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는 창녕군의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포함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의 하나였던 창녕지역 '비화가야'를 대표하는 고분군이다. 발굴 초기 신라 유적이냐 가야 유적이냐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 전체 형태와 부장품을 통해 신라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분군은 창녕분지의 배후 산지에서 서쪽 평야를 향해 뻗은 구릉지에 조성됐다. 모두 115기의 봉토분이 분포하며, 봉토분이 분포하지 않는 지대에도 지하에 많은 수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군 창녕읍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전경 /창녕군
◇순장 소녀 '송현이'로 상징= 또 다른 특징도 있다. 5세기에 축조된 고분은 구릉지 능선을 따라 위치하고, 조금 늦게 6세기에 축조된 고분이 구릉지의 동쪽 사면으로 위치한다.
가야 멸망 이후 비화가야의 창녕분지가 신라의 주요 거점으로 변화하면서, 고분군 내에 7세기 후반까지 신라 고분이 추가로 축조되기도 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발굴은 20세기 초 대규모로 이뤄졌다. 그 규모와 가치를 인정한 일제는 1939년 국가유적에 해당하는 '고적(현재의 사적 개념)'으로 지정했다. 당시에는 고분군 분포와 행정구역을 경계로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으로 각각 지정됐다.
해방 이후 정부는 1963년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사적'으로 전환·지정했다. 이후 200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두 고분군의 연관성이 밝혀졌고, 2011년부터 현재 명칭인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으로 통합해 재지정됐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위치를 쉽게 이해하려면 창녕박물관을 기준으로 잡는 것이 좋다. 특히 창녕박물관 맞은편 고분군 중 가장 큰 7호분 주위에는 중소형 고분이 위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가야 지배층의 계층분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송현이'를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창녕박물관을 방문하는 모든 관람객이 비화가야의 16세 소녀 '송현이'를 만난다. 송현동 15호분에는 매장 당사자 외에 4구의 인골이 함께 순장됐는데 그중 가장 보존이 잘된 인골을 복원한 결과 송현이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시신을 안치하는 석곽이 가늘고 긴 형태지만, 매장부의 한쪽 끝에 입구부가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의 가야식 석곽묘가 확인된다. 입구부는 장례 시 피장자의 관을 이동하기 위한 시설로, 창녕박물관 뒤쪽 3호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창녕박물관 내 전시돼 있는 순장 유골 복원 소녀 '송현이'와 발굴 당시 유적들의 모습 /창녕군
◇창녕군의 세계유산 활용 계획= 창녕군은 이번 세계유산 등재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원상태로 보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창녕군은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이후 찾아올 관광객을 위해 다양한 활용사업 공모를 준비 중이다. 또, 고분군 야간경관 조성과 세계유산 방문자센터 건립 등을 준비하고 있다.
성낙인 창녕군수는 "앞으로 군은 우리 고분군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용사업을 활발히 진행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창녕군에는 세계유산이 된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우포늪, 국보 진흥왕 척경비와 술정리 동 삼층석탑 등 112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영산줄다리기가 포함됐다. 군은 또, 우포늪과 화왕산지역을 핵심구역으로 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2020년부터 추진 중이고, 2024년 지정 목표다.
경남도민일보, 이일균 기자 ,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계층분화 보여주는 비화가야 무덤, 2023.09.19
대형 봉토분 주변 작은 봉토분들 위치, 일제강점기 도굴로 수많은 유물 반출 오구라컬렉션 9점 중요문화재 지정, ‘창녕식 토기’ 독자적 토기 생산 증거 금 공예품은 신라와 독자 교류 방증, 녹나무 관 등으로 일본과 교류 확인 순장소녀 ‘송현이’ 국내 최초로 복원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의 가야고분군 중 유일하게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한 지리적 요소로 인해 신라와 자율적으로 교섭했던 가야 정치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현재까지 조사를 통해 조성된 고분군의 면적은 53만1442㎡이며 봉분은 115기다. 봉분이 축조되지 않은 고분의 기수를 포함하면 수백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대형 봉토분을 중심으로 주변에 작은 봉토분들이 위치한다. 특히 교동 7호분 주위에는 중소형 고분이 위성처럼 둘러싸고 있어 가야 지배층의 계층 분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배치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다. 지배자들의 계층에 따라 고분의 크기가 다르게 만들어졌으나, 크고 작은 고분군이 군집해 구릉지에 조화롭게 조성된 경관은 가야고분군 중 으뜸이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전경./창녕군/
◇일제강점기 도굴 아픔 겪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가야고분군 중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도굴을 당했던 고분군이다. 1910년 합병 이후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성 근거 확보가 필요했고, ‘임나일본부설’ 실체 규명을 위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중 13기의 고분을 조사했다. 출토된 유물의 양은 마차 20대분, 화차 2량분으로 많은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오구라컬렉션’이라 불리는 오구라의 수집 유물 중 많은 유물이 창녕 출토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국립도쿄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오구라컬렉션 중 창녕 출토 가야유물 9점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높다.
◇체계적인 조사와 보존 관리= 일제강점기 이후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가야고분군 중 가장 많은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고분군의 보존을 위한 학술조사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와 협업해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5세기 중엽에 축조가 시작돼 6세기 중엽 신라로 편입되기까지 약 100년간 지속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비화가야 지배 세력의 성장과 쇠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적임이 증명됐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가장 대표적인 무덤 형태는 한쪽 끝에 입구부가 결합해 있는 독특한 형식의 가야식 석곽묘다. 입구부는 장례 시 피장자의 관과 부장유물을 이동하기 위한 시설로서 교동 3호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그 외에도 표형분, 적석목곽묘, 판석조 석곽묘도 확인돼 신라와 가까운 지역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분군에서 출토된 창녕식 토기는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지역색을 보여 독자적인 토기 생산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고 있다. 금동관, 금으로 만든 굵은 고리의 귀걸이, 허리띠 장식, 말안장 등 금으로 만든 공예품은 가야연맹 속 독자적으로 신라와 교류했던 모습을 잘 보여주며, 63호분에서 출토된 출(出)자형금동관은 축조기법을 통해 비화가야 세력이 자체 제작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녹나무로 만들어진 관과 명문이 새겨진 큰칼, 철판으로 만든 갑옷은 낙동강을 통해 일본 열도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출토품이다.
7호분에서 발굴된 장신구.
7호분에서 발굴된 녹나무관
◇최초 가야사람 복원 프로젝트 ‘송현이’= 2007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송현동 고분군 15분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순장자 인골 4구가 확인됐다. 4구의 순장인골 중 가장 온전한 인골 1구를 국내 최초로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복원 프로젝트에는 고고학뿐만 아니라 법의학, 해부학, 유전학, 화학, 물리학 등 국내 인문학·자연과학 전문가들이 함께했고, 그 결과 16세의 순장 소녀 ‘송현이’ 복원에 성공했다.
송현이는 정강이와 종아리뼈에서 무릎을 많이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 15호분 주인공의 시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모시던 권력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제로 죽임을 당한 뒤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성낙인 창녕군수는 “가야고분군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활용해 우리 유산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