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신라 (32)
력사를 찾아서

일본의 신화를 통해서 보면 고대 일본의 건설은 가야인과 반도부여인(백제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초기에는 스사노오(가야 마이너 그룹)가 주축이 되어 동해를 건너 시마네(島根)의 이즈모노쿠니(出雲國) 등에서 일본 초기의 야요이 문화(彌生文化)를 주도했으며, 후기에는 반도부여인(백제인)ㆍ아마테라스(가야 메이저 그룹)들을 중심으로 규슈를 정벌하고 그 여력을 몰아서 내해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지역으로 동쪽으로 정벌해 나아가 야마도 시대를 열어갑니다. 사실 가야계는 제대로 된 거대국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므로 후에 백제계가 일본의 건국을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일본 신(神)들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 연오랑ㆍ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이야기 아시죠? ..

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

2021년 4월 28일 문화재청은 대구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됐다고 밝혔다. 문자를 기록한 나무 조각인 목간은 문헌이 적은 고대사 연구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기록 유산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 조사를 벌인 화랑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 11점을 받아 기초 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11점 중 7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그 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도 등장한다. 대구 팔거산성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의 전경. 문화재청 제공 또다른 목간(木簡) 보물창고가 될 수 있을까. 삼국의 격변기였던 7세기 초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 팔거산성에서 목간 11점이 최초로 출토됐..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노태맹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

기존 연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말갈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별로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말갈을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던 예맥계통으로 보아야 하고, 고구려 남하정책 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변방주민을 일컫는 범칭이 되었다가 후기에는 예맥계와 숙신계의 융합 형태로서 고구려를 구성하는 종족으로, 또는 발해 건국의 주체와 기층민으로 각각 참여하게 된다. 말갈은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에 존재했던 많은 국가 또는 집단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만주지역에서 비롯되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기록상으로 『삼국사기』 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갈 관련 ..

1500여년 전 신라 청년 무사가 찼던 황금장식 보검(국가지정 보물)이 최근 영국 런던의 전시장으로 날아가 눈길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런던 브리티시박물관이 2024년 9월 26일 시작한 특별기획전 ‘실크로드’(내년 2월23일까지)가 그 자리입니다. 영국 브리티시박물관의 ‘실크로드’전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경주 계림로 14호분 출토 황금장식 보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이 대여한 신라 실크로드 관련 유물 8건 중 하나로 전시장 들머리 진열장에 나온 보검은 동서 실크로드 교류 역사를 상징하는 전시 간판 유물로 떠올랐다는 평가다. 박물관 쪽은 누리집 전시 정보에 이 황금보검을 13개 대표 작품(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선정해 집중 소개했다. 197..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입니다. 원통부 27단은 27대 선덕여왕, 쓰인 돌 362개는 음력 1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동양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 ▲ 첨성대 경주의 랜드마크 첨성대ⓒ 문운주 ▲ 첨성대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진 첨성대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형상화했다.첨성대를 만든 365개 내외의 돌은 1년의 날 수를 상징하고, 27단의 돌단은 첨성대를 지은 27대 선덕여왕을, 꼭대기 정자석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 것은 음력 한 달의 날수를 상징한다.관측자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은 1년 12달, 24절기를 표시한다.[경주 시청]ⓒ 문운주 높이, 형태 등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

■ 남산지구 경주 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하며,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가장 신성시 되어왔던 곳이다. 수많은 전설과 역사 유적들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불교 관련 유적 뿐만 아니라 왕릉, 무덤, 궁궐터들이 남아있어 신라 문화의 집결체라고도 할 수 있다.『삼국유사』에는 남산에서 나라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까닭에 남산에 얽힌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남산 기슭의 나정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헌강왕에게 신라의 멸망을 경고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여 결국은 멸망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주요 문화유산으로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경주 포석정지(사적), 경주 남산신성(사적) 등이 있는데, 다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

■ 황룡사지구 사적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