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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국가유산청은 2025년 2월 6일 "신라 태자의 공간으로 알려진 동궁이 그동안 알려졌던 것처럼 월지(月池·옛 명칭은 안압지)의 서편에 있는 대형 건물터가 아니라 월지 동편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월지의 왼쪽, 즉 Ⅰ-가 지구 일대가 동궁 터라고 여겨왔다. 1975년부터 약 2년간 월지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679년을 의미하는 '의봉4년'(儀鳳四年)을 새긴 기와가 나왔고, 동궁을 연결할 만한 여러 유물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신라 왕성이었던 경주 월성(月城)의 동쪽에 있다는 점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했다. ■ 넓은 마당에 연못 갖춘 대형 건물…신라 태자의 '동궁' 찾았다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2025. 2. 6. 09:00 국가유산청, 조사 성과 공개…"월지 서편 아닌 동편이..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팔기제도를 편성 완료했다. 1621년에 심양과 요양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정부조직을 모방한 축소판 정부행정 관료기구를 구성하여 전통적인 (전연-북위-요-금-원) 2원(二元)제도를 한층 개량시켰다. 1635년, 몽골족 팔기군(八旗軍)을 편성하여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신생 제국을 통치하려는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시켰다. 중립외교 정책을 택했던 광해군을 좋아 낸 인조가 친명정책으로 선회하자, 홍타이지(皇太極)는 1636년에 조선을 침공하여 신복(臣服)시켰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만주족 세력은, 적대적 자세를 취하는 조선 사람들에 의한 후고(後顧)의 걱정거리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다. 1642년, 요하 주변에 거주하..

“황금항아리 금행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입니다. 방금 말한 대로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가 바로 의 서해용왕인데, 이 분은 단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7세 선조 금시조 함보의 아버지인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아가 칭기스 칸의 10대조 알란 고와의 4대조인 보활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는 칭기스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 가계인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고래의 아들 ‘콩크라트’에게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는 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등 동서양의 여러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조의 혈통 상의 고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3)- 전원철 박사 인터뷰칭기스 칸, 발해 왕가의 후..
말갈이라 부르든 여진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배달 고조선 고구려를 거쳐 이어온 같은 강역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는 ‘친척 집안’이며 일가(一家)이다. 금나라의 뿌리가 신라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이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었고 그 땅이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전향적인 연구와 인식이 절실하다. ■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예신완순 입력 2016.04.05 11:31수정 2018.11.19 23:04 금나라는 대륙 북부를, 청나라는 모두 차지했다.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여진 금(金)나라...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소위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의 이분..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 [한민족의 시원, 만주]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1-14 14:25 평화인권단..

백제계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된 성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과 백제 성씨인 ‘진씨(秦氏)’ 목간…. 지난 2007년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縣) 북부의 야마가시(山鹿市) 기쿠치성(鞠智城) 북부 저수지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저수지 북쪽 1.5m 지하에서 발굴된 유물 중 손꼽히는 것이 바로 금동보살입상 1점과 ‘秦人忍□五斗’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 1점이다. 그러나 한국학계에서 이 유물들과 관련된 연구는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다. 일본 구마모토현 백제계 성인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확인된 금동불상. 보주나 항아리, 그릇을 공손히 받든 이른바 봉지보주형 보살상이다. 오른쪽은 발굴품을 토대로 일본에서 제작된 복원품이다.|이장웅 한성백제 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2019년 2..
2013년 7월 5~6일 경주시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둔황 석굴군(群) 중 40개에서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확인됐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한 리신(李新) 중국 둔황연구원 연구원은 둔황 지역의 한국 관련 자료에 정통한 중국인 학자이다.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은 종류와 수량도 많고 보존 상태도 좋습니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둔황학(學)의 범위를 넓히는 새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북사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92년 둔황연구원에 들어간 리 연구원이 둔황 석굴들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5년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경변도(經變圖) 연구를 시작하면서였다. 경변도에..

쇼소인은 일본 천년고찰 도다이지(東大寺)의 목조 창고다. 쇼무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묘황후가 왕과 자신의 애장품을 도다이지에 756년 헌납하면서 왕실 보물창고가 됐다. 이후 왕실·귀족들이 바친 다양한 종류의 보물과 문서 등 고대 유물 9000여점이 탁월한 보존·관리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쇼소인 유물은 대부분 일본제이지만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도 다수 있다. 화려한 바둑판, 신라시대 묵, 백동가위, 신라촌락문서 등이 한국 유물로 흔히 거론된다. ■ 2024년 일본 왕실 보물전…한국엔 없는 ‘신라 가야금’ 천년의 자태(2024. 11. 4.) 일본 왕실창고 쇼소인 보물전 현장 신라시대 현악기 유물 ‘신라금’. 오늘날 가야금의 원형인 가얏고로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

나주 복암리고분군전시관에는 복암리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3호분이 실제와 같은 크기로 재현돼 있습니다. 한 변이 42m에 이르는 네모꼴의 고분 바깥에서 시작해 고분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독널무덤(옹관묘)부터 돌방무덤(석실묘)까지 3호분 내 41기의 무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영산강 물이 돌아 들어와 ‘회진’(回津)으로 불렸던 나주 복암리 고분군 일대는 고대부터 해상 교역로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나주 =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 ‘역사문화권 정비사업’ 현장 가보니…400년 백제묘장문화 양식 담겨3호분에만 석실묘 등 41기 발견금동관·금동신발 등 잇단 출토유산청, 121억 들여 유지·보수잠애산성·정촌고분 등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