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대진국 (7)
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이형구교수는 발해국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로 발해 5경(京) 가운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인 동경성(東京城),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인 서고성(西古城),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인 청해토성(靑海土城)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 성곽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大祚榮)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震國)’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渤海)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
(※ 698년 발해 고왕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는데요, 원래 국호는 진국(대진국)이었습니다.) 1949년에 길림성 육정산에서 발해국의 제3대 王인 문왕(文王)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1980년에 黑龍江省 화룡현에서 발해국의 제4대 王인 문왕(文王)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1991년에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발해 왕릉,2004~2005년 길림성(지린성吉林省) 화룡시(허룽시和龍市) 용해촌(룽하이촌龍海村) 용두산(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에서발해 3대 문왕(文王)의 부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지(墓誌)와 9대 간왕(簡王)의 부인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가 발굴됐습니다. 이형구교수는 발해의 무덤에는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도 있는데, 벽돌무덤의 상부에 삼령둔 석실봉토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향당이 축조..
《환국-가사라국》 3. 환국은 어디인가?(4) 3.3 12국은 어디인가? 《삼성기 전 하편》과 《태백일사》〈환국본기〉에 12국의 이름이 나오는데 《삼성기 전 하편》은 《고기》를 인용하였고 《태백일사》〈환국본기〉는 《삼성밀기》를 인용하였다. 12국의 이름은 비리국(卑離), 양운국(養雲), 구막한국(寇莫汗), 구다천국(勾茶川), 일군국(一群), 우루국(虞婁)(우루국의 다른 이름이 《삼성기 전 하편》에는 필나국으로, 《태백일사》에는 비나국으로 나온다.), 객현한국(客賢汗), 구모액국(勾牟額), 매구여국(賣勾餘) - 일명 직구다국(稷臼多), 사납아국(斯納阿), 선패국(鮮稗){《삼성기 전 하편》에 선패국으로 나오는데 《태백일사》에는 선비이국(鮮卑爾)으로 나온다. - 일명 시위국(豕韋) 또는 통고사국(..
《환국-가사라국》 2. 환국은 어떤 나라인가?(4) 2.4.4 《삼국사기》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삼성기 전 하편》 12개국 주해에서 구다천국과 매구여국은 《삼국사기》에 구다국과 매구곡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1)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九年冬十二月에 구다국이 항복해왔다는 기사가 있다. 『12월에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가 멸망한 것을 듣고 해(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 이로써 땅을 개척하여 점차 넓어졌다.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舉國來降. 由是拓地浸廣.』(2) 또한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地理四 百濟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에 구다국 이름이 들어있다. 『삼국의..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7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1세 세조 진국열황제(668년~699년), 연호는 중광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개화 27년(단기 3001년,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8,000명이었다. 함께 동쪽으로 돌아가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 보전하여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고 연호을 중광(重光)이라 하셨다.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성에서 합류하는 자가 많았다.오로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업데이트 2009-09-26 13:212009년 9월 26일 13시 21분 《발해의 수도가 다섯인 것은 당(唐) 5경(五京)제의 영향이 아니라 부여·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내재적 발전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8월 박사학위 졸업논문 ‘발해 문왕(文王)대의 지배체제 연구’(필자 김진광)가 그것. 국내 15번째 발해사 전공 박사논문인 이 논문은 발해 3대 문왕의 재위기간(737∼793년)에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발해의 최대 판도가 확정됐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성 6부제 같은 중앙행정체제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체제가 완비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같은 제도의 완비가 이뤄진 ..
윤명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입력2020.04.03 17:11 수정2020.04.04 01:31 (27) 발해의 건국과 발전발해는 한민족의 역사구성원 대부분이 고구려 유민목간·그릇·파편 등에 '고려' 글자日 기록에도 "발해는 옛 고구려"둘레가 16㎞인 상경성 궁성 입구. 현무암으로 돼 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