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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대진(발해,고려)

2. 대진국(발해)의 강역 (2) 발해의 수도

대야발 2025. 1. 2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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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대조영이 세운 발해(渤海.698~926)는 2백28년간 모두 네차례나 수도를 옮겼다. 그것도 건국한 지 1백년도 안된 기간에 이뤄졌다.

 

 

모란강 상류 동모산 지역(현 지린성 둔화현)에 도읍을 정한 발해는 740년께 서고성(지린성 허룽현)으로 첫 천도를 한다. 그리고 다시 755년 상경성(헤이룽장성 영안현)으로 옮겼고, 또 785년엔 두만강 부근의 팔련성(훈춘)으로 이전했으며, 793년에 다시 상경성으로 되돌아가 멸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삼았다.

 

 

 


 

755년 상경성으로의 두번째 천도는 당시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킨 안록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옮긴 것이다. 발해 천도에 대해 연구한 임상선(교과서문제연구소 소장) 박사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기에 천도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임박사는 또 "발해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점차 동쪽으로 천도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이며, 서고성과 훈춘의 경우 고구려의 핵심 지역이었다는 점과 농사가 잘 되고 인구가 많다는 점도 고려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기호(서울대 국사학) 교수는 "경제적 이점이나 고구려와의 연관성 등 천도의 배경에 대해 다양한 추정은 가능하지만, 현재 있는 자료만으론 두 번째 천도 이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발해의 천도는] 100년간 4차례 옮겨, 2003.12.21, 업데이트 2006.04.11  (1)

 

 

 

 

발해의 수도가 다섯인 것은 당(唐) 5경(五京)제의 영향이 아니라 부여·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내재적 발전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박사학위 졸업논문 ‘발해 문왕(文王)대의 지배체제 연구’(필자 김진광)가 그것. 국내 15번째 발해사 전공 박사논문인 이 논문은 발해 3대 문왕의 재위기간(737∼793년)에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발해의 최대 판도가 확정됐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3성 6부제 같은 중앙행정체제와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체제가 완비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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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제도의 완비가 이뤄진 시점은 10대 선왕(宣王·818∼830년) 때라는 것이 그동안 학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김진광 박사가 특히 주목한 점은 발해 문왕 때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의 5경제가 확립되고 57년의 재위기간 중 사실상 4차례나 도읍지를 옮겼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발해의 5경제를 당의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당의 5경제는 본래 4경제였다가 ‘안사의 난’(755년) 때 현종의 피란처였던 남경을 757년 다섯 번째 수도로 지정하면서 성립됐으며 그나마도 불과 4년 뒤인 761년 폐지됐다. 또한 후대 중원을 장악한 국가들로 계승되지도 못했다.

 

 

반면 발해의 5경제는 755∼756년경 중경(당시 지명은 현주·顯州)에서 상경으로 천도할 즈음부터 성립했다고 봐야 하며 이후 요와 금의 5경제로 계승됐다는 점에서 그 기원과 기능이 다르다는 것이 김 박사의 지적이다. 북경에 해당하는 상경의 명칭에 이미 상하좌우와 동서남북에 해당하는 방위의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과 발해의 5경제가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긴 하지만 당의 5경이 내란의 산물이라면 발해와 요·금의 5경은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내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왕은 동모산→중경→상경→동경으로 3차례의 천도를 단행됐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를 준비하다 그 1년 전에 숨졌다.

 

 

김 박사는 이처럼 발해의 천도가 문왕 때 집중된 것은 새로 획득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에 대한 통치력 강화라는 내재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이는 발해의 상경천도가 ‘안사의 난’ 이후 당의 내분을 이용한 적극적 북방정책의 일환이라면 동경천도를 일본과 외교관계 강화를 위한 동방정책의 포석이란 식으로 대외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던 것과 차별화된 시각이다.

 

 

실제 문왕 사후 4∼9대 25년간 계속된 내분과 잦은 왕의 교체로 왕권 약화와 영토 축소가 이뤄지면서 수도가 상경으로 고정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10대 선왕 때 이뤄진 정복 활동이 그 과정에서 발해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게 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발해의 5경제가 이처럼 내재적 발전 논리에 의해 도입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영토가 겹치는 부여의 5가(五加)제나 고구려의 5부(五部)제 또는 신라의 5소경(五小京)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27년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했다”고 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 박사는 “발해 문왕 때에 들어서 비로소 자신을 천손(天孫)으로 지칭하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기 시작한 점은 독자적 천하관을 구축했던 고구려의 천손의식을 명실상부하게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완비했기 때문”이라며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기틀은 선왕 때가 아닌 문왕 때부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1)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일대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이었다. '간도(間島)'로도 불린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1909년 9월 4일 청(淸)나라와 체결한 '중한계무조관(中韓界務條款ㆍ간도협약)'에 의해 중국의 영토가 된 곳이다.

 

 

 

 

 

 

 

 

지린성 내의 수많은 고구려ㆍ발해 유적 중 옌볜자치주 허룽(和龍)시 시청(西城)진 청난(城南)촌에 있는 서고성(西古城) 유적은 이미 1940년대에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동양사학자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등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발해 5경(五京)의 한 곳인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비정됐다.

 

 

지린성 문물고고연구소, 옌볜자치주 문화국, 옌볜자치주박물관, 허룽시박물관은 2000-2005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이 서고성에 대해 대대적인 고고발굴작업을 벌였으며 그 성과를 '서고성 - 2000∼2005년도 발해국 중경현덕부 고지(故址) 야외고고 보고'라는 이름으로 최근 펴냈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 보고서에서 서고성 성터가 바로 중경현덕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면서 서고성 성터에 대한 고고발굴과, 이 성터에서 대량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와 문자 기와 등을 통해 중원의 한문화(漢文化)가 발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도굴'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심층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보호관리가 허술했던 서고성에 대한 중국의 전면적 고고발굴 작업과 보고서 발간은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서고성에 대한 부분적 조사는 1964년 북ㆍ중 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공동으로 진행된 바 있으나 그 보고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중경은 발해 3대왕인 대흠무(大欽茂ㆍ문왕)가 자신의 재위 때(서기 737-793년)인 대흥 5년(742년)부터 대흥 19년(755년)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14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곳.

 

 

그 위치와 관련해서는 대조영이 처음 터를 잡은 구국(舊國)과 동일한 지역인지, 중경현덕부의 소재지가 그 아래의 노주(盧州)인지 현주(顯州)인지를 놓고 학설이 분분했다. 그러나 1980년 10월 서고성 가까운 곳에서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의 묘가 발견됨으로써 서고성이 중경현덕부라는 학설이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발굴보고서는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였다는 기존의 '통설'이 실물 증거자료 부족으로 추론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번 고고발굴에서 나타난 자료와 기존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발해국 중격현덕부의 옛터를 서고성 성터로 충분히 확정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해 강역이었던 지역에서 확인된 발해 성터 중 규모면에서 도성의 조건을 갖춘 곳은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자리였던 지린성 훈춘(琿春)시 팔련성(八連城) 성터를 제외하고는 서고성 성터밖에 없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도 서고성은 팔련성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문헌에 기록된 발해 5경의 방위와 대체로 부합하며, 유적ㆍ유물면에서는 궁전의 크기라든가 건축 장식물로 사용된 유약도기 등이 도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러한 도성의 조건은 지린시 화뎬(樺甸)에 있는 발해 장령부(長嶺府) 소밀성(蘇密城) 성터, 염주(鹽州) 크라스키노성 성터(러시아 하산지방) 같은, 발해의 부(府)급과 주(州)급 성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서고성 성터의 중경현덕부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보고서는 '학술적인 추론'임을 전제로 "발해정권이 이미 대흠무 재위 시기에 5경제도(5경.15부.62주)를 수립했으며,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인 동시에 현주로 비정하고 있다"면서 고고학 연구를 통해 중경현덕부와 현주의 관계도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산 경성대 역사학과 한규철 교수(발해사)는 "이번 발굴을 통해 서고성이 중경현덕부의 옛터라는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다고 본다"면서 "발해 연구를 위한 자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학계에서도 서고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밖에 "서고성 성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성터의 도성 건설에 중원 한문화의 선진적인 도성 건설 경험과 영양분을 대량으로 흡수ㆍ섭취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하고 했다.

 

 

또 "여덟 잎 연꽃무늬 기와는 발해인들이 다소간 중원지구 육조(六朝) 연꽃무의 기와의 모티브와 도안을 직접 차용한 것"이며 "서고성에서 발견된 치미(망새)역시 육조와 수ㆍ당 시기의 치미가 갖고 있는 형태적.구조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이돈관 편집위원,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2007. 11. 23. (3)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통일신라의 국경을 3부분에 걸쳐서 연구했다.

삼국시대 패수는 신라와 발해의 경계인 니하와 같은 강으로 현재의 중국 요녕성 개주시의 어니하이고,

북송 때의 학자인 허항종이 금나라의 상경으로 가면서 기록한 사료에 현재의 중국 요녕성 개원시를 지나면서 “동쪽으로 신라산이 있다”는 부분은 중국의 길림합달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라의 정천군은 길림성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의 용정시임을 밝혔다. 용정시의 용두레우물에는 지금도 ‘용정의 기원은 정천이다’는 연혁비가 세워져 있다.

연구에 참여한 허우범 박사는 “신라 정천군이 용정시였다는 것은 통일신라 국경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면서 “발해와의 국경인 니하의 위치 비정과 함께 삼국시대의 강역을 재검토하는 단서를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뉴시스] 신라북계 예상도

 

 

 

이와 함께 정천군에서 300여㎞ 떨어진 흑룡강성 영안시의 발해왕궁터가 사실은 발해 동경용원부임을 새롭게 밝혔다.

현재 발해 상경으로 비정된 이곳은 원래부터 동경성으로 불려온 곳이다. 대일항쟁기흑룡강성 영안시의 발해왕궁터가 사실은 발해 동경용원부임을 새롭게 밝혔다.

 

 

그런데 문헌사료 어디에도 금나라의 동경이라는 기록이 없자 1939년에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했고, 발굴조사에서도 금나라와 관련 있는 유물과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안시의 발해왕성터가 발해의 상경이었고 금나라 때에는 동경이었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김영섭 박사는 “현 영안시에 비정된 발해 상경터는 신라 정천군과의 거리를 비춰볼 때 원래의 이름처럼 발해 동경이라고 보아야 한다”면서, “발해의 상경은 여러 가지 사료들을 검토해볼 때 영안시의 서쪽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인천=뉴시스] 용정시 우물과 지명 유래비

 

 

 

고조선연구소는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요동반도 천산산맥에서 길림성 길림시 남쪽의 길림합달령 및 목단강시 남쪽의 목단령을 잇는 선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연구를 총괄한 복기대 연구소장은 “조선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을 찾지 못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는 조선의 영역에 고구려의 평양과 고려의 서경이 없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오늘날의 북한 평양으로 바뀐 것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확정해 모든 출판물로 발간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통일신라 국경 연구의 성과에 대해 복 소장은 “통일신라의 국경 연구는 우리 국경사를 바로세우는 시금석과도 같은 일이며, 이번 연구를 통해 우리 국경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를 발주한 경북도의회의 김준열 의원은 “신라는 경상도에서 출발했지만 삼국을 통일하며 대국으로 성장했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10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명국이었다”면서 “이러한 통일신라의 영토가 진정 어디까지 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되찾는 것이며, 나아가 전 세계에 신라를 올바로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 함상환 기자, 인하대, "통일신라 국경선은 지금의 중국 연변 용정시 부근", 2022. 3. 22. (4)


 

 

 

 

 

https://youtu.be/s_R-p2oZ2KA

 

 

 

 

 

 

https://youtu.be/om9JLyynEB0?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자료출처>

 

 

(1) [발해의 천도는] 100년간 4차례 옮겨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06.04.11 

 

 

 

(2) “거대영토 통치 목적…”수도를 5곳에 설치한 발해의 五京제도|동아일보 (donga.com)2009-09-26 

 

 

 

(3) 서고성 성터, 발해 중경현덕부 자리 맞다 (daum.net) 2007. 11. 23.

 

 

 

(4) https://v.daum.net/v/20220322120557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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