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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5)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대야발 2025. 3. 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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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2006년 3월 (통권 제80호)
安昶範
濟州大學校 名譽敎授(韓國哲學 專攻) / 本聯合會 指導委員

 

 


Ⅰ. 問題의 提起


『桓檀古記』는 桂延壽 선생이 서기 1911년(光武 15년) 5월 묘향산 檀窟庵(단군굴 암자)에서 <三聖記>ㆍ<檀君世紀>ㆍ<北夫餘紀>ㆍ<太白逸史>를 모아 하나로 묶은 책이다. 그 요점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우리 民族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桓檀古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민족의 이상을 높이고, 민족의 기강을 강하게 하며, 민족의식이 다시 되살아날 것 같은 굉장한 책이다.


그러나 이들 문제들은 우리 民族의 원초적 종교를 모르고, 漢字를 경솔히 國譯하거나, 古典 섭렵이 많다하더라도 생각이 깊지 않는 사람은 理解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難題들이다.


이를 정리하면, 서기 2005년 현재, ① 9202년 전부터 3301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天山을 중심으로 12연방의 桓國과 7세 桓仁이 있었다는 기록, ② 5901년 전에 배달국의 태조인 환웅천황이 開天立敎하고 以三神設敎하였다는 기록, ③ 기독교 측에서 신화적인 가상 인물로 취급하는 古朝鮮의 태조 檀君王儉이 실존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적인 존재인가 하는 문제, ④ 中國의 儒學思想으로 배워온 五行思想이 『桓檀古記』에 나오는데 중국사상이냐 아니면 한국사상이냐 하는 문제, ⑤ 寧古塔이 <檀君世紀>와 <北夫餘紀>에 나오는데, 일부 학자는 청나라 때의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문제, ⑥ 立法ㆍ司法ㆍ行政의 삼권분립 사상이 <檀奇古史>에 나오는데, 그것이 서구사상이냐 아니면 한국사상이냐 하는 문제 등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이들 문제를 본 논문의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 밖의 天符經ㆍ三一神誥ㆍ參佺戒經의 경전, 삼륜ㆍ오륜ㆍ오계ㆍ팔조ㆍ구서의 계율과 덕목, 鹿書ㆍ花書ㆍ雨書ㆍ龍書ㆍ가림토(神篆) 등의 문자, 上下無等ㆍ男女平權 등의 민주적인 표현과 순수한 역사문제는(고준환 박사 지음, 「하나되는 한국사」, <한국교육진흥재단, 2002, 7, 개정판, 2쇄>의 머리말에서 실증적 역사문제를 자세히 밝히고 있음) 위의 문제가 풀리면 자연히 풀릴 것이므로 본 논문의 연구대상에서 제외한다.


이상의 이유로 『桓檀古記』 僞書論者인 젊은 교수들은 『桓檀古記』?『檀奇古史』ㆍ『揆園史話』를 조작 또는 위조라고 주장한다(단군학회, 「단군학연구」 제2호, 2000. 4. pp.33-50. 조인성의 논문). 반면에 민족종교 측과 재야의 원로 사학자들은 『桓檀古記』를 민족의 상고사를 밝히는 珍書라고 평한다. 그러한 것이 在野 史學派와 講壇 史學派, 민족종교 진영과 기독교 측 사이에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부터 『桓檀古記』 내용 중 僞書論者들이 주장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해설하고, 典據와 證據를 제시한다. 아울러 그 근본원인이 僞書論者들의 오류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桓檀古記의 問題點과 歷史的 事實의 一致


1. 桓國은 實在했었다.


1) 문제점 : 『桓檀古記』를 보면,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중앙아시아의 天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桓國이 있었고, 이를 3301년 동안 무위이화한 7세 환인이 있었다. 이에 대한 논증이다.


2) 해설 : 換局은 7세 桓因에 의해 무위이화한 神敎國家로서 神政一致 국가였다. 神政一致란 神敎(신선도의 고전적 표현)의 원리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영역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桓國의 영토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이 아니다. 또한 桓國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지에 의한 분류의 표현이다.


7세 桓因은 불교의 前七佛과 같고, 그 흔적이 신라의 고도 鷄林(지금의 경주)에 前七佛의 절터가 있다. 일본의 『日本書紀』 및 『古事記』의 건국신화에도 7세의 神이 있다. 중앙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나오는 天山과 불교의 수미산이 구조상 동일하며, 신선도와 불교를 연구해 보면, 그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그에 대해서는 졸저 「환웅천황과 한국고유사상의 탄생」,(제주대학교 출판부, 2001) 제2부, 제1편, 제9장 “불교와 신선도의 동일성”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桓檀古記』를 조작이다 위조다 하는 僞書論이 제1차로 부정되고, 珍書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3) 典據 : 주지하는 바와 같이 桓國 12연방 가운데 수밀이국(Sumer)과 우루국(Ur)이 서양사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중국인의 사서인 『晉書』 <裨離國等十國傳>에 나온다. 예컨대.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5만여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肅愼은 古朝鮮의 別稱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晉書』는 당 태종이 房玄齡과 李延壽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東晋과 西晉의 史書로서 25史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中國正史다. 이러한 책에 『桓檀古記』에서 말하는 12연방의 이름이 실려 있고, 疆域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桓國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僞書論 제2차로 부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우리 민족의 역사는 9200여년으로 올라간다. 연구의 대상인 것이다.


4) 實在的 證據 :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Novosibirok)山 및 아바칸(abakan)山脈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桓國의 중심지이다. 또한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전적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僞書論 제3차로 부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桓雄天皇의 開通天文과 宗敎創設


1) 문제점 : <三聖記全> 하편에 안파견 환인이 홍익인간을 위해 환웅에게 “開天立敎하고 在世理化하라”하고,? 환웅이 “天經을 演하고 神誥를 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桓雄이 以三神設敎하고 佺戒로서 勸善懲惡하는 법을 세웠다”고 하였다. 문제는 開天立敎와 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를 오역하여 『桓檀古記』를 위서라고 주장하고 우리 민족은 종교도 철학도 없는 민족이 된다. 중요한 문제이다.

 

2) 해설 : 첫째, 開天立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세우다”로 해석한다. 그와 같이 말이 안 되는 해석을 한다. 開天의 開자는 “(문이)열리다. (막히고 닫친 것, 아주 크거나 미세한 것,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드러내다. 관통하다. 개통하다. 大覺하다. 大通하다. (꽃이)피다”의 뜻이다. 天자는 하늘ㆍ땅ㆍ사람의 會意文字로서 “천체ㆍ천체의 운행원리ㆍ자연의 이법ㆍ천도ㆍ천리ㆍ天文ㆍ天門, 그 밖의 모든 것”를 의미한다. 곧 開天은 “天門이 열리다. 천문을 개통하다. 개통천문하다. 天文을 대통하다(관통하다). 천체의 구조와 운행원리를 깨치다. 인체의 돌고 도는 이치를 깨치다. 자연의 이법을 깨치다. 天道를 대각하다”는 등등의 뜻이다. 이와 같이 개천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立자는 “서다. 세우다. 일어서다”의 뜻이다. 敎자는 “가르치다. 본받다. 교지. 종교”의 뜻이다. 곧 개천입교는 桓雄天皇께서 “천문을 개통하여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그 기념행사가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이다. 뒤에 상설한다.

 

둘째, 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보통 “삼신으로 가르침을 설치하다”로 해석한다. 이와 같이 의미도 통하지 않는 해석을 한다. <三神五帝本紀>에 의하면 三神은 天一ㆍ地一ㆍ人一을 의미하며, 一은 천ㆍ지ㆍ인의 작용을 의미한다. 만물은 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 三神을 庶物의 원의라 한다. 設敎의 設자는 “만들다, 창설하다. 설치하다. (물건을)진설하다”의 뜻이다. 곧 以三神設敎는 “天一ㆍ地一ㆍ人一의 삼신으로 종교를 만들다”는 뜻이다. 天一ㆍ地一ㆍ人一의 <一>은 작용으로써 <一>을 종교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天一ㆍ地一ㆍ人一은 氣ㆍ心ㆍ身 내지 命ㆍ性ㆍ精이 되고, 거기에서 道敎ㆍ佛敎ㆍ儒敎가 된다. 『丹書口訣』에도 “天ㆍ地ㆍ人을 三才라 하고, 道ㆍ佛ㆍ儒를 三敎라 하니, 三才에서 삼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창설한 종교가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天敎 곧 신선도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본원적 固有宗敎이며, 원천적 根源思想이다. 종교성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拙著를 보아주기 바란다.

 

셋째, 文字도, 글도, 종이도 없는 太古時代에 어떻게 종교를 창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곧 經典과 戒律을 어떻게 강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鹿書, 자부에 雨書, 치우에 花書, 복희에 龍書, 단군에 神篆 등 문자가 있었다 하고, <三一神誥 봉장기>에 임금(桓雄天皇)이 <三一神誥>를 가르치시니(誕訓神誥) 高矢는 동해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오고, 神誌는 돌에 경전을 새겨서 전하였다. 또한 박달나무를 다듬어 殷文으로 써서 읽었다고도 하였다. 이를 보면, 돌과 나무에 경전과 계율을 새겨서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탄생이래 처음 있는 일인 것이다.

 

넷째, 桓雄天皇이 언제ㆍ어디서 종교를 창설했느냐 하는 문제다. <三聖記全>하편에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弘益人間 在世理化 하였다고 하였다. <檀君世紀>에는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太白山(白頭山) 神市 檀木 아래에 이르러 天神祭를 올리고 국인 九桓의 추대를 받아 朝鮮國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이 檀紀 4339년이다. 그러므로 桓雄天皇이 백두산 신시에서 종교를 창설한 때는 지금부터 5902년(1565+4339-2=5902) 전, 음력 10월 3일이다. 이 날이 開天節이다. 그러므로 開天節은 桓雄天皇의 開通天門과 宗敎創設, 그리고 檀君王儉의 朝鮮國 건국 기념행사인 것이다. 뒤에 상설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桓雄天皇이 지금부터 5902년 전 10월 3일에 백두산 신시에서 天門을 開通하시고,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종교를 창설하여 經典과 戒律을 강론하니, 신하들이 돌과 나무에 새겨서 전하고, 3000단부가 모이니, 弘益人間 理化世界 하였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때는 세계 인류가 원시의 迷夢에서 깨기 전이다. 일반적으로 문자도 글도 발달하기 전이다. 그러나 桓雄天皇이 天符經ㆍ三一神誥ㆍ參佺戒經의 경전과 三倫ㆍ九誓의 戒律을 강론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것이 아닌가? 그것이 弘益人間 理化世界이며 선천개벽이 아닌가? 그래서 수밀이국은 古朝鮮(배달국)을 하느님 나라라 동경하고, 中國에서는 東方禮儀之國 또는 君子之國이라 칭했던 것이다.


人類史에 유래 없는 대변혁이며 憧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滿洲와 韓半島를 중심으로 세계 각 처에 고인돌(한국어로서 “고인 돌멩이”이다)이 생기고, 샤마니즘(한국어로서 “辰韓ㆍ馬韓ㆍ弁韓의 삼한사상”의 변음이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후대에 이르면서 古朝鮮에서는 天神敎, 扶餘에서는 代天敎, 高句麗에서는 敬天敎, 新羅에서는 崇天敎, 渤海에서는 眞倧敎, 遼와 金에서는 拜天敎, 滿洲에서 主神敎, 高麗에서는 王儉敎, 現在에는 大倧敎라 전한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4차로 부정되고, 진서론의 반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典據 : 첫째, 『天道敎創建史』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敎主 崔時亨 先生이 “우리 도의 대운은 天皇氏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無極之運이며, 天皇氏는 先天開闢의 始祖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義菴 孫秉熙 선생도 “우리 대선생(崔濟愚 선생)께서 비로소 無極大道와 大德의 근본원리와 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 초의 天皇氏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즉, 崔濟愚ㆍ崔時亨ㆍ孫秉熙 선생은 선천시대에 개벽의 시조인 天皇이 있었고, 그 天皇에 의해 성립된 고유종교가 있었으며, 그 종교를 계승한 것이 東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5차로 부정된다.

 

둘째, 『周易』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4시의 운행이 어김없는 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써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 하였고, 『東文選』에도 “신비한 법도로써 宗敎를 창설하니 太平이 가득하다”고 하여 『周易』과 『東文選』이 太古時代에 孔子나 釋迦 탄생 이전에 대성인이 있었고, 그 聖人이 천도에 의해서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桓檀古記』 위서론이 제6차로 부정된다.

 

셋째,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興王 37년 조의 <崔致遠鸞郞碑序>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道ㆍ佛ㆍ儒 일체의 玄妙之道인 풍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곧, 만인이 인정하는 『三國史記』가 우리 나라에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7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4) 考古學的 實證 : ① 桓雄天皇이 처음 도읍한 곳은 白頭山(太白山) 神市였다. 그런데 홍콩의 星島日報는 중국관영 新華通信을 인용하여 백두산에서 40기의 고대제단 유적과 함께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考古學界는 새로운 古代文化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白頭山이 신선도의 발상지임을 실증하고, 桓雄天皇의 宗敎創設이 白頭山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8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② <神市歷代記>에 배달국의 도읍지를 神市에서 靑丘로 옮겼다고 했다. 靑丘는 지금의 만주 요령이다. 그런데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거기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塑造神像과 靑銅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지금부터 5500년 전으로 나왔다. 이것은 배달국의 존재와 고유종교의 실재를 考古學的으로 실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9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③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印度風이 아니라 韓國風이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인 것이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10차로 부정하는 것이다.

 

④ 그밖에 宗敎的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檀君陵에서 신선사상을 상징하는 금관조각이 발견되었고, 高句麗ㆍ新羅ㆍ百濟ㆍ伽倻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한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사찰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신선도의 실재를 증명한다. 그것은 『桓檀古記』 위서론을 제11차로 부정하는 것이다.(1)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2)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2)
2006년 5월 (통권 제82호)
安 昶 範
濟州大學校 名譽敎授(韓國哲學 專攻) / 本聯合會 指導委員

 


3. 桓雄天皇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이시다.


『神市歷代記』에 桓雄天皇을 居發桓이라 하였다. 居發桓은 天地人 일체에 대한 호칭으로서 부처님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 宗敎 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桓雄天皇은 天地人 일체의 천문을 관통하시어 종교를 창설한 大聖人이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天地人 일체를 대통한 부처님이시다.

 

둘째, 桓雄天皇을 字義로 해석하면, “桓雄”은 밝아범을 의미한다. 밝아범은 이를 옛말로 표현하면 곧 “박가범”이다.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 薄伽梵(박가범)이다. 박가범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과 아미타불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桓雄天皇의 다른 이름이 居發桓(거발환)인데, 거발환은 “빛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으로 부처님을 의미한다. 아미타의 다른 이름이 無量光佛인데, 無量光佛은 “한없는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환웅천황ㆍ아미타불은 모두 박가범 부처님이며, 빛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부처님으로서 동일한 인물이다.


『高麗史』 世家 제24대 元宗 12년에 4월 8일의 행사는 본래 國俗으로서 觀燈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음력 4월 8일의 부처님 誕辰日은 환웅천황 탄신일 기념행사이며, 아미타불 탄신 기념행사이다.


곧 환웅천황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인 것이다. 고려 중엽에 仙佛合作되면서 환웅천황 탄신일이 불교화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출판 예정인 『天地人思想과 韓國固有思想의 誕生』을 보아주기 바란다.


그러면 釋迦佛의 탄신일은 언제인가? 성인의 탄생일은 특이하여 干支가 모두 같다고 한다. 그런데 『長阿含經』 <遊行經>에 석가모니의 탄신일ㆍ출가일ㆍ成道日ㆍ涅槃日(열반일)이 모두 2월 8일이라 하였다. 음력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신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의 탄신일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4월 8일의 존경대상이 환웅천황임을 확연히 알게 된다.

 

셋째,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시며 숭배의 대상이시다. 死後에는 국토를 수호하는 호국신 내지 산신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산악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그 유상이 일본의 北九州 英彦山 神宮에 안치돼 있다. 그것은 환웅천황이 부처님이었기 때문에 모신 것이다.

 

넷째, 세계일보 1992년 2월 22일 2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지리학회가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를 촬영한 결과, 세계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釋迦氏譜』에 天地(세계)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백두산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웅천황은 백두산에서 천문을 대통한 아미타불 부처님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환웅천황이 부처님이며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웅천황을 무조건 신화적 가상 인물로 취급하거나,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매도함은 實證을 무시하는 모순행위다. 사실을 사실대로 평가하는 것이 학자의 윤리이다.

 


4. 開天節은 桓雄天皇의 開通天門 記念行事다.


開天節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天은 하늘ㆍ땅ㆍ사람 등 만물의 일체를 의미하는 글자로서 開天이란 막히고 닫히거나, 너무나 커서 까마득하거나, 너무나 작고 미세하여 肉眼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예컨대,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 등 천문형상의 구조와 법칙, 人體系의 조직과 그 기능, 그리고 사물의 성격과 기능 등을 파악하여 그 理法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인체에 天門(혼이 들고나는 곳)이 있고, 하늘에도 천문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인체의 천문과 하늘의 천문을 열고 들어가면, 慧眼이 열리고, 대각ㆍ대통하여 천문현상과 인체의 五臟六腑를 두 눈으로 보듯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환웅천황이 설한 『三一神誥』에 “신이 勅敎(칙교)로서 使者에게 시켜 빛의 세계(日世界)를 나누니 700세계라(예컨대, 빛의 세계가 은하계라면, 은하계에 700개의 태양계가 있다는 뜻이다), 너희 땅은 큰 것 같으나 하나의 타원 세계(一丸世界)라”하였다. 『周易』風地觀에도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觀하니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어김없는지라, 성인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환웅천황께서 천체의 일부와 그 理法을 보인 것이다. 일월화수목금토의 7회제신지역(七回祭神之曆)와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현재와 약간 다르다) 하는 曆法, 天文曆法과 寒暑紀年, 그리고 道ㆍ佛ㆍ儒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모두 환웅천황과 삼신일체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기념행사가 개통천문 기념행사이며, 요약해서 開天節이다.


그러나 환웅천황이 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빛의 세계(日世界)와 타원형지구(丸形世界)까지 관찰할 수 있느냐 하고 <三一神誥>를 조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민족비전>에 尸解法이 있다. 神仙이 되면,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어 하늘을 자유로 날듯이 영혼이 육신을 떠나 우주공간과 만리 밖을 자유로 드나들 수 있으며, 천문현상을 망원경으로 보듯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해법의 일부이다. 이를 이해하면 <三一神誥>와 환웅천황의 개천절을 이해할 것이며, 開天節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광이며 명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와 같이 위대한 환웅천황과 천도인 개천절이 어째서 지금까지 신화 또는 미신으로 취급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문제는 삼국이 불교ㆍ유교ㆍ도교 등 남의 나라의 종교를 수입한 이후 민족의식이 분열되고 해이되어 大學者와 聖人이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近世朝鮮이 明나라의 朱子學을 國是로 정하면서 정치ㆍ종교ㆍ교육이 중국화되고, 환웅천황과 개천절을 부정하고 미신으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桓檀古記』를 부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쉽게 朱子學과 開天思想을 비교 비판한다.


주자학이 인본주의 사상이라면, 개천사상은 天地人일체 사상으로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을 모두 포용한다. 주자학이 현실주의라면, 개천사상은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모두 포용하는 이상주의ㆍ현실주의ㆍ중용주의 일체사상이다. 주자학이 실증주의라면 개천사상은 天文主義다.


孔子를 1000년 앞을 내다보는 大聖人이라면, 환웅천황은 우주 전체를 내다보는 아미타불이시다. 따라서 孔子가 아무리 훌륭한 大聖人이라 하더라도 아미타불인 환웅천황을 이해할 수 없고, 현실주의가 이상주의를 이해할 수 없으며, 실증주의가 우주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자학이 우리 나라의 사회와 교육을 지배해왔다. 예컨대, 평범한 俗人이 산에서 修道한 道人을 이해하지 못하고 홀대하는 격이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우리 민족의 환웅천황과 개천절을 미신으로 멸시하여 역사에서 누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태고사와 고유종교가 말살된 것이다.



5. 檀君王儉은 歷史的 實存人物이었다.


『檀君世紀』와 『神檀民史』 등 여러 책을 종합해 보면, 단군왕검은 父王의 尊號가 檀雄 곧 居弗檀桓雄이시고, 母后는 熊氏 王女인데, 辛卯年(B.C. 2370) 5월 2일 寅時에 神市 檀木下에서 태어났다. 非西岬(비서갑) 河伯의 딸을 皇后로 맞아 슬하에 扶婁(부루)ㆍ扶蘇ㆍ扶虞ㆍ扶餘 등 四男을 두었다. 庚子 단기 94년(B.C. 2239) 3월 15일, 蓬亭에서 돌아가시고, 帝位에 있은 지 93년이며, 壽는 130세였다.


교외의 10리 지점에 장사지냈다. 평안도 강동현 대박산에 단군왕검의 단군릉이 있다. 오늘날 韓氏ㆍ鮮于氏ㆍ奇氏가 단군왕검의 직계손이다. 단군조선은 단군왕검이 戊辰年(개천 1565. B.C. 2333)에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47세를 전하니 역년이 2096년이다.


이와 같이 檀君王儉은 父母妻子와 생년월일시와 돌아가신 연월일과 무덤이 있다. 그밖에 考古學的 實證이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존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僞書論者들이 단군왕검을 신화적 존재라고 무시한다. 특히 기독교가 檀君像을 파괴하고 그 실재를 무시한다. 그 底意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6. 五行思想은 中國思想이라 하더라도 원래 韓國思想이다.


『桓檀古記』에 五行, 五行六正, 五行治水法 등 木火土金水의 五行思想이 자주 나오는데, 오행사상을 중국사상으로 본다. 그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桓檀古記』를 僞書라고 한다.


天一ㆍ地一ㆍ人一의 「一」을 循環論의 입장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태양계, 地一은 지구계, 人一은 인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번 公轉하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4季가 생기고, 4계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木, 여름은 火, 가을은 金, 겨울은 水에 해당한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4계는 지구의 공전에 의해 생김으로 지구인 土가 4계의 중앙에 위치하여 木ㆍ火ㆍ土ㆍ金ㆍ水의 5行이 된다. 또한 5행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대입하면, 5행은 5장과 5지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한다.


그래서 『蘇塗經典本訓』에 太白眞敎는 天符에 근원하여 地轉에 합하고 人事에서 모두 끝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五行思想은 중국 儒敎思想이라 하더라도 삼신일체 사상의 표현으로서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7. 三權分立 思想은 西歐思想이라 하더라도 원래 韓國思想이다.


1) 문제점 : 『檀君世紀』 제13세 단제 흘달 조를 보면,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력분립을 말하는 것이다. 『檀奇古史』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前檀朝 제13세 단제 흘달 16년 조와 後檀朝 제7세 단제 등을 2년 조에 국가권력을 입법ㆍ사법ㆍ행정으로 3분하여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僞書論者들은 『桓檀古記』와 『檀奇古史』를 僞書라고 주장한다.


2) 解說 : 앞에서 天一ㆍ人一ㆍ地一의 삼신일체 사상에서 도ㆍ불ㆍ유 삼교일체의 종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이를 민본적인 의미로 바꾸면, 천인지의 일체는 상중하의 일체, 대중소의 일체, 곧 인간평등, 남녀평등, 빈부일체, 만민일체, 생명일체가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天一은 조화작용, 地一은 교화작용, 人一은 치화작용을 의미한다. 一의 작용을 정치적 법률적인 용어로 바꾸면, 조화는 입법, 교화는 사법, 치화는 행정의 의미를 지닌다. 곧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분립 합의제는 天一ㆍ地一ㆍ人一 삼신일체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서구사상이 되기 이전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 고대사회는 민본주의의 왕도정치였던 것이다.


3) 實證 : 『檀君世紀』 15세 단군 대음 조에 養雲ㆍ須密雨(수밀이) 두 나라 사람이 단군조선에 와서 방물을 바쳤다 하고, 27세 단군 두밀 조에도 수밀이국ㆍ양운국ㆍ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나라는 환국 12국 중의 하나로서 단군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S.N. 크레머는 “최초의 의회제도 ; The First Bicameral Congress”라는 논문에서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경에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분립 사상은 서구사상이 되기 이전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8. 寧古塔은 地名이 아니라 “寧安의 옛 塔”이란 뜻이다.


1) 문제점 : 李巖의 『檀君世紀』 16세 단군 위나 조에 “寧古塔에 모여 삼신상제에 환인ㆍ환웅ㆍ치우(蚩尤)ㆍ단군왕검을 모시어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무리와 더불어 오일 대연을 베풀었다”하고, 20세 고홀 조에는 “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范樟(범장)의 『北夫餘紀』와 李陌(이백)의 『太白逸史』에도 寧古塔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 보면, 寧古塔은 후세에 이르러 지명이 되었으나 檀君朝鮮 시대에는 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桓檀古記』 僞書論者들은 寧古塔을 중국 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 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桓檀古記』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僞作이라 주장한다. 그 典據를 보면, 『滿洲源流考』를 들고 있다.


2) 解說 :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寧古塔에 대한 기록 末尾를 보면, 滿洲語로 여섯을 寧姑라 하고, 자리는 特으로서 영고탑은 와전된 것이며, 지명이 아니라고 했다. 곧 『滿洲源流考』가 寧姑特을 寧古塔이라고 와전한 것이다.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영고탑을 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古城이라 하였다. 『星湖僿說』에는 영고탑은 烏剌(오랄)ㆍ艾滸(애호)를 합하여 東三城의 하나라 하고, 城이 높고 해자(도랑)가 깊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영안의 옛 성에 있었던 탑인 것이다. 그것이 후에 地名이 된 것이다. 예컨대, 光化門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景福宮의 남문이며, 鐘閣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光化門과 鐘閣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성이며, 옛 탑이라는 것이다. 곧 영고탑은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탑인 것이다. 위서론자들이 전거를 확인하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다.



9. 桓檀古記가 지금 出現한 事由


『桓檀古記』는 지금이야 갑자기 세상에 나왔으니 어느 國粹主義者의 僞作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桓檀古記』에 인용된 사서들에 의하면 몽고와 만주대륙과 중국대륙 일대가 거의 태고시대 우리 민족의 疆土였다.


그러므로 이들 사서를 인정하면 우리 나라와 몽고 및 중국 사이에 국경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약소국인 근세조선은 국가안정을 위해 『桓檀古記』에 인용된 사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桓檀古記』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종교를 창설했었다. 그것은 강대 민족인 이웃 민족들의 자존심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桓檀古記』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2)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3)

安 昶 範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한국철학)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1. 환단고기 오역

 

1) 환단고기의 유래 : 위서론자들이 『한단고기』를 위서로 오인하게 된 과오를 지적하기 전에 범례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단고기의 유래를 요약 소개한다.

 

삼성기전 상편은 신라의 고승 안함노가 찬한 것으로 계연수 선생댁에 소장됐던 것이며, 삼성기전 하편은 원동중이 찬한 것으로 백진사 관묵에게서 얻었다 하고, 단군세기는 고려의 문인 이암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 역시 백진사 관묵에게 얻었다고 했다. 북부여기 상하는 고려 말기의 학자 범장이 찬한 것으로 삭주 이동 이진사 형식의 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이 엮은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했다. 개천 5808년(서기 1911),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계연수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선지(줄친 종이)에 글을 잘 쓰고, 홍범도와 오동진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무판자에 새기게 되었다. 그 뒤 1920년 계연수 선생이 운명할 때,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의 경신년(1980)이 되거든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발문을 보면, 개천 5846년(서기 1949) 오형기씨가 이유립씨로부터 위촉을 받고 한단고기를 정서하였다. 그 뒤 개천 5876년(서기 1979) 수 십 부가 영인된 후, 녹도승라는 일본인이 한단고기를 번역하고 영인본과 함께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자들과 일부 사계학자들이 시비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소개한다.

 

 

2)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 :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은 제기하기를 "적어도 이 책(한단고기)이 계연수의 『범례』와 오형기의 『발문』에서 말하는 1911년 편집과 1949년 필사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인되더라도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대단할 것이며,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1911년의 편집과 1949년의 필사설을 확증할만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냐 하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역설할 경우, 물증이 있으면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조인성은 "만약 이유립이 인쇄본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정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한단고기』공개자로 알려진 이유립도 인쇄본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범례〉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한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곧 정서를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인쇄본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인쇄본이 없으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3) 문제되는 내용과 위서론자들의 과오 : 그러면 위서론자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한단고기』 범례 말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桓檀古記悉經 海鶴李先生之監修 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吳東振 兩友之出金付諸剞劂"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국역하면, "한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한 내(계연수)가 줄친 종이에 또박 또박 베끼고(선사),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겼다(기궐)"는 뜻이다.

 

그러나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한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한단고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계연수 선생이 '선사(선사)'했다는 단어를 "고쳐쓰다. 옮겨쓰다. 정서하다. 필사하다"로 오역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궐(기궐)'했다는 단어를 "인쇄 또는 편집"으로 오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계연수 선생이 만약 『한단고기』를 인쇄했다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한 인쇄했다면, 후에 정서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전에 의하면, 선사(선사)의 선자는 "(실로)깁다. 꿰매다"의 뜻이며, 사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서 「선사」는 "줄을 상하좌우로 곧게 쳐진 바둑판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는 뜻이다. 곧 선사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정서하다"는 뜻의 선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궐(기궐)의 기는 끝이 굽은 '조각칼', 궐은 끝이 굽은 '조각끌'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기궐」은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또한 인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기궐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굴속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아서 인쇄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는 처음에는 인쇄되었던 것이 아니라, 판각되었던 것이며, 종이에 찍은 간단한 인쇄본이 아니라, 나무판자에 각자한 방대한 양의 판각본 또는 목판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판각본은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어디에 한단고기 원본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와 목판책이 비장되어 있을 수 있으나, 단군상도 이를 철거하라고 파괴하는 이 때에 남북이 통일되고 민족적 자주의식이 강해질 때까지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본다.

 

 

4) 환단고기 목판책 작성의 이유 : 그러면 어째서 『한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각자했을까? 그때는 1911년 한일합방 직후다. 일경과 일군이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구금할 때다. 한단고기를 선사한 계연수와 출금한 홍범도와 오동진은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사로서 시중 출입이 불가능한 체포구금 대상 인물이다. 신변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한단고기를 필사하려면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필사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굴암 곧 단군굴 속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한단고기를 새겼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2. 실증사학의 모순

 

『환단고기』부정은 한문오역 외에 실증사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에 대해 그 모순을 몇 가지 비판한다.

 

1) 실증사학을 맹신 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 실증사학은 고고학에 기반을 둔다. 고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학문으로 성립됨으로써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 전체를 조사하거나 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본다 하더라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실물이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만을 신봉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며, 현대사 내지 근세사만을 인정하고, 고대사를 무조건 부정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영국 불란서 독일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다. 이상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 실증사학이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을 우리사회에 무조건 적용함은 크나큰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실증사학의 배경인 서양문화의 원형(patten)에 있어서 동양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서양문화는 헬레니즘(그리스 중심) 문화와 헤브라이즘(유태교와 기독교 중심)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두 문화의 공통점은 유목문화이며, 자연정복문화이다. 동양문화에도 불교 유교 도교에 따라 다소 다르나 공통점은 농경문화이며 자연조화문화이다. 이와 같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또한, 서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돌아감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천도)로서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고 한 바와 같이 동양문화는 천도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서양문화의 우주관은 창조론으로서 자연질서를 인간 위에 천신이 있고, 인간 밑에 동식물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서양문화는 천지인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관계로 본다. 이에 반해, 동양문화의 우주관은 순환론으로서 천지인의 관계를 수평적 일체관계로 본다. 이와 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발생학적 배경과 발생원리 그리고 우주관 등 문화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문화의 원형이 다른 서구학설을 동양문화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둘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3) 실증사학은 후진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 불서에 의하면 천지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 이를 풀어 말하면, 지구의 중앙에서 역대 성인이 모두 탄생하였고, 문화가 먼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각자인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리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중앙 곧 5대양 6대주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곧 우리 나라가 서양보다 먼저 개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서구사회는 우리 나라보다 후진사회였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유년기였다면, 우리사회는 청년기였다는 것이다. 현대 종교를 예로 들면,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은 지금부터 2천년 전후인데,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출현은 2천 5백년 이전이다. 이를 보아도, 실증사학은 분명히 후진사회를 기준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선진사회였던 동양사회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셋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과 같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되었다. 그리고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 결정적 원인도 한문오역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한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모든 학자들은 한단고기를 마음껏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인용해도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원래 고집이 세고 자기의 학설을 쉬이 바꾸려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자기의 학설을 바꾸어 본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려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외람되나마 한단고기 위서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들이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한다. 일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첫째, 자아반성과 사실검증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 : 실증사학자들은 모든 일에 실증과 검증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단고기를 비판하기 앞서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안목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만년 이내의 동양사와 민족사를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한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고 확인한 다음, 한단고기의 내용에 모순이 있으면, 그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그것이 한국사 연구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단고기』영구보존을 위한 "선사와 기궐"을 오역하고 있으니 연구의 넓이와 깊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단고기의 내용은 7000만 민족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그 비판은 신중에 신중을 다했어야 했다. 깊은 반성과 자아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학문의 동기와 목적의 모호성에 문제가 있다 : 어렸을 때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취미나 적성에 따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투철한 사명감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 개인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인 독립운동가들의 글에 대해 위서니 조작이니 거리낌 없이 혹평하고,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을 위서 또한 위작이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실증사학자들이 학문을 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극히 애매 모호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을 위한 부정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아무리 태고시대의 국가라 하더라도 한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확인했다면, 부정하는 이유, 곧 그 유적유물에 대한 측정도구, 측정방법, 측정과정 등 어디에 모순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함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의 한단고기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서구학설을 맹신하는 사학계의 풍토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설은 서구인에 의해 성립된 서구제일주의 학설로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서구학설을 진리같이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사근취원하는 교육풍토에 문제가 있다 :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부터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풍토는 가까운 것인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보다도 먼 것인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무식하게 되고, 그 무식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왜곡하고,『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 나라는 태고시대에 이미 동방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말은 태고시대의 우리 사회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상과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허무한 조작같이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대해 소홀하게 되고, 그러한 소홀함이 무식을 낳고, 무식이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자연에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어 자연과 인생이 무상하듯, 문화도 거기에 생성소멸이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돌고 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도의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는 고도한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법칙 몰이해가『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실증사학자들에게 민족적 주체의식 내지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교육의 기초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있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자신의 안목과 사고방식이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를 자연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파란안경이든 검은안경이든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볼 것을 촉구한다. 곧 과거의 학설과 종교적 신념과 나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장이 1m 75cm면 정상적인 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1m 50cm밖에 안 되는 사람은 부러워할 것이며, 키가 2m 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잇을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서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 거의가 『삼국유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삼국유사』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한단고기』를 보는 시각이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보는 안목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생각과 태도를 바꿔 한단고기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래도 단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영원히 신화 속에 묻혀 두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격으로서 다음과 같은 비민족적 비애국적 주장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되살아나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꺽는 주장이다.

둘째, 그것은 9000년 내지 6000년의 민족사를 단축시키는 주장이다.

셋째, 그것은 진실한 민족사관 정립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그것은 민족적 자주의식 확립을 저해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그것은 민족총화를 저해하는 주장이다.

여섯째, 그것은 선지자들의 교시인 원시반본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일곱째, 그것은 신진 사학자들의 태고사 연구 열의를 꺾는 주장이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특히 단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단군확회가 환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그러한 글을 단군학연구(제2호)에 싣고, 환인 환웅 단군에 대한 역사를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니 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군학회의 결성 취지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3)   

 

 

 

<자료출처>

 

 

(1) 한글과 한자문화

 

 

(2) http://hanja-edu.com/0605_month/18.html

 

 

(3) 한글+ 한자문화 2006년 6월(통권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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