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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책에 따르면 미국은 1947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와 합의해 통일과 총선거를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한반도 분할이 굳어진 건 "이승만과 김일성이 자기의 통치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계획에도 완강히 동의하지 않았고, 1940년대 말 다른 곳에서 냉전이 격화됐기 때문"이었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모두 전쟁을 원했지만, 소련과 미국은 전혀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 1948년 말까지 38선 곳곳에서 남북의 잦은 충돌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미·소 모두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소련은 중국과 유럽의 공산화에 골몰해 있었다. ■ "가장 소름 끼치는 충돌…'한국전쟁'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연합뉴스 송광호2025. 3. 8. 07:00미국 예일대 역사학..

"AP통신의 최상훈과 헨리 마르타 기자." 2000년 4월 세계적인 언론상인 퓰리처상은 1999~2000년 탐사보도상으로 세계적인 뉴스통신사 AP가 1999년 6월에 보도한 '한국전쟁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선정했다. 50년 간 어둠에 묻혀 있었던 노근리 학살 사건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 ...... 노근리 학살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기에 퓰리처상은 이에 대한 보도에 권위 있는 탐사보도상을 준 것일까?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노근리 쌍굴다리 근처에서 미군이 이 지역 피난민에게 폭격과 무차별 사격을 가해 250명에서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이다. ■ '노근리 학살' 현장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다 [손호철의 발자국] 33. 충북 영동 : 미군의 '미라이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