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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 창녕 송현동 고분군 15호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가 2007년 12월 22일 개최한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에서 관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은 올해 조사된 유적 중에서도 대형급 무덤에 속하는 15호분 구조가 횡구식(橫口式) 석실분(石室墳)인지, 아니면 수혈식(竪穴式) 석실분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습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제15호 석실분 내부(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 벽에 순장자와 각종 부장품을 넣었다. 이 석실은 맞배지붕 모양을 본떴다. 창녕/연합뉴스 석실분이란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을 말한다. 석실 위에는 거의 예외 없이 흙이나 돌을 쌓아 봉분(封墳)을 만들기 마련이다. 이런 석실분을 ..
고령군이 2024년 6월 18일 대가야 궁성지 발굴과 정비사업 일환으로 추진 중인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에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궁성의 북벽부 토성벽 일부와 해자 등 궁성의 존재와 범위를 알려주는 방어(放語) 관련 시설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고령군은 2017년 대가야읍 연조리 594-4번지에서 토성과 해자로 추정되는 시설을 발굴한 이후, 2019년 '대가야 궁성지 발굴 ․ 정비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발굴조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그러나 아싑게도 통일신라시대 토축시설만 확인돼 대가야 궁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고령군은 2024년 3월부터 대가야읍 연조리 555-1번지 일원에 대한 ‘추정 대가야궁성지 I-1구역 정밀발굴조사’..
신용하교수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 이름을 가라(加羅), 특히 금관가라(金官加羅) 기마부대와 그 연합 세력이라고 특정해 설명하였습니다. 『AD 399년에 백제 아신왕은 신라를 병합하고자 백제·금관가야·왜의 동맹을 맺어 3국 연합군을 편성했다. AD 399년에 왜는 기병이 없이 모두 보병이었다. 백제·금관가야·왜의 연합군은 신라군을 격파해 400년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 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 부대를 남하시켜서 백제의 3국 연합군을 참패시켰다. 백제 4만 명의 보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포로가 8000명이었다니 그 참패를 추정할 수 있다. 금관가라의 기병부대와 왜 보병도 참패해, 금관가라의 수도 김해까지 점..
국가유산청과 경상남도는 삼강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2024년 5월부터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의 매장주체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가야 왕릉 밀집 지역인 고성박물관 쪽 고분군과 직선거리로 700m가량 떨어져 있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 14호분이 지금까지 조사된 모든 가야 고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철기 유물과 토기 400여점이 발굴됐습니다. 철기 유물은 갑옷 한벌과 투구, 대도(긴칼) 4점, 농경시대 우두머리의 상징물인 살포 1점, 꺾쇠, 화살촉, 창날 등으로 가야는 물론 왜·백제 유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토기는 전형적인 소가야 토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왜계 원통형 토기도 나왔습니다. 박천수 경북대학교 박물관장은 “이번에 발굴한 매장주체..
1992년 6월 6일 오전. 함안 성산산성을 한창 발굴 중이던 박종익 당시 학예연구사(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일간지 지국장으로부터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배달소년이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암만 봐도 문화재 같은”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다는 사학과 출신 지국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박종익은 꽃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년이 주워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넣은 쇳조각을 본 순간 그는 ‘말 갑옷(馬甲·마갑)’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을 발굴할 당시 비슷하게 생긴 말 갑옷 조각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발견한 조각은 황갈색 녹이 두껍게 낀 상태였고, 말에 두른 갑옷답게 길이는 10cm가 넘었다." ■ 함안 말이산..
■ 김해 대성동 고분 “예전부터 ‘애꾸지’ 아이가.”1989년 7월 경남 김해시 대성동. 온통 밭이던 야트막한 구릉 일대를 조사한 신경철 당시 경성대 교수(65·현 부산대 고고학과 교수)가 동네 토박이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애꾸지가 혹 ‘애기 구지봉’을 줄여 사투리로 부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구지봉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생지. ‘그렇다면 애기 구지봉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무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신경철 부산대 교수가 21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 29호 고분을 복원한 노출전시관에서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해=서영수 기자 kuki@donga.com“할배, 여기 옛날 이름이 뭡니까?” 이곳은 반경 500m 안에..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3.3 흥륭와(싱룽와)문화; 8200년 전~7400년 전(BC 6200년~5400년) 『중국 내몽고자치구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촌(興隆窪村)에서 확인되었다.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서요하(西遼河),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문화이다. 이 지역은 중국의 고고학적인 구분에 의하면 요서지구에 해당하며, 후대에 북방유목민들이 활동하던 무대이기도 하다. 1983년에 조사된 흥륭와유적의 발굴조사로 인해 동남부 지역의 선사고고학상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흥륭와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6200∼5400년 사이에 해당하며, 황하유역 중원지구의 노관대(老官臺), 자산(磁山)문화와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었던 것..
지금까지 가야의 건국 연대, 건국 초의 사회수준, 건국 뒤의 성장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에 관한 기본사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이 연대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 · 백제 · 고구려의 건국과 한韓의 쇠퇴라는 당시 주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때 서기 42년에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범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기 42년은 기본사료에 나타난 가야의 건국 연대이므로 이를 부인할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야는 그 지역 토착인들이 건국하였는데 그들은 가야를 건국하기 훨씬 전부터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6가라의 멸망 김수로 6형제가 신가라(지금의 김해), 밈라가라(지금의 고령), 안라가라(지금의 함안), 구지가라(지금의 고성), 별뫼가라(지금의 성주), 고령가라(지금의 함창)1)를 각각 통치했다는 점과, 임라·안라 두 가라가 4국 동맹에 참가해서 백제를 돕고 고구려를 막았다는 점은 제4편 열국쟁웅시대(중국과의 격전시대) 및 제7편 남방 제국의 대(對)고구려 공수동맹에서 서술했다. 신라의 지증·법흥·진흥 세 대왕은 지속적으로 6가라를 잠식했다. 그러다가 진흥 때 6국이 모두 신라의 소유가 됐다. 이로써 지금의 경상 좌우도가 완전히 하나가 됐다. 이제 6가라 흥망의 역사를 약술하고자 한다.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금관국으로 표기된 나라다. 시조인 수로 때는 신라보다 강성했다. 신라 파..
고구려에 맞선 신라·백제·임나가라·아라가라 4국 동맹 장수태왕이 신위례성을 침입하자, 근개루의 태자인 문주는 신라에 가서 급난을 알렸다. 신라는 꼭 동맹의 의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출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비마립간이 병력 1만을 보냈지만,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도 파괴된 뒤였다. 문주왕은 수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웅진에 도읍을 정했다. 웅진은 광개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고모나라(古模那羅)다. 웅진과 고모나라는 똑같이 곰나루로 읽어야 한다. 전자는 뜻에 근거한 이두문자이고 후자는 음에 근거한 이두문자다. 지금의 공주가 당시의 곰나루다. 당시 한강 이남에는 신라·백제 외에 가라 등 6개국이 있어, 이들이 지금의 경상남도를 차지했다는 점은 제3편 삼조선 분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