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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6년 11월1일부터 12월3일까지 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한.러 공동발굴특별전 '아무르.연해주의 신비'를 열었다. 사진은 아무르강 하류 가샤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편(古土器片)으로, 방사성탄소연대 12,960±120B.P.로 측정된 세계 최고(最古)의 토기편이다. ■ B.C.1만3000년 전의 세계 최고(最古) 토기편2006. 10. 30. 【서울=뉴시스】 지난 6년간 러시아와 공동으로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조사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이 특별전은 우리 민족의 원류를 밝히고 선사시대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양 지역 상호 문화교류 양상을 이해하고자 추진된 양국 공동발굴조사의 결과물로, 러시아 극동지역의 신석기시대에서 발해, 여진까지의 고고유물과 현지 원주민의 ..

계봉우(1880년(고종 17)~ 1959년)는 이명은 사방자(四方子)·뒤바보·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고고학이 전하는 말갈의 실체는 다르다. 최근 러시아와 연변 일대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로 말갈이 백두대간을 따라 연해주와 강원도 일대에서 살던 우리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두만강 유역은 한국과 북방사를 이어주던 역동적인 역사의 공간이었다. 삼국시대엔 강원도 지역 사람들을 말갈이라고도, 예맥이라고도 했다. 강원도 지역을 말갈로 불렀던 이유도 그들이 오랑캐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사 안에서 전통적인 농사보다는 사냥과 무력에 의지해서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렇듯 우리가 말갈이라는 사람들을 ‘한국사’ 대 ‘오랑캐 역사’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것은 변방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1989년 두만강에서 2000㎞ 떨어진 중..

러시아 연해주 서남부 지역에서 발해의 말갈 지배 사실을 입증해주는 청동제 풍탁(風鐸)이 나왔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6년 8월 2일부터 한 달간 연해주 라즈돌나야 강가 구릉에 자리한 시넬니코보-1 유적의 보루(堡壘) 내부를 조사해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약 10㎝의 청동제 풍탁을 발견했다고 10월 19일 밝혔다. 시넬니코보-1 유적의 보루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풍탁. [문화재청 제공] 풍탁은 풍경처럼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으로, 말갈의 힘이 미쳤던 지역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 유물이다. 말갈은 만주족의 선조로, 만주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족지연구소와 공동으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는 청동제 풍탁 외에도 말갈과 발해의 ..

“연해주에 들어선 최초의 고대 국가는 발해(渤海)였다.” 2012년 10월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러시아 극동연방대 부총장이 산운 장도빈 선생 기념비 제막식 때 남긴 연설이다. 사실 연해주는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의 역사 강역이었다. 1일 러시아 연해주 콕샤롭카 발해 성터에서 김동훈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왼쪽)와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선사고고실장이 2014년 발굴된 ‘제사 유구’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위구르계 토기가 출토됐다. 콕샤롭카=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1일(현지 시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400km를 달리자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평원이 나타났다. 궁벽한 시골마을 콕샤롭카다. 가슴 높이까지 자란 풀..
■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 러시아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을 발굴해온 한국전통문화학교(총장 이종철) 조사단은 2008년 9월 4일 “발해의 문화상을 알 수 있는 토제 집모형 1점과 사슴그림이 새겨진 토기편, 그리고 발해 군인들의 무장상태를 알 수 있는 철제 대도(大刀), 갑옷, 화살촉 등이 쏟아졌다”고 밝혔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해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집 모양의 토제품과 사슴이 그려진 토기편이 발견됐다. 또한 연해주에서 한인의 역사가 옥저~발해~19세기 한인 이주민으로 이어졌음을 실증해주는 유구와 유물이 쏟아졌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견된 발해 시대의 사슴그림 토기편 이번에 발견된 유물 가운데 특히 토제 집모형과 사슴그림 토기편이 주목된다. 토제 집모형은 입방체 위에 사다리꼴 ..

■ 연해주 크라스키노 염주성 유적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발굴 작업을 진행 중인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블라디슬라프 볼딘 박사는 지난 12년간 발굴 내용을 종합한 결과, 염주성은 성·사찰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식 표현을 번역한 성·사찰복합체란 곡식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사장인 사직(社稷)과 유사한 개념으로 성 내부시설이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러시아 측은 1980년 염주성 북서지역에서 대규모 사찰터를 발견하고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2007년부터 총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가 발해 염주성 사찰터에서 발굴한 내용을 토대로 제작한 금당복원도와 우물평면도, 사찰터평면도의 모습./자료제공=동북아역사재단 러시아..
발해의 세력이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됐습니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7년 7-8월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의 트로이츠코예 유적과 연해주 동해안의 소콜로프카 유적을 조사한 결과를 9월 18일 발표했습니다. 트라이츠코예 고분군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은 1천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러시아 극동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무덤의 조성시기가 발해의 존속연대(698-926년)인 8-10세기로 추정돼 러시아 학계에서 발해와의 관련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문헌자료 등 2차 자료를 통해 발해의 최북단 영역을 추정하는 학설은 제기됐으나 고고학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유물은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
윤재운교수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10대 선왕(宣王)과 13대 대현석(대현석(大玄錫) 대에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발해의 영역은 대체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고 있었으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송기호교수는 발해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 넓이는 최소 50만㎢, 최대 6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한반도 면적을 22만㎢로 어림잡을 때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고, 통일신라의 영역과 비교하면 발해는 3.8~4.9배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도 1.5~2배 넓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