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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통구성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며, 현재 성벽이 상당 부분 훼손되어 있습니다. 집안(지안) 서북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이 있는데, 이 때부터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1)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
진파리고분군은 동명왕릉의 오른쪽 뒤편에 산재해 있는 10여개의 무덤입니다. 북한은 고구려 개국공신들인 오이(烏伊)‧마리(摩離), 부분노(扶芬奴) 등과 평양 천도 후 장군이나 학자, 외교관인 고흘(高紇), 온달, 이문진(李文眞), 예실불(芮悉弗) 등의 무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중 '진파리1호분'(국보유적 181호)과 '진파리4호분'(국보유적 제180호)에서는 사신도가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확인됐습니다. 북한은 '진파리4호분'을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봅니다. 무덤 안 북벽에 청룡과 함께 상서로운 새를 탄 여자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한학계에서는 벽화무덤 양식을 토대로 두 무덤을 왕릉으로 평가합니다. 남한의 일부 연구자는 북한이 양원왕 때의 ..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명왕릉'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시의 력포구역 룡산리의 용산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용산에 있었던 이 무덤이 '동명왕묘'로 전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1891년 조선 고종 때 '동명왕릉'으로 추봉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동명왕릉이 동명성왕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기에 '전(傳) 동명왕릉'이라고도 합니다. 다만 적어도 근현대 이후 갑자기 생긴 게 아닌, 고려시대 때도 기록이 확인되는 정말 오래된 유적인 것은 확실합니다. (1)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옭기면서 졸본에 있던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겼다고 주장합니다. 『북한학계에서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졸본에 있..
남의현 고대 압록강은 어디인가?기자명오종홍 입력 2017.02.14 16:59수정 2017.03.13 12:16 고려시대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였다... 역사지리의 위치를 찾는 것은 역사연구의 핵심이다.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으로 작용하는 압록강은 언제 붙여진 이름일까?중국의 수많은 정사류正史類는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라고 한다. 압록강이 요하라면 우리역사 다시써야...고려와 요의 전쟁에서 요나라 군대가 건넌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일까? 또한 이성계가 회군한 곳이 현재의 압록강일까?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다 보면 알 수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압록강도 그 중의 하나다. 중국의 '연산도燕山圖'라는 고지도를 보면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에 그려져 있다. 만약에 현재의 압록강이 고려시대까지의 압록강이 아니라..
복기대 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고구려의 평양’에 대해 연구하는 복기대 교수는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 대한 교차 분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새롭게 고구려사에 접근하고 있다.남문희 대기자다른기사 보기입력 2015.03.18 08:54호수 391 복기대 교수는 국내 고조선 연구 권위자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의 직계 제자다. 윤 교수로부터 문헌학적 연구 기초를 배운 그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랴오닝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길림성(지린성) 지린 대학에서 박사를 하면서 홍산문명(황하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문명)과 고조선·고구려 유물 유적에 대한 광범위한 답사와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하지만 그는 고조선 연구..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신채호 조선상고사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한나라 관계위씨가 망한 뒤에 한나라는 진번·임둔·현토·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삼한의 연혁에 관한 문제에 뒤지지 않는 조선 역사상의 쟁점이다.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씨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지금의 개원(요령성 동북쪽_옮긴이) 이북은 당시에는 북부여 땅이었다. 지금의 흥경 동쪽은 고구려 땅이었다.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 땅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 땅이었다. 따라서 이 네 지역 밖에서 한사군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한사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주장이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 때문이었다.첫째, 지..
신라·가야 금관과 다르고 백제의 금제 꾸미개와는 비슷 고구려 금관(?) 최초 발견기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입력2014-01-23 11:07:00가야 포함한 삼국시대는 세계 유일의 금관 공동체대일항쟁기 ‘니시하라’라는 고물행상한테 구입1000여 년 이상 무덤에 있다 출토된 금관인 것은 확실동북공정에 맞서려면 금관을 연구하라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최대의 금관 보유국이다. 왕관이 아니라 금관 분야에서. 금관이란 금판을 기본으로 만든 관(冠)을 가리킨다. 청동이나 구리로 만들거나 금도금한 ‘금동관’ 등은 금관으로 치지 않는다. 천이나 말총, 자작나무 껍질 등으로 기본을 만들고 보석이나 금붙이를 ‘꾸미개(관식·冠飾)’로 단 유럽 왕실의 화려한 왕관도 금관으로 보지 않는다.학자에 따라 약간 차이..
고조선의 수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고[高-요임금-]와 같은 시대이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세 개를..
신채호 조선상고사광개태왕1) 서토남정의 개시서기 384년에 백제 근구수왕이 사망하고 장자인 침류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2년 만에 침류왕이 사망하자 차남인 진사왕이 즉위했다. 진사왕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호탕했던 그는 근구수가 성취한 강국의 위세만 믿고 인민을 함부로 혹사했다. 그는 지금의 개성인 청목령에서부터 위쪽으로 지금의 곡산인 팔곤성까지 성책을 쌓은 뒤 서쪽으로 꺾어 서해까지 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았다. 또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최고라 할 수 있는 궁궐을 매우 장엄하게 쌓았다. 큰 연못을 파서 각종 어류를 기르고 연못 중앙에 인공 산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기이한 동물과 특이한 풀을 심었다. 그런 뒤 그곳에서 도를 넘는 오락을 즐겼다. 그러..
신채호 조선상고사고구려의 발흥목차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4)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우고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았다”며 추모를 찬양했고,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반대한 후한시대 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