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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7)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낙랑군 재평양설,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다/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7)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낙랑군 재평양설,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다/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대야발 2025. 4. 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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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 실재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고 단군조선 역사도 공백으로 비워두는 주류 강단사학은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도 병립하고 있다. 주류 강단사학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진 않지만 결별하지도 못하여 선도사학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3)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 

K스피릿 입력 2022.07.16 08:13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8.15 광복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해체하고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 체계를 세우는 임무를 역사학계에 부여하였다. 미군정 시기 친일 세력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역사학을 주요한 체제경쟁 수단으로 여겼던 북한의 초청으로 백남운・김석형・박시형・최익한・도유호 등이 월북하였다. 6・25전쟁 와중에 현실정치에 참여하던 역사학자 정인보・안재홍 등이 납북되어 공백이 생기자 식민사학 유산으로 비판받던 문헌고증사학이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친일적 행태가 워낙 분명하여 친일세력을 옹호하였던 미군정 아래에서도 진단학회에서 제명운동 대상이 되었던 이병도였지만 1954년 서울 환도 후 이병도가 진단학회 이사장을 맡게 되면서 친일학자 제명 문제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이병도・신석호는 서울대・고려대・성균관대 사학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하여 조선사편수회 역사관과 연구 성과를 전승, 강단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1950년 6.25 이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 계열 학인들이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이병도 사학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고,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한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도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완성된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주류 강단사학에서도 정체성론・당파성론 등을 극복하고자 광복 이후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기백이 반도적 성격론・당파성론・정체성론 등을 처음 본격적으로 비판하였다. 학계에서는 정체성론은 자본주의 맹아론·내재적 발전론으로, 당파성론은 붕당정치론으로 극복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타율성론의 한 축을 이루는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과 낙랑군 재평양설은 극복되지 못하였고 그 골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면에서는 북한학계의 적극적인 노력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북한학계는 1961년 6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3개월간 7차례에 걸친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열었다. 낙랑군 위치에 대해 문헌사학자들은 고대 요동으로, 도유호 등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평양설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북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리지린의 견해(낙랑군 재요동설)에 힘이 실리고, 1962년 고조선연구가 출간되면서 식민사학의 핵심 쟁점(낙랑군의 위치와 임나일본부설) 중 하나인 한사군 위치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고조선 강역에 대한 리지린의 핵심 주장은 서기전 5~4세기경까지는 지금의 하북성 난하를 경계로 하였던 국경선이 서기전 3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2천리 강역을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낙랑군 또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정리하였다.

 

 

한국고대사 분야 연구에 과거 식민사학 잔재는 말끔하게 제거되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타율성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주류 강단사학의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노력 중에서 타율성론 부분만을 주로 살펴보았다. 곧, 남인 실학자에서 식민사학으로 이어진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설 인식의 대체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주류 강단사학 학자들의 의견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주류 강단사학 입장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와 중학 역사교과서(이하 중학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이하 고등교과서)에 종합적으로 조율되어 반영되므로, 국편의 관점과 중학・고등교과서를 기준으로 살펴보았다. 국편의 관점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달린 주석과 국편의 대중교양・역사교육 사이트인 우리역사넷에 있는 <교과서 용어 해설>과 신편한국사에서 확인하였다.

 

 

특히 교과서는 국사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기본 틀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2020년부터 중1, 고1에 적용된 2015교육과정에 따른 중학 역사교과서 채택순위 1~3위 교과서[비상교육, 미래앤, 동아출판 점유율 합:85%]와 위 3개 출판사의 고등 한국사교과서[점유율 합:58.4%]를 살펴보았다.

 

 

 

*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의 모호함

 

먼저 단군왕검에 대한 인식부터 살펴보겠다.

 

우리역사넷에서는 단군왕검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건국자이며, 우리 민족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정의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용 설명에서는 결국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체로서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고조선 건국 세력 및 지배층의 문화적 기원과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ʻ관념적인 존재’라고 서술하였다. 정의를 내릴 때는 ‘사람’이라고 서술했지만 설명에서는 ‘관념적인 존재’라고 단군왕검의 실체를 모호하게 서술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중학교과서에서는 삼국유사 환웅사화 기록과 동국통감에 의거하여 서기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했다. 한편, 교과서 같은 쪽수에서는 만주와 한반도에 청동기가 보급된 이후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고조선은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 사이에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건국 시기로 문헌 자료에 나오는 서기전 2333년과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였다는 서기전 2000경~서기전 1500년경 두 가지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 사이에는 300년~800년 이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고조선 건국 시기에 대한 이런 애매모호한 서술은 독자인 학생들로 하여금 ‘단군왕검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존재가 아니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만든다. 고고학 자료와 비교하여 300년~800년 시간 차이가 나는 문헌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기전 2500년 전후로 편년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고고학 유물・유적을 중학교과서에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양평군 양수리 고인돌유적에서 채취한 숯(교정연대:BCE 2325년)과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유적에서 수집된 숯(교정연대:BCE 2630년, BCE 2630년)에 대한 방사성탄소측정연대는 BCE 25세기경을 청동기 시대 연대로 보게 한다. 북한지역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도 BCE 26세기경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창끝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반영하면 시간적 간극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고등교과서에서는 서기전 2000년경~서기전 1500년경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이후, 세력이 강한 집단의 지배자(환웅집단)가 천손사상을 내세워 주변 집단을 통합하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워 단군왕검이라는 제정일치의 지배자로서 통치하였다고 했다. 당시 지배자가 누렸던 권력과 부를 반영하는 것이 거대한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였다. 중학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된 단군왕검과 청동기문화가 보급된 이후 고조선을 세웠다는 단군왕검과 사이에는 300년~800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역사넷과 중학・고등교과서는 모두 단군왕검의 실재를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당연히 독자들과 학생들은, 실제로는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우리역사넷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신편한국사는 단군사화에 나오는 고조선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여 국가단계가 아니라고 명시하여 이런 판단을 더 굳히게 한다. 따라서 주류 강단사학은 ʻ남인 실학자식민사학ʼ이 단군왕검을 부정하는 역사 인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단군조선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겠다.

 

우리역사넷에서는 단군왕검이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왕위에서 물러나 산신이 될 때 나이가 1908세였다는 내용에 대해, 그 기간 동안 단군왕검의 칭호를 가지는 지도자가 대를 이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였다. 환웅은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세력의 대표로 보고, 웅녀는 곰을 숭배하는 토착 집단 대표로 파악하여, 이주민과 토착민 결합에 의해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보았다.

 

 

중학교과서에서는 고조선 건국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빈 공백으로 두고 있다. 갑자기 서기전 5~4세기경 중국에서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고, 서기전 2세기경 연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집권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된 단군조선의 2000여 년 역사는 공백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교과서에서도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서기전 3세기경 ʻ부왕(否王)준왕(準王)ʼ으로 세습되었고, ʻ위만한사군ʼ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중학교과서와 마찬가지로 2000여 년 역사를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중학・고등교과서는 단군왕검의 실재를 모호하게 서술하고 2000여 년 역사를 공백으로 비워두고 단군조선에 대한 아무런 내용도 서술하지 않았다. 이러한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단군조선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가로 받아들일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학・고등교과서에서는 2000여 년 공백 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ʻ부왕준왕ʼ을 ʻ고조선 왕ʼ이라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단군 후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학・고등교과서에서 확실하게 역사성을 인정하는 인물은 ʻ부왕준왕ʼ인데 그 계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모호하게 남겨둔다. 또한, 우리역사넷 사료에는 《위략》 내용을 인용하여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는 과정은 설명하지만, 준왕이 ʻ기자(箕子) 후예인 조선후(朝鮮侯)ʼ라는 구절은 생략하여 숨기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반영한 때문으로 보인다.

 

 

단군왕검 실재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고 단군조선 역사도 공백으로 비워두는 주류 강단사학은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도 병립하고 있다. 주류 강단사학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진 않지만 결별하지도 못하여 선도사학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도사서에는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 단군조선의 정통은 부여로 이어졌다. 《삼성기》와 《북부여기》에는 ʻ준왕위만ʼ 사건은 단군조선 서쪽 변방인 고대 요동에서의 일로 기록되어 있고,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대종교사학자)들은 이 관점을 계승하고 있다. 단군왕검도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모두 애매모호하게 처리하여 학생들의 고대사 인식 역시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고대사 서술 목적이 아니라면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1)

 

 

 

 

남인 실학자들은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였던 평양(한사군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고착화시키기 위해 지리비정을 하였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보았던 당대의 새로운 흐름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북쪽으로 보느냐 남쪽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대동강 일대의 평양을 낙랑군으로 보아 남인 실학자들의 인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낙랑군 위치 문제에 대해서는 국편은 물론 중학・고등교과서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같은 의견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인식을 아주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류 강단사학에서도 한사군에 대한 역사지리 연구는 ‘조선 실학자일제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의 계승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4) 낙랑군 재평양설,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다 

K스피릿 입력 2022.07.23 01:08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에서는 낙랑군은 처음 설치된 위치에 계속 존속하였으며, 한(漢)이 멸망하고 진(晉)이 들어선 이후에도 유지되었다고 한다. 낙랑군의 관할 범위는 대체로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일부 지역이라고 하였다.

 

 

낙랑군 위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 삼국사기 기사 주석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낙랑군 위치를 현재 중국 요령성 지역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으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재 북한 평양이라는 주장은 북한학계의 주류 견해인데, 당시는 북한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낙랑군은 한무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여 313년까지 존속한 중국 왕조의 변군(邊郡)으로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하며, 군치(郡治)는 고조선 수도 왕검성에 설치한 조선현(지금의 평양)이라고 한다. 미천왕이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기록에는 313년 ʻ한반도 서북부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소멸되었다ʼ는 표현은 없다. 낙랑군을 침략하고 포로를 노획하였다는 표현만 존재한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悢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

 

 

중학・고등교과서에서는 모두 고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예외 없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본문에 서술은 하지 않았으나 지도에 명시(明示)하고 있다. 고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을 위만이 쫒아내고 고조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준왕을 쫒아낸 위만의 왕검성은 평양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한사군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인식을 지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한국고대사 중심무대가 지금의 평양 일대라는 인식을 지도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남인 실학자들은 한국고대사 중심 무대였던 평양(한사군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고착화시키기 위해 지리비정을 하였다.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보았던 당대의 새로운 흐름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북쪽으로 보느냐 남쪽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대동강 일대의 평양을 낙랑군으로 보아 남인 실학자들의 인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낙랑군 위치 문제에 대해서는 국편은 물론 중학・고등교과서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같은 의견이다.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인식을 아주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류 강단사학에서도 한사군에 대한 역사지리 연구는 ‘조선 실학자일제 식민사학주류 강단사학’의 계승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한영우는 ʻ이병도의 한사군 연구에 대한 학설은 우리 학계의 통설ʼ이라고 하였고, 오영찬은 ʻ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한사군에 대한 연구 성과와 방법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연구과 이병도의 연구에 수렴됨으로써 한국 고대사 체계의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ʼ고 한다.

 

송호정도 ʻ이병도의 고조선 및 한사군, 삼한과 관련된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은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컸는데, 이는 한백겸과 안정복, 특히 정약용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많이 고민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ʼ고 하였다.

 

 

문제는 송호정처럼 이병도를 포함한 일본인 학자들의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를 “근대 사학에서 요구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그저 객관적이고 합리주의적 서술만을 추구하여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 속에서 수행되었다”고 평가하는데 있다. 남인 실학자들의 주관적・비합리적인 ‘연구 방법과 연구 성과’를 계승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립(定立)한 식민사관을 ’객관적・합리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015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학습요소(학생들이 배워야 할 학습내용)는 ‘고조선의 건국과 변화’이다.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 고대사 부분에서 요구하는 내용은 ‘동아시아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고려하며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을 설명한다’이다. 그 이상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음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된 중학・고등교과서는 주류 강단사학의 한국고대사에 대한 관점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으로 이어지는 단군 및 단군조선 인식과 낙랑군 재평양설 인식의 대체가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국편의 관점, 중학・고등교과서 서술 내용을 통해 살펴보았다.

 

 

주류 강단사학은 단군왕검에 대해 단군조선을 건국한 ‘사람’이지만 ‘관념적인 존재’라고 이해할 수 없도록 서술을 하고 단군조선도 2000여 년 이상을 공백으로 비워두어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단군조선의 역사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남인 실학자식민사학’의 역사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위만의 반란으로 쫓겨 난 준왕을 ‘고조선 왕’이라 하여 서쪽 번조선 왕이 아닌 단군조선 왕으로 오인되게 하고 있으나 단군 후손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유교사학・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결별하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신채호나 정인보 등 대종교사학자(민족사학자)들이 강하게 비판했던 낙랑군 ‘재평양설’ 중심의 한사군 연구는 이병도 학설이 주류 강단사학 통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극복되지 못하였다. “한사군의 역사지리에 대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나카 미치요(那珂通世),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연구와 이병도의 연구에 수렴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체계의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주류 강단사학에서는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2)

 

 

 

 

 

유교사관과 유교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저류화되었던 선도사학은 1910년대 대종교사학 형태로 재등장하였으나 시대적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인식 면에서는 선도사학을 수용하여 한민족 역사의 시작을 신시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면에서 선도사학의 온전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고고학 발전을 기다려야만 하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낙랑군 위치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남인 실학자들의 관점인 재평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평양에서는 벗어났으나 요동에 머물러 요서까지 시각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선도사서 《삼성기》, 《북부여기》에 한사군 낙랑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선도사학 연구를 우선하기보다는 풍찬노숙하는 독립투쟁에 매진해야만 했던 시대였다. 이 역시 1980년대 이후 역사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5)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K스피릿 입력 2022.07.30 07:26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사대・모화의 성리학이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범람하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인해 민족정기 수호마저 위태롭던 구한말, 선도사학은 대종교사학 형태로 역사에 재등장하였다.

 

 

1909년 서울에서 나철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중창한 대종교(大倧敎:初名 단군교(檀君敎))는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워진 종교단체로서, 수행에 기반한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종교 형태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대종교는 사상면에서 선도 경전인 《삼일신고(三一 誥)》를 중심으로 하였고, 수행면에서 선도의 지감・조식・금촉 수행론을 따랐다(성통). 실천면에서는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기준에 따라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공완).

 

 

비록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신시배달국 역년을 축약했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신인(神人)이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고 풍백・우사・운사・뇌공을 거느리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도(神道)를 베풀고, 곡식・목숨・질병・형벌・선악의 5사(事)와 각종 인간사를 다스리며 교화(敎化)했던 신시시대(神市時代)가 단군조선에 앞서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한민족 역사를 단군조선 이전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는 선도사학 역사 인식이 대종교사학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1910년대의 민족사학은 대종교와의 밀접한 관련 위에서 전개되었고, 1910년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신채호, 박은식, 김교헌 역시 모두 대종교도였으므로, 민족사학을 ʻ대종교사학ʼ이라 명명하였다. 비록 민족사학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그 내용적 실체가 모호하고 실제 사상적 기반은 대종교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역사인식에 기반한 역사학을 ʻ유교사학ʼ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종교 중광(重光)에 결정적 계기가 된 1909년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교본으로, 사대(事大)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줌과 더불어 국권 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던 단군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였던 독립군에게 대종교사학(선도사학)은 더없이 강력한 사상적 무기였고, 일제하 대종교 교당은 곧 민족주의 교육의 학교이면서 독립운동 전초기지였다.

 

 

대종교사학이 등장하면서 유교사학에서 삭제하였던 민족 고유 선도사상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채호는 우주의 광명(光明:환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5월・10월에 소도(蘇塗:수두)에서 하느님(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고유종교로서 선교(仙敎)가 있었음을 설파하였다. 선교는 피세(避世), 장생(長生)에 관심을 두는 중국 도교와는 그 역사와 성격을 달리하였는데, 조의(皂衣)나 화랑에서 알 수 있듯이 ʻ현세ʼ에서 국가・사회에 헌신하였다고 하여 개인적인 수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한국선도의 본모습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 주었다.

 

 

박은식은 단군이 강화도 마니산에 제단을 쌓아 제천보본(祭天報本)하던 예식이 부여・예・고구려・백제는 물론 요나라와 금나라에까지 전해졌음을 밝혔다. 단군시대에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교화했던 그 종교를 신교(神敎) 또는 배천교(拜天敎)라 했는데,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하였다.

 

 

김교헌은 단군왕검이 마니산에 참성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는 매해 10월 국중대회 형식으로 부여(영고)・예와 맥(무천)・진한과 변한(계음(禊飮))・마한으로 전해졌다고 하였다. 신교의 한 갈래는 중국으로 퍼져서 장생의 도를 닦는 신선(神仙)문화가 되었음도 밝혔다. 또한 그는 대종교 교리 정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사서와 민간 자료에서 수집된 단군에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단조사고(檀祖事考)》(1911), 《신단실기(神檀實記)》(1914), 《신단민사(神檀民史)》(1914)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민족 고유 사상을 정리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김교헌의 공(功)은 ʻ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세운 공보다 더 큰 것ʼ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대종교사학은 한국고대사 정통 계승에서 단군조선의 정통은 부여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므로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 인식 체계를 뒤집었다. 신채호는 기자 자신이 아니라 기자 후손이 서기전 323년에야 불조선(번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기자조선을 삭제하였다. 이는 ʻ단군조선▶부여▶열국ʼ으로 정통이 이어진다는 선도사학 인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성균관 박사 출신 유학였지만 중화주의 유교사학의 틀을 벗어버렸기에 이러한 인식 전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유교의 틀에서 벗어난 후 민족을 만났던 박은식의 생각은, 소중화 정신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던 무치생(無耻生)에게 금태조의 입을 빌려 “존화양이의 대의를 고집한다면, 만일 漢나라의 순체・양복, 唐나라의 소정방・이세적이 다시 쳐 들어와도 앞장서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그 군사를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질타하는 부분에서 잘 읽을 수 있다.(「夢拜金太祖」) 박은식은 중토에서 동래한 중화인 기자는 귀화・동화되어 기자 후예들은 단군 후예가 되었다고 보았다. 기자는 연나라와 접하는 단군조선의 구석진 땅(요서 영평부 조선성)에 살았다고 하여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인식체계를 부인하였다.

 

 

김교헌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귀화한 기자와 그 집단은 영평(永平)과 광녕(廣寧) 사이 비어있는 땅에 나뉘어 살았다고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기자조선을 부정하였다.

 

 

이상룡기자를 중심으로 삼은 정통 계승 체계를 부인하고, 단군조선 혈통은 ʻ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ʼ로 이어지면서 3천 년간 부절(不絶)했다고 하였다. 「배구전(裵矩傳)」을 인용하여 해주(海州)는 옛 고려(고구려) 땅이자 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는 해성(海城)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해 신채호는 단군조선 문화수준은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중원지역의 물난리를 해결하는 치수법(通水之理)을 전수해 줄 정도로 높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편차를 보여 주었다. 역사 연구 초기에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대동강・청천강 유역은 기씨・위씨・유씨(한무제 유철) 등 지나족(支那族)의 수라장”으로 “평안도에는 지나족이 바야흐로 강성하였다”고 하여 낙랑군 ʻ재(在)평양설ʼ을 인정하였다. 1914년 봉천성 회인현에서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과 인연을 맺으면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한 이후에야 기자 후손이 다스리던 번조선을 전복한 위만의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관점을 교정하였다.(《조선상고사》)

 

 

박은식은 기자 후손인 조선후가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여, ʻ기준왕ㆍ위만ㆍ한사군 낙랑군ʼ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의 통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김교헌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을 인용하여 한(漢)낙랑군은 요양(遼陽)에 있었다는 낙랑군 ʻ재(在)요동설ʼ을 인정하였다.

 

 

이상룡은 수사(隋史)에는 ʻ좌우 20군(軍)이 현토・낙랑 등의 길(道)에서 나와 압록강 서쪽에서 모였다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ʼ고 하여 한사군이 설치된 곳은 요동지방으로 보았다.

 

 

신채호나 박은식도 한사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 역사인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911년, 고성이씨 가문 이상룡은 이미 기자조선, 한사군의 일을 한반도가 아닌 요동지방에 국한한 일로 보고 있었다. 중국사서도 참고하였겠으나 가전(家傳) 선도사서인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읽은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고등왕(高登王) 천도는 단군기원 1060년 갑자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단군세기》에만 나오는 ʻ고등왕ʼ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유교사관과 유교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저류화되었던 선도사학은 1910년대 대종교사학 형태로 재등장하였으나 시대적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사상 면에서는 수행(성통)과 사회적 실천(공완)을 본령으로 하는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수용하여 선도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원형을 회복하는 ʻ과정ʼ에서 등장한 것이 대종교였기에 하느님・삼신을 선도 본연의 생명(기)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삼성(환인・환웅・단군)이라는 인격신으로 보았던 점에서 종교적 요소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수행에 기반한 선도수행문화로 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민속・무속문화로 종교화되어 있었기에 재등장 시에 종교의 방식을 뛰어 넘지는 못한 것이었다.

 

 

역사 인식 면에서는 선도사학을 수용하여 한민족 역사의 시작을 신시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면에서 선도사학의 온전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고고학 발전을 기다려야만 하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낙랑군 위치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남인 실학자들의 관점인 재평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평양에서는 벗어났으나 요동에 머물러 요서까지 시각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선도사서 《삼성기》, 《북부여기》에 한사군 낙랑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선도사학 연구를 우선하기보다는 풍찬노숙하는 독립투쟁에 매진해야만 했던 시대였다. 이 역시 1980년대 이후 역사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인해 독립투쟁은 일차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ʻ저항적 민족주의ʼ에 집중되었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과정으로 바라 본 연원일 것이다. 박은식이 금태조(金太祖)・동명왕(東明王)・대조영(大祚榮)・천개소문(泉蓋蘇文) 등 만주를 누볐던 고대 영웅들의 전기를 잇달아 발표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종교에 기반하여 단군 자손으로서의 민족정체성 정립이 우선시되었기에, 선도사상의 본령인 조화・평화・공생의 ʻ홍익주의ʼ에까지 인식이 미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독립투쟁은 인간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지향점이 같은 사회적 실천이었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대종교인들은 ʻ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ʼ 홍익주의라는 선도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사회적인 실천(공완)을 하는 삶을 영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3)

 

 

 

https://youtu.be/_yEUsi0fggE

 

 

 

 

 

<자료출처>

 

(1)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  - K스피릿

 

 

(2) 낙랑군 재평양설, 주류 강단사학으로 계승되다  - K스피릿

 

 

(3)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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