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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3)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하> 러시아 옥저 유적 본문

여러나라시대/옥저

옥저 (3)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하> 러시아 옥저 유적

대야발 2025. 3. 2. 15:48

 

 

 

 

 

 

 

 

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면적 12만 km²의 삼강평원에서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 토기와 비슷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흥한 옥저 계통의 문화가 삼강평원까지 북상한 흔적이다.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옥저인은 북쪽에서 찾은 기름진 땅에서 300여 년간 살며 거대한 성터를 일궜다. 이곳에서는 250여 기의 성터가 발견됐고, 이 중 가장 큰 성터는 풍납토성의 규모를 능가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 근무지가 과거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북도 녹둔도다. 북방민족의 영토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옥저와 읍루' 펴낸 강인욱 교수
삼강평원 성터, 옥저 문화 밝혀
읍루서 BC4세기 철도끼 발견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51)가 지난달 발간한 책 ‘옥저와 읍루’에는 옥저와 읍루에 대해 새롭게 발굴한 고고학적 결실이 담겼다. 옥저는 기원전 4세기∼서기 246년, 읍루는 기원전 4세기∼서기 559년경 존재했던 북방민족이다. 강 교수는 10년간 러시아와 중국, 한국을 다니며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은 북방민족인 옥저와 읍루를 연구했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 팽창주의를 막는 대안이 된다”고 말했다.

 

강 교수의 연구로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그동안 삼강평원에서 발견된 성터를 옥저인이 지은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 교수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삼강평원의 각종 유물들은 옥저인의 문화와 똑같았다. 잡곡농사에 유리한 지역을 따라 이동했던 옥저인의 습성을 고려하면 이동경로 역시 설명 가능했다. 강 교수는 “이 책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삼강평원을 연구하는 중국학자들도 이 성터의 주인을 옥저인으로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헤이룽강 하류에서 쑹화강 유역에 걸쳐 있는 읍루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철화된 철도끼가 발견됐다는 점도 강 교수가 꼽는 학문적 성과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국내 연구자가 거의 없는 분야인 북방민족을 연구하는 강 교수는 “북방민족 역사가 한국의 역사가 맞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방민족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네 것과 내 것을 나누는 것은 한국사 왜곡의 지름길”이라며 “역사의 다변적인 흐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전채은 기자, "다양한 북방민족 역사 연구가 '中 역사굴기' 막는 대안", 2021. 3. 10.
 
 
 

옥저에서 처음 발견된 청동투겁창… 기원전 4세기 고조선 유물로 추정
모피 무역 중심지였던 고조선… 연해주와의 교역 보여주는 증거
고립된 부족국가로 알려졌던 옥저…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확인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하> 러시아 옥저 유적

 

 

러시아 연해주 아누치노 지역의 옥저 유적에서 발견된 고조선 청동투겁창. 길이 21㎝, 최대 폭 3.9㎝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보다 큰 편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기원전 4∼3세기 고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銅모·동모)이 러시아 연해주의 옥저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다. 옥저가 모피 등을 매개로 요동지역의 고조선과 원거리 교역을 한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017년 8월 2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 국립문화재연구소로 구성된 취재팀은 연해주 아누치노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 1점을 현지에서 확인했다. 해당 유물은 한 러시아 주민에 의해 기원전 4∼1세기 크로우놉카(옥저) 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1cm, 폭 3.9cm의 청동투겁창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날 끝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특히 숫돌로 등날을 갈아 움푹 파인 흔적이 투겁창 표면에 남아 있었다. 등날을 간 흔적이 많지 않은 걸 감안할 때 몇 번만 사용한 뒤 무덤에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자루를 투겁창에 고정하기 위해 등날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중국 지린(吉林) 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강 교수는 투겁창의 형태가 위아래로 가늘게 떨어지고 한반도 출토품보다 대형인 점 등이 후기 고조선의 세형동검 양식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유물은 요동 지역의 후기 고조선 문화가 지린성 중부를 거쳐 연해주로 유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조선 청동투겁창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해 강 교수는 고조선이 압록강 일대와 중원을 잇는 모피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동물 뼈와 고대 화폐 명도전의 출토지역을 감안할 때 고조선은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모피를 생산해 중원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고조선의 원거리 모피무역 루트에 옥저도 포함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옥저가 자리 잡은 연해주는 예부터 모피와 약초 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해주 콕샤롭카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터도 발해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에서 발견된 기원전 4∼3세기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銅劍)이 주목된다. 당시 이 동검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된 중국 위나라 화폐 ‘칠원일근’과 함께 발견됐다.

 

 

강 교수는 “고조선 청동투겁창과 부여 동검은 중원과 요동지역, 연해주로 이어지는 고대 모피무역 과정에서 옥저로 넘어온 유물로 추정된다”며 “옥저가 고립된 부족국가라기보다 멀리 고조선, 부여와 교류한 개방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한편 연해주 미하일롭카 지역에서도 니콜라옙카 출토품과 비슷한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동검 근처에서는 중국 화폐인 반량전(半兩錢)과 오수전(五銖錢)도 발견됐다.

강 교수는 “연해주는 이미 기원전부터 옥저로 대표되는 한민족 고대사의 한 축을 이뤘다”며 “이후 발해가 연해주로 진출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4)

 

동아일보, 아누치노=김상운 기자, [단독]고조선 청동투겁창, 러시아 연해주서 첫 발견, 2017-08-16

 

 

 

 

고대 국가 옥저의 영토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기원전 3∼4세기 부여계 동검(銅劍)이 처음 발견됐다. 이 동검은 옥저와 부여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위서동이전 등 문헌상 확인되는 부여와 옥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2세기인데 이보다 앞선 유물이 발견돼 주목된다.

 

 

고대 옥저 영토… 부여와 교역 증거, 中 위나라 희귀 동전도 출토돼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최근 발견된 ‘부여계 동검’ 조각들(아래 왼쪽 사진). 각 조각을 이어 붙인 뒤 빠진 부분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위 사진). 전형적인 안테나식 동검이다. 이 동검 근처에서 위나라 동전(아래 오른쪽 사진)도 발견됐다. 강인욱 교수 제공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주(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과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인 ‘칠원일근(桼垣一釿)’이 현지 사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다. 동검은 손잡이 끝부분의 장식이 양옆으로 돌출돼 마치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부여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강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총길이 약 40cm인 이 동검은 4개로 조각 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칼날 조각의 두께는 0.5∼0.9cm, 최대 너비는 2.2cm다. 칼날의 형태가 길쭉하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세형동검이다. 특이하게 손잡이 아랫부분에 T자형 홈이 파여 있다. 홈 아래로 돌출된 안테나 장식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새 두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검은 곳곳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 교수는 “조각들의 부러진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장례용으로 동검을 땅에 묻으면서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검 근처에서 발견된 칠원일근은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직경 3.5cm의 동전. 기원전 3∼4세기에 통용된 이 화폐는 극히 적은 수량만 제작돼 지금껏 한반도나 주변 지역에선 출토된 전례가 없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동검과 동전을 함께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강 교수는 “위나라 화폐는 당시 매우 귀했으며 중원∼요동반도∼연해주로 이어지는 모피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검은 초기 옥저가 부여와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5)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 [단독]연해주서 기원전 3∼4세기 부여 銅劍 첫 발견,

 

 

 

 

https://youtu.be/FbNyVSOAId8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10310030311972

 

 

(2) [단독]고조선 청동투겁창, 러시아 연해주서 첫 발견|동아일보 (donga.com)  2017-08-16

 

 

(3)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428/77821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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