. 196∼219년 사이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해 드디어 왜(倭)와 한(韓)과 접하게 됐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발해는 본래 속말(粟末) 말갈이다. 추장(酋長) (대)조영(祚榮)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712년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만 했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왕위에 오르자 우리 황제(당 현종)가 왕에 책봉했다. 그런데 우리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스스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만들며 해동(海東)의 큰 나라로 컸다. 5경(京)·15부(府)·62주(州)의 지방행정제도를 뒀다. 926년 거란(契丹)이 발해를 공격해서 이긴 이후로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고 중국 역사서인 ‘통전(通典)’은 ‘발해’가 ‘당’에게 까불다가 ‘거란’한테 혼났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678년 고구려 후예들이 북쪽 태백산(太伯山) 부근에서 발해를 세웠다. 732년 당 현종이 장수를 보내 발해를 공격했다. 734년에는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현종은 겨우 막아냈다.'는 ‘삼국사’와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발해를 세웠다.'는 ‘신라고기(新羅古記)’ 기사들을 일연스님은 용케도 찾아냈다. 그러고는 '여러 문헌을 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別種)으로 이후 갈라지기도 합치기도 해서 서로 좀 다르게 기재되었을 뿐이다.'고 분석했다.
‘지장도(指掌圖)’는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다.'고 했다. 가탐(賈眈)이 지은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 지리지에서 삭주 영현(領縣)으로 지금의 용주(湧州)로 비정되는 신라 천정군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驛)이 있다'고 했다. ‘삼국사’에는 '백제 멸망 후 발해·말갈·신라가 그 땅을 나눠 가졌다'고 했다. 이들 문헌을 보면 발해는 또 말갈과 갈라져서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이외에도 말갈 관련 기사는 더 있다. 신라인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우리 신라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 서쪽에는 백제가 있어 우리나라의 해가 되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지금의 동진(東眞)인 말갈에 접해 있다. A.D. 125년 말갈군사들이 신라 북쪽 국경을 대거 넘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넘어갔다'는 기록도 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을 물길(勿吉)'이라고 했으며 ‘지장도’에는 '읍루와 물길이 모두 다 숙신(肅愼)이다'라고 했다. 일단 여기에 다 전하니, 후일 역사가들이 잘 공부해주기를 바란다.
* 이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 있다는 상상에 기반을 둔 재해석이다. ‘삼국유사’ 자체가 일연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 재편됐을 것이기에 조목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한 것도 있음을 알린다.(5)
dogyeom.ha@gmail.com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낙랑 25개국과 남삼한 70여 국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146-149쪽
(4) 출토옷감서찾은 낙랑공주 '최리왕 낙랑국' (breaknews.com) 2011/12/05
(5)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4.12.18 15:25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