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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대진(발해,고려)

3. 대진국(발해) 고고학 (3)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대야발 2024. 10. 24.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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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구교수는 발해국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로 

 

발해 5경(京) 가운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인 동경성(東京城),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인 서고성(西古城),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인 청해토성(靑海土城)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 성곽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발해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원래 고구려의 후예인 대조영()이 698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모아 만주 동모산(, 오늘의 중국 길림성 돈화현)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에 ‘진국()’이라 이름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713년에 발해()라고 고쳤다.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이와 같은 인식과 학문적 실증작업에 소홀했다.

 

발해와 후기 신라시기[8세기] 강역도

 


발해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거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안정된 정치와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리면서 926년 거란(, 요나라)에 망할 때까지 220여 년간 해동성국()으로 존재했다.

발해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구당서()』 발해전에는 발해국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본래 고려[고구려]계의 민족[]”이라 전제하고, 이어서 발해의 건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당()나라 즉천무후()가 대장군 이해고()에 명하여 대조영을 쫓게 하자 대조영은 고려[고구려]와 말갈의 민중을 모아 해고에게 항거하니 왕사(, 당나라 왕이 보낸 군사)가 크게 패해 해고는 간신히 탈출하여 돌아갔다. 즉천은 더 이상 대조영을 토벌할 수 없게 되므로,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개루부()의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웅거하게 되었는데, 말갈과 고려[고구려]의 여중()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자 스스로 진국( 혹은 )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가 성력() 연간으로 698년이다.

여기에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고려[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나라[진국]을 일으킨 것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대조영의 민족 문제에 대해서 중국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 건국의 양대 건국 유공자, 즉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내원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는데, 후세의 해석상에서 이를 구분치 않아 대조영을 혹자가 잘못 ‘말갈인’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대조영을 ‘’이라고 분명히 지칭하고 있다. 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한 것이나, 『주서()』이역전에서 “백제가 부여의 별종[ ······ ]”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계 민족이 건국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당서』가 말한 “ []”이란 것도 마땅히 대조영이 고구려계 민족이란 뜻이다.

둘째, “조영과 말갈의 걸사비우[]”라고 하는 구절인데, 여기에서 걸사비우 앞에 굳이 ‘말갈’을 지칭하였으나 조영 앞에는 ‘고려’가 생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당서』는 조영을 전구()에서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이미 종족명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라 하지 않고 조영 앞에 오는 종족명[고려]을 생략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이라 칭한 것은 “”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발해는 고구려와 동일시한 즉,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는 「발해전」 앞에 분명히 「말갈전」을 분리시키고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발해국의 민족 구성의 중요 성원이 고구려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발해 동경성지(東京城址)

 

 

오늘날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실정이지만 고구려와 발해국은 분명 우리의 역사에 속한다. 발해국이 우리의 역사로 인정되는 사료는 발해국이 중국사로 오인될 수 있는 사료보다 훨씬 많다. 또한 발해국의 문화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발해국의 문물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발해 성곽을 들 수 있다. 발해 5경(京) 가운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인 동경성(東京城),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인 서고성(西古城),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인 청해토성(靑海土城)을 들 수 있다.

발해국의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인 동경성(東京城) 유적은 일찍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서 조사된 바 있다.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고 당시의 고분이 흩어져 있다.

한편 동경성 안에서는 수십 편의 와불()이 출토된 바 있다. 발해 석등()은 지상에 몇 안되는 건조물[조각] 중의 하나이다.

발해 동경성지 석등(石燈)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내 청나라때 흥륭사(興隆寺)가 있던 자리에 발해 석등이 남아 있다. 높이 6m.

 

 

상경용천부는 일명 동경성이라고 하는데 성의 축성 방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발해 수도 동경성지(東京城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도성, 일명 동경성이라고 한다. 둘레 16,296m나 되는 외성 안에 황성과 궁성이 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시기[698~926]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사방 수백 리가 되는 평탄한 분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분지 둘레는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 처져 있으며 성의 서남쪽에 있는 경박호()에서 흘러나오는 모란강()이 성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감아 돌면서 자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상경용천부는 궁성·황성·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상경용천부의 외성은 평지토성()이다.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 밖의 길이는 동쪽이 3,358m, 서쪽이 3,406m, 남쪽이 4,586m, 북쪽이 4,946m로 전체 둘레는 무려 1만 6,296m나 되며 성벽의 높이는 약 2m 정도 된다.2) 외성 밖으로 모란강 물을 끌어들인 해자()가 둘러져 있다.

황성과 궁성은 성의 북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궁성의 정남으로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도시계획이 정연하게 이루어진 모습이 마치 근대적 도시계획인 ‘전()자’ 형과 비슷하다. 이는 일찍이 552년부터 586년까지 대규모로 계획도시가 건설된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 역시 외성과 중성[황성], 내성[궁성]으로 된 기본적인 구조에 방어성인 북성을 축성하였다.

상경용천부의 외성의 성벽은 고구려가 평양성의 평지에 쌓은 성벽 축조 방법과 마찬가지로 돌로 성벽의 외연()을 쌓고 그 안에 흙을 다져 쌓는 판축방법으로 축성하였다. 판축수법은 중국과 같은 판축토성이기는 하지만 외연을 석축으로 마감하는 방법은 중국의 고대 축성법과는 다르다.

상경용천부에서는 석재 건축유구를 비롯하여 유명한 발해 석등, 불상과 사리함 등 불교유물 및 여러 종류의 기와와 유약을 바른 기와 그리고 발해삼채(渤海三彩)·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해에서는 삼채 말고도 녹유 도기, 백자 등이 제작되었다. 우리는 발해 자기의 유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유물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매우 고구려적이다. 동경성의 서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는 유명한 발해 삼령둔(三靈屯) 고분이 있다.

길림성 발해 용정현 중평() 사지 출토 발해 석조 삼존불상()

발해 삼채완()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북대 7호묘에서 최근 발견되어 공개된 발해 삼채완()이다.

흑용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동경성() 출토 발해삼채() 편]록.청.황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도기.(『동경성()』, 1936, PL.103)

 

 

발해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서고성지(西古城址)는 화룡현 해란강 유역 평강평원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의 남북 길이가 각각 720m, 동서 넓이 각각 630m로 전체 둘레 2,700m이다. 기저부 폭은 13~17m이고, 모양은 장방형이다. 외성의 성벽은 흙과 진흙을 번갈아 쌓으며 다졌다.[니토항축()]3) 외성의 사주에는 해자를 둘렀다. 최근 2000~2001년 발굴을 통해서 성안에서 41×25m 면적의 1호 궁궐지를 비롯하여 건물지와 연못지가 조사되었으며, 기와와 벽돌들이 출토 되었다. 그리고 유약을 입힌 기둥 밑 장식, 치미, 괴면, 전벽돌, 약간의 철정() 등 건축 장식 및 재료가 출토되었다. 이 성은 성의 구획, 건물의 배치, 규모, 형식, 건축장식 그리고 출토 유물에 이르기까지 상경 용천부와 유사하다. 이 곳은 발해 3대 문왕()이 수도로 사용하던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가 있던 현주()이다. 서고성지 주변에 발해 시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 무덤이 있다.

발해 서고성지(西) 발굴전 전경[1990]

발해 서고성지 발굴 장면[2002]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청해토성(靑海土城)이 있다. 이 곳은 남경 남해부가 있던 발해 5경 가운데 하나로, 5경 중 유일하게 오늘날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규모는 동쪽 성벽 332m, 서쪽 성벽의 길이가 342m이며, 남쪽 성벽 328m, 북쪽 성벽의 길이는 340m로, 성벽의 둘레는 길이 1,342m이다. 그러나 원래의 성은 이보다 규모가 더 컸는데, 1916년 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그 둘레가 2,132m가 된다고 한다. 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놓인 장방형이다. 성벽의 남은 높이는 2~3m이며 기저부 넓이는 약 8m이다. 성의 바깥 둘레에는 해자가 있으며 성벽에는 각루()와 마면()이 있다. 마면의 길이는 6m 정도이고, 높이는 2m이다. 성내에는 건물지와 우물지가 있으며, 출토 유물로는 초석·기와·벽돌·괴면·치미 등이 있다.

발해 남경남해부 청해토성지(靑海土城址)함경남도 북청읍 토성리에서 동남쪽 16km 지점 남대천 하구에 위치한 발해 남경남해부의 청해성. 평지 토루(土壘)형의 성터는 지금 남아 있는 높이가 약 2m 정도이고, 둘레 1,342m의 정방형이다. 북한의 지정고적 제172호.

 

 

이 외에 갑옷·활촉·창끌 등 무기류와 말등자·말자갈 등 마구, 낫·삽 등 생산도구와 기타 토기류가 있다. 성벽의 중앙에서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옹성() 형식의 문터가 확인되었으며, 토성 주위에서는 발해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구려계의 문화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청해토성지 궁뜰

청해토성지 부근 발해 고분함경남도 북청읍 명수리에서는 최근 수십 기의 발해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들 고분은 고구려 특유의 묘제인 소형 석실 봉토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해의 산성도 고구려의 성곽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발해의 산성은 고구려의 산성과 같이 남쪽이 낮고 그 북쪽에 한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우묵한 골짜기를 낀 산 능선에 성벽을 두른 ‘고로봉식()’ 산성이다.

발해국의 성터를 고르는 방법에서부터 성벽을 쌓는 기술, 왕궁의 기본 구조와 건축술, 도시계획 그리고 무덤을 축조하는 짜임새, 주검을 묻는 방법, 그 밖에 건물에 사용되는 기와 종류와 형태는 물론 제작기술에 이르기까지도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1)

 
 

 

 

 

발해국의 고분은 주로 발해 5경()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상경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과

 

중경현덕부가 있던 화룡현 서고성(西),

 

그리고 발해 구국도()인 동경용원부가 있던 길림성 돈화현의 오동성() 주변의 고분군입니다.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주검을 묻은 고분이다. 발해의 고분은 지상이나 지하에 돌을 사용해 무덤을 축조하고 그 위에 흙을 덮는 이른바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이는 고구려 계통의 전형적인 무덤형태이다.

발해국의 고분은 주로 발해 5경(京) 주위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상경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東京城)과 중경현덕부가 있던 화룡현 서고성(西古城), 그리고 발해 구국도(舊國都)인 동경용원부가 있던 길림성 돈화현의 오동성(敖東城) 주변의 고분군이다.

특히 발해의 무덤 가운데 고분의 봉분 위에서 건물의 기단부나 추춧돌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고분 위에 목조건축물을 세운 시설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고분 위에 목조건축물[묘상건축()]을 세우는 풍습은 고구려의 장군총·태왕릉·천추총·임강총·서대총 등 왕릉급의 고분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사당과 같은 릉상묘()로서 저자는 이를 ‘향당()’이라고 했다.

발해 향당이 존재했으리라고 믿어지는 고분은 발해 5경 중 가장 장기간 도성으로 존속했던 상경용천부 북방 5km지점 영안현 삼릉향(三陵鄕)에 있는 삼령둔(三靈屯) 고분이다. 세 기의 능(陵)이 있다고 해서 삼릉(三陵), 혹은 삼령(三靈)이라고 한다.

발해와 후기 신라시기[8세기] 강역도

 

여기에서 논하고자 하는 삼령둔 고분은 삼릉 1호분이라고도 하는데 동경성 동북, 모란강 북안의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는 동서 123m, 남북 121m의 대형 조역()을 형성하고, 고분의 중앙부에 남북 20m, 동서 15m 넓이의 장방형의 현무암으로 적석하고 반지하식의 묘실[현실()과 연도()]을 축조한 석곽묘이다. 석곽의 표면에는 칠식(, 즉, 오늘날의 콘크리트 구조물과 같은)을 바른 흔적이 남아 있고 입구는 남향이다.

고분의 상부에는 발해시대의 녹유() 치미()와 기와편이 산포되어 있고, 분구상()에서는 초석() 4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조역() 내 곳곳에서도 녹유와를 비롯하여 많은 발해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경성지 삼령둔() 고분 실측도

삼령둔 고분 정상의 주춧돌고분 정상부에서 세운 향당 건물의 주초석이 발견되었다.

 

 

한편, 삼령둔 고분의 외형에 대하여 보고서에는 “묘의 봉토는 높지 않고 낮게 성토한 위에 혹종()의 건조물()을 덮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여기서 말하는 ‘혹종의 건조물’을 향당()으로 보았다.

삼령둔 고분 석실의 구조면에서는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통구 산성하묘구의 절천정총()이나 평안남도 중화군 진성리 제1호분 석실의 석벽축조와 천정 결구방법이 유사하다. 이 밖에 삼령둔 고분 및 조역, 또는 동경성지 일대에서 출토된 발해 와당도 고구려계의 전통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발해문화의 고구려적 요소가 선왕선공()을 모시는 상례()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삼령둔 고분의 향당에서 찾아 볼 수 있으니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중국의 주국침()은 “무덤 위에 향전(殿)과 같은 종류의 건축물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발해의 무덤에는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도 있는데, 벽돌무덤의 상부에 삼령둔 석실봉토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향당이 축조됐을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효공주(貞孝公主, 792년 卒) 무덤이다.

화룡현 서고성 부근에는 발해 무덤들이 많이 널려 있는데 지금까지 1,000여 기의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다. 1980년에 연변박물관에서 화룡현 용수향 용두산() 위에서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용두산 고분군은 발해 왕실 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정효공주 무덤의 구조는 무덤 바깥 길[연도()], 무덤 문[묘문()], 무덤 안 길[용도()], 주검 칸[현실()], 무덤 탑[묘탑()]의 5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무덤 남북의 길이는 약 15m, 동서의 너비는 약 7m이다. 무덤 바깥 길은 무덤의 남쪽에 설치되었는데, 그 수평거리는 7.1m이며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은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다. 무덤 안 길의 길이는 1.9m이다. 주검 칸은 남북의 길이 3.1m, 동서의 너비 2.1m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벽돌로 축조되었다. 주검 칸의 벽의 높이는 동·서벽은 1.4m, 북벽은 1.6m, 남벽은 1.66m이다. 네 벽의 윗 부분은 벽돌과 돌로 평행고임을 만들고, 그 위에 큰 판석()을 덮어서 천정을 얹었다. 벽면과 천정에는 모두 흰 회를 발랐다.

발해 정효공주(貞孝公主) 묘 현실 실측도면

 

 

벽돌로 쌓은 주검 칸과 무덤 안 길의 벽에는 흰 회를 바른 위에 주인공의 문위()·시종()·시위()·악사()·내시() 등 모두 12명의 입상 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무덤 안 길에서는 완전히 원형대로 보존된 정효공주묘지()가 발견되었는데, 묘지의 주인공인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그가 죽은 때는 부왕이 아직 살아 있던 792년 6월이고 장사를 지낸 것은 그해 11월이다.

발해 정효공주 묘의 현실 벽화 인물도[모사도]

 

 

무덤 칸[현실] 내부의 관대 위에서 남녀 2인의 유체 골격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정효공주 부부가 2차에 걸쳐 매장된 합장묘로 추측되고 있다.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 위에 흙을 덮어 축조하고 다시 그 위에 무덤무지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탑의 기초가 있다.

그 위에 이른바 묘탑( 혹은 )을 세웠다. 탑신은 이미 없어졌고 방형으로 된 기초만이 남아 있다. 지상에 있는 탑 기초의 남북 길이는 5.6m, 동서 길이는 5.5m이다. 묘탑은 삼령둔 고분에서 보는 일종의 향당()과 같은 묘상건물()이다.

1973년 6월에 길림성박물관, 연변박물관 및 훈춘현문화관이 훈춘시 마적달향 마적달촌에서 약 1km 떨어진 마을 북쪽 산중턱에서 마적달() 무덤을 정리하였다. 마적달 무덤은 전부 벽돌과 돌로 쌓았고 지면의 묘탑과 지하의 궁전[지궁( 즉, 현실())], 무덤 안 길, 무덤 길로 구성되어 있다. 탑 둘레는 남북의 길이가 13m, 동서의 너비가 10.3m이다. 벽돌을 깐 지면 가운데에 탑 기초가 있다. 기초는 남북의 길이 4.95m, 동서의 너비 4.8m이며 방향은 남에서 동쪽으로 40°이다. 탑의 기초는 ‘지궁[현실]’ 윗부분의 판석() 위에 장방형으로 벽돌을 쌓았다. 지궁의 중심은 높이가 2.3m, 길이가 2.7m, 너비가 1.86m이다. 바닥에 관대 같은 것들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또 사람의 아래턱 뼈·등뼈·팔과 다리 뼈가 있었는데, 한 개체의 중년 남자 유골()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마적달묘탑 역시 무덤 위에 세워진 향당으로 볼 수 있다. 이 묘탑은 원래 7층이었으나 민국() 10년[1921]에 무너졌다고 한다.

마적달 무덤은 발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자리인 팔련성(八連城)에서 약 50km 떨어진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무덤의 축조 방법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마적달묘탑을 쌓은 연대도 정효공주 무덤의 축조 시기인 792년과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며, 마적달묘탑에 묻힌 사람도 발해 왕족일 것으로 보인다.

훈춘시 마적달묘탑 복원 상상도[위]와 현실 실측도면[아래]『연변문물간편』 p.124.

 

 

이밖에 발해의 묘탑으로, 길림성 장백현() 현성에서 서북으로 1km 떨어진 탑산()의 서남골 평탄한 둔덕에 ‘영광탑()’이 있다. 영광탑이란 명칭은 이 지방 토어()이고, 원래는 발해 묘탑이다. 대지는 해발 820m 분지로 동서 길이 약 4리[2km], 남북 길이 2리[1km]정도이다. 묘탑으로부터 약 2리 되는 곳에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 묘탑은 ‘누각식공심방탑형()’으로 탑신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탑신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발해 묘탑이다. 묘탑은 연도, 용도, 지궁[현실], 탑신, 찰주() 등 5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림성 장백(長白)조선족자치현 발해 영광탑(靈光塔)지하에는 묘실[현실(玄室)]을 축조하고 지상에는 벽돌로 5층으로 쌓아올린 묘탑(廟塔). 고구려 시기의 묘상건축(墓上建築)인 향당(享堂)과 같은 성격의 발해 시기 향당 건축이다. 높이 13m.

 

 

묘탑의 기단은 현실 천장에 덮은 개석() 위에 흙으로 판축하고, 그 위에 전돌로 탑신을 축조하였다. 묘탑은 모두 5층이며, 높이는 12.86m이다. 탑신은 방형이고 1층 정면[남면]에 아치문[공권문()]을 설치하고, 2·3·5층의 기단마다 방형 감실()을 두었다.

영광탑의 지궁[현실]은 평면이 남북 길이 1.9m, 동서 길이 1.42m, 폭이 1.49m의 장방형으로, 바닥은 세 겹으로 전돌을 깔았고 벽면도 전돌을 쌓았다. 천장은 석판()으로 덮었으나 많이 붕괴되었고, 현실의 벽면과 천장은 백회를 발랐으나 대부분 벗겨졌다.

현실의 후벽 중앙 약간 동쪽으로 석대좌()가 놓여 있는데 보고자는 이를 사리함()으로 추정하고 있다.7) 그러나 현실의 크기로 보아 시신을 안치한 고분형 전축분이 아닌가 한다.

발해의 무덤 위에 전돌로 탑을 세운 것은 전 시기 고구려의 왕릉급무덤 위에 건물을 세우는 향당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탑은 본래 죽은 자를 묻는 무덤으로,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한 묘()와 같이 제사의 대상인 탑()을 상징물로 삼았다.

고구려의 능묘()의 향당 제도에서 비롯하여 불탑() 형식으로 발전한 발해의 독특한 묘탑 묘제이다. 화장() 사리() 묘제인 신라의 모전석탑()이나 전탑()과의 관계를 주목해 볼 만하다.

육정산(六頂山) 발해 고분 출토 벽화 잔편(殘片)길림성박물관 소장.

 

 

1991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전사 5』 발해편에 “집안의 장군무덤 꼭대기에 집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풍습이 고구려에도 있었으며, 발해 무덤에 보이는 지붕은 고구려의 풍습을 계승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향당제도에 대하여 본서 21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향당제도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묘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이 밖에 발해 고분 가운데 봉분 위에 묘탑[향당]을 설치한 고분이 몇 군데 더 발견된 바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벽화파편이 출토되는 고분도 발견되고 있다.

발해의 돌칸 흙무덤도 그 짜임새가 고구려의 돌칸 흙무덤과 똑같다. 한편, 중국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왕승례() 씨는 돈화현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 780년 매장)의 대형 석곽묘 천장의 이른바 말각조정() 결구방법이 집안() 고구려 모두루총()의 결구방법과 같다고 하였다. 또, 소형 석관묘의 무덤 위에 여러 장의 판석을 덮는 방법이나 묘장의 형태가 통화()나 집안 일대의 고구려 소형 석관묘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일찍이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 선생은 『발해사』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해국이 이룩한 문화는 그 정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서 이전 고구려 사람들의 것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 남은 발해의 도시 유적·성곽·고분·전축·조각·공예품 및 기타 유물·유적들은 다 고구려의 것들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며, 그 가운데는 고구려 것인지 발해 것인지 거의 가려낼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것들도 적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예전처럼 중국사의 입장에서 쓰이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점령시대에서와 같이 일본사의 일부로 쓰여서도 안 된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다만 얼마나 사실에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실사구시학()’이다.(2)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 - 고구려의 계승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2) [네이버 지식백과] 발해의 향당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참고자료>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0815/85826814/1

 

 

 

연해주서 청동제 풍탁 출토.."발해의 말갈 지배 증거" (daum.net)2016.10.19. 

 

 

 

연해주 발해 보루 유적, 말갈족 집터 위에 세워져… "발해가 지배 증거" (hankookilbo.com)2015.09.09

 

 

 

[취재후] 발해 땅에서 발굴된 청동 낙타, 천년의 비밀은? (kbs.co.kr)2015.08.27 

 

 

 

연해주 발해땅서 위구르 토기가 웬일? (hani.co.kr)2014-08-25 

 

 

 

발해고분서 청동기마인물상 발견 (daum.net)2006. 8. 25. 

 
 

최대 크기 '발해 온돌' 유적 발굴됐다 (daum.net)2005.08.25.

 
 

 

 

 

 

2300년전 연해주는 ‘한인 터전’ 확인 - 경향신문 (khan.co.kr)2008년 09월 04일

 

 


‘38년 발굴’ 박물관 세운 러 조각가 (hani.co.kr)
한겨레 2008.5.6

일부 발해 유물 추정…“유물들, 내 인생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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