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남국/조선 (27)
력사를 찾아서
경희궁에 다녀왔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이었습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습니다.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입니다.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 1902년경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
창덕궁 바로 옆에 있는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창경궁 전경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에 다녀왔습니다. 창덕궁 전경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습니다.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 세금 운반선의 비밀 마도 1·2·3호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마도 4호선에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마도 4호선’은 마도 해역의 확장 조사 중에 확인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선체 내부에서 분청사기 150여 점 확인됐다.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판단됐다. 그 중에는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 유물이 보였다. 우선 ‘내섬(內贍)’명 사기가 3점 눈에 띄었다.1403년(태종 3) 6월 29일 설치된 ‘내섬(시)’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는 호조 산..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1932년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는데요, 고고학적인 발굴이라기 보다는 발견이라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1932년 10월 6일 강원도 준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사 중이던 인부들이 돌 상자를 발견했는데요, 그 속에 사리를 잘 모셔두기 위한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서울=뉴시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중 은제금도금라마탑형사리기와 유리제사리병(가운데)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5.26. photo@newsis.com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를..
양주 회암사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持空·1300∼1363)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어서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1990년부터 시작한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진행합니다.고종 때 중건 당시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 있던 건물은 36개동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강녕전·교태전 등)-후원(건청궁) 등으로 이어지는 중심축과 태원전(임금 초상화를 모신 곳), 동궁(자선당·비현각 등), 함화당 및 집경당 등 보수·복원이 마무리되었습니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중건 당시의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있던 건물은 36개 동에 불과했다. 1차 복원계획이 끝난 2010년까지 총 125동(기존 36개동 포함)에 달했다. 문화재청은 2차 복원 기간(2011~2045년)에 80개동을 더..
2019년부터 진행한 광화문광장 조성 과정에서 조선시대 주요 관청의 흔적이 발굴됐습니다. 지금의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로 일대까지 뻗어있었던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서울의 핵심거리로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를 비롯한 6조(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가 있었습니다. 삼군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의 외행랑, 배수로, 건물지의 터가 확인됐고요, 중추부의 건물자리, 사헌부(지금의 감사원, 검찰)와 병조의 문지, 행랑, 담장, 우물, 배수로 터, 형조와 공조의 배수로 터, 그리고 민가 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에서 드러난 조선시대 육조거리.①지점에선 삼군부의 외행랑, 배수로, 건물지의 터가 확인됐다.②지점에서는 중추부의 건물 자리가,③지점에선 사헌부와 병조의 문지·행랑·담장·우물..
2003년 12월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구 청진동에서 건설사(르메이에르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현장에서 건물 기초석인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은 돌)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문화재를 발견했다’고 신고하여, 한국건축문화연구소(명지대 부설)가 본격 발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연합뉴스) 서울 도심 종로 한복판인 '서울 종로 청진2-3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바닥을 드러낸 조선시대 시전행랑(아래쪽). 조사 결과 시전행랑 뒤 피맛길에서 청진동으로 통하는 쪽에서는 이문(里門)이라는 조선시대 문터가 드러나기도 했다. 오른쪽 사람의 왼쪽에 노출된 초석 4개가 이문의 흔적이다. 2010.6.20 > ..
2021년 6월 29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의 허가를 받아 (재)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이 발굴조사 중인 ‘서울 공평구역 제15ㆍ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 발굴현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79번지)’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있는 형태로 발굴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훈민정음' 금속활자 등 중요 유물 쏟아진 피맛골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