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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력사 (15)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

우리겨레력사 (15)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대야발 2025. 3. 8. 19:08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 [한민족의 시원, 만주]<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1-14 14:25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 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환인 한나라, 환웅 배달, 고조선, 고구려 터전
신라는 정통성 없고 조선은 사대로 역사 ‘망각’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에 탄생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라는 것은 본 정부가 따로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임시로 정부를 세웠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나라냐, 민이 주인인 나라냐에 따라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라는 것은 왕이 주인인 국가다. 고종황제 때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단체이고, 신문일까? 많은 사람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선은 언제부터 청나라에 예속되었을까?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역사를 만나다’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상 캡쳐. 박종찬 기자

 

 

일제의 식민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지배한 것이다. 그 전에 조선은 청나라와 싸워서 졌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 인조는 1636년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다 항복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도두’의 예를 갖추었다.<편집자>) 그래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외교권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는 의미로 독립 연호를 썼다. 황제국가인 중국만 연호를 쓰는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쓰지 못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고조선, 배달 나라, 한나라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민족의 기원이 된 ‘배달나라’다. 인기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은 우리 상고사의 주인공인 ‘환웅’을 연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고조선이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인데 후기에 조선이 또 생겼으니 구분하기 위해 옛날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니 단군조선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자신을 환웅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인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환인이 더 근원이다.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린 나라는 한나라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한’은 한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 환인의 한나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그것은 없다. 그러니까 민족사가 한나라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여기까지다.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지는 것이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한나라가 시작이다.

 
 

열국, 또는 부여시대

 

다시 한번 우리의 민족사를 되풀이해본다면 제일 먼저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성립한 나라를 쭉 내려오면 빠진 나라들이 많다. 예, 맥, 신라, 백제, 가야, 옥저 등이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

 

고조선의 말기에 가면 여러 제후국이 세워진다. 작은 부족들이 다 독립해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부여였다. 부여시대가 열국시대다. 부여가 중심이지만,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포진했다. 옥저, 예, 동예 등이 있었고, 옥저에도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하는 식으로 여러 개가 있다. 또 맥이라는 나라도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후손들이 이동해 한강 이남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게 한이다. 한도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시대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열국시대의 중심 나라인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계승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원부여족이 있었고, 거기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지기 전 부여를 원부여라고 하고 갈라진 뒤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다. 이처럼 동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 아래 삼한 가운데 마한은 백제로 흡수되었고,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나오고, 가야가 일어났다.

 

열국시대의 많은 나라는 결국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5국 시대로 정리가 되었다. 5국 시대에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역사의 주류,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여와 백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세 나라가 심한 마찰을 빚었다.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 않았던 가야나 신라와는 마찰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가 위험에 처할 때 고구려가 도와주기도 했다.

 

 

3국 시대, 그리고 발해가 빠진 통일신라시대

 

5국 시대의 후기에 가면 동부여는 고구려에 합병이 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이 돼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이 천하를 통일해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북국시대 또는 2국 시대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해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임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고구려인보다 말갈인이 많다. 그렇다고 말갈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국가인데 구성원으로 보면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엔 왕만 고구려 사람이면 그 나라를 고구려라고 보았다.

 

발해는 명백히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더 커졌다.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2배나 넓혔으니, 인구구성상 말갈족의 비중이 높아진 것뿐이다. 정리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민족사로 볼 때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 2국 시대, 양국시대라고 본다. 3국 시대에서 2국 시대로 갔다고 봐야 한다.

 

고려의 ‘다물사상’ 계승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고려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사람들이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구전이나 문서로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다는 게 없다. 고려와 고구려 사이의 나라가 신라와 발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한 것이다. 신라만 계승해도 그렇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의 절름발이다.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의 뿌리가 유지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웠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 한 무제가 침입해 땅을 뺏겼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고토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우리가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고구려의 전쟁은 침공이나 침략전쟁이 아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뺏은 게 아니라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고구려의 ‘다물 사상’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물사상을 계승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강동6주’ 담판.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고려는 북진정책을 펴서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했다.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이 다 거란 땅이라고 생각했으니 고려의 북진은 자기 땅을 침공한 것으로 봤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침공해오자 서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새 치 혀로 강동 6주를 인정받았다.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했다.

 

거란 입장에선 혹 때려다 혹 붙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영토문제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요와 고려가 국교를 맺었다. 그것으로 영토분쟁은 일단락됐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했으면 요나라 땅을 침공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럼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고려의 역사의식과 조선의 자발적 사대주의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

 

반면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란족도 강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더 강성했다. 요나라나 금나라만 해도 고려와 형제의 예를 맺고 화친했는데, 원나라는 너무 세서 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시절 복속된 민족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자고 하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는 투철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이렇게 강했던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약소국 비슷하게 전환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모두 약소국가로 전락했다. 즉 자발적 사대를 취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현상이 빚어졌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다시 정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사를 상고사부터 다시 되돌아 보면서 웅대했던 역사의식을 되찾자는 것이다.

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법륜 스님은= 정토회 지도법사, (사) 좋은벗들 이사장, (사)한국제이티에스 이사장, (재)평화재단 이사장 (사)에코붓다 이사장, 월간 정토 발행인. 개인의 삶이 전환되는 수행을 기초로 해서 기아·질병·문맹퇴치운동, 평화, 인권, 통일운동, 생태환경 운동을 실천해왔다. 해마다 좋은벗들과 민족의 성산 백두산과 고구려·발해·항일운동 유적지를 순례하는 ‘만주 역사기행’을 벌이는 등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도 관심이 남다르다.

 

 

https://youtu.be/teawzwF7rZo

 

 

 

 

 

 

<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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