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4) 이종휘(李種徽) 동사(東史) 본문
이종휘는 조선후기 『동사』, 『수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31년(영조 7)에 출생하여 1797년(정조 21)에 사망하였다. 자는 덕숙이고 호는 수산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
『동사』에서는 단군에서 후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 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였다. 특히 고구려를 역사 계승의 중심축으로 삼아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문집으로 『수산집』이 있다.
이종휘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 계열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지낸 적이 있다.
이종휘의 학문적 기본 입장은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학문적 기초를 확보하고 있다. 이종휘는 우주가 생겨난 이래 가장 탁월한 명사(名士)로 장량(張良) · 제갈량(諸葛亮) · 왕수인(王守仁)의 세 사람을 들고 있으며, 왕수인은 재주에서는 제갈량에 견줄 만하고, 공적에서는 장량과 비슷하며, 지조에서는 가장 뛰어났다고 극찬하였다.
이종휘는 육왕학(陸王學)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심학(心學)을 이어왔음을 지적하고, 정주학(程朱學)이 실천에서는 육왕학에 못 미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종휘는 『대학』을 잘못 읽었다는 것을 왕수인의 문제점으로 지적함으로써, 『대학』 해석에서는 주희(朱熹)가 옳고, 심학에서는 왕수인이 정당한 것으로 양면적 긍정을 하고 있다.
이종휘는 이 시대 유학의 가장 큰 사업은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입문(入門)과 통로[路脈]를 변별(辨別)하는 것이라 강조함으로써, 주자학과 양명학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인식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제자백가의 서적이 있음으로써 사서(四書)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육구연(陸九淵) · 왕수인의 심학이 있음으로써 정주학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여, 정통주의적 정주학이 다른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이종휘의 심학은 양지(良知) · 근독(謹獨) · 성(誠)의 개념들이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양명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역사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사학체계(史學體系)를 제시하였다. 이종휘는 사학[史]과 경학[經]이 표리 관계를 이루며, 서로 날실[經]과 씨실[緯]로 짜여져 하나의 경사(經史)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홍양호(洪良浩)는 이러한 이종휘의 학문 체계에 대하여 경술(經術)을 체(體)로 삼고 문장과 사학(史學)을 용(用)으로 갖추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한쪽에만 치우쳐서 학문의 전체성과 균형성을 잃어버린 편협함의 오류를 탈피한 것이었다.
또한 이종휘는 옛 역사를 지나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요, 내 마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값지게 전달되는 것임’을 역설하여 역사 인식에서 주체적 정당성을 중시하였다.
대표적 역사 저술인 『동사(東史)』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 · 기자 · 삼한 · 후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 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였다. 특히 고구려를 역사 계승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義理史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종휘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종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론적 관심, 그리고 과거제도 · 변경방어 등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1)
동사는 조선 후기 학자 이종휘가 본기, 세가, 열전, 연표, 표, 지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이종휘의 문집인 『수산집(修山集)』 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고조선과 삼한, 부여, 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다. 특이한 점은 단군 신앙의 내력을 독립적으로 신사지(神事志)라는 항목에 정리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부여·예맥·비류·옥저·고구려·백제 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하여 단군의 혈통과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설정하여 발해사를 확실하게 한국사로 편입시켰다.
『동사』는 기전체형식에 따라 본기(本紀) · 세가(世家) · 열전(列傳) · 연표(年表) · 표(表) · 지(志)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조선과 삼한, 그리고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것이 특징이다.
지은이가 고대사에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우리 고대의 문화와 영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즉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후 중국에는 이미 중화(中華)의 전통이 끊어졌고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화의 문화를 간직한 선진국가라는 인식하에, 이미 단군 · 기자 때부터 중국의 삼대(三代)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어 고구려 · 발해로 이어져 온 것으로 재구성하였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부여 · 고구려 · 백제 · 예맥 · 옥저 · 비류 등을 모두 단군의 후예인 것으로 간주하고, 발해 또한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이들이 만주에 세웠던 나라들이 본래 우리의 강토였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 때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九城)도 그 최북단인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요수(遼水)를 우리나라의 8대 강 중에 포함시킴으로써 요하 동서지방도 우리 강역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만주를 잃은 고려 이후의 강토도 3,000리가 아니라 제주도까지 포함하면 지방(地方) 6,000리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강토 속에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후와 풍토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리적 측면에서도 중화국가로 자부하는 데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지은이가 구성한 한국사는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국가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단군 · 기자 · 위만조선을 3조선이라 하여 3황(三皇)에 대비되는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며 이를 본기(本紀)에 넣고, 부여 · 옥저 · 비류 · 예맥 · 삼한 등도 고조선에 신속(臣屬)한 나라로 보아 고조선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특히 삼한을 단군 · 기자조선에 신속한 나라로서 생민(生民)의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 것은, 삼한을 중국의 유망민 집단으로 해석하고 기준(箕準) 이후부터 마한이 성립하였다고 보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긍정했으며, 마한이 삼한의 맹주로서 54국을 거느리는 대국이었다는 점에서 삼한을 삼한본기로 서술하고 이를 후조선본기(위만조선) 앞에 배치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성립보다도 삼한의 성립이 앞선 것으로 본 까닭이다.
한사군의 문제는 역사체계에서 삭제하였다. 이는 한사군이 낙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좌(遼左)에 있었을 뿐 아니라 부여 · 예 · 맥 · 옥저 · 비류 · 낙랑국 등 여섯 개의 큰 나라들이 병립해 있었고, 한반도 남쪽에는 삼한의 78국이 엄존하여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단절로 해석되지 않았다.
지은이는 고대국가의 강역에 관한 위치비정에 있어 대체로 선배 소론학자인 임상덕(林象德)의 설을 따랐다. 특히 삼한의 위치를 황해도 이남으로 본 것이나 그 밖에 비류 · 대방 · 패수 · 환도 · 졸본 등의 위치 고증은 임상덕의 설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은이의 역사인식은 유학자의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체(史體)인 강목법(綱目法)과 정통론(正統論)을 따르지 않았으며, 또 유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신으로 간주되던 귀신 숭배의 전통을 신사지(神事志)라는 독립된 항목을 두어 정리한 것이 특이하다.
이 신사지에는 환웅, 즉 신시천왕(神市天王)이 이신설교(以神設敎)한 이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화도의 삼랑성,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성모사(聖母祠), 그리고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신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유학자들이 대체로 황당무계한 것으로 배격하던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상당 부분 채용하여 단군을 환씨(桓氏)로 호칭하고,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 · 남녀 · 음식 · 거처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산천과 백성의 거처를 정했고, 아들 부루(夫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나라 임금 우(禹)를 만나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단군을 수출성인(首出聖人)으로 격상시킨 것도 이와 같이 단군시대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종휘의 역사의식은 『동사』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는데, 그가 드러내어 강조하고자 한 역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부여 · 예맥 · 비류 · 옥저 · 고구려 · 백제 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뿌리에 있어서 단군이 차지하는 혈통 및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② 발해를 말갈계통으로 인식해온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이를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성립된 국가로 설명함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켰다.
③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는 기자로부터 중국의 이상시대인 3대의 문화가 유입되어 소중화로서의 높은 문명단계로 진입했고, 이어 삼한 · 고구려 · 발해로 이어짐으로써 우리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화국가라 자부할 수 있는 문화국가가 되었다.
④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된 이후의 우리나라 강토도 제주도까지 포함시켜 볼 때 폭원(幅員)은 1만 리에 이르고 지방(地方)은 6,000리에 이르므로 결코 소국이 아니며, 그 안에는 중국이 갖추고 있는 기후 · 풍토 · 산물의 다양성이 있어 하나의 독립된 천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 역사도 중국천자만이 칭하던 본기라는 서술방식을 따를 수 있다.
⑤ 미래의 과제로는 단군 이래 우리의 영토였던 만주지방, 특히 요심(遼瀋)지방을 다시 수복함으로써 문화적인 면에서의 소중화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영토면에서도 대국으로 부상해야 한다.(2)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지리와 인문이 어우러져 문명 이룩…풀 한포기, 흙 한줌도 위대한 유산
조선 후기 역사가 이종휘 "중국 못잖은 축복의 땅" 예찬

이 땅은 아름답다. 봄꽃이 피고 여름 소낙비가 내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가을 단풍이 물들고 겨울 눈발이 날리는 풍광이 아름답다. 대지의 축복이다.
풍광이 아름다운 데 이유는 없다. 화려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위대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쩌면 누추할지 모르고 어쩌면 왜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소소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했던 선비의 글 하나 생각나 옮겨 본다.
그의 이름은 이종휘(李種徽·1731~1797), 《동사(東史)》를 지은 역사가다. 그는 《수산집(修山集)》의 '동국여지승람의 뒤에 부친다(題東國輿地勝覽後)'에서 이렇게 썼다.
'천하의 이름난 산과 큰 강을 말할 때 반드시 오악(五岳·중국의 오대 명산)과 사독(四瀆·중국의 사대 강)을 꼽는다. 안탕산과 나부산은 산세가 하늘에 닿고, 부강(府江)은 함께 섞여 바다와 가없지만, 성명문물(聲明文物)과 예악도수(禮樂度數)는 저쪽에서 나고 이쪽에서 나지 않으니, 크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휘는 이어 조선은 중국 못잖은 자연과 함께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 온 천하가 오랑캐 땅이 되었는데 머리 깎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사람들 사이에 의관조두(衣冠俎豆)와 문물예악(文物禮樂)을 지키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요, 그 인민은 반만명 은나라 사람의 후예요,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것이 고군자국(古君子國)이다. 지금 세상에서 추로(鄒魯)의 풍속으로 의관을 하고 있고 이락(伊洛)의 풍속으로 예의를 지키고 있다. 저기 불룩하고 우묵한 것이 다시 오악과 사독에 양보함이 없다.'
그러면서 도덕문명을 영위하고 있는 이땅을 '동주(東周)' 또는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러 《동국여지승람》을 《동주직방지》나 《소중화광여기》라고 바꿔도 좋겠다고 말한다.
'옛날 맹자는 등나라 임금에게 권하기를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취해 법으로 삼으라" 했으니, 압록강 동쪽을 들어 강한(江漢)의 풍속을 기대해도 주(周)의 이남(二南)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논어》에서는 "나는 그 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이 책은 '동주직방지(東周職方志)'라 불러도 좋다. '소중화광여기(小中華廣輿記)'라 일러도 좋다.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한 것은 황조(皇朝)의 세상을 만난 배신(陪臣)의 말이었다.'
역사와 지리는 국가 지식의 보고(寶庫)다. 그 나라의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 국가 지식의 보고는 《동국통감》과 《동국여지승람》이었다. 그런데 《동국통감》을 누가 읽느냐는 옛말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다행히도 그런 옛말은 보이지 않지만, 역시 후대로 갈수록 실용적인 가치는 낮아졌다.
하지만 황윤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종휘는 《동국여지승람》에서 기쁨을 느꼈다. 아니,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 고전적인 가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종휘가 《동국여지승람》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산수벽(山水癖) 때문인 것 같다.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몹시도 사랑했던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땅 전체를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조선의 국토를 흐르는 물줄기의 원위와 형세를 자세히 연구해 《청구수경(靑邱水經)》을 지었다.
이종휘가 사랑한 이 땅이 단지 아름다운 산수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이 땅은 자연과 더불어 문화가 있는 곳이고, 오늘날의 사람과 더불어 옛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부여나 경주와 같은 고도(古都)에 가도 옛 역사를 까마득히 망각하고 단지 산수만을 볼 뿐이라면, 폐허로 남은 유적지를 보아도 아무런 사연을 생각지 않고 망설임 없이 휙휙 지나갈 뿐이라면, 그는 진정으로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이 곧 옛 사람이 태어난 동방의 나라이고, 내가 타고난 언어와 기품과 성정이 곧 옛 사람도 타고난 동방의 풍기라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내가 보는 수풀과 들판을 옛 사람도 보았고, 내가 입는 옷과 먹는 음식도 곧 옛 사람이 입고 먹었다는 사실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이종휘는 이런 마음으로 《청구고사(靑邱古史)》를 지었다.
지리와 역사가 어우러져 문화를 이룩한다.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은 근원적으로 이 땅의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되고 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전승된 이 땅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된다. 나의 순수한 양지(良知)가 이 땅과 만날 때, 그 땅은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어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종휘는 양명학에 공감한 인물이다. 양명학의 정감으로 이 땅의 아름다움을 심득(心得)한 순간,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열정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이 《청구수경》과 《청구고사》의 편찬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해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산을 깎아 버리고 강을 파헤쳐 버리고 바다를 메워 버렸던 이욕(利慾)의 세파가 맑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땅이 곧 역사이고 문화이며 문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2)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 찬란한 역사·문화가 모두 땅에서 나오는데.., 2012. 1. 20.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해 2002학년도 이후 고교 1학년생이 사용하는 현행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후기 "문화의 새 기운"이라는 항목에서 역사학 분야의 새로운 기풍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 대목이 있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316쪽)
이처럼 현대 한국사학사에서 이종휘(李種徽.1731-1797)와 그가 저술한 "동사"(東史)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원류쯤 되는 저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대체 이종휘는 누구이며, 동사는 또 무엇인가? 이종휘는 자를 덕숙(德叔)이라 하고 호는 수산(修山)이라 하며,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철(李廷喆)의 아들이다. 하지만 요즘의 유명세와는 달리 정조 16-17년(1792-93)에 공주 판관을 지냈다는 점을 제외하고 그의 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가 죽은 지 6년 뒤인 1803년, 그의 아들에 의해 "수산집"(修山集)이라는 문집이 간행된다. 동사란 이 수산집 일부(권 11-13)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서술로 "동사"(東史)라는 말 그대로 동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고 평가되는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나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같은 동시대 동국(東國)의 역사서술이 상당한 거작이었음과 비교할 때 동사는 무엇보다 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다.
체제를 보면 본기(本紀)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ㆍ연표(年表)ㆍ표(表)ㆍ지(志)로 구성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그대로 본떴음을 알 수 있다.
서술대상 시기는 단군조선 이후 고려시대까지를 커버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에 관한 일을 "단군본기"(檀君本紀)라는 이름으로 제일 첫 머리에 세우고 있고, 발해사를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항목을 별도로 만들어 다루고 있다.
여기에다 동사 현존본은 삼국시대와 관련해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라와 백제본기는 따로 없고 고구려 관련 기록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열전의 경우 고구려 관련 비중은 절반 이상이며, 일종의 사회ㆍ문화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지(志)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편명(篇名)들인 예문지(藝文志) ㆍ율력지(律曆志)ㆍ천문지(天文志)ㆍ지리지(地理志)ㆍ형법지(刑法志)ㆍ오행지(五行志) 앞에는 모두 "고구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단재 신채호 이후 동사야말로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하고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쓴 역사서로 꼽힌 까닭은 이러한 "현존본"의 모습을 이종휘가 구상하고 실천한 바로 그 동사의 원래 모습이었다고 암묵적으로 간주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만 이 현존본 동사는 여러 면에서 불완전본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첫째, 서문이 없다.
둘째, 역사서평을 가하는 주체(즉 이종휘 자신)가 어떤 곳에서는 외사씨(外史氏)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찬(贊)이라고 해서 요동을 치고 있다.
셋째,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본기도 없다. 넷째, 예문지(藝文志)를 필두로 하는 각종 지(志)에 "고구려"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들 지가 이종휘 저작이라면 그는 신라와 백제의 지(志)도 따로 구상했음을 엿보게 한다.
본기나 세가도 없이 느닷없이 그 시대에 대한 지(志)가 돌출한다는 것은 현존본 동사가 불완전 판본임을 보여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현존본 "동사"는 애초에 이종휘가 쓰다가 완성치 못한 것이거나, 완성은 했으되 원고 일부(혹은 상당수)가 망실되고 남은 것들을 수산집을 편찬할 때 "동사"(東史)라는 이름으로 긁어 모은 데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문이 없고 역사서평 형식이 다르다는 점은 적어도 현존본 동사가 이종휘가 애초에 하나의 통사로써 구상한 책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불완전한 현존본을 토대로, 거기에 고구려 관련 기술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주목해 동사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하고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쓴 역사서라는 평가는 매우 성급하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동사가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비되어 동국의 역사를 발명하려 얼마나 고심했던가 하는 흔적을 완연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규장각 책임연구원들인 김영심ㆍ정재훈 씨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지원하는 동서양 학술명저번역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동사를 처음으로 완역했다.
이런 한문 고전은 원문이 생명인데, 그것을 빼어버리고 번역문만 실은 점이 아쉽기 짝이 없다. 같은 학술명저번역총서 시리즈로 먼저 나온 "염철론"(鹽鐵論)도 원문을 누락시킨 바 있는데,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지원주체인 학술진흥재단이 나서야 할 것이다.(3)
<자료출처>
(1) 이종휘(李鍾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32
(3) 찬란한 역사·문화가 모두 땅에서 나오는데.. (daum.net) 2012. 1. 20.
<참고자료>
동사 (이종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이종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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