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대진국(발해)의 강역 (1) 남쪽은 신라와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 동쪽은 동해까지 본문
2. 대진국(발해)의 강역 (1) 남쪽은 신라와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 동쪽은 동해까지
대야발 2025. 1. 24. 17:15
윤재운교수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10대 선왕(宣王)과 13대 대현석(대현석(大玄錫) 대에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발해의 영역은 대체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고 있었으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송기호교수는 발해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 넓이는 최소 50만㎢, 최대 6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한반도 면적을 22만㎢로 어림잡을 때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고, 통일신라의 영역과 비교하면 발해는 3.8~4.9배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도 1.5~2배 넓었습니다.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 발해의 강역에 대해 구당서엔 사방 2천리, 신당서엔 사방 5천리라고 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 발해의 강역에 대해 일치된 견해는 없다. 연구자들은 그동안 문헌자료를 통해 발해의 영토를 다양하게 규정해 왔으며, 최근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척되면서 발해 강역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대조영(고왕)이 건국할 때 발해는 빠르게 속말말갈 부족들을 흡수하며 지린성을 중심으로 지배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2대 무왕이 727년 일본 천황에 보낸 국서에 “무예(무왕의 이름)는 외람되게 여러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무왕 대에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발해의 영토에 관해 신당서 발해전에 “남쪽은 니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나란히 하였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거란과 접했다”고 했다.
무왕은 732년 장문휴에게 군대를 주어 산둥반도 등주를 공격하고 요서에서 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후 당과 화평관계를 맺었고, 서부와 남부 영토를 굳힌 것으로 파악된다.
남부 국경은 735년(성덕왕 34)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이때에 대동강~원산으로 굳혀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는 강국이었으므로, 발해가 대동강 이남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당과의 외교관계 수립이후에도 발해는 말갈 정복을 계속했다.
737년 3대 문왕이 즉위한 이후, 철리부(鐵利部), 불열부(拂涅部), 월희부(越喜部), 우루부(虞婁部) 등이 발해에 편입되었다. 이들 말갈부족을 복속시킴으로써 발해는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신당서에 바다에 이르렀다고 했고, 연해주에 발해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다는 점에서 발해는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북부 경계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흑수(黑水)말갈이 발해에 복속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구당서 말갈전에는 “오직 흑수부만이 온전히 번성하여”(唯黑水部全盛)라고 해 흑수말갈이 발해에 독립적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신당서 흑수말갈전에는 “오직 흑수만이 온전히 강성하여.”(唯黑水完彊)라고 했다가 뒤에선 “나중에 발해가 번성하자 말갈은 다 그에 복속하고”(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라고 적었다.
흑수말갈이 버티다가 끝내는 발해에 복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태평환우기와 당회요에서도 흑수가 발해에 속했다고 했다. 종합하건데, 흑수말갈도 시간이 걸렸지만 발해의 지도력을 인정했다. 따라서 발해의 북쪽 경계는 흑수말갈의 영역을 포함한다.
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압륙강하구, 요하하구, 요동은 중국 영토이고, 그 동쪽이 발해의 영토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견해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었는데, 한국 학자들은 요동지역도 발해가 손에 넣었다고 주장한다.
서쪽 경계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해줄 문헌은 드러나지 않는다. 요하 하류와 요동이 당나라와 발해의 완충지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오늘날처럼 국경을 선으로 긋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발해 서변에 대한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발해 유적 발굴지와 발해 강역도 /정석배 논문 캡쳐
윤재운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10대 선왕(宣王)과 13대 대현석(대현석(大玄錫) 대에 가장 넓었다고 한다. 발해의 영역은 대체로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은 요양과 요동에 미치고 있었으며,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다.
그러면 발해의 영토는 얼마나 넓었을까.
사학자 송기호는 발해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었으며, 전체 넓이는 최소 50만㎢, 최대 65만㎢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한반도 면적을 22만㎢로 어림잡을 때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2.2배에서 2.8배에 이르렀다. 통일신라의 영역과 비교하면 발해는 3.8~4.9배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전성기에 비해서도 1.5~2배 넓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넣는다면, 최대의 강역을 확보한 나라였다.
아틀라스뉴스, 김현민기자, 발해⑨…고구려보다 넓은 영토, 2023.08.10 (1)
“해동성국이라 불리는 발해는 고구려와 함께 역사 전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 중 일부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죠. 가뜩이나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에서 연구자들마저 발해를 외면한다면 우리 역사를 중국에 송두리째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병건 동원대 교수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북한에서 발굴된 발해 유적을 집대성한 ‘발해유적총서’를 발간한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겸 북방문화유산연구소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면서 그 역사까지 잊히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총서는 중국 718개소, 러시아 370개소, 북한 34개소 등 총 1172개에 달하는 발해 관련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다. 연구 총괄을 맡은 정 교수는 발해를 30년간 연구한 고고학자로 발굴·조사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마흔다섯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정석배 교수가 주장하는 발해 강역도. 발해의 영토에 흑수말갈 지역까지 포함하면서 기존 학설보다 약 25% 정도 넓어졌다.
총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발해의 강역(疆域·영토).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발해의 강역에서 흑수말갈 지역을 제외했다. 반면 정 교수는 흑수말갈 지역까지 발해의 강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헌에 발해가 흑수말갈을 포함한 모든 말갈족을 복속했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실제로 흑수말갈이 약 107~108년간 중국에 사신을 보내지 못한 점이 그 근거다.
정 교수는 “러시아 문헌을 보면 발해가 자유시 지역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 세 번이나 나온다”며 “이러한 근거로 볼 때 발해의 최대 강역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약 25~30% 정도 더 넓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가장 주목한 것은 120년 이상 발해의 수도 역할을 한 상경성 유적이다. 우선 그 규모부터 엄청나다. 전체 둘레가 36㎞를 넘고 성곽 둘레도 16.3㎞에 달한다. 특히 2호 궁전의 경우 기단의 좌우 폭이 92m나 된다. 그는 “2호 궁전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규모”라며 “침전으로 예상되는 곳에는 온돌까지 깔려 있어 고구려 문화를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발해가 수나라나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일부의 주장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상경성의 경우 장방형의 외성과 궁전이 있는 궁성, 관청이 모인 황성으로 구성돼 있고 도로도 반듯하게 구획된 계획 도성으로 자신이 천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상경성은 중국 장안성과 같은 황제의 도성을 표방한 곳”이라며 “이는 지방 권력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서울경제, 송영규 선임기자, "기존 학설보다 25% 더 큰 발해···소중한 북방역사", 2023. 6. 5. (2)
금사(金史)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동부 만주의 모든 말갈부족을 지배했다고 말합니다.
발해는 안녹산의 난(755-7)을 틈타 요동을 점령하고 소고구려를 흡수하였다.
742년 당시의 당나라 지도는 요하 서쪽의 요서 연안이 당나라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763년의 지도에는 당나라 국경이 만리장성 뒤로 물러갔음을 보여준다 Ledyard (1983: 341)는 “676년에 요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단지 8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후, 756년에 철폐되었다”라고 구당서(39志19地理2)를 인용한다
당나라는 717년에 평로군사(平盧軍使)를 영주에 설치하였고, 765년부터는 평로군사가 신라와 발해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후에 거란족이 발해를 정복한 후, 요(遼)에 편입된 흑수 말갈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요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흑수말갈족은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생여진족들은 이른바 백산-흑수 (장백산맥과 흑룡강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3)
홍원탁교수,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3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의 연합[홍원탁의 동아시아역사 바로보기]
The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2005.03.30
https://youtu.be/AO9t7cPvXf0?list=PLRAmvpNm4pmnzo6l8_G1sE7udrC6_X-YS
<자료출처>
(1) 발해⑨…고구려보다 넓은 영토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2023.08.10
(2) "기존 학설보다 25% 더 큰 발해···소중한 북방역사" (daum.net)2023. 6. 5.
(3)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참고자료>
해동성국 발해는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다 (daum.net)2012. 6. 22.
1천100여곳 유적으로 본 발해의 영역…'발해유적총람' 발간 (daum.net)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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