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평양 (10)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때(BC 37년) 졸본(광개토태왕릉비에는 '홀본') 현 랴오닝성 환인 오녀산성에 첫 도읍을 하였고, 2대 유리왕 때(3년)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10대 산상왕 때(209년)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 때(427년)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해서 3번 천도했다고 합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온 것입니다. 출처;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신동아 (donga..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대략 4가지 학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낙랑군 및 고조선의 갈석산과 습수, 열수, 산수, 패수의 위치 ‘낙랑 1’은 심백강과 김봉렬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하북성설’입니다.‘낙랑 2’는 윤내현과 이덕일 등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난하설’입니다.‘낙랑 3’은 신채호와 정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했던 ‘낙랑군 재요동설’입니다.‘낙랑 4’는 노태돈과 송호정 등 대다수의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재평양설’입니다.(1) 신채호선생은 한사군은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
'여러나라시대'는 '열국시대'라고도 쓰고요, 기존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대체하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사실상 고조선(위만조선 포함) 멸망 후 여러 왕국들이 등장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러나라(왕국)시대'라고 봅니다. BC108년 위만조선이 한漢에 멸망하여 그 자리에 한漢의 행정구역인 한사군이 세워 집니다.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위만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인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또 위만조선이 기자조선, 고조선의 영토를 완전히 점유했는가하는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한사군 중 가장 핵심적인 낙랑군이 오늘날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합니다. 『한사군의 위치를 중국의 요동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한반도 중·북부 및 남만주 일부에 걸쳐 있었..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통구성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며, 현재 성벽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습니다. 집안(지안) 서북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있는데, 이 때부터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1)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
진파리고분군은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 산재해 있는 10여개의 무덤입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습니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봅니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합니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명왕릉'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시의 력포구역 룡산리의 용산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용산에 있었던 이 무덤이 '동명왕묘'로 전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1891년 조선 고종 때 '동명왕릉'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동명왕릉이 동명성왕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기에 '전(傳) 동명왕릉'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적어도 근현대 이후 갑자기 생긴 게 아닌, 고려시대 때도 기록이 확인되는 정말 오래된 유적인 것은 확실합니다. (1)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옭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합니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
길림성의 고구려 유적 중국 장춘시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왕건군(王建群) 소장과 저자뒤에 보이는 건물이 구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중국의 광개토대왕릉비 전문가인 왕소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1990년 8월, 중국 북경 수도비행장에서 쌍발 프로펠러기를 타고 연길 비행장에 도착하여 발해 고분 발굴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길림성 집안시로 발길을 옮겼다. 연변박물관 엄장록(嚴長錄) 선생이 동행하여 길을 안내했다. 아침 일찍 연길역을 떠난 천진(天津)행 급행열차는 길림역(吉林驛)까지 350km를 무려 7시간여 동안 달렸다. 길림역 한 정거장 앞의 흥융역(興隆驛) 부근에는 고구려시대의 용담산성(龍潭山城)과 함께 송화강변(松花江邊)에 자리한 부여시대의 동단산성(東團山城..
고구려의 다물이념 지금까지 필자는 고구려가 그 말기에 수 당과 충돌하기 전까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록(주로 전쟁기록)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대외전쟁의 기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 단게는 추모왕(서기 전 37~20년) 때부터 민중왕(서기 44~47년) 때까지로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번째 단계는 모본왕(서기 48~52년) 때부터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로서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하였고, 신라와는 신하..
고구려의 발흥목차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4)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우고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았다”며 추모를 찬양했고,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반대한 후한시대 학자 왕충은 추모의 행적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국 한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영어: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또는 조선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북부에 위치한 나라이다.[3]UN이 추정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024년 기준으로 약 2,561만 명이며[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는 조선말이며, 평양말을 기초로 문화어가 형성되었다.수도는 평양시이며, 이밖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 도시로는 남포시, 개성시, 라선시 등이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 형태는 정당이 조선로동당이 있으며 사실상 일당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6.25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