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13) 유득공(柳得恭) 발해고(渤海考) 본문
유득공(1748년(영조 24)~1807년(순조 7))은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춘(柳瑃)이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사군지(四郡志)』·『발해고(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유득공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으면서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가 많아,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 수준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한 모습은 『이십일도회고시』에서도 잘 보여준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 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均)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縱橫: 재주와 기백이 활발함), 재정부유(才情富有: 재주가 많음)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1)
조선후기 학자 유득공이 발해의 역사 · 문화에 대한 내용을 엮어 1784년에 저술한 역사서.
저자는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과 중국 문물의 수입을 적극 주장했으며, 당대의 사검서(四檢書) 혹은 한학사가(漢學四家)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역사의식이 투철하여 이 책 외에도 『사군지(四郡)志』와 『이십일도지주(二十一都誌註)』 등의 역사서를 남겼다.
『발해고』는 서문(序文) 외에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고는 일종의 본기(本紀)에 해당되는 부문으로, 진국공(震國公)·고왕(高王)·무왕(武王)·문왕(文王)·폐왕(廢王)·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선왕(宣王)·이진(彛震)·건황(虔晃)·현석(玄錫)·인선(諲譔)·흥요왕(興遼王) 및 염부왕(琰府王)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진국공은 성이 대씨(大氏),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고구려에 신속(臣屬)한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라고 하였다. 진국공의 아들 고왕조영(祚榮)은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로서 고구려·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이해고(李楷固)의 군대를 무찌르고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했다고 한다.
염부왕에 대해서는 “비록 그 성명은 말하지 않았으나 태종의 조서에 나타나므로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신고는 성명 미상자를 제외하고 대문예(大門藝)를 포함하여 83인의 발해국 문·무신과 학자·외교관 등에 대해 쓴 일종의 열전(列傳)이다. 지리고는 5경(五京)·15부(十五府)·62주(六十二州)와 군(郡)·하(河)·성(城) 등에 관한 내용이고, 직관고는 문·무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의장고는 품계에 따른 복식(服式) 및 동경(東京)의 의위(儀衛)에 대하여, 물산고에서는 몇몇 지방의 산물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국어고에서는 발해의 몇몇 칭호를 소개했는데, 왕을 가독부(可毒夫)·성왕(聖王)·기하(基下)라 했으며, 명(命)을 교(敎)라 했고, 왕의 아버지를 노왕(老王), 어머니를 태비(太妃), 처를 귀비(貴妃), 장자를 부정(副正), 제자(諸子)를 왕자, 관품을 질(秩)이라 했다고 한다.
국서고에는 주로 일본에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무왕과 문왕이 각각 성무(聖武)왕에게, 강왕이 환무(桓武)왕에게 보낸 것들이다. 무왕의 국서에서는 발해국을 두고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한 것으로 부여의 유속이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고 한 글귀가 소개되는데, 이는 발해의 고구려의식을 짐작하게 한다.
끝으로 속국고에서는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의 종(種)으로서 거란에게 파한 바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정안국왕 오현명(烏玄明)이 “신은 본래 고구려의 구양(舊壤), 발해의 유예(遺黎)로서 방우(方隅)를 보거(保據)하였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고 했다면 고려에 망명 온 발해 유민 십여만 인을 통해서 능히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당나라 사람 장건장(張建章)도 일찍이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썼는데, 어찌 고려 사람으로서 발해의 역사를 편수하지 못했겠는가하고 반문하고 있다.
저자는 발해가 멸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나 문헌이 산망(散亡)하여 제대로 쓸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신당서(新唐書)』·『구당서』를 비롯한 17종의 중국 서적과 『삼국사기』·『고려사』·『동국통감』 등의 한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일본일사(日本逸史)』 등의 일본사서 등 총 22종을 참고하여 이 책을 썼다.
저자는 또 이 책을 세가(世家)·전(傳)·지(志)라 하지 않고 고(考)라 한 것은 사(史)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종래 발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동국통감』·『동사강목』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서술되어 오다가, 허목(許穆)의 『기언(記言)』과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는 독립된 항으로 서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분량이 미미했을 뿐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이종휘를 제외하고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범주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득공에 이르러 서술 분량과 성격에 있어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한국사화(韓國史化)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며, 그 뒤 이러한 성격은 한치윤(韓致奫)·홍석주(洪奭周)·정약용(丁若鏞)·김정호(金正浩) 등에게 일정하게 전수된다고 하겠다.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수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이론적 근거는 『발해고』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혀 우리 민족사의 범주로 끌어들였고, 신라와의 병립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여진·거란에 대해 영토적 권리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발해고』의 사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2)
유득공이 '발해고'를 출간한 후에도 발해에 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출간 이후 당대 최고의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국내의 여러 역사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입수한 각종 문헌들을 검토하고 발해 관련 사료들을 발굴했다.
또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연행길에 참가해 발해의 강역이었던 만주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에 관한 연구가 축적될수록 유득공은 '발해고' 개정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발해고'를 작성하고 이를 자신의 문집인 '영재서종'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발해고' 4권본이다.
1784년, 조선의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서 검서관(檢書官)으로 일하던 37살 청년 유득공은 '발해고'를 세상에 내놓는다. '발해고'는 청나라가 중화질서의 중심으로 등장한 뒤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에 안주하고 있던 조선을 뒤흔들었다.
당시까지 조선 사회는 반도 바깥의 발해를 자국의 역사라 여기지 않았다. 기자 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반도의 마한이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로 통일되었다는 성리학적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이 같은 역사관에 반발했다. '발해고'에서 유득공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이자, 삼국시대 이후에도 신라와 발해가 병립했다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했다. 이는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규정하는 것이자, 한민족의 강역을 대륙까지 확장시킨 혁명적인 역사관이었다.
이후 《발해고》는 한치윤ㆍ홍석주ㆍ정약용ㆍ김정호 등 당대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이들이 발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근대 이후에는 신채호ㆍ박은식ㆍ장도빈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학의 역사 왜곡에 맞서는 데 필수적인 저서로 자리매김한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출간한 후에도 발해에 관한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출간 이후 당대 최고의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국내의 여러 역사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입수한 각종 문헌들을 검토하고 발해 관련 사료들을 발굴했다.
또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연행길에 참가해 발해의 강역이었던 만주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발해에 관한 연구가 축적될수록 유득공은 '발해고' 개정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발해고'를 작성하고 이를 자신의 문집인 '영재서종'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발해고' 4권본이다.
이 새로운 수정본은 기존에 출간된 '발해고' 1권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9고(考)로 구성된 '발해고' 1권본과 달리, '발해고' 4권본은 5고(考)로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내용도 대폭 추가되었다. 발해의 역대 신하들을 다루는 〈신하고〉에는 '발해고' 1권본에는 없었던 32인이 등장했다.
발해의 지리를 설명하는 〈지리고〉의 경우, 완전히 새로 썼다고 여길 만큼 고금의 지리지와 역사서들을 비교 분석해 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을 치밀하게 규명하고 있다.
발해의 외교문서를 다루는 〈예문고〉에서는 당나라 현종이 발해 무왕에게 보내는 네 개의 서한을 추가해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4권본은 1권본에 비해 유득공의 논평이 크게 늘어났다. 이를 통해 발해사에 관한 그의 인식을 깊이 파악할 수 있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 '발해고: 우리가 버린 제국의 역사', 2017. 2. 26.
<자료출처>
(1) 유득공(柳得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발해고(渤海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3) '발해고: 우리가 버린 제국의 역사' (daum.net) CBS노컷뉴스 2017. 2. 26.
<참고자료>
발해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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