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남국/대한제국 (10)
력사를 찾아서
한일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데라우치 마사타게 통감의 서명을 거친 뒤 내각의 의결을 거쳤으나 그 비준서에는 순종의 서명 없이 대한국새만 날인됐습니다. 당시 순정황후 윤 씨가 치마폭에 감춰 둔 국새를 친일파였던 그 숙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날인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경술국치 하루 전 ‘순종 문서’ 발견 경술국치 하루 전인 1910년 8월 28일 순종황제가 수여한 훈장증. 가운데 찍힌 대한국새(大韓國璽) 위에 일심(一心)을 변형한 순종황제의 수결이 뚜렷하다. 아래는 8월 22일 순종황제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이완용에게 써 준 전권위임장. 붉은색 대한국새 위에 일본식으로 순종황제의 이름 척(척)이 서명됐다. 김재명 기자 일본식 서명대신 ‘一心’ 직접 수결 ..
"현재 안중근의 시신은 일본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안중근, 그는 아직도 독립을 이룬 그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영화 '영웅'中)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순국에 이르기까지 그린 영화 '영웅'의 윤제균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이같이 적었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아야 할까. 안 의사는 누구일까. 순국한 지 112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고국에 잠들지 못하셨을까. 영화 '영웅' 한 장면. 사진=CJ ENM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조선총독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렸다. 의장대 사이로 번개같이 튀어나와 그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
덕수궁에 다녀왔습니다.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습니다.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
1897년 고종 황제가 황제 즉위식을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환구단(또는 원구단)에 다녀왔습니다.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여간 생활한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8월 14일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정하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습니다.다음 날 고종황제는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습니다.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은 ‘고종실록’에 ..
고종황제는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고종실록》에 대한제국의 영토가 4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넘어 만주 땅까지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주재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한 윌리엄스 웰스(Williams S. Wells)가 1884년 뉴욕에서 발간한 중국지도는 당시 조선과 중국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에다가 붉은 선으로 표시했다.이처럼 간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한 이 지도는 붉은 색으로 두텁게 칠한 국경선 일대를 중국과 한국의 중립지대(Neutral Territory between China and Corea)로 명기하기도 했다.(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1053..
‘친일파’ 영국기자도 치를 떤 일제 만행…역사적인 의병사진 남겼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이기환 기자2024. 9. 5. 05:00 유인석·이강년·허위·최익현·연기우·윤인순·허겸·노재훈…. 얼마 전 구한말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대표 의병장 및 독립투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구입 환수한 자료는 항일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작성한 친필 편지 등 13건 등이다.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두루마리 형태로 묶어 보관한 문서들이다. 1907년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인 프레더릭 아서 매킨지가 의병 항쟁의 현장인 경기 양평 등에서 찍은 의병 사진 두 장. 매킨지는 군대 해산 직후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항일 의..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008년 2월 22일 밝혀졌습니다.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 ▶서구 열강의 정상에게 보낸 국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 파견에 앞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입체적인 총력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특히 고종은 이 훈령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전면 문호개방..
광무개혁(光武改革)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이 시행한 개혁을 말한다.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서구화하고 근대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반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에 따라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무게와 측량의 기준이 하나로 표준화되었다.[8]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를 개시하여 소유지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연관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맡았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발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 만민공동회 관리(官)와 백성(民)이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장래와 개혁의 방향을 논의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지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대신들과 시민들은 관민공동회에서 국정개혁안 '헌의6조'를 의결했습니다. 서희경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한국 역사상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의 이행의 역사는 1989년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로부터 시작된다면서 "이를 통해 백성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고 자각되었으며 근대적 정치 주체인 '국민'이 탄생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관민공동회에서 의결된 '헌의6조'가 한국 근대 헌법의 뿌리가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1898년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조선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