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5) 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1)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5) 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

대야발 2025. 2. 28. 11:37
SMALL

 

 

 

 

 

 

 

 

한치윤은 조선후기 『해동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 1814년(순조 14)에 사망했다. 178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남인으로 출세하기 어려웠기에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1799년 서장관으로 파견된 한치응을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말년에 한국사 서술에 몰두하여 70여 권에 이르는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김정희, 홍명주, 심영석 등과 교유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여 색다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헌납(獻納) 한덕량(韓德良)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한원도(韓元道)이며,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9세 때에 이미 글을 읽으면 그 뜻을 완전히 깨달을 만큼 숙성하였다. 또한, 청년기에는 시문에 뛰어나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남인의 정치세력이 완전히 꺾여 있던 터라 벼슬에의 뜻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영조 정조대의 탕평정국(蕩平政局)이라 하더라도 그가 속한 남인들은 정치무대에서 힘을 잃고 대부분 학문에만 전력하던 추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만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응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지체로도 불리는 것은 아들 한진상(韓鎭象)이 동지돈녕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87년(고종 24) 삼대추증(三代追贈)에 의해 그에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증직되었다.

 

 

1799년 10월 북경에 사행(使行)하는 집안 형님 한치응(韓致應)을 수행해, 당시 학자들이 가고 싶어했던 선진문물의 본거지 북경에 약 2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살펴보았다. 당시의 사행은 의례적인 외교적 차원의 통교(通交)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중요한 기회도 되었다. 따라서 북경여행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개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이러한 학문적인 기틀 위에서 한국사의 객관적인 서술을 기도하게 되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원편(原篇) 70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그의 만년의 10여 년 동안에 걸쳐서 이룩한 업적이다. 이 밖에도 북경을 여행할 당시의 연행일기(燕行日記)와 많은 유고(遺稿)가 조선 말기까지도 그 증손자인 한일동(韓日東)에 의해 간직되고 있었으나, 오늘날 그 소장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생 동안 젊어서는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중년에는 북경을 찾아서 견문을 넓혔으며, 만년에는 한국사의 객관적인 편찬물을 이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집안에서는 일찍이 죽은 형님 한치규(韓致奎)의 식솔을 극진히 돌보았다.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진사가 된 뒤 현감까지 된 것도 그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한편, 당색을 초월해 폭넓은 학우들을 사귀는 데 노력하였다. 당시는 학연(學緣) · 지연 · 당색 등을 초월해 학문교류가 활발했던 시대상황에서도 연유하지만 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가 죽은 뒤 상청에 보낸 만장(挽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의 원만한 인격과 학문적인 업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후대 김정희(金正喜)는 만장에서 그를 송대 『옥해(玉海)』의 저자 왕응린(王應麟)과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에 비유해서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한치응 · 홍명주(洪命周) · 심영석(沈英錫) 등도 그와 같이 평가했으며, 김유헌(金裕憲)도 그의 인품을 옥(玉)과 난(蘭)에 견주었다. 그리고 이해응(李海應)은 그를 후한 때 은거하면서 학덕을 쌓고 청빈하면서도 봉양(奉養) · 우애를 일삼았던 모용(茅容)과, 역시 같은 무렵 신선과도 견줄 만큼의 풍채와 학문과 덕행을 가졌던 곽태(郭泰)와 비유하기도 하였다.

 

 

만장에서 그를 높이 평가한 이들은 대부분 당대 당상관으로 있던 지체 높은 친구 내지는 그를 아끼던 인물이었지만, 이 밖에도 그를 기리던 사람들은 허다하였다. 『해동역사』의 서문에서 유득공(柳得恭)이 그를 평가한 것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사학사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해동역사』의 저자라고 하는 위치에서만이 아니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우리 나라의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도외시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전통적인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적인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위한 색다른 업적을 쌓아올린 성과는 당시의 학문적 · 사상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1)

 

 

 

 

 

해동역사》(海東繹史)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기전체로 기술했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한치윤이 원편 70편을,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속편 15권을 편술한 것으로, 한반도 서적 이외에 중국·일본 등 외국의 서목 550여 종에서 자료를 뽑은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 안정복의 <동사강목>과는 달리 단군조선을 인정하여 단군에서부터 기전체로 기술한 점, 역사를 분야별로 나누어 세기(世紀)·성력(星歷)·예(禮)·악(樂)·병(兵)·형(刑)·식화(食貨)·물산(物産)·풍속(風俗)·궁실(宮室)·관씨(官氏)·석 (釋)·교빙(交聘)·예문(藝文)·인물·지리 등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점, 흔히 안 다루던 숙신씨(肅愼氏)를 별개로 다룬 점 등이 모두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종래의 관찬사서(官撰史書)들이 취한 관료적인 편찬방법을 탈피하고, 역사와 지리의 합일을 꾀하였던 것이다.(2)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사실을 기전체로 서술한 역사서. 한국통사.

 

 

필사본. 한치윤이 지은 본편(本篇) 70권과 조카 진서(鎭書)가 보충한 속편(續篇) 15권을 합쳐 모두 85권이다.

책은 한치윤이 죽기 10여년 전부터 착수해 본편 70권만 이루고 죽었다. 이에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지리고(地理考) 15권을 진서가 속편으로 완성한 것이다. 청나라 마숙(馬驌)이 찬술한 ≪역사 繹史≫를 모범으로 하여 ‘해동역사’라 했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東史綱目≫이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을 본떠서 한국사의 강목을 꾸민 것과 유사하다. 책의 찬술 동기는 종래의 한국사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편찬되어 이를 바로 잡고, 객관적인 한국사의 참모습을 찾기 위함이었다.

 

 

체재는 정사체(正史體)인 기전체를 따랐으나 표(表)는 생략했다. 그리고 객관적인 찬술을 위해 550여종의 인용서를 동원하였다. 즉, 중국의 사서 523종, 일본의 사서 22종과 한국의 기본서를 참고로 했다.

 

 

편찬 방법은 고대에서 고려까지의 왕조를 세기(世紀)로 삼고, 지(志)와 전기(傳紀)를 덧붙였다. 전기는 인물고(人物考)라 했다. 한진서도 속편을 지리고라 하여 본편의 지와 구별했다. 그러나 기전체인 점에서 ‘지리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위에 말한 방대한 인용서에서 한국 관계의 기사를 모조리 발췌한 뒤 이들을 세기·지·전기로 유취해 편찬하고, 그들 기사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안서(按書)’를 병기(倂記)해 바로잡거나 자기의 의견을 곁들이는 방법을 취했다.

 

 

따라서, 원문은 모두 외국의 사료를 취해 엮은 한국의 통사이고 여기에 편찬자의 의견과 교감(校勘)이 붙는 형식이었다.

특히, ‘지’부분은 한국의 문화사적인 발달 상황을 볼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편찬됐다는데 의미가 있으며, 속편의 지리고는 고증면에서 우수함을 보이고 있다.

 

 

저자가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앞서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에서 다양한 내용이 취급되었고, 한치윤이 연경(燕京)에 머무르면서 직접 목도한 청나라의 다양한 문물과 폭넓은 연구 경향에 자극받은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 의한 사찬물로서 최초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편찬 당시는 이른바 실학(實學)의 학풍이 선각된 학자와 사상가들에 의해 개진되고 있었고, 경사(經史)만이 아니라 폭넓은 학문 분야가 개척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면서 뜻있는 찬술물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유행되고 있던 유서(類書)의 범주로 볼 수도 있으나, 편찬 동기가 기전체에 의한 찬술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 성격짓는 것이 마땅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지나치리 만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결함도 적지 않다. 한 예로 사료 비판이 제대로 되지 못한 외국의 자료를 그대로 뽑는 과정에서 잘못된 서술 내용이 많고, 한국사의 기년(紀年)까지도 중국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일단 있는 자료를 그대로 유취시켜서 한국의 역사를 귀납적으로 객관화시켰다는 데 특색이 있고, 저자 나름의 역사 해석과 고증을 시도한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 뒤 국내에서 널리 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소개되었다. 즉 한국사를 연구하는 문헌 학자들에게 좋은 자료집 내지 입문서가 되었다.

 

 

책은 종류를 달리하는 세 가지 판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정교한 필사본(71권 26책)인 원편이 소장되어 있다.(3)

 

 

 

□ '백제의 요서경략' 설파하면 '사이비' '국뽕'인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선임기자2021. 8. 10.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

 

‘백제의 요서경략’은 백제가 한때 ‘중국의 영토 일부를 공략해서 지배했다(경략·經略)’는 뜻이다.

488년 편찬된 <송서> ‘이만열전’에 처음 소개된다.

 

“백제국은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뿐이 아니다. 523~536년 사이 중국 남조 양나라(502~557)에 파견된 각국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에도 나온다. 즉 “진나라 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는 것이다.

 

 

<양직공도>엔 <송서>에 기술되지 않은 ‘진(晋)나라 말’이라는 구체적인 시점이 기술됐다.

629년 당나라 요사렴이 편찬한 <양서>는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을 점령한 뒤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당나라 이연수가 편찬한 <남사>(송·남제·양·진 등 남조의 역사서)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역시 당나라 두우(735~812)가 편찬한 <통전>은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에 자리잡았으며…진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북송의 사마광(1019~1086)이 1065년~1084년에 편찬한 <자치통감>은 488년 북위의 백제침공 사실을 전하면서 <남사>를 인용,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 땅에 의거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송서>(488년)부터 <자치통감>(1065~1084)까지 무려 600년 가까이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가 꾸준히 중국 역사서에 등장한다.

 

 

■안정복·정약용의 부정론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여러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과 월주 침공 등의 중국 진출 기사가 왜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설’로만 취급되는 것일까. 크게 세가지를 지목할 수 있겠다.

 

 

첫번째는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에 ‘백제의 요서경략’ 등의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요서경략’ 기사의 경우 중국 남북조 시대(420~589) 중 남조(송·제·양·진)의 역사에서 주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서>와 <북사> 등 북조(북위·북제·북주)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세번째는 백제가 경략했다는 요서지방에서 백제인의 영역임을 입증할 고고학 자료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제의 요서경략 등 중국 진출’은 조선 후기부터 고대사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부정론’은 특히 안정복(1712~1791)과 정약용(1762~1836) 등이 개진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안정복은 “중국인들이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에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가 실렸다”면서 “이런 설은 중국인의 공상과 억측으로 제기한 것”이라 주장했다.

 

 

정약용 역시 “‘당나라 때…백제가 요서·진평을 차지했다’는데 이것은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이며, 중국에서는 외국의 역사를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의 주장에 솔깃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언급에서 기본적인 팩트가 틀렸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정약용은 ‘백제의 요서경략 시기=진나라 때’라고 기술한 중국사서와 달리 ‘당나라 때’라고 잘못 인용했다.

 

 

아무튼 ‘부정론’은 백제의 요서경략 관련 기사가 ‘중국 사가들의 오기(誤記)’라든가, 혹은 ‘백제의 당시 국세로 보아 많은 선박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라든가 하는 논리로 이어져왔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일본에서는 부정론이 득세했다. 나카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는 “…백제가 모용씨(전연·후연)에 속한 요서를 경략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와다 하코모토(和田博德)는 “백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요서를 백제가 경략했다는 것은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며, 처지가 궁해진 백제가 날조한 설에 중국 남조가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강변했다.

 

 

다산 정약용은 “<문헌통고>(송말 원초의 학자 마단림이 저작한 제도와 문물사 )에 ‘당나라 때…백제가 요서·진평을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여와 백제를 혼동했기 때문이며, 중국에서는 외국의 역사를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신경준·한치윤·신채호·정인보 등의 긍정론

 

하지만 안정복·정약용의 시대에도 긍정론이 만만치 않았다.

당대의 역사학자인 신경준(1712~1781)은 ‘백제의 요서경략과 월주 진출’을 한꺼번에 거론한다.

 

즉 “중국사서와 최치원의 편지 등을 종합할 때 백제는 북으로는 요서, 남으로는 월주까지 진출한 적이 있다”면서 “다만 우리 역사가 소략해서 그 일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해동역사>를 편찬한 한치윤(1765~1814)도 “진나라 때 백제가 바다 건너 북으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고, 남으로는 제나라 땅과 노나라 땅을 어지럽혔다”고 설파했다.

 

 

신채호(1880~1936)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근구수왕(재위 375~384) 연간’이라고 특정하면서 “근구수가 바다 건너 중국 대륙에 진출해서 요서·산동·절강 등을 경략하고 광대한 토지를 장만했다”고 주장했다.

 

정인보(1893~1950)는 “백제는 영가의 난(307~312)으로 중국이 남북으로 나눠진 이후 산동과 요동·요서에서 해양패권을 장악했다”면서 “시기는 전연(337~370)이 멸망하는 370년(근초고왕 25)”이라고 특정했다.

 

이후 긍정론은 안재홍(1891~1965)과 손진태(1900~?), 최남선(1890~1957), 김상기(1901~1977), 홍이섭(1914~1974), 김철준(1923~1989) 등으로 이어진다.(4)

 

 

 

 

 

 

<자료출처>

 

(1) 한치윤(韓致奫)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해동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2539

 

 

(4) https://v.daum.net/v/20210810050003075

 

 

 

 

<참고자료>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2&cate1=N&cate2=&dataGubun=%EC%84%9C%EC%A7%80&dataId=ITKC_BT_1433A

 

 

 

한치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유엔은 왜 영양곡물에 관심을 가질까? [생명과 공존] (daum.net)  2023. 12. 13.

 

 

신경 안정 효능에 약용식물로 큰 인기, 완도에 있습니다 (daum.net) 2023. 12. 1.

 

 

[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명주’로 이름 날린 삼국시대 우리의 술 (daum.net)  2023. 10. 21.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