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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낙랑국

낙랑국 (1) 낙랑 25개국

대야발 2024. 7. 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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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선생님은 《한서》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한나라 낙랑군의 25개 현은 원래 낙랑국 소속의 25개국이었으며, 낙랑국은 지금의 평안·황해를 포함해서 강원·함경의 일부까지 소유했다고 보았습니다.

 

 

■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 옛 도읍 평양에서는 최씨가 등장해 주변 25개국을 복속시키고 하나의 대국을 이루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낙랑국이다. 마한은 낙랑이 분리해 나가면서 임진강 이북을 상실했지만, 이남의 70여 개국은 여전히 다스렸다.(1)




■ 낙랑 25개국과 남삼한 70여 국

 

낙랑에 속한 국가 중에서 역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25개다. 조선·감한·패수·함자·점선·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루방·제해·혼미·탄렬·동이·불이·잠태·화려·야두미·전막·부조다.

 

 

이들 25개국은 《한서》 〈지리지〉에 한나라 낙랑군의 25개 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의 《한서》 본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입하기 전에 신하와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조선의 옛 땅이 거의 다 중국의 영토였다며 역사를 조작하고자 이전 중국 역사책에서 조선과 관계되는 글을 상당 부분 고쳤다. 이윽고 낙랑국 소속의 25개국을 낙랑군 소속의 25개 현으로 고쳐서 〈지리지〉에 넣었다.



25개국 중에서 ‘조선’과 ‘패수’는 평양에 있었다. ‘조선’은 곧 ‘말조선’의 옛 땅이었기에 이것이 나라의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낙랑의 종주국이 되었다. 패수는 ‘펴라’로 읽는데 24개 속국의 하나였다.

 

조선국과 패수국의 관계는 평양감사(평안도 관찰사)와 평양부윤의 관계 같았다. 그리고 소명국은 지금의 춘천 소양강에 있었고, 불이국은 뒤에 동부여가 된 나라로 지금의 함흥에 있었다. 그러므로 낙랑국은 지금의 평안·황해를 포함해서 강원·함경의 일부까지 소유했다.(2)

 

 

 

 

윤내현교수님은 최씨낙랑국은 난하 유역에 있었던 낙랑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에 위만조선이 서자 동쪽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만조선이 서한에게 멸망되고 난하 유역의 낙랑 지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됨에 따라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이 낙랑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병존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씨낙랑국이었다. 

대동강 유역의 낙랑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보는 일부 학자들은 그 근거로 고대 중국 문헌에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과 《수경주》에서 지금의 대동강을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로 단정한 기록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 문헌에 낙랑군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라 난하 유역에 있었던 평양이었다. 원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읍 또는 도읍을 의미하기 때문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경주》에서는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은 한사군의 낙랑군 땅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낙랑군 안에 있었던 패수를 찾음으로써 당시 패강으로 불렸던 대동강을 낙랑군의 패수로 단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수는 여러 곳에 있었던 강 이름이므로 고구려의 도읍이 낙랑군 땅이었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낙랑군의 패수를 찾은 것은 잘못이다.

 

 

고대 중국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삼국사기》에서는 대동강 유역에 최리왕이 다스렸던 낙랑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두 개의 다른 낙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난하 유역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고 다른 하나는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씨낙랑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한국 문헌과 중국 문헌에 보이는 낙랑을 모두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잘못 인식하고 그 위치가 대동강 유역이었던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임이 이 글을 통해서 밝혀졌다.

 

 

최씨낙랑국은 난하 유역에 있었던 낙랑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에 위만조선이 서자 동쪽의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였다. 그런데 위만조선이 서한에게 멸망되고 난하 유역의 낙랑 지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됨에 따라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씨낙랑국이 낙랑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병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낙랑국은 건국 초에 고구려와는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북변을 여러 번 침략하였다. 일시적으로는 그 영토를 지금의 춘천 지역까지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씨낙랑국은 서기 32년에 예상하지 못했던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약화되어 서기 37년에는 나라를 잃는 고충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잃은 지 7년 뒤인 서기 44년에 동한 광무제의 도움으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당시에 동한은 동쪽에서 성장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최씨낙랑국의 재건을 도왔던 것이다. 동한은 최씨낙랑국의 재건을 도운 뒤 그곳에 행정연락처와 무역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곳은 주로 한사군의 낙랑군과 행정연락을 했던 것 같다. 낙랑군에서 보낸 공문을 봉인했던 봉니들이 대동강 유역에서 많이 출토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일본인들이 이른바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로 발표한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은 최씨낙랑국이 남긴 것들이다. 그곳에서 출토된 중국 유물은 최씨낙랑국이 재건된 뒤 그 지배귀족들이 중국에서 예물로 받은 것들과 당시에 그곳에서 거주해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동한에서 최씨낙랑국 영토 안에 설치했던 행정연락처나 무역기지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한이 멸망한 뒤로 중국은 삼국 · 양진 · 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어 밖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씨낙랑국은 재건된 뒤에도 국력이 약하여 그 활동이 미약했던 것같다. 서기 300년에 대방국과 더불어 신라에 귀복하여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그 활동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첫째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조의 백제가 낙랑군의 변경을 습격했다는 기록과, 분서왕 7년조의 백제가 낙랑의 서부 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들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던 것처럼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백제는 지금의 난하 서부유역인 북경과 천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난하 동부유역에 있었던 낙랑군을 쳤던 것이다.

 

 

둘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조의 화려 · 불내의 두 현 사람들이 신라를 쳐들어왔다는 기록이다. 낙랑군에는 화려와 불이라는 현이 있었는데, 불이는 불내와 통하므로 이 기록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신라와 가까이 있었던 것처럼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화려와 불내는 최씨낙랑국에 있었던 지명이었다. 최씨낙랑국은 난하 유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건국했기 때문에 원래 그들이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이 많았다. 낙랑이라는 나라 이름부터가 그러했다. 화려와 불이도 난하 유역에 있었던 지명이었는데, 그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그곳은 현의 이름이 되었고, 그곳에서 최씨낙랑국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최씨낙랑국 안에서 화려와 불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당시에 패강으로 불리던 대동강을 낙랑군에 있었던 패수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당서》에 평양성은 한의 낙랑군인데 그 남쪽이 패수에서 끝났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의 편찬자는 《당서》에 나오는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당서》에 나오는 평양성은 난하 유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낙랑군이나 그 안에 있었던 패수는 난하 유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그곳은 낙랑군이 있었던 곳임에 틀림없다고 믿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서 그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과 유물인지 아닌지 결정되는 것이다. 유적과 유물 자체에는 그곳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고 기록된 것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3)

 

 

 

 

 

<자료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낙랑 25개국과 남삼한 70여 국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146-149쪽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이기훈, 동이한국사, 책미래, 2021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낙랑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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