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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강서대묘는 북한 남포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 벽화 고분으로 이웃한 2개의 큰 무덤과 함께 강서삼묘로 불립니다. 고구려 평원왕 또는 영양왕의 무덤으로 추정합니다. 강서3묘 전경(출처; '한왕묘'와 강서3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daum.net)2019. 5. 2.) 널방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비천 · 비운 · 신선 · 산악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신은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고 인기를 모은 방위신(方位神)으로서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일컫습니다. 강서대묘 새를 탄 선인(출처; 강서대묘 깊이보기 3 - 비천과 선인 (daum.net)2019. 6. 27.) 강서대묘 비천상(출처; 강서대묘 깊이보..
쌍영총은 통로에 2개의 커다란 8각기둥이 세워져 있어 붙인 이름입니다. 쌍기둥무덤이 되겠습니다. 벽화의 종류로는널길 동벽의 우차도 · 개마무사도 · 여인행렬도,서벽의 기마인물상도,앞방 입구 통로 동벽의 험상궂은 얼굴의 역사,널방 동벽의 남녀행렬도,현실 북벽에 있는 묘주인부부의 초상 · 남녀시종 · 쌍현무 등이 있습니다. 5세기 말엽을 전후하여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고분 중 하나인 쌍영총의 앞방 전경. 8각 돌기둥과 앞방 벽, 그리고 천장이 한눈에 들어온다.출처; 연합뉴스, 쌍영총 앞방 전경 (daum.net)2006. 8. 29. ■ 고구려 쌍영총 벽화, 눈으로 직접 본다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인..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태왕이 천도한 곳은 85년 전 수도로 삼은 평양이다. 삼국사기 고국원왕 조는 평양 동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으니, 평양은 황성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황성은 지금의 지안이니, 평양은 지안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북 평양은 지안의 남쪽에 있다. 따라서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이북 평양’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주장은 삼국사기 내용과 완전 배치된다. 장수왕이 옮겨간 평양이 지안(황성)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遼史) 지리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요사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가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도읍을 옮긴 평양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사는 장수태왕이 아닌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설명한다.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합니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웁니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습니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
임기환교수는 덕흥리고분에 담겨 있는 벽화 제재의 풍부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림의 대상과 내용에 대해 그 이름과 설명이 묵서로 밝혀져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며, 벽화와 묵서 등 이 무덤에 담겨 있는 역사 자료의 가치로 보아 덕흥리고분을 현존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첫 자리로 꼽았습니다. ■ [고구려사 명장면-26]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 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벽화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임에도 발굴단은 부랴부랴 12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한 달여 동안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무덤..
임기환교수는 각저총(씨름무덤)의 축조 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하고, 광개토대왕 · 장수왕 때로 고구려인들의 활달한 기운이 넘치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역시 씨름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각저총의 씨름그림 한 장면에는 고구려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갖춘 문화를 향유하였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 임기환교수 [고구려사 명장면-33] 각저총 씨름도가 말하는 고구려의 전통과 개방성 무용총과 마치 쌍둥이 무덤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벽화고분이 각저총(씨름무덤)이다. 각저총의 축조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
무용총(舞踊塚)은 길림성(지린성) 통구에 있는 고구려 고분입니다. 고분 내부 오른쪽 벽에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 벽에는 검은색 말을 탄 사람과 무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그림이 있습니다. 무용총의 남쪽에는 각저총이 있고, 무용총의 서남쪽에는 산연화총,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희분 등의 우산하고분군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마주보이는 현실 주벽에는 주벽벽화접객도가 있고, 현실 서쪽 벽에 수렵도가 있고, 수렵도와 함께 현실 서쪽 벽에 우차도(牛車圖)가 있으며, 현실 동측 벽에 무용도가 있습니다.(1) 임기환교수는 두방무덤인 무용총은 널방 벽면의 가무배송도, 수렵도, 묘주접객도가 유명하며, 그외 천장에 있는 하늘세계를 꾸미는 다양한 벽화도 눈길을 사로잡는데, 무용총이란 이름은 벽화 중..
이형구교수는 북한의 미술사학자 주영헌(朱榮憲)씨가 안악 3호분을 미천왕릉(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는데, 1990년대에 와서는 고국원왕릉(故國原王陵)이라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안휘준(安輝濬) 선생은 “안악 3호분은 중국인인 동수(冬壽)의 묘로 보기보다는 역시 고구려 왕(王)의 능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 “묘주는 왕의 신분을 지닌 지체 높은 인물로 신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요동 지방은 고조선의 옛 영토이다. 이곳은 3세기 무렵 위(魏)나라에 의해 점거되었고, 310년까지 서진(西晋)이 장악하였다. 물론 이후는 5호(胡) 16국(國)이 중국 중원을 차지하려고 할거하던 시기이다. 그래도 요동 지방은 중원 지방보다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건국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생애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
일반적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내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형구교수는 장군총은 통구 고분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고구려식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기원 3, 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5단·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학계에서는 서로 “장군총이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이다”,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정비된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태왕릉[오른쪽]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와는 불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떤 이는 이른바 장군총을 장수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