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독자적 역사가 서기까지... 한반도 역사지리의 뿌리를 읽다 (daum.net)2024. 1. 14. 

 
[김성호의 독서만세 213] 박인호 지음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김성호 기자]

한때는 역사란 그저 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하나쯤으로 여겼을 때였다. 그 시절 역사는 간명했다. 책에 쓰인 옛 이야기였고, 그 책이란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명확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를 거쳐 여러 나라가 일어서고 쇠망했다. 그로부터 반도체를 팔아 지구 반대편에서 에너지를 사오고 K-Pop 스타를 배출해내는 이 작지만 강한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편 끝자락에서 고조선부터 삼한, 삼국시대가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 나아가 오늘에 이르는 역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유구한 시간 속 기록해 마땅한 순간들이 내가 아는 역사였다.

 

언제쯤이었을까. 내가 배운 역사가 의심스러워진 순간이 있었다. 교과서를 두고서 편향논란이 제기되고, 심지어는 역사왜곡이냐 아니냐 열띤 토론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였다. 누군가는 역사교과서가 편향되었으므로 올바로 새로 써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구는 이 같은 발언이 치우쳤다며 일갈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부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배워 아는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저 유명한 문장,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배운 역사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채택된 것일 터였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했던 모든 사실이 유의미한 역사가 되지는 못한다. 어느 것은 취해지고 어느 것은 버려진다. 이를 가르는 것은 학자들이다. 때로는 정치적 득실과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학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어떤 사실은 택하고 다른 사실은 버린다. 역사 또한 결국은 사람의 일인 것이다.

내가 아는 역사는 언제 역사가 되었을까. 시간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대신, 오늘을 사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 마땅한 과거의 사실이 된 건 언제부터인가 말인가. 문득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역사가 역사가 되기까지는
 
▲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책 표지
ⓒ 동북아역사재단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본래 그러했다'고 가벼이 지나치는 지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책이다. 박인호 교수가 지난 2021년 발표한 이 책은 저자가 과거 저술한 논문을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정리한 교양도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선 중후기 실학자들이 당대로서는 생소한 역사지리적 인식을 갖고 나름의 학문을 펼치는 과정을 정리해 나열했다. 16세기를 산 한백겸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이익과 정약용을 거쳐 서구열강과 직접 맞닥뜨린 19세기 사람 이유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를 소환해 그들의 역사지리학적 성과를 풀어놓는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와 지리가 별개의 영역이라 여긴다. 역사란 과거의 일과 그 의미를 배우는 학문이며, 지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지표 위 공간을 이해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통시적인 것이고, 지리는 공간을 넘어 분석돼야 할 공시적인 것이어서, 둘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사는 지리 가운데서 태동하고, 지리는 역사 가운데서 의미를 가진다. 지리의 영향 없이 발전하는 역사는 없고, 역사와 따로 떨어진 지리는 생동감을 잃는다. 따라서 둘을 서로 결합해 이해하는 건 앎을 넓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역사 속에서 지리를 이해하는 것, 말하자면 역사지리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론 역사와 지리가 처음부터 함께 하는 건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고, 둘의 관련성을 한 번에 꿰뚫어보는 데는 나름의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역사 가운데 지리의 중요성을 알아가기까지는 긴 시간과 외래 학문의 도움이 필요했던 듯 보인다. 이전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에 그쳤다. 국가와 사람, 업과 제도의 흥망성쇠가 주요한 대목을 이루었고, 지리는 그를 보조하며 필요한 경우 지명으로써만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마저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역은 지명이나 실제 위치가 누락되고 혼동되기 십상이었다. 어느 사료에는 한반도 안에 있다 하는 것이 다른 사료에는 요동에 있다 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역사와 지리의 긴밀한 관계맺음

고증과 실측이 역사서술의 주된 방법론으로 등장하기 이전엔 저술의 의도에 따라 지리를 제멋대로 서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후대 조선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 원나라 대의 사서 <요사>는 거란족의 역사를 요동 지역의 주류로 부각하려는 의도 아래 작성됐다. 한반도 일원에서 발호한 세력들을 요동 주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표현한 것도 그래서였다. 삼한과 삼국의 옛 지명이 난 데 없이 요동 일원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됐고, 후대의 사서 중 상당수가 먼저 있었던 이 사료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앞선 나라와 그 시대를 산 이가 이미 사라진 세상에서 후대가 이를 바로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다. 고대사 서술에선 이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아 후대에서 고대 국가의 영토를 비정하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 될 밖에 없었다.

 

책은 조선조 여러 학자가 남긴 저술을 통해 역사지리에 대한 인식과 기록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살았던 실학자들, 모두 40명 가까운 학자들이 남긴 저서를 비교분석하여 기록할 만한 특징을 따로 떼어 실었다.

 

저자는 조선 학자 가운데 역사지리학을 독립적 학문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물로 1615년 세상을 떠나는 한백겸을 이야기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 완성돼 1640년 간행된 <동국지리지>가 최초로 역사지리에 대한 내용을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기초적인 논증을 거쳐 실었기 때문이다. 책이 나라 안 강역의 변화와 관방의 실태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쓰였기에 고대 국가의 흥망을 역사지리 안에서 담아내게 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한백겸은 여기서 '남자남북자북'이란 논리로써 상고사를 살핀다. 조선이 계승하는 이 나라의 상고사는 남쪽과 북쪽으로 양분돼 별개로 발전해왔다는 이야기다. 또한 삼국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부터 연결돼 나타났다는 이전의 해석에서 탈피해 삼한 모두 남북 중 남쪽의 역사로 구별한다. <요사>의 서술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시각을 뒤집는 획기적 관점으로 이후부터는 한백겸의 시각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된다.

17세기를 산 유형원 또한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동국여지지> 등의 책에서 고대 국가들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벗어나 요동 지역까지 확장해 비정한다. 기자조선이 요하의 동쪽에 있었고, 진번 또한 요동에 있었다고 하는 식이다. 여전히 과거 여러 서적을 비교해 그중 합당하다 여겨지는 설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부이지만, 유형원은 생애 전반에 걸쳐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고대사의 무대를 합리적으로 정착시키려 노력한다.

 

진취와 경계 사이에서

성호 이익 또한 인상적이다. 저자는 이익의 역사지리 인식에 대해 '요동 땅에 대한 강한 복구의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자들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 또한 그러해서, 단군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산동반도까지 확장하거나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에 두는 등 조선이 계승한 역사를 한반도 너머까지 넓히려는 일관된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하며 계승할 역사 안에 받아들인 유득공의 <발해고> 또한 흥미롭다. 그는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적은 관심으로 불명확한 지명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요사>와 <대청일통지> 등이 잘못 기록한 위치를 비평하고 바로잡는다.

 

반면 역사지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정약용은 한반도 고대 역사를 한반도 내로 끌어들인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만주 존재설을 부정하고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끌어들이는 시도 또한 비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요동 지역의 문화가 청에 의해 함몰되어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정약용이 보인 여진과 말갈의 역사를 우리의 것과 철저히 구분하고 집요하게 역사서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고정하려는 모습 안에 시대적 흐름과 이에 대응하려는 목적성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온다.

 

실학자들의 변화하는 역사지리학적 연구로부터 단순히 고증을 통해 사실에 다가서는 모습 이상을 읽게 된다는 점은 각별히 흥미롭다. 결국 역사란 시대 안에서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로부터 더 낫거나 못한 미래에 가 닿게 된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주변 상황 가운데 우리는 역사를 대하는 더 나은 태도를 요구받고 있으므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한민족” : 네이트 뉴스 (nate.com)헤럴드POP 2007-03-15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존 패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는 생전 “중국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 왜곡하고 날조한 동아시아 역사관을 서구학계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폄하하는 중ㆍ일 학자들의 역사관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그대로 수용돼 왔고, 오늘날 대 한반도 정책의 학문적 배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오는 30일 세계적 석학들의 저서를 출간해온 뉴욕 캠브리아 출판사에서 중, 일 학자들의 왜곡된 역사관과 서구 학계의 무지를 깨우칠 수 있을 만한 한 권의 책이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헌팅턴 커리어 칼리지의 이홍범 학장이 평생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영문으로 출간하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란 400쪽 분량의 저서가 바로 그 책이다.

‘태평천국과 동학혁명 사상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부제만 보면 동아시아의 근대사에 국한된 내용 같지만 “고대 한민족의 정신문명이 중국과 일본 문명의 원류”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주장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대륙공정’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동경대 법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와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이 박사는 이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신이 밟아온 최고의 학풍을 스스로 백지화하는 셈이다.

이 학장은 “한민족의 역사는 ‘객관적 연구’란 미명 아래 고대에는 중국의 식민지로, 근대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비문명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고,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관이 세계 학계의 정설로 통하는 실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학장은 책의 첫머리에서 영자역학 이론을 들어 “중, 일 학자들이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연구할 때 연구대상의 실체는 사라진다”며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객관적 연구방법론 자체가 주관적 오류를 범한다”며 “동양의 초합리적인 직관적 방법과 자연과학의 이론까지 병행하는 ‘총체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학장은 자연과학의 실증적 방법으로 한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 아니라 1만년이며, 4대 문명이 존재하기 전 이미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있었다고 입증했다. 그리고 방사선 동위원소 추적결과, 9000여년 전 한민족 일부가 베링해를 건너 오레곤주 일대의 미국에 정착했으며, 오늘날에도 ‘아파치’(아버지), ‘가시내’(처녀), ‘지풍’(지붕) 등의 인디언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이어 다양한 고증을 통해 중국의 3황5제, 일본의 천황계가 모두 한민족 계열이며, 한(漢)문화는 다름아닌 한(韓)민족 문화였음을 입증한다. 청(淸) 태조 누르하치 또한 중국 역사문헌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점을 들어 한민족의 후손임을 드러낸다.

이 학장은 이런 실증과 고증을 통해 한민족 정신문화가 중, 일 문화의 원류임을 입증한 뒤 근세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문명의 우월성 주장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분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해왔으나 이제는 한민족의 홍익이념을 세계민주주의(Unicracy)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태평천국이나 동학이념은 모두 고대 한민족의 천부(天符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유,불, 선이 한민족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천부사상이 동아시아 정신문명의 원류”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 만유를 포괄하는 홍익이념이야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라고 말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이 ‘도전과 응전’이라면 이 학장의 역사관은 ‘자아투쟁’이다. 역사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정신과 인격이며 세계민주주의는 물질과 경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신과 인격을 더 중시한다는 것. 이런 역사관은 ‘H=PNT’라는 공식으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H는 역사(History), P는 인격(Personality), N은 비인격적 요소(Non-Personality), 즉 경제와 자원, 군사력 등을 말한다. “역사는 자아의 투쟁”이며 “인격이 몰락하면 역사도 몰락한다”는 것이 이 역사공식의 의미다. 이 학장은 “중국과 일본은 한민족 인물까지 자기네 민족으로 둔갑시켜 자아를 확장하려 애쓰는데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이 미국 학계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이 학장은 자신의 저서가 “미국을 움직이는 아이비리그의 지원으로 출판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학계 역시 대륙공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학장에 따르면 책의 서문을 쓴 힐러리 콘로이(Hilary Conroy)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는 원래 동경대학에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한 친일 학자였으나 최근에는 친한파로 자신의 학문적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고 한다. 한 때는 “일본이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에 근대화의 방법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었으나 한국은 받아먹지 못했다”며 한민족을 우매한 나라로 취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버드대학의 아키라 이리에(Akira Irie) 교수, 스탠포드대학의 피터 두스(Peter Duus) 교수 등 미국내 동아시아학계를 주도하는 다른 두 명의 학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이 박사의 관심거리다.

LA에서 다민족연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 박사는 세계민주주의론이 인연이 돼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뉴욕주)과 돈독한 교분을 지니고 있다. 또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감으로서 힐러리 의원을 적극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오는 23일 베버리힐스에서 소수계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열리는 힐러리 의원의 선거자금 모금행사도 그가 주관하는 것이다. “힐러리 의원은 세계민주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고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그의 당선 가능성은 90%이상”으로 믿고 있다.(1)

 

 

 

 

"식민반도사관 벗자" 재미사학자 폴 김 박사 '동이배달한민족사' 발간 (daum.net)노창현 2013. 9. 6. 

2009년 '간도협약' 무효청구 국제사법재판소 제기 주역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본과 청이 멋대로 맺은 사기조약은 원천무효입니다. 간도는 통일 코리아(Corea)가 반드시 찾아야할 우리의 영토입니다."

1909년 9월 4일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오욕의 날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제국주의는 청나라가 이른바 '간도협약'을 맺고 이 지역의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우리 땅 간도를 멋대로 중국에 넘겨주었다. 청일간의 사기조약으로 대한제국과 중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가 되버렸다.

 

일본은 1965년 간도협약을 무효라고 국제사회에 선언했지만 남북한 정부 어디도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간도는 현실적으로 중국이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간도를 수복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근거를 갖고 있다고 뉴욕의 재야사학자 폴 김(63 김태영) 박사는 주장한다.

이는 간도협약 100년을 사흘 앞둔 지난 2009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민족회의통일준비정부(대표 김영기)가 간도협약 무효청구를 정식으로 제기한 덕분이다. '실효적으로 점유한 영토가 100년이 지나면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한다'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100년 시효설은 지난 2009년 뜨거운 쟁점이었다.

당시 선봉에서 피끓는 목소리로 간도협약 무효청구소송을 주장한 주인공이 바로 폴 김 박사다. 동포들의 연대서명과 거듭된 탄원을 이명박 정권은 끝내 무시했지만 정부를 대신해 민족회의측이 '간도협약 100년'을 불과 사흘 남겨두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정식 제소하는 개가를 올렸다.

폴 김 박사는 4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국제사법재판소에 무효청구를 제기한 것은 100년 시효설의 함정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0년이 되기전에 국제사법재판소가 무효소장을 정식 접수했기 때문에 시효설을 근거로 시비를 삼을 여지가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 말 폴 김 박사는 필생의 역작을 탈고했다. 이후 3년이 넘게 손질 보완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햇볕을 보게 된 것은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이다. 소호출판사에서 지난 여름 발간된 '동이배달한민족사'는 무려 594쪽에 달하는 우리 민족의 참역사 이야기다.

 

부제로 '김태영의 한국 상고사'가 달린 이 저서는 김 박사가 반평생을 걸쳐 연구하고 찾은 사서와 기록, 자료, 지도를 토대로 엮었다. 그는 수년전의 간도논란을 비롯, 국사학계를 지배하는 식민반도사관을 척결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책을 펴냈다고 했다.

김 박사는 "이 책은 현존하는 모든 역사자료들을 토대로 했고 경우에 따라 토씨까지 바꾸지 않고 기록한 곳도 있으므로 엄격히 말해 내가 저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힌다"면서 "당시의 기록을 생생하게 재현시키기 위해 지리지명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책 말미에 있는 참고자료 목록은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엄청난 양이다. 한중일 역사서가 도합 131권, 영어 등 기타외국 서적이 114권이나 된다.

김 박사는 우리 민족의 정확한 명명은 한민족보다는 '동이배달한민족'이 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을 '지나(支那)'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 '중공'이라 부른다. 알려진대로 'China'는 지나에서 유래된 영어이고 중국은 수천년전 단군조선이 지어준 이름을 20세기 들어 차용했는데 그 뜻을 천하의 중심국인양 자의적으로 해석해 쓰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중국은 단군조선의 제12대 아한(阿漢)의 국태사(國太師)였던 유위자(有爲子)가 지어준 이름으로 '가운데 사이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섬서성과 하남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나대륙 땅은 단군조선 영토였고 모계와 서출로 이뤄진 지나인들을 한가운데 모여 살도록 배려한 것인데 힘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조상이자 큰집인 동이배달한민족의 영토를 침탈한 것이다. 황하 북쪽의 아시아대륙은 고려때까지도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다른땅은 몰라도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포함한 간도(間島)는 1909년 9월 3일까지 우리 땅이었고 역사적 법적으로 당연히 되찾아야 할 땅이다."<138-139쪽 중국이란?>

그는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왜곡 날조 말살한 식민사학의 노예가 된 강단사학이 해방 65년이 지나도록 바른 민족사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뜻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면서 "재야사학이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상고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식민사학이 '단군조선은 신화다'라는 말 한마디로 삼국 이전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켰기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물론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식민사학의 바이블인 '조선사'처럼 정리되지 않고 특히 지리의 해석이 제각각인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만신창이가 된 우리 민족사를 정리하기 위한 통과의례일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단군조선의 역사기록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모두 불타 없어지고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역사는 선비족 모용외의 난으로, 고구려 초기까지 역사기록 유기(留記) 100권은 위나라 관구검의 난으로 각각 소실되고 심지어 조선 태종 이방원은 명나라에 사대하기 위해 단군조선의 기록인 신지비사(神誌泌詞),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을 불살랐다.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을 한 일본은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경찰과 헌병을 총동원하여 전국각지에서 강탈한 역사서 51종 약 20만권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일본은 1923년 6월 총독부직속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를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열등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후세인들이 알 수 없게 조작 날조 왜곡을 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상고사를 약간이라도 언급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남아 있는 것이다."<79~80쪽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다'>

김 박사는 "한민족 상고사는 환국(BC8936)으로부터 배달국(BC3898) 단군조선(BC2333)으로 이어지는 약 9900여년의 역사를 말한다. 특히 환웅천황이 음력 10월3일 아사달(산서성 태원)을 도읍지로 배달국을 세우고 47대 단군들이 2100년동안 통치한 조선을 일본의 이마니시류(今西龍)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이름으로 신화라고 비하했지만 단군조선은 실존한 대연방국가였다"면서 "따라서 동이배달한민족의 역사역년은 2013년을 기준하여 배달기 5911년을 사용해야 옳으며 음력 10월3일을 우리 민족의 설날로 지정하고 이날을 기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이 책에서 제1대 단군 왕검(王儉)부터 제47대 단군 고열제(高列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것은 물론, 기자조선과 한사군 등 허구의 역사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또한 "자국의 수치를 감추고 남의 자랑은 깎아내리며, 자국의 역사는 상세히 기록하고 남의 역사는 간단히 기록하는 춘추필법의 엉터리 기록들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정사로 둔갑하고 있다. 오늘날 동북공정과 탐원공정도 그것의 연장선"이라며 민간차원이 아니라 정부차원에서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이밖에 '고구려는 900년간 대륙을 지배한 천자국',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한글의 역사는 4190년이다'는 놀랄만한 주장의 역사적 논거들을 들고 'Corea로 국호를 되돌리면 동해와 독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한일간의 갈등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책 발간에 맞춰 모국에 다녀온 폴 김 박사는 '동이배달한민족사'를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전국의 주요 대학 도서관에 일일이 발송을 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기관이나 단체에서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기증할 생각이다.

'한민족사관정립의식개혁회'라는 역사연구단체를 이끌며 요즘도 동포들을 위한 무료 역사강연회를 열고 있는 그는 "둘째 손자의 이름을 '한(韓)', 손녀는 '동이(東夷)', 넷째 손자는 '국(國')이라고 지었다. 부디 우리 자손들이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잘 지키고 계승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일본의 조선 추월, 조선이 버린 무기로 이뤄졌다[Deep&wide] (daum.net)2023. 12. 11. 04:31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궁극에 도달하면 서로 만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특정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나면 자연스레 인접 분야에 대해서도 혜안이 생긴다는 얘기지만, 요즘처럼 각 분야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최중경 한미협회 회장이 ‘잘못 쓰인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펴낸 건 보기 드문 반전이다.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금융위기 극복과정에 힘을 보탠 최 회장은 그 과정에서 체험한 ‘국가 경영전략’이라는 인식 틀을 과거 2,000년 한민족 역사에 투영했다. 최 회장은 “한민족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고 분단상황까지 맞게 된 건 역사의 중요한 순간 우리 지배층이 중대한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앞서게 된 건, 조선의 사장시킨 제련기술을 활용해 조선이 포기한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통일로 한미협회 집무실에서 진행된 최 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_역사책을 쓰게 된 동기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는 승자의 왜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논리적 추론으로 왜곡의 여지를 탐색하고 추가 사료를 발굴해 왜곡을 시정해야 올바른 역사가 보인다. 역사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외면하고 선악 논리를 앞세워 인과관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은폐, 왜곡, 과장, 편견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서술과 역사교육도 은폐, 과장, 왜곡,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매국노가 애국자가 되고 실패한 자를 성공한 자로 둔갑시키며 책임지는 자가 없는 기존의 역사 서술은 국민들이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위해 헌신할 의욕을 꺾는다."

 

_우리 역사 서술의 대표적 왜곡 사례를 꼽는다면.

"조선 고종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고종에게 덧씌워진 독립 투사 이미지를 다시 봐야 한다.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여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 구실을 스스로 내준 이가 고종이다. 자신과 외척 민씨 가문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무분별하게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용렬한 군주다."

_우리 현대사를 결정지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아달라.

"현재 우리 민족은 만주를 잃고 한반도로 밀려난 뒤, 분단상황까지 맞고 있다. 이는 과거 4, 5개가량의 역사적 변곡점마다 지배층이 선택한 국가대전략이 주변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꼽아본다면 △고구려의 방관 속에 멸망한 백제 △만주 회복 기회를 걷어찬 위화도 회군(1388) △청과 협력해 만주에 진출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1636) △청의 속방을 자처했던 임오군란(1882) △상해 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 미참전이 그것이다.”

_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많이 다르다. 백강전투부터 설명해달라.

“고구려와 백제의 몰락으로 민족의 활동 무대가 축소되고 만주 대륙의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초래한 건 신라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고구려 리더들이 최대 위험을 미리 인지해 642년 대야성 전투(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전사한 전투)의 결과를 놓고 백제에 강력히 경고하는 한편, 신라를 보듬어 더 이상의 군사적 위협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다면 660년과 668년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배후 도움이 없었다면 당은 결코 고구려나 백제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박해일이 '인조' 역을 연기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_위화도 회군과 병자호란은.

“14세기와 17세기 중국 왕조 교체기에 우리 민족은 다시 만주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공민왕 시절인 1370년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요동성에 다시 진출해 요동지배권을 확립하려는 군사작전이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지만, 당시 요동에 대한 명의 지배권은 확고하지 않았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북으로 쫓겨간)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신경 쓰였을 것이다. 고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우리 옛땅을 되찾은 거라고 설명하고 명과 조공관계를 맺었더라도 주원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명청교체기에도 조선이 청군과 연합해 명군을 공격했더라면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화를 자초했다.”

 

_임오군란 전후 19세기말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19세기 후반 조선은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신미양요, 거문도 사건 등을 겪었다. 역사교과서는 신미양요는 서양 세력과의 무력충돌로 거문도 사건은 거의 다루지 않지만, 두 사건 은 조선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처럼 영국, 미국과 가까워져 급성장할 기회를 놓쳤다.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침몰사건의 책임을 묻는 목적보다는 조선을 개항해 교역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조선 조정이 오판해 선제포격을 하는 바람에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과 협력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러시아 견제정책을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이 2년 점령 기간 중 적극적 교류를 시도하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놓였던 태국이 영국을 끌어들여 영ㆍ프의 중립지대로 남으며 독립을 보전했던 사례를 재연하지 못했다."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해군 장병(왼쪽)과 거문도 앞 해상에 정박 중인 영국 전함 페가수스. 영국해군 자료사진

 

_상해 임시정부의 실책도 언급한 바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전략적으로 영민하게 대응했다면 한반도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26개 연합국이 ‘중국 전구(戰區)’ 성립을 발표했다. 중국 전구 최고사령관에 장제스가 임명되고, 참모장은 미국 육군 중장 조셉 스틸웰이었다. 중일전쟁이 미국 통제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상해 임시정부가 미국을 잘 설득했다면, 즉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에서 일본과 싸우던 조선 청년들을 선발해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겠다고 제의했다면 우리는 전후 승전국 지위를 얻고 남북 분단도 막을 수 있었다."

_근세 일본의 발전에 조선이 버린 기술이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조선 연산군 시절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은광석 제련에 획기적 기술이 발명되었다. 연산군이 기술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해 치하할 정도였다. 당시 유럽, 남아메리카, 중국을 잇는 삼각무역의 결제통화가 은이었기에, 은을 효율적으로 제련해 생산량을 늘리는 건 국가의 부강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세력은 단천광산을 폐쇄했다. 은이 많아지면 사치 풍조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조선이 버린 기술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이 기술을 이와미 광산에 적용,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당연히 일본이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다. 게다가 조선이 명나라를 본받아 해금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해 아시아 무역의 중심에 서게 됐다."

_이런 잘못된 결정들에서 배우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17세기 명청교체기 국가전략의 실패는 국제 안보문제를 국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푸는 실책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인조반정 세력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시대역행적 친명반청 정책을 펴면서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 대외 안보에서는 초당적이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나토 창설 과정에서도 아서 반덴버그 미국 상원외교위원장은 반대 정파인 트루먼 대통령과 적극 협력했다. 그는 "국제 안보문제에 국내 정치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조선과 일본이 취한 대응을 비교하면 국가 대전략의 품질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해 경쟁이 없는 사회, 승자가 정해져 있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다. 또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폐쇄된 사회도 발전하기 어렵다. 인재 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최중경: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국장, 세계은행 이사, 기획재정부 제1차관, 주 필리핀 대사,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지식경제부 장관,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역임. 현재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제8대 한미협회 회장. 저서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청개구리 성공신화'가 있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재일동포 학자의 일침 "고대를 국민국가 틀로 보지 말라" | 연합뉴스 (yna.co.kr) 2019-09-02

이성시 교수가 쓴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오래고도 새로운 역사 읽기 (brainmedia.co.kr)2010.12.23

 

 

 


[인문사회]한중 역사전쟁 키워드…‘고조선 고구려사 연구’|동아일보 (donga.com)2007.03.03

 

 

 

 

‘분쟁 휘말린 고대사’ 실증연구 :: 문화일보 munhwa2004-01-08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러시아에 진출한 '진짜 한국사' (daum.net)2003.06.25

 

 

 

 

헤럴드 경제 2006년 9월 20일

외국인'영문 한국사'펴냈다

마이클 세스 美제임스 매디슨대 교수'한국사개요'발간

 

미국 학자가 영문으로 한국사 개요를 펴내 화제다. 미 제임스매디슨대 마이클 세스 교수는 20여년간 작업 끝에 석기시대 이후 19세기 개화기 이전까지의 한국역사를 망라한 '한국사 개요(A Concise History of Korea)'를 펴냈다.

외국인이 낸 첫 한국사는 1883년 W. E.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Kingdom)'. 고대 이후 역사를 망라한 한국사책이 나오기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특히 체계적으로 쓰인 사실상의 첫 영문 한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 같은 이웃 큰 나라들의 그늘을 벗어나 그들의 존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게 어려웠지만, 결코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한국사를 특징지을 수 있는 개념들로 저자는 동질성과 영속성, 독립성을 내세운다.

고대 이래 한국처럼 오래 통합성을 유지하며, 독특한 언어와 문화ㆍ정치ㆍ사회적 제도를 꽃 피운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는 것.

 

특히 500년 이상 지속된 조선은 일본과 오스만튀르크를 제외하면 세계 최장 왕조이고, 5세기부터 시작된 경주 김씨 같은 가문은 유럽의 어떤 가계보다도 역사가 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한국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스스로 중국을 중심이라 여기며 조공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했고, 사실은 '지독하게 독립적(fiercely independent)'이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세계적으로 눈부신 경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남한과 유례없는 독재체재를 구축한 북한의 오늘날 모습도 외부 문명에 독창적으로 적응해온 '전통 깊고 역사성 있는' 한국인들의 이 같은 사회ㆍ문화적 특성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그는 제시한다.

 

 

 

 

[고조선]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 (chosun.com) 2018.08.08.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펴내

 

 

 

 

"고조선 건국 주도 세력은 한강서 농사짓던 韓부족" (chosun.com) 2010.08.25.

'고조선 연구서' 펴낸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

 

 

 

 

일제가 지운 '고조선'의 모든 역사를 되살리다 - 노컷뉴스 (nocutnews.co.kr)  2015-10-21 

 

 

 


[책마을] "단군조선은 한반도와 만주일대 실체의 나라" (chosun.com) 2003.09.26.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 윤내현 지음, 지식산업사

 

 

 


[잠깐 읽기]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정형진 - 부산일보 (busan.com)2014-05-10 

 

 

 

 

[나의 삶이 책이 되다④]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2013.08.01 

수학 전공자가 왜 고조선 검증에 나섰을까

 

 

 

왜곡된 한사군의 실체를 밝히는 책 (1편) 열수는 하북성 영정하

 

 

 

 

[여러나라시대]

 

 

 

1500년의 미스터리를 소설처럼 풀다

고구려 고분 최고 권위자 전호태 교수
타임머신 탄듯 시대 넘나들며 비밀 탐구

기자신승근 수정 2019-10-19 11:23등록 2014-12-1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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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 환문총
전호태 지음
김영사·1만6000원

 

무용총, 각저총, 강서대묘, 안악3호분, 덕흥리 벽화분…. 널방과 천장고임에 벽화가 가득한 고구려 고분은 끊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사냥과 일상의 장면 등이 담긴 벽화는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삶을 읽어내고 그들의 내세관, 종교관, 우주관을 해석하는 장의미술이다.

 

중국 집안 고구려 무덤 환문총 벽화에는 정체 모를 겹둥근무늬 동심원들이 가득하다. 그 동심원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도 희미하게 비친다. 남겨진 벽화 아래 먼저 그려진 또 다른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120여기의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세부적인 표현을 일부 수정한 사례는 많다. 하지만 먼저 그린 그림 위에 석회를 바르고, 주제를 바꿔 전혀 다른 그림을 다시 그린 경우는 환문총이 유일하다. 더욱이 망자의 생전 생활상이나 내세인 조상신의 세계가 아닌 동심원을 가득 채웠다. 현재까지 그 이유는 비밀로 남아 있다.

<비밀의 문 환문총>은 그 미스터리의 해답을 찾아 1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전호태 울산대 교수(울산대박물관장)는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으며 축적한 성과를 이 책에 쏟아부었다. 환문총 미스터리를 고리 삼아 북한 남포의 강서대묘, 중국 집안의 무용총과 사신총 각저총 등 산재한 고분의 벽화 사진과 모사도는 물론 고분 조성 및 벽화 제작 방식, 발굴 기법 등에 관한 고고학적 지식을 종합적으로 풀어냈다. 또 고분이 조성될 당시인 4~6세기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 송, 유연의 ‘4강’ 쟁탈전 속에서 전쟁포로나 노예로 팔려가는 민초들의 고단한 삶, 불교 전파를 위해 고행의 길에 나선 승려들의 모습까지 두루 담아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서술 방식의 독특함이다. 지금껏 고구려 고분 벽화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고고학적 전문서적 성격이 강했다. 대중적인 것조차 벽화 그림을 따라가며 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비밀의 문 환문총>은 미스터리 소설 형식을 차용했다. 벽화가 제작됐을 4~6세기, 발굴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고분이 방치 훼손됐던 한국전쟁과 중국 문화혁명기까지 1500년의 역사를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듯 넘나들며 각 시대마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벽화의 비밀을 풀어간다.

 

이야기는 1988년 여름 국립박물관 미술부의 신입 학예사 한인규에서 시작된다. 고구려 고분 환문총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인규는 논문과 박물관 특별전 때문에 좀체 연구에 집중할 엄두를 못 내는 그야말로 신입이다. 하지만 대학 선배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해 온 1960년대 후반 출간된 책 꾸러미 속에서 자신보다 먼저 환문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고태일 교수의 자료를 접하면서 환문총의 실체에 한발 한발 다가가는 설정이다.

1966~76년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을 피해 연길로 떠난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 조선족 교사 이윤호와 한국전쟁 참전 동기 만대복의 회고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상황에 몰린 자신들이 대동강과 재령강, 중국 집안 일대에 산재한 고구려 벽화 무덤 속에서 추위와 미군의 폭격을 피하며 생존한 얘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실제 고분이 방치되고 훼손된 당시 현실도 담아낸다.

 

또 벽화 발굴에 참여했던 가상 인물 아즈마 다다시 등의 독백을 통해 일제 강점기 고분을 발굴 조사한 일본 관학자들의 모습과 당시 발굴에 동원된 조선인의 고뇌를 다룬다. 120여기의 고구려 벽화 가운데 널리 알려진 무용총, 각저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이 일제 강점기에 발굴된 것을 염두에 둔 설정이다.

책의 주제인 한 무덤에서 벽화의 내용이 완전히 뒤바뀐 환문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은이는 고구려의 요충지 북부여성을 지키는 성주 한보를 무덤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생전 생활상과 사후 조상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내는 당시 보편적인 벽화와 새로 도래한 불교 사상을 벽화에 구현하려는 인물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 당시 종교관, 내세관, 우주관의 충돌을 포착했다.

1500년의 미스터리를 소설처럼 풀다 (hani.co.kr)2019-10-19 

 

 

 

“백제의 개방과 국제성, 동아시아 문화권 기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백제통합 전쟁에 불과”

  • 문화일보
  • 입력 2013-03-05 11:04

중국 베이징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북송대 모사한 ‘양직공도(梁職貢圖)’ 가운데 백제국 사신을 그린 ‘백제국사도’.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일선에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임무를 수행한 첨병이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대학에서 한국고대사를 30년 넘게 가르쳐온 중견 역사학자 두 명이 최근 각각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묶은 책을 펴냈다.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인 노중국(64·사학) 계명대 교수가 상재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지식산업사)와 국내 고대사학계에서 대표적인 남북국시대론자인 김영하(60·사학) 성균관대 교수가 출간한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성균관대출판부)가 바로 그것. 두 연구서에는 모두 30년 내공의 연구자들이 절차탁마한 한국고대사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이 담겨있다.

노 교수의 연구가 풍부한 실증 자료에 바탕을 하고 있는 반면, 김 교수의 연구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실증보다 있는 사실에 대한 재검증과 논리에 바탕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 “백제 문화의 자기 개성과 국제성, 개방성은 고대 동아시아 공유문화권(共有文化圈)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는 우리나라 삼국 가운데 중국 대륙과 한반도, 왜(倭) 등과 폭넓고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던 백제의 대외관계사를 교섭과 교류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정리한 책이다. ‘백제정치사상사연구’와 ‘백제사회사상사’ 등을 펴낸 바 있는 노 교수는 이 책에서 백제사를 초기 백제와 한성도읍기, 웅진도읍기, 사비도읍기 등 크게 네 시기로 나눈 뒤 시기별 대외관계를 정치·군사·외교 측면에 비중을 둔 교섭과 경제·문화 측면에 비중을 둔 교류의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자국의 존립과 이익 추구였다. 이에 따라 중국 대륙의 수나라·당나라, 고구려 같은 대국들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른바 ‘실지양단(實持兩端)’ 정책을 추진했다는 게 노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백제는 이러한 현실적인 외교의 모습과 함께 개방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의 면모도 지녔다. 특히 지정학적·자연환경적으로 중국 왕조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던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가야·왜의 사정은 용이치 않았다.

노 교수는 “백제는 신라와 가야, 왜가 중국 남조와 교섭을 재개하려 할 때 뱃길 안내와 통역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며 “이로써 이들 나라들도 한문자(漢文字)의 사용과 유교·도가사상·불교라고 하는 정신문화, 율령 제도를 기본적인 공통요소로 하는 동북아시아 공유문화권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백제가 고대 동아시아의 공유문화권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 =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전은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으로 이해하기보다 신라의 백제통합전쟁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영하 성균관대 교수가 펴낸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논리’의 문제의식은 세 가지로 모아진다. 우선 김 교수는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일국사적 접근을 넘어 동질의 고대사로 인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7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국제전을 신라의 백제통합 전쟁이란 관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축소해 이해하는 한편, 이 전쟁을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의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삼국의 정치체제는 노예를 소유한 귀족들의 평의체제에서 권력을 강화한 대왕의 전제체제로 발전했지만, 대왕 전제체제하에서 귀족세력은 분열했고 삼국 간의 세력 각축전은 더욱 격화됐다. 이 같은 이중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삼국에서는 권력의 집중을 지향한 정변이 일어났고, 삼국 간의 전쟁은 수와 당의 개입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비화됐다.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임을 주장해온 김 교수는 책에 실린 ‘신라통일론의 궤적과 함의’라는 글에서 “고구려를 포함한 신라의 일통삼한(一統三韓)은 신문왕대에 측천무후를 상대한 외교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허위의식이었다”고 강조했다. 신라의 일통삼한의식은 고구려를 통합하지 못한 신라 지배층의 허위의식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선사관은 고구려 고지에서 건국한 발해를 한국사에서 배제하기 위해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는 신라통일론의 전형을 마련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전에 대한 한국사의 해석에서 신라의 백제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 건국이라는 기본 사실 위에 ‘신라와 발해’로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백제의 개방과 국제성, 동아시아 문화권 기여”…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백제통합 전쟁에 불과” :: 문화일보 munhwa 2013-03-05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김재호 승인 2023.07.04 17:29
최재석 지음 | 만권당 | 612쪽

야마토왜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일본서기』를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파헤친다!

 

‘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의 변신 과정’을 다룬 책으로, 일본 고대사 연구에 대한 열 편의 논고를 모은 책이다. 1990년에 출간된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의 신판이다.

저자인 고(故) 최재석 교수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을 집중 분석해 “적어도 서기 670년까지의 일본사는 일본의 역사가 아닌 한국의 역사, 한국 고대사의 일부”였음을 밝혀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백제인의 대규모 일본열도 이주 과정과 일본 개척사, 그리고 그들이 야마토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이어 백제가 야마토왜를 어떻게 통치, 경영했으며, 백제 멸망 후 야마토왜는 어떻게 일본으로 변신했는지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쪽으로는 압록·두만강을 건너 만주땅까지, 남쪽으로는 일본열도까지 펼쳐져 있었다는 진실을 밝혀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 교수신문 (kyosu.net)

 

 

 

 

[남북국시대]

 

[대진국(발해)]

 

 

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daum.net) 2012. 6. 22. 17:43

 

조선족 출신 중국학자 방학봉 교수 평생 연구 총망라

[세계일보]

중국이 관변 학자들을 동원해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발해는 실로 동아시아의 대단한 나라였다. 668년 당에 멸망한 고구려보다 더 강성했던 적도 있다. 당시 중국 사가들도 발해를 일컬어 '해동성국'이라 부르며 부러워했다. 발해에 대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사서나 한국 고문서 가운데 유독 발해를 입증할 만한 문헌이나 실증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에 한국 고대 사학자들 또한 분명한 견해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증과 실사에 의해서만 인정받는 고대 역사학의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척박한 발해 연구 환경에서 괄목할 만한 발해 연구서가 나와 주목된다. 연구서지만 지루하거나 딱딱하진 않다. 중국 연변대학의 주임 교수와 발해사연구소장을 지낸 저자 방학봉은 발해사 연구에 평생을 건 조선족 출신 중국 학자다. '발해의 강역과 지리'는 그의 평생 연구업적을 망라한 것이다.

 
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발해의 강역과 지리/방학봉 지음/정토출판/2만2000원

 

1930년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어난 방 교수는 "1949년 연변대 역사학부 학생 시절 발해 3대 문왕의 딸 정효공주(貞孝公主·757∼792)묘 발굴작업에 참여하다 엄청난 규모의 발해 역사에 매료돼 평생 동안 연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국 사학계에서도 '발해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줄곧 발해사 연구에 매진해 왔다.

팔순을 넘긴 그는 "지금 나이에 무슨 민족이니 뭐니 할 필요가 뭐가 있나. 편견이나 예단 없이 오로지 학자적 양심과 고증에 따라 발해사를 연구해 책을 썼다"고 강조한다. 그는 발해에 대해 "거란·말갈·돌궐·해 등 여러 부족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침략과 통치에 저항해 698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5경 15부 62주를 설치해 229년간 통치한 동아시아 대국"이라면서 "발해사는 아직 밝혀진 부분보다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고 했다.

방 교수가 인용한 고서적은 당나라 정사인 10세기경의 '구당서'와 송대 '신당서'를 비롯해 중국 쪽 정사 25권을 포함한 100여권에 이른다. 신당서보다 더 권위를 인정받는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를 중국과 구별된 나라로 규정한다. 한족 중심의 중국과 동이족이 다수를 차지한 고구려는 과거부터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쟁패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쪽 학자들의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사실이다.

 
1984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이던 왕승례가 쓴 '발해간사'에 나온 발해 강역도.

발해 강역은 동쪽은 바다(동해)에 닿고 서쪽은 거란(요서)과 접했으며, 남은 신라와 접하여 패강(대동강) 일대에 미쳤다. 서남쪽은 요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고, 북쪽은 흑수말갈(연해주 북쪽)에 이르렀다. 방 교수는 특히 대조영과 당군이 북방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부분을 묘사했다.

발해가 빠른 시일 내에 넓은 강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패권적인 당나라에 반대한 당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당 통치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며, 이는 당시 북방 민족들의 공통적 염원이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등은 분명히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당·신라 연합군의 침략으로 영주(베이징 부근 추정)에 강제 이주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고구려의 별종인 걸걸중상과 대조영, 말갈 추장인 걸사비우의 영도 하에 당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걸걸중상이 죽자 대조영이 통일 지휘하여 천문령에서 이해고가 거느리는 당 추격군을 물리치고 진국을 건립했다.

 
평생 발해를 연구해 온 연변대 방학봉 교수가 발해를 풀이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도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합하여 (이)해고를 치니 왕군은 대패하고 해고는 몸을 빼어 돌아갔다. 조영은 동으로 나아가 고지를 확보하고 동모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은 용맹스럽고 용병술이 뛰어났다. 이에 흩어졌던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이 모여들었다. 조영은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북방 유민들에 널리 퍼져 있던 항당투쟁 열기는 대조영이 급속히 기반을 닦아 나라를 세운 자양분이 된 것이다.

때마침 진행된 당의 쇠락과 국제환경도 대조영의 발해 건립을 도와주었다. 당시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말갈 영토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당나라는 돌궐과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였고, 신라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발해의 남하를 막을 수 없었다. 대조영은 건국 10년 사이에 고구려 옛 영토와 말갈 영토를 대부분 수복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재야사학자 남주성씨는 "청대 건륭제가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의 장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해 나라를 세웠으며 청은 발해를 잇는다고 기술돼 있다"고 증언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중국의 정사 가운데 하나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 문화일보 munhwa200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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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대외 교통로, 크게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다.


걸걸중상, 걸사비우, 이진충, 이해고, 설인귀…. TV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익숙해진 이름들이다. 고구려의 멸망과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 인물들은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만큼이나 발해를 한민족사의 중요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말갈족의 나라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구려를 승계한, 한민족의 국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사진)는 이같은 중국측 주장을 총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은,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동아시아의 당시 질서가 당나라 중심이었지만, 이같은 국제적 질서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발해 왕에 대한 당나라의 ‘책봉’은 주변 왕조에 대한 외교적 승인 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는 아니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조선]

 

 

 

 

"과거제 없었던 일본, 조선과 달리 성리학에 비판적" (daum.net)2021.04.26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낸 강지은

 

 

 

‘조선의 노마드’ 박지원 따라 중국유람 (hani.co.kr)수정 2019-10-19 등록 2008-03-21 

 

기이한 동물

〈세계 최고의 여행기-열하일기 상, 하〉
박지원 지음·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옮긴이들 “연암 읽히지 않는 건 죄악” 5년 걸쳐 ‘열하일기’ 알기 쉽게 편역삽화·현재 사진 덧붙여 사실감 더해

때는 1780년, 요즘 드라마 〈이산〉에서처럼 정조가 신난고초 끝에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다.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기골까지 장대했던 ‘당대의 천재’ 연암 박지원은 스스로 부도 명예도 버린 채, 울울한 심정으로 마흔두 살을 맞고 있었다. 정조를 옹위한 ‘일등공신’ 홍국영의 세도에 밀려 개성 부근의 연암골에서 은둔하고 있던 그에게 중원 대륙을 유람할 필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팔촌형이자 화평옹주(영조의 딸이자 화완옹주의 언니)의 부마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살 생일) 사절로 갈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해 5월25일 떠나 10월27일 돌아오는, 장장 6개월의 대장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애초 목적지인 수도 연경(북경)까지는 2300여 리, 연암 일행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벌을 지나 성경(심양), 산해관을 통과하기까지 한여름 무더위를 이겨내야 했고 변덕스런 일기 탓에 죽을 고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그곳에 황제는 없었다. 여름 궁전인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고 있었던 것. 열하까지는 북동쪽으로 다시 700리길. 연암은 ‘형님의 빽’으로 온 까닭에 반드시 가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조선인으로서 첫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권유에 이끌려 합류한다. 서둘러 오라는 황제의 닦달에 일행은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무박나흘’ 만에 열하에 당도한다.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을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또 한 권의 〈열하일기〉가 나왔다. “조선 왕조 오백년을 통틀어서, 아니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2003년 리라이팅 북시리즈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펴내며 ‘열하일기 폐인이자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는 고미숙씨를 비롯한 옮긴이들은 당당히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수식어까지 내걸었다.

 

화려한 불꽃놀이

 

열하는 중국인들이 ‘천하의 두뇌’로 여긴 곳, 두뇌를 누르고 있으면 오랑캐인 몽골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셈이라 해서 황제들이 자주 머문 ‘제2의 황성’이었다. 몽골·위구르·티베트 등 변방의 이민족들, 코끼리·낙타 등 기이한 동물, 화려한 불꽃놀이와 연회, 요술 퍼레이드 등등 이질적인 문화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빈 연암은 밤마다 관사를 몰래 빠져나와 한족 재야 선비들과 비밀 회합을 즐긴다. 중국말을 몰라 필담으로 나눈 고담준론을 통해 그는 천하의 형세, 주자학과 불교의 관계, 서학과 지동설 등등 신문물을 익혀 ‘북학파의 원조’로서 우뚝 서게 된다. 황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티베트 법왕 판첸라마를 친견하라는 명령에, 사신단이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에 어긋난다며 ‘꼬장’ 부리다 6일 만에 쫓겨나지 않았다면 〈열하일기〉는 한층 풍성해졌을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선후배 사이인 옮긴이들이 ‘고문의 고루함을 비웃어 정조의 문체반정까지 낳은 장본인인 연암의 글이 읽히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며 쉬운 편역서를 내걸고 5년 꼬박 정성을 들인 만큼 책은 ‘친절한 편집’이 돋보인다. 이김천 화백의 시원한 삽화, 당시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실사 사진, 연암의 글대로 묘사한 갖가지 도해와 그림 등이 더해져 마치 연암과 함께 2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간 듯 실감을 안겨준다. ‘연암체’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자 희곡 형식으로 처리한 중국인들과의 밤샘 필담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질적 존재들의 시끌벅적한 향연을 즐긴 건 에피쿠로스를 닮았고,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 건 스피노자를 닮았으며, 웃음이야말로 삶과 사유의 동력임을 보여준 것은 니체를 닮았으며, ‘투창과 비수’의 아포리즘으로 통념의 기반을 가차 없이 뒤흔든 건 루쉰을 닮았구나!”

고미숙씨가 연암의 묘비명으로 바치고 싶다는 헌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박지원은 진정한 자유정신, 노마드(유목민)였다’가 되겠다. 무엇보다 그가 연암을 통해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하고픈 얘기가 있다. “네 멋대로 좀 해라!”

 

 

 

18년간 경·문집 500권 쏟아낸 다산의 ‘다산’ 비결 (hani.co.kr)2019-10-20

 

틈만 나면 정리…카드작업·교정·제본·필사인력 풀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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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펴냄. 2만5000원

 

소학보전, 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 아학편훈의, 주역사전, 단궁잠오, 상례외편, 예의문답, 제례고정, 다산문답, 가례작의, 상례사전, 시경강의, 시경강의보, 상서고훈수략, 매씨서평, 소학주천, 아방강역고, 상서지원록, 민보의, 춘추고징, 역학서언,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중용강의보, 대동수경, 소학지언, 심경밀험, 악서고존, 상의절요, 경세유표, 목민심서, 국조전례고.

강진유배기(1801~1818)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저술·편집한 서목이다. 경집 232권, 문집 260여권. 한해 평균 두 가지의 책을 지은 셈이다. 그저 베껴쓰는데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란다.

그저 베껴쓰는데만 수십 년 걸릴 일…1년에 동시에 아홉 가지 작업하기

거기다가 한 가지 책을 두고 적게는 1년, 길게는 10년간 씨름했음을 감안하면 동시에 대여섯 가지 작업을 병행했음을 알 수 있다. 1810년에는 무려 아홉 가지를 동시에 진행해 마무리했다.(464~465, 56쪽) 조선 후기 학술계의 기적으로까지 일컫는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낮에는 구름 그림자와 하늘빛, 밤에는 벌레소리와 대바람소리만 들리는 유배지 생활이어서였을까?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꽃들의 웃음판>, <초월의 상상>,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내가 사랑하는 삶>, <죽비소리>, <돌위에 새긴 생각>,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글쟁이 정민 교수 다산 지식경영법 원용해 분석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집 232권

 

1996년부터 10년에 걸쳐 11권의 책을 써낸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가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원용하여 다산의 각종 저술을 분석함으로써 정리해낸 공부법이 10강 50목 200결이다. 2005년 8월부터 딱 1년동안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도서관에 머물면서 다산과 씨름한 결과다. 유배와 진배없는 시간, 다산처럼 복사뼈에 세번 구멍이 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다산의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상상은 충분했으리라.

지은이의 학교 연구실에는 둥그런 의료차트 보관대가 있다. 수백 개의 차트를 꽂아두고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돼 있다.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그가 ‘씨앗창고’라고 부르는 보관대는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 차 있다. (18도, 한국의 글쟁이 ⑫ 정민)

지은이가 귀띔하는 이 책 저술과정. <다산시문집>(민족문화추진회) 9책을 몇 차례 통독하다가 떠오른 메모를 책상 앞에 따로 붙여두었다. 정보를 조직화한다, 겉만 보지 않고 의미화한다, 집체작업으로 시간을 효율화한다 등 9개 항목이다. 카드작업을 계속하면서 문목의 대강을 세웠다. 요긴한 대목을 발췌해서 초록했다. 1차 초서작업이 끝난 뒤 항목들을 재배열했다. 항목별 집필 과정에서 관련 내용이 많고적음에 따라 덜고 더하는 작업을 하고 문목을 변경하거나 추가하기도 했다.(145~147쪽)

한 수레 넘치는 보고서, 정조 명 받고 도표 1장으로 딱!

지은이가 다산시문집에서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읽어낸 것은 다산이 <서경>이라는 텍스트를 고대의 인사고과와 논공행상하던 자취를 정리한 책으로 이해한 것과 흡사하다.

지은이가 초록한 카드에는 이런 내용도 분명 들어있을 테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립에 착수한 뒤 수원, 광주, 용인, 과천, 남양 등 여덟 고을에 명해 나무를 지속적으로 심도록 했다. 1789~1795년 7년동안 여덟 고을에서 나무를 심을 때마다 보고문이 계속 올라와 수레에 가득 싣고도 남을 지경이 됐다.

서류가 하도 많고 복잡해서 어느 고을이 무슨 나무를 심었는지 알 수가 없고 심은 나무의 총수도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정조의 명에 따라 다산은 그 자료를 정리하고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 가로는 한해 열두 달 열두 칸, 세로는 여덟 고을 여덟 칸의 도표를 만들어 칸마다 그 수량을 적었다.

도표아래 나무 종류별 그루수를 따로 적었다. 이렇게 총수를 헤아려보니 소나무와 상수리 나무 등 나무가 모두 12,009,772그루였다. 결과를 보고받고 정조는 입이 딱 벌어졌다. 소 한마리가 땀을 흘릴 만한 분량을 한 장의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올라온 것이다. 지은이는 다산식 지식경영이 거둔 성과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말한다.(125~127쪽)

초고 정리 뒤 초본 만들고 수정 첨삭 거듭해 중간본 거쳐 최종본으로

다산은 끊임없이 초서하고 틈만 나면 정리했다. 열흘쯤에 한번씩 집안에 쌓여있는 서찰을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거든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워버리고, 덜한 것은 노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표지로 만들어 정신을 산뜻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461쪽)

다산은 초고를 쓰면 빈 공책에 정리해서 초본을 만들었다. 그 초본에 수정과 첨삭을 거듭해 잘못된 것은 지우고 새로운 생각은 여백에 채워넣고 그래도 부족하면 별지를 붙였다. 너무 어지러워 지저분해지면 중간본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질정하고 수렴해서 최종본을 만든다. <주역심전> <마과회통>은 다섯번 고쳐 초고본을 완성했다.(196쪽)

문집 260여권을 집필한 다산 정약용. 그 왕성한 생산성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외부와 절연된 유배지라는 특수성이나 복사뼈가 세번 구멍이 났다는 끈기 등의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한 정민 교수가 다산시문집을 중심으로 다산의 내밀한 지식경영법을 재구해냈다. 사진은 다산의 산실이었던 다산초당. 김영사 제공


다산의 다작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다산초당은 일년내내 풀가동됐다. 제자들은 역량에 따라 카드작업을 하는 사람, 베껴쓰는 사람, 교정보는 사람, 제본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했다. 작업목표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관련정보를 수집하고 정보가 모이며 각각의 정보를 교차대조했다. 정보의 우열과 정오를 판단하고 스승이 내려준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침에 따라 분량을 나눠 작업했다. 일단 이들의 1차작업이 끝나면 다산이 이를 총괄하여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잘못된 곳을 수정 검토했다.(430~431쪽)

다산이 살아돌아와 봤다면 “어, 나하고 비슷하네” 할 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 다산을 정민으로 대체해 제목을 삼아도 무방할 만큼 다산과 정민은 뒤섞여 일체화돼 있다. 다만, 30권30책으로 남은 이익의 <성호사설>을 두고 자신이 정리하면 7~8책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다산이 살아와 후학이 정리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보면 “엇비슷해 구별되지 않는 항목이 눈에 띈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조선사람들 활 정말 잘 쏜다” (hani.co.kr)
2019-10-19 

 

임진왜란·청일전쟁 당시 조선 상황 묘사
“일생에 단 두번 씻어” 비하 내용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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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당시 일본 또는 조선에서 이를 목격한 극소수 서양인들에 의해 유럽에도 알려졌다. 그림 왼쪽은 1592(선조 25년) 4월13~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부산진 순절도. 오른쪽은 같은 달 15일 동래성에서 왜군에 맞서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그린 동래부 순절도. <한겨레> 자료사진

 

근대 이전 서양인들은 조선과 조선인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윤지관)과 명지대-LG연암문고(이사장 유영구)가 내놓은 <임진난의 기록> <백두산으로 가는 길> <조선의 소녀 옥분이> 등 3권의 책들(살림 펴냄)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 지난 2005년부터 진행해온 ‘그들이 본 우리(Korea Heritage Books)’총서 발간작업의 첫 성과물이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와 있던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의 <임진난의 기록>은 일본 전국시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년 침략전쟁 과정을 직접 관찰한 저자의 방대한 필사본 <일본사> 중에서 임진왜란에 대해서 쓴 마지막 10개의 장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의 전쟁 준비, 부산에 도착해서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성을 공격하는 상황, 명군의 개입과 강화협상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주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변역자인 정성화 명지대 교수는 “프로이스가 직접 조선에 건너왔던 것은 아니고 세스페데스 신부 등 당시 종군했던 선교사와 일본 쪽 자료들을 토대로 쓴 것”이라며 “왜곡이 심하지만 조선사람들이 활을 굉장히 잘 쏜 것으로 묘사하는 등 흥미있는 사실들을 많이 담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인터뷰하고 통역도 했던 저자가 히데요시를 매우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대망>에서 묘사된 내용과 일치한다”며, 그가 국내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침략을 감행한 것으로 묘사했다고 전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조행복 옮김)은 ‘영국군 장교의 백두산 등정기’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청일전쟁 때 중국주재 영국공사관 육군부관을 지낸 저자 알프레드 캐번디시(1859~1943)는 1897년에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돌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특별사절단의 일원으로 제물포로 들어와 육로로 원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책은 “들리는 말로는 조선인은 일생 동안 단 두 번 씻는다” 등의 조선비하 내용도 담고 있지만 당시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보이는대로 충실히 그렸고 정치·외교 상황도 언급하고 있다.

1903년 감리교 선교사로 와서 서울과 경기도에서 전도활동을 하다 1912년 미국에 돌아간 미네르바 구타펠의 조선 체험기 <조선의 소녀 옥분이: 선교사 구타펠이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이형식 옮김)은 새로운 문명과 전통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당시 조선인들의 삶을 어린이와 왕자 등 여러 주인공들 생활을 통해 엿보게 한다. 유교, 가부장제, 미신, 귀신 등에 사로잡힌 다양한 인물들을 내려다보는 우월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 목록은 2005년 명지대-LG연암문고가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고서, 문서, 사진 등 1만여 점의 한국관련 자료들 가운데 유일 희귀본들을 포함한 91종을 가려내고, 이 가운데 2006년에 단행본 9종 등 5개 언어권 13종의 도서, 그리고 2007년에는 3개 언어권 10종의 도서를 각각 선정해 번역지원한 끝에 1차로 완성된 것들이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우리를 외국에 알림과 동시에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아왔고 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 한국문학번역원이 제안한 이 사업은 앞으로 5년 동안 선정된 자료들을 모두 번역해내게 된다.

 



다산 정약용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봐야 할 책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2014.06.24 

[서평] 다산 전문가 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

 

 

 

 

추사 김정희, 어떻게 조선 금석학 개창자 되었나 (brainmedia.co.kr)2015년 07월 30일 

 

[신간]'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연구한 책이 나왔다. 박철상 씨가 펴낸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너머북스 간)은 조선시대 출판과 장서 문화, 간찰, 금석문, 연행 등의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세한도』(2010) 『서재에 살다』(2014)를 출간하며 고수의 내공을 선보인 저자 박철상이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이다. 김정희가 쓴 대련 중에 “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연경누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가 있다.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는 뜻이다.  책 제목은 여기서 따왔다.   

 김정희를 빼놓고 19세기 학문과 예술 세계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박철상은 "김정희 학문의 본령이 고증학이고, 금석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금석학이야말로 추사체가 탄생한 까닭이자, 추사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 하며 금석학을 통해 김정희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박철상의 김정희 연구에서 2002년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 기폭제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출간과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 『해동비고』의 발굴이었다. 200군데가 넘은 오류를 지적한 박철상의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 학자의 연구 성과는 유홍준의 연구 성과로 바뀌어 있었고, 고증 없는 서술로 일관되어 있었다.”라 평한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김정희란 인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앞의 논문을 발표한 다음날, 절묘한 인연으로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김정희의『해동비고』를 찾은 것이다. 『해동비고』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이 글에서도 후술하겠지만 김정희 사후 150년 동안 이제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저자는 『완당평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동비고』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김정희의 학문과 연구 세계로 잡아끄는 듯 했다고 소회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금석학 자료들을 정리하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 금석문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시기에 따른 흐름을 살펴본다조선시대에 처음부터 금석학이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서법 수련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감상의 대상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금석학이 학문으로  맹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북학파 지식인들이 금석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김정희 금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금석학자로 영재 유득공에 주목한다. 유득공이 조선 금석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한객건연집'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등 유득공의 저작에는 언제나 고대사에 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는데 그가 사료로 연구한 것은 금석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내용을 분석한 첫 번째 학자가 된 것이다.

 저자는 19세기를 '연행을 통한 북학의 시대’라는 배경을 펼쳐놓고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김정희가 젊은 시절 연행을 갔다가 옹방강(翁方綱) 옹수곤(翁樹崐) 부자와 완원(阮元) 등 대가와 교유하는 장면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다. 옹방강은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완원은 추사체 탄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의 교유는 김정희 금석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옹수곤은 조선 학자들을 통해 조선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 중심에 김정희가 있었다. 김정희는 자신과 친분 있는 인물들이 연행 갈 때면 옹방강 부자에게 편지를 써서 소개해주었고, 옹방강 부자는 김정희를 통해 신분을 확인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김정희가 금석학을 학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옹수곤과 편지로 교유하면서부터였다. 옹수곤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을 김정희에게 물었고, 김정희는 그 과정에서 금석문의 연구 방법론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1815년 옹수곤이 요절하자, 옹방강은 옹수곤의 금석학 연구 자료를 김정희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김정희의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아이가 대아(大雅, 김정희)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가르침과 사랑을 자주 받았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이 아이는 일찍부터 친구가 적었고, 오직 존형과의 우정을 일찍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이니, 존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너무도 슬퍼할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오형이 멀리서 보낸 고비(古碑)의 탁본들을 받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석하면서 얻은 것이 꽤 있습니다. 그 아이는 또 모방(摹仿), 향탑(響搨), 구록, 전랍 등의 방법을 세밀한 데까지 파고들어 이 아이가 지은 금석문을 연구한 여러 건은 대아에게 한두 가지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 것입니다."-(123~124쪽, 옹방강이 추사에게 옹수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 중에서)

이후 김정희는 본격적으로 조선 금석문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1816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다.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은 탁본과 함께 중국에도 알려졌다. 김정희는 일약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이후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817년 고적 답사를 위해 경주로 떠난다. 주요 목적은 금석문을 찾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답사를 통해 우리 금석문 연구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거둔다. 대표적으로 진흥왕릉과 다른 세 왕릉의 위치를 고증한 '진흥왕릉고' 와 '화정국사비' '문무왕비' '무장사비'등의 비석을 발굴하고 고증한 일이었다. 답사의 요체는 탁본과 책을 통해서만 보고 연구했던 내용을 실사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15일 여행은 그의 연구 업적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후 한양에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김경연의 기록은 당시 김정희가 금석학 연구에 얼마나 몰두했었는지 알려준다. 이렇게 김정희는 명실상부한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진흥왕릉' '화정국사비''문무왕비''무장사비'등 조선 역사상 최고의 비문들을 김정희가 발견하고 그 탁본들이 청나라로 전해지자, 청나라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모든 인맥을 동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그들 중 누구와도 쉽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연경의 친구들이 철저히 검증한 문사들과 선별적으로 교유할 뿐이었다. 조선 금석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나라 문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선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자 박철상은, 추사 김정희를 최근의 ‘연예 한류’에 비견할 만한 ‘학예의 조류(朝流)’를 만들어낸 한류 스타에 비견한다. 김정희의 한마디 한마디에 청조 문사들은 귀 기울였고,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예당금석과안록』의 서명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의 대표 저서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다.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2종을 연구한 추사의 논문으로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고,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서 추사 김정희의 위치를 확인시켜준 명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철상은 『예당금석과안록』에  문제를 제기한다. 김정희 문집 『완당선생전집』에는 『예당금석과안록』이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진흥이비고'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동일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가 본 금석문을 기록한 책"는 뜻인데,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예당금석과안록』이라는 서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 이유는 첫째, 진흥왕순수비 2기의 비석에 관한 논문을 싣고 과연 추사가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석문만 있고 금문(金文)이 없으며, 셋째, 김정희는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금석과안록’이란 명칭 대신 ‘비고(碑攷)’(비석과 비문에 대한 고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치밀한 고증을 거친 저자의 주장은 『예당금석과안록』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일본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당금석과안록』에 수록된 글은 분명 추사의 저작이지만, 서명은 추사가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예당금석과안록』에는 과연 어떤 이름이 붙어야 했을까? 김정희의 금석학 저작이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것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조선 금석학의 비조라는 명성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사는 과연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는 연구한 금석문이 없었을까? 이런 의문에 해답을 준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이 앞서 언급한『해동비고』의 출현이었다.

『해동비고』에는 「평백제비」「당유인원비」「경주문무왕비」「진주진감선사비」「문경지증대사비」「진경대사비」「경주무장사비」등 모두 7종의 비문에 관한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실려 있다.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학 연구서다. 이는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에 수록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논문 역시 『해동비고』에 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진흥이비고』가 『해동비고』에 실리지 못한 것은 1816년부터 시작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연구 초고가 1834년에 이르러서야 완결되기 때문이다. 반면 『해동비고』에 실린 7편의 논문은 그 이전에 완성되었다.

저자는 박철상은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의 8장에서 ‘해동비고’의 주요 내용을 톺아보며 추사 금석학의 핵심을 간결히 드러낸다. 특히 '평백제비' '당유인원비'의 경우처럼 중국과 조선의 선행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한 것도 있지만 '문무왕비' '무장사비'처럼 김정희가 직접 발굴하여 고증한 내용도 실려 있다. 여기에는 현재까지의 연구 내용을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들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김정희는 '문무왕비'의 건립 연대를 687년으로 고증했다. 이는 유희해의 681년, 이마니시 류의 682년 등 기존 학설과 다른 결과이다. 또한 현재 학계의 통설인 682년 건립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 책의 저자 박철상은 김정희의 고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해동비고』는 한국 금석문 연구사의 이정표이자, 추사 금석학의 정수를 밝혀주는 저작이다.

한편 이 책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추사체의 정체란 그가 젊은 시절 그토록 몰두했던 금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금석학이 역사와 경전의 고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서법(書法)의 고증에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김정희가 비록 서법 고증에 관한 별도의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추사체’ 자체가 살아 있는 논문이자 그의 서법 고증 금석학 연구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김정희 말년 제자인 조면호(趙冕鎬)의 글을 통해 윤곽을 잡아 추사체가 김정희 서법 고증의 정수임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에 부처 “내년이면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지 200년이 된다. 조선에 금석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이 김정희의 학예를 기리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한다.

 

 

 

 
조선을 주름잡은 8명의 '킹메이커'를 통해 21세기형 참모의 모습을 재조명한 책이 나왔다.

'조선의 킹메이커:8인8색 참모들의 리더십'(역사의아침 펴냄)은 빼어난 감각과 탁월한 결단력으로 군주를 성군의 길로 인도한 8명의 참모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 군주와 함께, 때로는 군주를 리드하며 새로운 왕조를 연 정도전
△ 스스로 선택한 군주를 결코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군주의 의지를 잘 살펴 보좌한 하륜
△ 치밀하고 때로는 의심 많은 완벽주의자 세종을 잘 섬기며 완급을 잘 조절한 황희
△ 세조의 문화적이고 외교적인 왕재를 발견해 이를 성취하도록 만든 신숙주
△ 중종을 군주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조광조
△ 투정이 심하고 겁도 많은 임금을 보필하며 처참한 난국을 극복해낸 유성룡
△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 최명길
△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정조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고 군주를 위해 영의정 자리마저 초개처럼 내던진 채제공 등 8명이다.

 

저자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리더십을 통해 21세기형 킹메이커의 모습을 제시한다. 각 인물들의 지혜와 경륜, 처세술도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저자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상 최대의 부자 군주 솔로몬의 말처럼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지난 1년간 8명의 삶을 기록한 사료와 책자에 파묻혀 시간 여행을 즐긴 저자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교훈과 21세기형 참모의 모습,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처세의 철학을 만나보자.

◇ 조선의 킹메이커/박기현 지음/역사의아침 펴냄/288쪽/1만2000원
 
 

 

 

조선은 ‘바둑 왕국’… 세종도 푹 빠져 | 중앙일보 (joongang.co.kr)2008.01.11

 

 
 고대 사서에 만 가지 놀이의 제왕으로 기록된 바둑.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21세기에 이르러 한국이 세계 최강의 실력으로 우뚝 서게 된 바둑. 그 바둑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소설가이자 한학자인 이청(48·사진)씨가 『한국 바둑사』를 처음 펴냈다. 중국의 수많은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실록에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승정원일기까지 뒤져 한국 바둑에 관한 기록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조선실록의 바둑에 대한 기록은 380건, 승정원일기는 260건. 비변사 등록원 등에서 찾은 기록이 1000건이 넘는다. 4년여에 걸친 작업이다.

 책에 따르면 조선은 바둑의 유토피아였다. 조선의 바둑은 당대 제일의 기예이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그 인기는 500년 내내 식을 줄 몰랐다. 태종의 친위세력들은 거의 바둑을 즐겼고 세종은 고수 조순생을 아예 관원으로 발탁했다. 세조는 ‘바둑왕’으로 꼽힐 만한 인물. 정무가 끝나면 상금을 걸고 측근들의 바둑 시합을 구경하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세조 때에 오면 바둑은 궁녀·환관·내의원에까지 미친다. 여자가 바둑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교자 안에서 바둑을 두다가 고변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는 왕과 사대부는 물론 시골 아전이나 기생들조차 바둑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바둑 고수를 외교전에 동원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진은 단원 김홍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둑 그림.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선조·이순신·유성룡,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 명나라의 심유경 등 3국의 수뇌부가 모두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병법과 정책 등을 말할 때 바둑은 약방의 감초가 된다.

일례로 명장 진유격은 선조에게 왜군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한 판의 바둑입니다. 이 정도에서 판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는 인조 이후 바둑은 왕궁 등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는 오히려 숱한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다시 국기(國棋)·도기(道棋)·군기(群棋) 등으로 나뉠 정도로 극성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반대자도 많았다. 정조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바둑을 두지 않았고 실학자 이익은 바둑의 폐해를 규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조선의 최고수로 숙종 때의 장문익과 영조 때의 한대수를 꼽는다. 조선 국수들의 계보를 시대별로 정리한 것도 이 책의 성과로 보인다.

 고대 기자조선과 더불어 한반도에 바둑이 유입되고 마한에서 한국의 바둑사가 시작된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삼국이 다 바둑을 즐겼지만 백제에서 특히 성행했다. 고려에 와서는 금기서화(琴棋書畵)라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귀족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 이것이 조선에 와서 전국적인 융성을 보인다는 기본 축은 기존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몇 가지 새로운 논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바둑 양식으로 여겨온 순장바둑의 원형이 인도의 시킴식 바둑이라는 것.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바둑으로 백제의 개로왕을 망하게 했다는 고대 바둑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삼국유사)를 소설적 과장으로 치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청씨는 청동기 시대인 3000년 전의 갑골문자집에서 당시에 이미 바둑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재미있는 자료도 찾아냈다.

중국과 일본은 바둑사가 그런 대로 충실하다. 한국은 바둑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은 없었고 야사나 인물사뿐이었는데 재야에서 먼저 한국 바둑사를 정색을 하고 쓰는 바람에 학계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박치문 전문기자

 

 

 

 

세종은 독재자였다, 착하고 인내심 많은 (hani.co.kr)2007-12-28 

세종은 독재자였다

〈나는 조선이다〉
이한 지음/청아출판사·1만2000원

셋째아들로 권력기반 없이 왕위 올라해박한 지식·열린 귀로 ‘선량한 독재’온갖 풍파·병고 이겨낸 힘은 ‘인내심’

한 아이가 있었다. 총명했고 부지런했으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두 형들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맏형은 끊임없이 ‘사고’를 쳤으나 부모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 관대함의 의미를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형은 조용했지만 완고해 감히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결국 아이가 선택한 것은 ‘자기 내부로의 망명’이었다. 한번 잡은 책은 100번 넘게 읽어 통째로 외웠다. 편집증에 가까운 독서는 평생 아이를 괴롭힌 눈병의 싹을 틔웠다.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살가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눈길은 오로지 맏형에게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야속했다. ‘나도 엄연히 이 집안의 아들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참았다. 그래야만 했다. 아버지는 엄했고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소년은 그렇게 인내심을 벼리며 10대를 통과했다. 21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느닷없는 일이었지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은 그렇게 옥좌에 올랐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의 형들인 양녕·효령대군을 제치고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렸다. 아버지를 상왕으로 모시고 세종은 4년을 ‘인턴 왕’으로 지낸다. 자신을 응원해줄 관료도, 옥새를 받을 명분도 없었던 세종의 초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런 권력 기반 없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32년 동안 그가 이룬 성취는 이후 400여년 조선을 지탱한 들보요 기둥이 된다. 세종을 ‘인턴 왕’에서 성공한 군주로 이끈 ‘비밀의 문’은 무엇일까?

세종은 ‘선량한 독재자’였다. 〈나는 조선이다〉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의 카리스마는 강력하게 윽박지르거나 화를 냄 없이도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조선은 세종이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착하고 인내심 많은

세종은 신하들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면서도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관료들의 말을 성실히 경청하고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줄 알았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발의하는 몫을 도맡았지만 인재를 중용해 그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든든히 지켜주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은 동시에 ‘불행한 남자’였다. 아버지 태종은 그의 처가를 풍비박산냈던 것이다.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들어 장인 심온을 주살했으며 나머지 가솔들을 나락으로 내몰았다. 세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었다. 게다가 세종의 육신은 ‘종합병동’이었다. 눈병에서 당뇨, 임질, 풍질에 이르기까지 그의 건강기록부는 참담했다.

이 모든 괴로움을 이겨낸 것은 그의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세종은 ‘인내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남자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백리요 명재상의 표상인 황희는 부정축재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으며 맹사성은 우유부단의 전형이었다. 도승지 안숭선은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이 흠이었다. 세종은 한없이 넓은 곤룡포로 그들을 감싸주었다. 전문가의 중요성을 그가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600년 전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사람이었다”는 지은이의 평대로 세종은 허례허식을 배격한 현실주의자였다.

독재자(dictator)는 그 어원이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최고권력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세종도 혼자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당했고 실천을 담보한 것이었다. 중구난방을 믿지 않았으므로 뭇사람의 의견을 막지 않고 들었으되, 결단은 단호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를 ‘선량한 독재자’라 이르는 것이다. ‘인턴 왕’을 ‘대왕’으로 이끈 그의 인내심을 배우고 싶은 이, 귓불 때리는 칼바람을 견디는 일부터 연습해도 좋을 일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조선 실학자 유수원을 아시나요 (hani.co.kr)2007-10-17

 

한영우 교수, 연구서 펴내…신분·상공업중심 개혁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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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서〉(迂書)는 18세기 초 조선 실학자 농암 유수원(1694~1755)이 지은 유일한 저서다. 책의 뜻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에둘러서 실제와는 거리가 먼 책’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떤 내용을 담았길래 지은이조차 실현 가능성에 고개를 흔들었을까?

원로 사학자인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가 이 책과 유수원을 본격 조명하는 연구서를 펴냈다. 〈꿈과 반역의 실학자-유수원〉(지식산업사).

성호 이익(1681~1763)과 함께 당대 대표적인 개혁사상가였던 농암은 〈우서〉에서 양반문벌 혁파와 상공업 중심 개혁을 강조한다.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사민(四民) 분업에 따른 신분개혁안을 제시했다. 토지 재분배에 몰두했던 성호와는 달리, 상공업 육성에 큰 관심을 보임으로써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북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게 한 교수의 평가다.

청각장애인이었던 농암은 백성이 가난한 근본 원인을 사·농·공·상의 직업적 전문화가 이뤄지지 못한 데서 찾았다. 유수원에게 진정한 사(士)는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을 말한다. 하지만 학생이든 아니든 자칭 타칭으로 사로 불리는 ‘가칭 양반’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농·공·상은 군역의 부담까지 져야 하기 때문에 피해갈 묘수만 찾았다. 유수원은 송나라 이후부터 양인과 문벌사족의 구별이 없어진 중국을 신분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즉 양반과 양인을 신분상 동질화시키는 신분체제 개혁으로 사민체제의 안정을 꾀하자는 것이다.

농암은 또 국부민안을 위한 상공업 개혁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소상인과 대상인이 자본 혹은 자본과 노동력의 형태로 결합하는 상업의 대형화와 협동화, 지방 상설시장과 도시 형성 그리고 임노동자층의 확대를 개혁안으로 제시했다. 농암은 영조 31년 62살에 소론 급진파의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교수는 영조가 양반들에게 군역의 의무를 지운 군역법을 시행한 데는 〈우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한다면서 유수원 개혁 사상의 중심축을 이루는 관제·재정·부세 개혁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시대 생물대백과 사전 | 서울신문 (seoul.co.kr)2007-08-17

‘시경(詩經)’은 기원전 11세기 서주 초기부터 기원전 6세기 동주 중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중국 북방 지역의 운문(韻文) 305편을 모은 일종의 노래책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이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중요성을 역설했다. 제자들에게는 ‘시경’을 읽으면 “날짐승과 들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충고했다.

실제로 ‘시경’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시에는 예외가 없을 만큼 온갖 동물과 식물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동식물의 출현에 혼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청대에 새로운 학풍으로 자리잡은 고증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시경’에 나오는 물명(物名·사물의 이름)을 풀이한 연구서가 줄지어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조선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명다식(詩名多識)’(정학유 지음, 허경진·김형태 옮김, 한길사 펴냄)은 바로 ‘시경’에 등장하는 생물의 정체성을 규명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저술이다. 쉽게 말해, 시경에 이름이 나오는 동식물을 망라한 ‘생물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 운포 정학유(1786∼1855)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다.‘시명다식’은 그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올곧게 이어받았음을 증명한다.

‘다식(多識)’은 제자들에 대한 공자의 충고에서 따왔다. 그러니 ‘시명다식’이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의 이름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지식’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정학유는 주자의 ‘시전(詩傳)’을 비롯해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獸蟲魚疏)’,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 곽박의 ‘이아주(爾雅注)’ 등 매우 다양한 자료를 인용했다. 본문은 식물 170종, 동물 156종 등 326가지 생물을 ▲풀(識草) ▲곡식(識穀) ▲나무(識木) ▲푸성귀(食菜) ▲날짐승(識鳥) ▲길짐승(識獸) ▲벌레(識蟲) ▲물고기(識魚)의 8개 항목으로 나눈 뒤 각각 이름을 제시하고 설명했다. 자료 사이에 혼란이 있을 때는 자신의 생각을 마지막에 적어 넣었다.3만 5000원.

 

 

 

조선 후기 학자·관료들의 백가쟁명 '國富증진 프로젝트' (daum.net)2007. 12. 7.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 발행ㆍ329쪽ㆍ1만3,000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학문은 시대적 현상과 모순을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유독 경제학만큼은 서양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르카르도의 '비교우위론'에 대해서는 한 마디씩 하면서도 정작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제학자와 이론을 꼽으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곤 한다.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그 명맥이 단절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복원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경제학이 봉건체제에서 근대경제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것처럼, 이 책은 17~18세기 조선 사회의 불치병이랄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모순들을 몸소 겪으며 개혁하려 했던 13인의 경제학자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큰 줄기는 토지공유와 경자유전(농사를 짓는 백성이 농지를 소유한다)의 이념아래 토지개혁을 통해 양반계층의 기득권을 없애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려는 이상을 가졌던 중농주의 학파와 오랑캐로 취급 받는 청의 문물을 수용해서라도 교역과 상업활동을 하는 것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외쳤던 중상주의 학파들의 시대적 고민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딱딱한 경제ㆍ경영서로 취급하는 건 큰 오해다. 정작 저자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경제학자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다. '왜 그들이 그런 이론을 펼칠 수 밖에 없었는지' 를 인물 중심의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고 있어 역사소설을 읽는 박진감을 준다.

가령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로 꼽히는 빙허각 이씨가 가문의 몰락으로 직접 생계를 꾸리다 보니 생활경제 백과사전격인 <규합총서>를 쓰게 됐다는 대목이나 <택리지>의 이중환이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 돼 방방곡곡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는 대목은 저자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들 경제학자들이 벌이는 가상좌담회는 FTA를 둘러싼 작금의 논쟁과 너무도 닮아 있어 조선시대의 경제이론이 죽은 사상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쉬는 사상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또 체제공의 금난전권(시전상인의 독점권) 철폐나 수원 화성 건립 등은 최근 집중 조명 받고 있는 개혁 군주 정조와 관련된 부분들이라 색다른 재미를 준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베스트셀러의 저자들/노대환 신병주 외 지음/255쪽·1만 원·동녘

 

전설적인 승려이자 사회개혁가 도선의 예언을 담은 ‘도선비기’, 위대한 영웅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는 이규보의 ‘동명왕편’,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이지함의 ‘토정비결’, 새로운 글쓰기와 시대에 대한 통찰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개항기 신지식의 갈증을 풀어준 유길준의 ‘서유견문’.

모두 장구한 세월 동안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저작물이다. 저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썼고 이것들은 어떻게 해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이 책을 읽으면 궁금증이 풀린다. 특히 저자들의 삶과 사상,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저작물의 의미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된 배경을 흥미롭게 추적했다. 동양대 노대환 교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신병주 학예연구사 등 한국사 전공자 5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첫 권으로, ‘이미 우리가 된 이방인들’도 함께 나왔다.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토정비결’. 지금도 수많은 ‘운명철학관’에 몇 권씩 비치돼 있고 연말연시에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이 책은 어쩌면 대한민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일지도 모른다.

필자인 신병주 학예연구사는 먼저 우리가 잘 몰랐던 16세기 토정 이지함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이지함은 다양하고 개방적인 학문을 추구한 16세기의 지식인으로, 명예와 재물과 여색(女色)에 초연했으며 천문 지리 의학에 달통했다. 국제 무역을 주장했던 경제학자였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팔도를 누빈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용하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이 책을 정말로 이지함이 지었을까’ 하는 신 연구사의 의문이다. 그는 이지함이 살았던 시대와 ‘토정비결’이 유행했던 시대의 차이를 근거로 이지함의 저작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8세기 이후에 이지함을 쏙 빼닮은 누군가가 이미 신화가 된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 ‘토정비결’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 연구사는 “이지함의 저작은 아니지만 이지함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며 “그렇기에 불멸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열하일기’와 박지원 이야기도 재미있다. 필자인 노대환 교수는 한낱 여행기에 불과한 ‘열하일기’가 어떻게 출판 당시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살펴봤다.

노 교수는 우선 독특한 제목이 큰 몫을 했다고 분석한다. 당시 중국 기행서는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왔다는 의미에서 ‘연행록(燕行錄)’ ‘연행일기’라는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전 사람들이 거의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 ‘열하’를 제목으로 내세워 눈길을 잡았다. 연암은 이처럼 관행을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했던 인물이었고 그 과감한 도전정신이 베스트셀러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다. 장사꾼과 창녀에게 지조를 바랄 수 없듯, 선비와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장사꾼과 창녀에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조지훈,‘지조론’중에서)




청빈과 지조를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본격 재조명하는 소설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올들어 최인호의 ‘유림’(전6권, 열림원 펴냄)과 한승원의 ‘추사’(전2권, 열림원 펴냄)에 이어 정찬주의 장편 ‘하늘의 도’(전3권, 뿔 펴냄)가 최근 출간됐다.

천민자본주의 공세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선비정신이 새삼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머니(돈), 머니해도 머니’라는 천박한 세태어가 회자되는 요즘, 무엇이 아쉬워 ‘퇴물’ 취급을 받아온 선비정신이 다시 주목받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일신의 안락을 좇아 변절을 밥 먹듯 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풍조, 부정부패가 판치는 시대상황 때문일 것이다.

조선 선비의 표상 조광조(‘하늘의 도’)와 세도정치에 당당히 맞선 김정희(‘추사’), 겸양과 군자의 미덕을 가르쳐준 거유(巨儒) 이황(‘유림’)을 중심에 세운 소설들은 바로 이런 시대를 향해 준엄하게 꾸짖는다.

개혁 선봉 조광조의 삶 그려

장편 ‘하늘의 도’는 군자에 도달하기 위해 간단없이 학문에 정진한 옛 선비들의 모습과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생생히 담아낸다. 이야기를 이끄는 핵심은 조광조. 서른네살에 관직의 길로 들어선 그가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정치를 펴다 끝내 중종의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는 굵직한 삶을 극적으로 그린다.

“순정한 마음으로 개혁의 씨를 뿌렸으니 뒷사람들이 반드시 열매를 거둘 것이오.”(조광조,3권 325쪽)

후세 사가들은 조광조를 당파 싸움 속에서 무리하게 개혁정치를 추구하다 실패한 정치가라든가, 조선 유교 사상을 주도한 선비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가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연산군을 폐위시킨 훈구파들의 권력 농단에 맞서 개혁의 선봉에 선 조광조는 선비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식·김정·박상·기준·양팽손 등 청류사림(淸流士林)들을 재조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교훈 삼아 가르침 깨달아야

소설 ‘추사’는 비운의 생을 산 추사 김정희의 거대한 족적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다. 말년의 삶을 중심으로 세도정치와 당당히 맞선 참 선비, 천재 예술가, 북학파의 선구자, 양반과 서얼 자식을 둔 고뇌하는 아버지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소설은 세도정치에 항거하다 유배길에 오른 추사가 모든 욕망을 버리고,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에만 매진. 신필(神筆)의 경지에 이르는 삶을 가감없이 다룬다.

‘유림’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한편의 대하 서사극. 유교의 비조 공자부터 완성자인 조선 퇴계에 이르는 유교의 본류를 시공을 뛰어넘어 21세기로 이끌어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선비 가운데 특히 주목할 인물은 조선 유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 불세출의 선비에게서 가르침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한 줄기 빛을 찾고 싶다.”는 작가 최인호의 말은 곧 우리의 심정을 대변한 말이 아닐까.

 

 

 

 

 

[인문사회]그 책, 왕의 칼이 되다… ‘제왕의 책’|동아일보 (donga.com)2007-12-01

 

 

 

인터뷰 / ‘사화와 반정의 시대’ 펴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동아일보 (donga.com) 2007-11-27

‘공자와 그의 제자들’(전 2권·한길사)과 그 유학 이념에 입각해 세워진 조선의 정치가 공자의 본뜻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살림)를 1주일 새 나란히 내놓은 신동준(51·사진) 21세기 정치연구소장.

 

 

 

 

“서울, 17C 후반부터 근대 움직임 있었다” (hani.co.kr)2007-11-14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펴낸 고동환 교수

 

 

 

“유교 문학은 글재주 이상의 사상 담아” (hani.co.kr)수정 2007-11-02 20:06 등록 2007-11-02 20:06

기자강성만,신소영

〈우리 고전을 찾아서〉

 

인터뷰 / 〈우리 고전을 찾아서〉펴낸 임형택 교수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지난 30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남긴 원전을 출간하거나 번역 출판해 학계와 대중에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그가 인사동 고서점이나 도서관 서가에서 찾아내 소개함으로써 학계의 관심을 받게 된 옛 학자들도 여럿이다. 현실주의 시정신의 다채로운 성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진명 권헌(1713~1770)이나 개항을 앞둔 시점에서 서양 종교에 맞선 대항 사상 정립에 몰두했던 심대윤(자 진경·1806~1872)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지난 30년 동안 옛 우리 책을 소개한 출판물에 쓴 해제를 묶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우리 고전을 찾아서-한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한길사 펴냄·2만6000원·사진).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1328~96)의 〈목은집〉에서부터 월북 소설가 이태준(1904~?)의 작품 〈해방 전후〉까지 소개됐으니 600여년의 시간격을 두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전들은 일관된 체계에 의해 추려지지는 않았다. “햇빛을 보지 못했던 것들 가운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새로 발굴한 것과 이미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재평가가 필요한 것들이 수록되었지요.” 전자가 권헌의 〈진명집〉, 심대윤의 〈심대윤 전집〉, 노명흠(1713~1775)의 〈동패낙송〉이라면, 후자는 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이다.

그는 특히 몰락한 소론계열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호구지책으로 안성읍내에서 장사를 하며 학문을 닦았던 심대윤에 주목했다. “그는 위기의 시대인 19세기에 서양의 사상적 침투에 맞서 어떻게 사상적으로 대응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의 욕망과 이익추구를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성리학과 완전히 다른 체계이자 근대적 각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전에 이런 생각을 뚜렷이 제기한 이는 없었습니다. 동시대 인물인 다산과는 다른 측면에서 사상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나에게 이로우면 남에게 해로운 것이 이(利)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심대윤의 해답은 “남과 더불어 ‘이’를 취하는 ‘여인동리’”와, “남과 나의 이해를 저울질해서 한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지공지도(至公之道)”였다고 임 교수는 풀었다.

 
고려말서 ‘해방전후’까지 600년 고전 한눈에권헌·심대윤 등 저작 새로 발굴해 소개하며‘열하일기’ ‘목민심서’ 등 알려진 저서 재평가까지“한문학과 우리말문학 경계 허물고 하나로”

그는 권헌에 대해선 “중요한 시인이지만 완전히 사장되어 있었다”며 “리얼리스트로서의 성과가 그분만큼 풍부한 내용을 가진 시인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했다. ‘관북민’과 ‘시노비’와 같은 장편시는 “가난하고 비천한 인생을 인간적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서사적 전향을 생동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재해석에 가장 공을 들인 책은 〈열하일기〉이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생산기술을 도입한다는 북학론적 관점에서 읽혔으나 그가 보기에는 중국을 통한 세계 인식에 더 큰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지원은 당시 시대상황을 ‘어두운 밤’으로 인식하고 천하대세의 전망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연암이 상하 각층 인간 군상의 삶과 행동 양식과 그들 가슴속에 무슨 뜻들을 감추고 있는지 가지가지 수단을 동원해 살펴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연암의 확신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곁들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빼어난 문장가와 올곧은 사상가 가운데 그의 마음을 가장 강렬히 빼앗은 이는 이항복이다. 그는 선조·광해군 사이의 명재상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상을 경륜하면서 학문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융통성도 있으면서 진정한 애국자였지요. 또 ‘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문학가로서는 박지원, 학자로서는 정약용을 첫손으로 꼽았다.

임 교수는 유교적 문학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냥 글재주가 아닙니다. 사상성과 내용성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견해이죠.” 그렇다고 문학의 독자성을 주장한 용재 성현(1439~1504) 같은 학자가 유교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유교적 문학 안에도 다른 견해들이 있습니다. 유교가 그만큼 폭이 넓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그에게 좋은 사상과 좋은 문장은 한묶음이다. “이태준과 홍명희 같은 분 역시 문장도 명문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생각이 좋았습니다.”

최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는 국문학 연구에서 탈근대·탈민족 관점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임 교수는 강 교수가 제자란 점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민족을 앞세우는 학문 의식을 탈피하는 것은 좋다고 보지만, 통일 과제도 있는 상황에서 내화된 민족의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근대에서 근대까지 또 한문학에서 우리말 문학까지 통일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한문학과 우리말 문학의 경계 나누기가 아니라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인간을 쾌락적 향락적인 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가 생각하는 동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 썩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성해야 합니다.” 내년 정년을 맞는 노학자의 염려이자 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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