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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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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면적 12만 km²의 삼강평원에서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 토기와 비슷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흥한 옥저 계통의 문화가 삼강평원까지 북상한 흔적이다.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옥저인은 북쪽에서 찾은 기름진 땅에서 300여 년간 살며 거대한 성터를 일궜다. 이곳에서는 250여 기의 성터가 발견됐고, 이 중 가장 큰 성터는 풍납토성의 규모를 능가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 근무지가 과거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북도 녹둔도다. 북방민족의 영토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옥저와 읍루' 펴낸 강인욱 교수삼강평원 성터, 옥저 문화 밝혀읍루..
러시아 연해주에서 2300년 전의 옥저 온돌(쪽구들)과 발해 온돌이 한꺼번에 확인됐다.2007년 6월28일부터 8월3일까지 러시아 조사단과 함께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유적을 발굴한 한국전통문화학교 발굴단(단장 정석배)은 주거지 1기에서 발해 온돌과 옥저 온돌을 차례로 발굴했다. ◇옥저·발해 온돌이 한꺼번에=지난 7월22일이었다.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눈이 빛났다. 발굴단은 이미 이 발해 주거지에서 발해시대 쪽구들(부분 온돌) 1기를 확인한 바 있다. 그때 확인한 발해 쪽구들의 길이는 4.5m가량이었고,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의 구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발해인들이 버린 생활 폐기물 구덩이를 파다가 바닥 땅부분에 불에 탄 흙(소토) 2줄기를 본 것이다. “아, 이건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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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沃沮, 기원전 3세기 ~ 285년)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조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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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고 합니다[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그런데 이상하죠? 왕융이 궁예에게 “대왕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