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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그 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왜(倭)가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키가 작다'는 의미의 '왜(矮)'라는 말과 결합하여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습니다.그러나 왜인(倭人)이라는 말은 현재 산동(山東)·베이징(北京)이나 요동(遼東) 지역, 황해 도서지역, 한반도 남부 해안 및 도서지역,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아온 사람들로 결국은 말갈이나 물길의 다른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왜(倭), 한국인들의 이름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겨울 연가(冬のソナタ)』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방영할 당시에는 시시콜콜한 남녀간의 사랑 얘기라고 생각하여 ..

결국 요동부여 지역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근초고왕(부여계)은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마한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였고(『日本書紀』神功 49年), 371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입니다(『三國史記』百濟本紀 近肖古王).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반도 부여인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야마도 왕국을 세운 것이지요. 즉 4~5세기 경 대륙의 부여인들이 한반도로 거쳐 바다를 건너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4세기 전반에 규슈로 갔고, 이 지역을 정벌하고 야마도 왕조를 건설하는데 대략 1세기 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 ***백제와 왜, 영원한 부여의 아들**"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일본의 신화를 통해서 보면 고대 일본의 건설은 가야인과 반도부여인(백제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초기에는 스사노오(가야 마이너 그룹)가 주축이 되어 동해를 건너 시마네(島根)의 이즈모노쿠니(出雲國) 등에서 일본 초기의 야요이 문화(彌生文化)를 주도했으며, 후기에는 반도부여인(백제인)ㆍ아마테라스(가야 메이저 그룹)들을 중심으로 규슈를 정벌하고 그 여력을 몰아서 내해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지역으로 동쪽으로 정벌해 나아가 야마도 시대를 열어갑니다. 사실 가야계는 제대로 된 거대국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므로 후에 백제계가 일본의 건국을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일본 신(神)들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 연오랑ㆍ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이야기 아시죠? ..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서기전 660년부터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일본열도는 서기369년 부여족이 정복, 일본신도는 한국무당의 후예... 369년 부여족이 왜(倭) 정벌, 신도(神道)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유래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교육부는 국가..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고분군'(Gaya Tumuli)은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유적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가야와 관련한 고분군이 780여 곳에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연합뉴스, 김예나기자, 사진은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2023.9.17 백제와 가야의 흔적이 모두 묻어 있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사적으로 지정됐다.문화재청은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와 아영면 두락리 일원에 있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했다. 남원 유곡리 및 두락리 고분군 전경/사진제공=문화재청 호남 지역 ..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는 창녕군의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포함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던 창녕지역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 초기 신라 유적이냐 가야 유적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 전체 형태와 부장품을 통해 신라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군은 창녕분지의 배후 산지에서 서쪽 평야를 향해 뻗은 구릉지에 조성됐다. 모두 115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며, 봉토분이 분포하지 않는 지대에도 지하에 많은 수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전경 /창녕군 ◇순장 소녀 '송현이'로 상징 = 또 다른 특징도 있다.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은 구릉지 능선을 따라 위치하고, 조금 늦게 6세기에 축조된 고분이 구릉지..
20~30m 내외 높은 봉분 27기 모여, 전체 고분 숫자 1000여기 추정 일본보다 빠른 말머리가리개 6점, 임나일본부설 극복 강력한 근거 금동장식 투구·금동제허리띠 등, 여러 나라 교류 유물 다수 발견 합천 옥전고분군. 하지만 특이하게 언덕의 한쪽 지역에는 지름 20~30m 내외의 높은 봉분을 가진 무덤이 27기가 모여 있으며 전체 고분의 숫자는 약 1000여기로 추정하고 있다. 옥전고분군은 언덕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묘역을 넓혀가면서 축조되었다. 무덤 형태는 일반적인 덧널무덤과 덧널의 바깥쪽에 돌로 보강한 이 지역의 독특한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다양하다. 보물 제2043호, 옥전 28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화려한 장신구로는 귀걸이와 목걸이, ..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5세기부터 가야 연맹의 유력한 해상 세력으로 떠오른 소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성읍 무기산서 뻗어나간 구릉 주변에 위치한 고성 송학동고분군./고성군/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중심 고분군으로 이 지역에서 북쪽으로 300m 거리에 기원리 무덤들이 있고, 동쪽으로 300∼400m 거리에 송학동 조개더미가 있어 삼국시대 소가야국의 자리를 나타내주고 있다.1호 무덤은 앞이 네모나고 뒤가 둥근 무덤인 전방후원형 무덤으로 보이기도 하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무덤방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7기의 무덤은 1호 무덤인 무기산 무덤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배총)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
함안박물관을 시작점으로 하면 드라마 에서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 나홀로 나무(벚나무)가 7, 8호분 사이에 보인다. 말이산고분군은 해발 40~70m의 구릉 능선에 남북으로 2km 규모로 자리한다. '언덕을 오르는가. 산을 오르는가. 무덤을 오르는가.'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계단을 오르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말이산고분군은 말하고 있다. 말이산고분군의 주능선, 4호분을 따라 완만한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다 '가야'는 기원 전후로 형성되어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던 연맹 왕국이다. 함안의 아라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상주의 고령가야로 구분해 6가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가야는 땅이 비옥해 농업이 발전했으며, 철 기술 또한 뛰어났다. 그러나 통..

대가야금관은 높이 11.5㎝, 밑지름 20.7㎝로 머리에 두르는 넓은 띠 위에 4개의 풀꽃 장식이 꽂혀 있습니다. 띠에는 아래위에 점을 찍었으며 원형 금판을 달아 장식했습니다. 드문드문 굽은 옥이 달려 있지만 출토된 이후에 부착한 것입니다. 원형, 은행형, 꽃형, 곡옥, 금고리, 금제 드리개(수식) 등 부속 금제품도 함께 보관 중인데 금관의 어느 부분에 어떤 모양으로 붙어 있었는지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국보의 자취-30] 1963년 대구 현풍읍 유가면의 속칭 '8장군묘'를 불법으로 파헤친 도굴꾼 일당이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현풍도굴사건'으로 알려진 희대의 도굴사건이다. 대구의 유명 골동상 3명이 주도한 전문적·조직적 도굴이었다. 범인들은 고분 유물 400여 점을 2년 동안이나 들키지 않고 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