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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 김교헌 서거 100주기를 추모하다

[특별 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 기자명 김동환 
  •  입력 2023.12.22 13:50
  •  수정 2023.12.22 13:53
 
무원 김교헌 존영. [사진 제공 – 김동환]

 

역사를 위한 변명

역사는 나와 우리를 위한 변명이다. 또한 사관(史觀)이란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말한다. 따라서 역사가의 눈은 ‘주인으로 보는 눈[主視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인 됨을 버리면 기준과 척도를 잴 수 없다.

구차함과 억측이 진실을 가리게 되고 가식과 협잡으로 인해 바로 보는 눈이 무너져버린다. 우리의 과거는 이러한 눈을 잃어버린 노예시대의 여정이었다. 다시금 사관을 시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노예의 눈으로는 주인의 역사를 만들 수 없고, 주인의 눈에서는 결코 노예의 역사가 나올 수 없다. 신채호가 “아국(我國)을 망(亡)하는 자는 정론(政論)도 아니며, 학제(學制)도 아니오, 기백년래(幾百年來) 망필을 휘(揮)한 노사가(奴史家)가 시(是)라.”고 한탄한 것이나,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 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이 조선일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박은식의 말도, 노예적 사필에 대한 일갈(一喝)이었다.

『삼국사기』 이후, 우리의 사서에 담겨있는 역사인식과 기술태도에 안타까움을 갖는 것은 왜일까. 역사가의 가치관 때문이다. 김부식을 비롯해 지은 이(혹은 엮은 이)들 대부분이 유교사관에 함몰된 유학자들이었다.

공자가 쓴 『춘추』는 경전으로 꼽힐 정도로 뚜렷한 사관을 제시한 책이다. 어지러운 춘추시대에 정통을 강조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여지없이 매도하는 사관을 담고 있다. 뒷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유교사관을 충실히 따랐다. 유교사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 정리는 중국의 자기중심주의적 역사 해석이 대부분이다. 춘추필법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와서 더더욱 화석화되고, 의리(義理)와 대의명분(大義名分), 그리고 중화주의에 따른 정통성 등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대간(臺諫)이나 사관(史官)의 활동 역시 유교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유교사관의 정당화와 체계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전통시대의 중화적 사대주의사관이 그대로 일제 식민주의사관으로 연결되며 온존했다는 점이다. 노예의 집단의 대물림 속에 주인만 바뀐 양상이다. 다시금 ‘주인의 눈’을 잃어버린 아픔을 곱씹게 된다.

중화에서 민족으로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 19868-1923)은 그러한 시대의 끝자락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섬겼던 조선을 세운 주체는 신흥사대부들이다. 그들은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윤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주자학(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다.

새로운 왕조를 이룩한 이들 주도 세력은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유교사회를 지향하게 된다. 더욱이 또한 조선의 국시(國是)가 된 성리학은 과거제도와 맞물리면서 조선의 굳건한 통치논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에서 성리학과 대립하며 입신출세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성리학적 가치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가치지향이 본격화된 시기는 구한말 때였다. 노예의 눈을 버리고 주인의 눈으로 각성한 시기 역시 이 무렵이다. 그 변곡점을 이룬 사건이 대종교의 등장이다. 김교헌의 역사인식은 그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의 하나다.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의 김교헌 역시 중화주의 가치관에 흠뻑 젖은 유학자였다. 과거급제 이후 종2품에 이르도록 25년간의 벼슬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익힌 김교헌의 가치는 바로 소중화인으로서의 성취감이었다. 그 대표적 양태가 『자치통감강목』을 통한 역사인식의 되새김이었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김교헌 역시 소중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마음껏 향유한 것이다. 벼슬 말기 『문헌비고』 편집위원(1903년)과 『국조보감』 감인위원(監印委員, 1909년)으로의 발탁은 성리학적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최고조를 의미했다.

그러나 김교헌은 유교적 가치로부터 환골탈태한다. 대종교 중광(重光)의 명분으로 외쳐진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의 충격 때문이었다. 이것은 중화주의적 가치관 속에 함몰되었던 김교헌 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출발이었으며, 중화주의 역사관에서 민족주의 역사관으로 변모되는 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던 ‘국망도존’은, 정신의 망각으로 망한 나라를 정신의 지킴으로 되찾자는 구호였다. 이 정신은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항일투쟁의 총체적 동력을 만들었다. 김교헌은 대종교의 2세 교주까지 올라 이러한 동력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이후 김교헌은 단군 관련 근대 최초의 사료집(史料集)인 『단조사고(檀祖事攷)』(1911년) 편찬을 주도하는가 하면, 『신단민사(神檀民史)』(1914년)와 『신단실기(神檀實記)』(1914년), 그리고 『배달족역사』(1922년) 등을, 사료의 뒷받침을 통해 저술하였다.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도 빼놓지 않았다. 사료의 고증을 통해 엮은 『배달족강역형세도비고(倍達族彊域形勢圖備考)』의 찬술이 그것이다.

역사는 독립운동의 동력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은 최근 30년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다.”

백암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서 일깨운 경구다. 독립운동을 ‘역사인식에서 발생하는 동력’으로 규정하였다. 독립운동은 주인된 의식에서만 가능한 행동이다. 친일에 엎어져 매국의 길을 걸어간 인물들을 기억해 보자. 노예의식의 그늘에서는 항일의 의지를 찾을 수 없다.

김교헌의 역사서술은 항일의식의 동력원이 되었다. 독립운동 현장에서 정신적 교본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독립군들 사이에 국사교과서로서 널리 읽혔다.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간도의 여러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 역할을 하며 역사인식 고양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1918년 김교헌이 주도하여 만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김동환]

그뿐만이 아니다. 김교헌 스스로 독립운동의 중심부에 섰다. 1918년 재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을 결집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한 인물이 김교헌이다.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후일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국내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선언서에 담긴 항일투쟁의 방략은 완전자주독립과 항일무장독립전에 있었으며, 이후 만주 무장항일투쟁의 주요 행동지침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 항일단체인 중광단·북로군정서·신민부 등의 행동지침에도 이 선언서의 이념과 사상이 그 바탕에 있었다.

김교헌은 청산리전투를 이끈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조직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당시 대종교 교주로서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덕원리(德源里)에 소재한 백포(白圃) 서일(徐一)의 집에 거처하며, 서일과 더불어 북로군정서 조직에 직접 관여하였다.

경신년 일제의 만행 이후, 영안현(寧安縣)에서 도모된 북로군정서 재건 활동을 이끈 인물도 김교헌이다. 서일의 순국 이후 밀산(密山)에서 영안으로 대종교총본사를 옮겨온 김교헌은, 각지로 흩어진 북로군정서 간부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재기를 도모했다. 측근을 국내로 밀파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무기와 탄약까지 구입하며 조직적 무장투쟁의 준비를 주도하였다.

북로군정서‧신민부‧한족연합회 등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정신(鄭信, 혹은 鄭潤)이 김교헌을 추모한 아래의 글이 위의 정황을 말해 준다.

“나는 이 어른을 종교가나 문학가로만 보지 않고 군사가(軍事家)로도 보는데, 이는 우리가 북간도(北間島)에서 군사행동을 할 때에 이 어른이 미리 말한 것이 여러 차례 있는데, 그 뒤에 모두 이 어른 말한 대로 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역사학

20세기 초 조선은 역설의 공간으로 시작된다. 을사늑약으로 조선 역시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한편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는 조선의 내정까지도 간섭했다. 일제 통치의 완성은 조선의 완전한 일본화로 연결된 반면, 우리의 가치지향은 정체성 회복을 통한 조국 광복의 완성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오히려 완전한 일본화에 순응하였다. 이것이 전도된 공간에서의 대표적 역설이다. 이러한 뒤틀린 삶 속에서의 선택은, 바로 선 자와 거꾸로 선 자의 인식마저도 바꿔 놓았다. 주인이 노예가 된 공간에서, 노예된 자신을 진정한 주인인 양 행세케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역사학 분야다. 민족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진정한 광복을 도모하고자 했던 역사학이 민족주의역사학이라면, 일제의 관학을 뿌리로 하여 조선의 영구적 식민지를 획책한 역사학이 식민주의역사학이다.

그 양 진영의 인물로 무원 김교헌과 두계 이병도가 주목된다. 공교롭게도 화성 출신인 김교헌과 용인 출신인 이병도는, 같은 경기도 출신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갖는다. 또한 김교헌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역사가로 추앙받던 학자다. 이병도 역시 해방 이후 한국역사계의 인맥을 주도해 온 최정점의 인물로, ‘두고계장(斗高溪長, 두계 이병도의 학문이 북두와 같이 높고 장강과 같이 길다는 뜻)’이라는 찬사까지도 그 후학들에게 받았다.

문제는 전도된 공간 속에서의 두 인물의 선택이다. 김교헌은 민족주의역사관을 토대로 여러 저술들을 남긴다. 이러한 저술들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독립군 역사인식의 기반이 되는가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도 쓰였다. 반면 이병도는 일본 유학과 함께 일본 관학자들의 영향 속에서 역사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의 주변을 맴돌면서 일제의 『조선사』 완성에 부용(附庸)하였다.

마음 아픈 것은 해방된 공간에서의 두 인물의 위상이다. 김교헌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만주 영안현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20여년이 흘러 광복이 되었지만, 그의 학문은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로만 전언될 뿐이다. 학문적 계보는커녕 학문적 가치로서도 무의미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병도의 학문 기반은 확고하다. 그가 일제관학의 아류로 처신한 경험과는 상관이 없었다. 청산되지 않은 기득권에 빌붙으며 한국사학계의 대부로 처세하였다. 회색지대로 변해버린 해방의 공간이, 학문이라는 포장을 쓰고 다시 온존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교헌과 이병도의 사학 성향이 신교적(神敎的) 민족주의역사학과 신도적(神道的) 식민주의역사학으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물론 중량급과 경량급의 두 인물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자체가 무게의 형평성에서 어긋날 수 있으나, 김교헌 역사인식이 신교사관과 관계가 깊고 이병도의 역사인식이 일본 신도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은 신교사관의 근대적 위상을 가장 잘 정리한 인물이다. 김교헌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로, 후일 대종교 2세 교주를 역임했다. 그가 저술 혹은 감수한 책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일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등의 민족주의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병도 역사인식의 이면에는 신도사관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 그가 황국신민화의 첨병이었던 일제관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그렇거니와, 황국사관의 이론적 공장이었던 ‘조선사편수회’에서 적극 활동한 이력만 보아도 직감이 된다.

그의 이러한 환각은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일본에서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를 방문하여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한 인물이 이병도다. 돌아와 후배 교수들에게는 그러한 행태를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이병도의 가치 기반에 일본 신도의 작용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다.

한편 일제는 실증사학이라는 허울을 식민주의사학 정착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역사의 서술 주권을 장악한 일제는 과학적‧객관적‧합리적이라는 학문성을 내세우며 식민주의역사학을 체계화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우리 근대역사학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실증사학(문헌고증주의사학)은 사관(史觀) 이전에 역사학의 기초 접근방법이다. 실증이란 관념사학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도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사관이나 식민주의사관 그리고 사회경제주의사관 등, 모두 실증적 방법을 토대로 관념을 논리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실증사학의 교묘한 함정이다. 가장 큰 논리적 함정이 ‘민족주의역사학=비실증적 역사학’이라는 인식 주입이다. 그리고 일제관학에 뿌리를 둔 식민주의역사학만이 진정한 실증사학으로서의 학문성을 갖는다는 고도의 사기극까지 펼쳤다.

이러한 인식 주입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역사학을 비실증적‧비학문적‧비과학적‧주관적이라는 곡해된 논리로 매도하였다. 또한 한국사의 개별성을 특수성 내지는 고유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세계사적 보편성과의 연관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보탰다.

이러한 민족주의역사학은 한국 민족을 인류로부터 고립시키고 한국사를 세계사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나아가 결국 민족의 우열론으로 기울어져서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자라나게 한 것과 같은 온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가증스런 염려도 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역사학은 결코 역사학이 될 수 없다는 궤변으로 연결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해 온 상식의 눈으로 보자. 민족주의역사학은 과거 중화주의역사학으로부터의 탈피이며, 중화주의역사학의 연장이었던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자 대항이었다.

중국의 눈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 객관이고 일제 식민지의 눈으로 우리를 읽는 것이 실증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역사학은 주관과 비실증으로 낙인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역사학을 이념이자 관념으로 매도함도 그러한 인식의 연장이다.

주인의식도 경험해 본 집단이 행사하는 것이다. 노예의 삶으로 오래 길들여진 역사적 경험은, 늘 시류에 맞게 변신하는 것이 현명함으로 통했다. 우리의 역사학에 있어 실증사학의 가면 역시 이러한 변신과 무관치 않았다.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의 가면이 실증사학라면, 해방 이후 한국역사학의 가면 역시 실증사학이다. 그러한 가면 뒤에 숨어 행세한 대표적 인물이 이병도다.

김교헌은 관념적 역사가가 아니다. 『문헌비고』와 『국조보감』 참여를 통해 경험한 실증적 사료 분석과 집성(集成)에 누구보다 훈련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자료집, 통사, 지리지 등의 저술들 모두가 사료의 고증과 정리를 통해 만들어낸 노작(勞作)이었다.

오히려 실증의 가면을 쓴 이병도의 역사학이 극히 비실증적이다. 진즉부터 이병도 역사 연구에 있어 비실증성 문제는 제기되어 왔지만, 근자에 들어 이병도의 사학에 실증이 없다는 글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이비 실증사학의 종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교헌과 이병도가 살다 간 행적도 대조적이다. 김교헌은 부귀영화를 스스로 버리고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나라사랑의 길로 독립운동의 험로였다. 그 수단의 하나로 택한 것이 실증적 민족주의역사역학으로,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항하는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이병도는 중국 경극에 나오는 변검(變臉)의 달인처럼, 시류의 변화에 너무 잘 적응했다. 일제관학자들에게 감명 받아 역사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한 인연을 토대로 식민의 그늘에서도 늘 양지에 발을 딛고 산 인물이다. 실증사학‧순수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선사편수회에 부용하며 식민주의역사학 확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청구학회‧진단학회라는 허울을 쓰고 어쭙잖게도 민족사학의 맥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다시 변신하여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일제 관념(식민)사학의 아류인 그가, 한국 실증사학의 태두로도 자리 잡았다. 그에게는 나라사랑은커녕 명분도 염치도 없었다. 오직 변신을 통해 온존해 온 지식인일 뿐이었다. 그가 바로 이병도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

김교헌의 역사학을 돌아보며, 문득 청나라 말기 학자인 정함(定盦) 공자진(龔自珍)의 다음 경구를 되새기게 된다.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문지방을 허물고 강기(綱紀)를 파괴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인재를 끊어버리고 그 가르침[敎]을 근절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조상을 쓸어버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강자의 역사가 약자의 역사를 지배해야 한다는 당위적 논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구절이다. 역사학이 학문 이전에 지배와 피지배, 제국과 식민의 길항작용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역사가 살아남은 자의 기록임을 직설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하자마자 우리의 역사를 식민지화하려 한 의도가 무엇일까. 반면 그에 맞서 모든 것을 잃어가며 우리 역사를 지키려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쓰러지는 나(정체성)를 지탱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눈은 ‘주인으로 보는 눈[主視眼]’과 ‘슬기로 보는 눈[慧視眼]’, 그리고 ‘바로 보는 눈[正視眼]’이 요구된다.

주인 됨을 버리면 기준과 척도를 잴 수 없다. 슬기를 잃어버리면 구차함과 억측이 진실을 가리게 된다. 바로 봄을 망각케 되면 가식과 협잡으로 인해 정관(正觀)할 수가 없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이러한 눈을 잃어버렸다. 다시금 사관을 시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 이 속담은 ‘돼지의 눈으로 보면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가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의미다. 따라서 노예의 눈으로는 주인의 역사를 만들 수 없고, 주인의 눈에서는 결코 노예의 역사가 나올 수 없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에 기록된 「한상국(韓相國)의 농사」를 떠올려 보자. 상국(相國) 한응인(韓應寅)이라는 농사의 반푼이가 벼[稻]와 강아지풀[稂莠]를 구별 못해 벼를 다 뽑아버리고 진정한 농사꾼인 양 우쭐해 하는 이야기다.

혹여 ‘슬기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학이 이런 것은 아닐까. 역사의 ‘어설픈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답시고 남의 다리를 긁어준 것은 아닌지 궁금키도 하다. 다시 우리의 얼굴과 혹도 구별 못하는 사가들을 비판한 신채호의 다음 주장을 보자.

“조선사를 지은 기왕(旣往)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眼鏡)이 너무 철면(凸面)인 고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무수한 ‘혹’을 가져다가 붙이었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대통(大通)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참괴한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 있도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올바른 조선사가 아니었다.”

유몽인이 벼와 강아지풀을 구별 못한 한응인을 비웃은 것이나, 신채호가 우리 얼굴과 혹을 구별 못한 역사가들을 힐소(詰笑)한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혜시안(慧視眼)’을 잃어버린 우리 역사가들의 현실을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본질을 놓치고 현상에 기울어진 이치를 비판하는 것이며, 거짓을 가지고 진실이라 호도하려는 부류에 대한 공박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강아지풀 속에서 벼를 찾아 환호했던 모습도 보인다. 숙종조 인물인 북애자(北崖子)의 다음과 같은 경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언제부턴가 우리의 역사는 소외와 위축의 역사로 진행되어 왔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서의 수난과 더불어 흔들린 신교의 쇠퇴와 맞물린다. 탄압 속에 사라진 서적도 대부분이 신교서적이다. 남아서 천대받는 서적도 하나같이 신교사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뒤집혀진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사(正邪)가 전도(顚倒)되고 주객(主客)이 역전된 삶이 우리의 역사적 삶이다. 혹과 강아지풀인 외래사관에 의해 얼굴과 벼인 신교사관이 압살당해 온 것이다.

한편 역사는 나와 우리를 위한 변명이라는 측면에서, ‘정시안(正視眼)’이 요구된다. 우리는 과학성이니 합리성이니 보편성이니 하는 허울 속에, 그 ‘바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 지 꽤나 오래되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중국적인 것이 과학적‧합리적‧보편적인 가치요, 근대 이후로는 제국주의적 잣대가 바로 그러한 가치였다. 우리는 늘 변두리 의식 속에서 빌붙어 사는 것에 길들여져 왔다. 바로 보아야 할 역사의 눈 역시 사팔뜨기[斜視眼]가 된 원인이다.

그러나 진정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과정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중략)…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前途)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신채호의 외침이, 새삼 올바르게 와 닿는 지금이다.

대한민국 역사학의 우두머리

1923년 12월 25일(음력 11월 18일), 중국 길림성 영고탑에 있는 대종교총본사 수도실에서 대한민국 역사학의 우두머리 김교헌이 영면하였다. 꼭 100년전 이맘 때다. 민족사의 올바른 서술을 통하여 단군의 의미를 역사 속에 끌어들였고, 불교와 유교 중심의 역사 경험을 신교(神敎, 道家)적 사관으로 체계화시킨 거목이 쓰러졌다.

박은식이나 신채호를 비롯하여 수많은 민족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 쓰러지자, 당시 생각하는 지식인들 모두 슬퍼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진실로 한 단체나 개인의 덕망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전민족의 모범적 지도자요 국학상의 둘도 없는 대학자였다.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추모처럼 김교헌은 ‘말 없는 애국자’요 ‘참된 조선인’이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자료와 그 정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 않고 열정을 쏟았던 인물이다. 대종교에 몸 바친 이유 또한 그러한 정신의 연장이었다. 안재홍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애국자·국학자를 잃은 것으로, 대종교도를 넘어 전민족의 손실로 애도하였다.

안재홍은, 김교헌이 옥처럼 쇠처럼 단단한 인품과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기질로 20여년을 하루같이 대종교와 민족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임은, 국내외 모든 동포들이 알고 있는 바라 회억하였다. 더욱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앞길에 지도자가 되어줌은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이 되었다는 토로다.

김교헌의 인격을 논함에도, 우리 사회의 정신적 계도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솔선수범하였음을 추앙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일이라면 극한 고통의 길이라도 기꺼이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북간도의 혹한 속에서 굶주림을 다반사로 경험하면서도 동포들을 일깨우고 지도하는 삶이 그의 전부였음을 애도하였다.

나아가 안재홍은, 김교헌의 고행역정을 석가(釋迦)의 6년 고행을 넘어서는 삶으로 회억하면서, 아래와 같이 추모의 변을 올리고 있다.

“그러면 선생은 단순히 개인의 선생이 아니며 일개 단체인 대종교의 선생이 아니라 곧 우리 전체의 선생이니, 우리 전체의 선생이 되는 동시에 차일(此日)을 당하여 선생을 잃은 우리의 경우가 얼마나 비애이며, 우리의 손실이 얼마나 거대한가. 말하고자 하여도 차마 말하지 못하겠으며, 말하지 않고자 하여도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도다.”

이어 충혼기백으로 일관한 김교헌의 삶은 떠났을지라도, 그가 남기고 간 큰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추모했다. 오히려 “교해(敎海)는 민멸(泯滅)되지 아니할 만큼 민족에게 파종되었으며, 선생의 성력은 이미 사회에서 근대(根帶)가 기고(己固)하였은 즉….”이라는 회고와 같이, 김교헌의 가르침이 민족의 근간에 이미 굳건히 자리 잡았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추모를 아래와 같이 맺고 있다.

“선생의 육신은 비록 이 세상에 없다 하여도 선생의 정신은 영원토록 우주 간에 존재하여, 우리의 광명한 앞길을 툭 터줄 날(衝出할 一日)이 반드시 있을지라. 그럼으로 오인(吾人)은 보잘 것 없는 몇 줄의 글(荒文數行)을 장(將)하여 선생의 영(靈)을 조(吊)하려는 것보다도, 선생의 유지(遺志)를 바르게 체득하여 선생을 위로코저 하는 견지에서 이와 같이 애도의 의(意)를 표함이로다, 아 슬프고 애통하도다(悲夫痛矣)”

평소부터 깊은 우애를 맺었던 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 역시, 김교헌이야말로 인인(仁人)이요 군자(君子)라고 평하면서, 남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강인한 마음을 동시에 소유한 인물로 회억했다. 그리고 아래의 평가로 김교헌을 기렸다.

“선생(김교헌-인용자 주)의 깊고 넓은 학문은 모든 것을 바르고 깊게 살폈으니, 당시에는 이에 관하여 선생을 따를 이가 없었다. 더욱이 동방의 역사에 오로지 힘을 쏟아 연구를 쉬지 않아 누구든지 그 한 마디 한 글자에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우리 역사와 어문에 남다른 조예를 보인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의 추모도 돋보인다. 그는 김교헌이 우리 역사에 끼친 공적을 추모함에, “사마천의 공보다 크다”고 아래와 같이 평가하였다.

“나는 이 어른(김교헌-인용자주)과 십여 년을 같이 있었는데, 나의 본 것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공부와 발견이 제일 많다. 그럼으로 광문회에서 고고(考古)의 책을 많이 발행하였으나 거기도 이 어른의 공이 많으며, 또 오늘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두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가 세운 공보다 더 큰 것이다.”

그렇다. 김교헌은 우리 역사계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은계(隱溪) 백순(白純)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평가와 같이, 김교헌은 ‘대한민국 역사가의 진정한 우두머리[宗匠]’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출처;  고조선과 요하문명 - 경남매일 (gnmaeil.com)

고조선과 요하문명
  •  이헌동
  •  승인 2022.11.17 19:40

이 헌 동
전 영운초등학교장

 

고조선과 요하문명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식민사학 유풍의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요하문명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  요하문명과 고조선이 관련된 것이 밝혀지면 그들의 소고조선론과 식민사학 유풍 학설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하문명이 이루어진 곳은 고조선의 강역이다. KBS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를 youtube에서 보면 그 관련성을 잘 알 수 있다. 

2021년 11월, 세계 최고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요하문명과 우리 한국인의 관계를 이야기해주는 논문이 발표되어 요하문명과 고조선은 관련이 많다는 것을 학술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논문은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의 마르티너 로베이츠(Martine Robbeets) 교수 연구팀을 중심으로 10개국의 학자들이 언어학, 고고학, 유전생물학 분야를 종합한 대규모 공동 연구의 결과였다.

요하문명에 대해서 심도있는 연구를 한 우실하 교수는 요하문명과 고조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한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 역사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등이 분포하는 만주 일대를 `고조선 영역`, `고조선의 문화권`, `고조선의 세력 범위` 등으로 가르친다. 요하문명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미 중국학계에서도 `요하문명의 꽃`인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3000)의 후기(BC 3500~3000)에는 `초기 문명 단계` 혹은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했고,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BC 2300~1600) 시기에는 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고고학의 대부인 (고)소병기(蘇秉琦: 1909~1997) 선생은 홍산문화 시기에는 `고국(古國)`이,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는 하-상-주와 같은 `방국(方國) 단계의 대국(大國)`이 존재했었다고 본다. 

설지강(薛志强)은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하(夏)나라보다 앞서 건설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홍산문화를 바탕으로 하가점하층문화 시기에 건설된 `방국 단계의 대국(소병기)`, `하나라보다 앞서서 건설된 문명고국(설지강)`이 바로 `단군고조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300년전 프랑스 레지 신부의 <레지 고조선 사료: RHROJ> 기록을 제대로 해제/사료교차검증/상호보완해 이슈화시킨 유정희는 <레지 사료>에는 고조선과 중국 하(夏), 상(商)왕조와의 전투 장면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백 년 전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등이 쓰신 <신단민사/실기> 등과 사료 교차검증(cross-examination)했다.

더 나아가, `서경-후한서 동이열전-삼국유사-레지사료-신단민사/실기` 등으로 사료 상호보완(reciprocal complementation)하여 고조선 역사의 기본 틀과 큰 뼈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요하문명이 우리의 상고사-고대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학계에서는 요하문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그들의 상고사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고조선의 강역/영향권/문화권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고 있는 것은 한국학계의 직무 유기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상고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이제는 우리나라 초-중등-대학에서 요하문명에 대해서 가르쳐야 하고, 역사교과서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요하문명의 발견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fact)이기 때문이다. 

요하문명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들은 모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Fact)`이다. 고고학 자료는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된 `사료`와는 달리 처음부터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위의 글은 요하문명 전문가 우실하 교수와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란 책의 저자인 유정희가 나눈 대담이다. "우실하 교수님 주장이나 나의 주장은 누가 들어도 합리적인 주장이다. 흔히 masstige(대중적 명품)를 지향한다는 인문학, 그중 역사학에서 이 정도면 왜곡은커녕 과장조차 하지 않았다. 740년 전 일연, 300년 전 프랑스인 레지 신부, 100년 전 독립운동가 겸 국학역사학자(國學歷史學者)인 김교헌 등 모두가 우리 고조선이 유구하다는데, 우리 특정학계만 자꾸 아니라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조선과 요하문명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하여 우리역사의 시원인 고조선사를 정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의 직무 유기다. 언제쯤 식민사학 유풍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시원인 고조선사를 정립한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후대들에게 교육하는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는 정부를 볼 수 있을까.

 

 


출처;  [단독]나철 김교헌 서일 '대종교 3종사' 유해 봉환 움직임 본격화 - 아시아경제 (asiae.co.kr)

[단독]나철 김교헌 서일 '대종교 3종사' 유해 봉환 움직임 본격화

소종섭정치사회부문에디터

입력2022.10.14 17:49

 

수정2022.10.14 19:00

 

국가보훈처 관계자들 최근 대종교 고위 인사 만나 협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의 묘. 왼쪽부터 서일 종사, 나철 대종사, 김교헌 종사. 사진=대종교 제공



단독[아시아경제 소종섭 정치사회부문에디터] '대종교 3종사'의 유해 봉환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 3종사'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종사, 김교헌 종사, 서일 종사를 일컫는다. 지난 10월 초 국가보훈처 관계자들은 대종교 총본사를 방문해 박민자 대종교 총전교를 만나 이들의 유해 봉환 문제를 논의했다. 박민자 총전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얼마 전에 보훈처 관계자들이 찾아와 여러 얘기를 듣고 갔다. (유해 봉환에)노력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국가보훈부로 승격을 앞두고 있는 국가보훈처가 이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종교 3종사'는 모두 항일투쟁을 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사망했는데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 묘소가 있다. 그러나 봉분 일부가 훼손되고 풀이 무성한 등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종교는 홍암 나철 선생이 1909년 창시한 민족 종교다.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했고 1911년에는 아예 본사를 만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대종교는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16년 나철 선생이 사망한 뒤에는 김교헌이 교주로 취임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북로군정서 장병 중에는 대종교인이 많았다. 신채호 김좌진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도 대종교인이었다. 북로군정서 총재를 지낸 서일은 사후 종사로 추증되었다.


대종교 측에서는 서울 현충원에 이들을 모시고 서훈 등급을 향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3종사'는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으나 그동안에도 훈격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돼 왔다. 유해 봉환 작업이 본격화하면 이 문제도 궤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에 묻힌 독립유공자 봉환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 때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한 적이 있다.

 

 

 

출처;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 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K스피릿 (ikoreanspirit.com)

선도사학 ,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대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5)

 

사대・모화의 성리학이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범람하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인해 민족정기 수호마저 위태롭던 구한말, 선도사학은 대종교사학 형태로 역사에 재등장하였다.

1909년 서울에서 나철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중창한 대종교(大倧敎:初名 단군교(檀君敎))는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워진 종교단체로서, 수행에 기반한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종교 형태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대종교는 사상면에서 선도 경전인 《삼일신고(三一 誥)》를 중심으로 하였고, 수행면에서 선도의 지감・조식・금촉 수행론을 따랐다(성통). 실천면에서는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선도적 기준에 따라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무장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공완).

비록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신시배달국 역년을 축약했다는 한계는 있었으나, 신인(神人)이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고 풍백・우사・운사・뇌공을 거느리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도(神道)를 베풀고, 곡식・목숨・질병・형벌・선악의 5사(事)와 각종 인간사를 다스리며 교화(敎化)했던 신시시대(神市時代)가 단군조선에 앞서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한민족 역사를 단군조선 이전으로 소급해서 바라보는 선도사학 역사 인식이 대종교사학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1910년대의 민족사학은 대종교와의 밀접한 관련 위에서 전개되었고, 1910년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신채호, 박은식, 김교헌 역시 모두 대종교도였으므로, 민족사학을 ʻ대종교사학ʼ이라 명명하였다. 비록 민족사학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그 내용적 실체가 모호하고 실제 사상적 기반은 대종교였기 때문이다. 유교적 역사인식에 기반한 역사학을 ʻ유교사학ʼ이라 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종교 중광(重光)에 결정적 계기가 된 1909년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총체적 저항의 교본으로, 사대(事大)의 정신적 폐해를 공박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심어줌과 더불어 국권 회복을 통한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하게 일깨웠다.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던 단군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저항적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였던 독립군에게 대종교사학(선도사학)은 더없이 강력한 사상적 무기였고, 일제하 대종교 교당은 곧 민족주의 교육의 학교이면서 독립운동 전초기지였다.

대종교사학이 등장하면서 유교사학에서 삭제하였던 민족 고유 선도사상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채호는 우주의 광명(光明:환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5월・10월에 소도(蘇塗:수두)에서 하느님(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고유종교로서 선교(仙敎)가 있었음을 설파하였다. 선교는 피세(避世), 장생(長生)에 관심을 두는 중국 도교와는 그 역사와 성격을 달리하였는데, 조의(皂衣)나 화랑에서 알 수 있듯이 ʻ현세ʼ에서 국가・사회에 헌신하였다고 하여 개인적인 수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한국선도의 본모습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 주었다.

 
 

박은식은 단군이 강화도 마니산에 제단을 쌓아 제천보본(祭天報本)하던 예식이 부여・예・고구려・백제는 물론 요나라와 금나라에까지 전해졌음을 밝혔다. 단군시대에 신도(神道)로써 백성을 교화했던 그 종교를 신교(神敎) 또는 배천교(拜天敎)라 했는데,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하였다.

김교헌은 단군왕검이 마니산에 참성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는 매해 10월 국중대회 형식으로 부여(영고)・예와 맥(무천)・진한과 변한(계음(禊飮))・마한으로 전해졌다고 하였다. 신교의 한 갈래는 중국으로 퍼져서 장생의 도를 닦는 신선(神仙)문화가 되었음도 밝혔다. 또한 그는 대종교 교리 정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사서와 민간 자료에서 수집된 단군에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단조사고(檀祖事考)》(1911), 《신단실기(神檀實記)》(1914), 《신단민사(神檀民史)》(1914)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민족 고유 사상을 정리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김교헌의 공(功)은 ʻ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세운 공보다 더 큰 것ʼ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대종교사학은 한국고대사 정통 계승에서 단군조선의 정통은 부여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므로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 인식 체계를 뒤집었다. 신채호는 기자 자신이 아니라 기자 후손이 서기전 323년에야 불조선(번조선) 왕이 된 것으로 보아 기자조선을 삭제하였다. 이는 ʻ단군조선▶부여▶열국ʼ으로 정통이 이어진다는 선도사학 인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성균관 박사 출신 유학였지만 중화주의 유교사학의 틀을 벗어버렸기에 이러한 인식 전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유교의 틀에서 벗어난 후 민족을 만났던 박은식의 생각은, 소중화 정신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던 무치생(無耻生)에게 금태조의 입을 빌려 “존화양이의 대의를 고집한다면, 만일 漢나라의 순체・양복, 唐나라의 소정방・이세적이 다시 쳐 들어와도 앞장서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그 군사를 환영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질타하는 부분에서 잘 읽을 수 있다.(「夢拜金太祖」) 박은식은 중토에서 동래한 중화인 기자는 귀화・동화되어 기자 후예들은 단군 후예가 되었다고 보았다. 기자는 연나라와 접하는 단군조선의 구석진 땅(요서 영평부 조선성)에 살았다고 하여 기자 중심의 유교적 역사인식체계를 부인하였다.

김교헌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귀화한 기자와 그 집단은 영평(永平)과 광녕(廣寧) 사이 비어있는 땅에 나뉘어 살았다고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기자조선을 부정하였다.

이상룡도 기자를 중심으로 삼은 정통 계승 체계를 부인하고, 단군조선 혈통은 ʻ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ʼ로 이어지면서 3천 년간 부절(不絶)했다고 하였다. 「배구전(裵矩傳)」을 인용하여 해주(海州)는 옛 고려(고구려) 땅이자 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는 해성(海城)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에 대해 신채호는 단군조선 문화수준은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중원지역의 물난리를 해결하는 치수법(通水之理)을 전수해 줄 정도로 높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사군 낙랑군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편차를 보여 주었다. 역사 연구 초기에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대동강・청천강 유역은 기씨・위씨・유씨(한무제 유철) 등 지나족(支那族)의 수라장”으로 “평안도에는 지나족이 바야흐로 강성하였다”고 하여 낙랑군 ʻ재(在)평양설ʼ을 인정하였다. 1914년 봉천성 회인현에서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과 인연을 맺으면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한 이후에야 기자 후손이 다스리던 번조선을 전복한 위만의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관점을 교정하였다.(《조선상고사》)

박은식은 기자 후손인 조선후가 지금의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여, ʻ기준왕ㆍ위만ㆍ한사군 낙랑군ʼ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의 통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김교헌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을 인용하여 한(漢)낙랑군은 요양(遼陽)에 있었다는 낙랑군 ʻ재(在)요동설ʼ을 인정하였다.

이상룡은 수사(隋史)에는 ʻ좌우 20군(軍)이 현토・낙랑 등의 길(道)에서 나와 압록강 서쪽에서 모였다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ʼ고 하여 한사군이 설치된 곳은 요동지방으로 보았다.

신채호나 박은식도 한사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유교사학 역사인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911년, 고성이씨 가문 이상룡은 이미 기자조선, 한사군의 일을 한반도가 아닌 요동지방에 국한한 일로 보고 있었다. 중국사서도 참고하였겠으나 가전(家傳) 선도사서인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읽은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고등왕(高登王) 천도는 단군기원 1060년 갑자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단군세기》에만 나오는 ʻ고등왕ʼ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유교사관과 유교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저류화되었던 선도사학은 1910년대 대종교사학 형태로 재등장하였으나 시대적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사상 면에서는 수행(성통)과 사회적 실천(공완)을 본령으로 하는 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수용하여 선도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원형을 회복하는 ʻ과정ʼ에서 등장한 것이 대종교였기에 하느님・삼신을 선도 본연의 생명(기)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삼성(환인・환웅・단군)이라는 인격신으로 보았던 점에서 종교적 요소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수행에 기반한 선도수행문화로 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민속・무속문화로 종교화되어 있었기에 재등장 시에 종교의 방식을 뛰어 넘지는 못한 것이었다.

역사 인식 면에서는 선도사학을 수용하여 한민족 역사의 시작을 신시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면에서 선도사학의 온전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고고학 발전을 기다려야만 하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였다.

낙랑군 위치를 바라보는 데에서는 남인 실학자들의 관점인 재평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평양에서는 벗어났으나 요동에 머물러 요서까지 시각을 넓히지는 못하였다. 선도사서 《삼성기》, 《북부여기》에 한사군 낙랑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선도사학 연구를 우선하기보다는 풍찬노숙하는 독립투쟁에 매진해야만 했던 시대였다. 이 역시 1980년대 이후 역사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인해 독립투쟁은 일차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ʻ저항적 민족주의ʼ에 집중되었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과정으로 바라 본 연원일 것이다. 박은식이 금태조(金太祖)・동명왕(東明王)・대조영(大祚榮)・천개소문(泉蓋蘇文) 등 만주를 누볐던 고대 영웅들의 전기를 잇달아 발표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종교에 기반하여 단군 자손으로서의 민족정체성 정립이 우선시되었기에, 선도사상의 본령인 조화・평화・공생의 ʻ홍익주의ʼ에까지 인식이 미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독립투쟁은 인간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지향점이 같은 사회적 실천이었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대종교인들은 ʻ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ʼ 홍익주의라는 선도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사회적인 실천(공완)을 하는 삶을 영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k-spirit@naver.com

 

 

 

출처;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4. 만주 무장투쟁을 후원하다… 무원 김교헌 (kyeonggi.com)

[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4. 만주 무장투쟁을 후원하다… 무원 김교헌

승인 2019-10-24 19:50
절망의 망국 국민… ‘단군 역사관’ 민족혼 깨우다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된 북로군정서 대원들,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

“…궐기하라! 독립군! 독립군은 일제히 천지를 바르게 한다. 한 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랴.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는 같이 부활할 것이다.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냐, 힘을 기울여 나라를 회복하면 삼천리 옥토는 자가(自家) 소유이다. 일가의 희생을 어찌 아깝다고만 하겠느냐. 아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

1919년 2월 초 중국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이 담대한 선언은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과 이동녕이 주도해 조소앙이 지은 것으로 2·8독립선언문과 3·1독립선언문에 영향을 주었다. 놀랍게도 서명자 39인 중 27인이 대종교인이다.

 
 

■ 역사의 격랑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발견하다

무원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868년 수원군 구포리(현 화성시 비봉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으나 숙종의 국구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직계라는 배경을 가지고 정승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부친 김병희도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을 지낸 고위관료였다. 4형제의 장남인 그는 18세가 되던 1885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892년에 성균관 대사성에 오를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격동기에 관리로 살던 당대 지식인들의 인식이 바뀐 것은 여럿이지만 가장 큰 충격을 던진 것은 아마도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일 것이다. 놀랍게도 ‘독립신문’은 군수나 관찰사를 ‘백성의 종’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인민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관리 김교헌도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해 10월29일, 김교헌은 1만 명의 청중이 지켜보는데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에서 관(官)을 대표한 의정부 참정 박정양과 민(民)을 대표한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들었다. 바야흐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평생 동지가 되는 유근(1961~1921)을 만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외교권이 상실되었으나 여전히 관직에 몸을 담고 있던 그는 외교문제가 첨예하게 격돌하는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1906년 10월, 동래부사 김교헌은 일본 통감부의 비호를 받던 일본인들의 침탈행위를 법에 따라 징계했다가 면직되는 수모를 겪었다. 망해가는 나라의 관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면직되어 귀경한 김교헌은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때 사귄 이동녕(1869~1940)은 평생 그의 가장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규장각 제학의 신분으로 김교헌은 ‘문헌비고’와 ‘국조보감’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는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큰 뜻을 폈던 실존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무원 김교헌

■ 대종교에 입교하여 단군을 되살리다

1910년 8월29일, 국망을 당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약해서만이 아니었다. 김교헌은 최남선이 주도하던 조선광문회에 참여하여 조선의 명저를 시대에 맞게 출판하였다. 함께한 동지들은 박은식, 장지연, 유근 등이다. 이때 그가 소장하던 장서는 고전 편찬사업에 참고서로 활용되었다. 1911년에는 박영효를 총재로 내세운 문예구락부에도 현채, 류근, 정인보 등과 참여하였다.

국권을 되찾을 방안을 모색하던 김교헌은 운명적으로 홍암 나철(1863~1916)과 만나게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네 차례나 도일하여 일본 관리들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담판을 벌였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들었던 열혈지사였던 나철은 1910년 1월15일 오기호, 유근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종교를 세웠다. 대(大)자의 뜻이 크다는 ‘한’이며 종(倧)은 단군을 가리키는 ‘검’이다. 대종교에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육운동아 앞장섰던 이동녕, 이회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같은 역사학자들과 주시경, 김두봉, 이극로 같은 한글학자들도 입교했다. 일제의 판단대로 대종교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열혈 지사들의 ‘소굴’이 되었다.

나철은 김교헌을 깊이 신뢰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고위 관직을 지냈지만 해박한 역사지식과 진솔하고 겸손한 그의 품성을 높이 샀던 것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이내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그것은 전설과 신화로 전해지는 단군의 실체를 역사문헌에서 온전히 되살려내는 과업이었다. 김교헌은 동지 유근, 박은식과 함께 수많은 사서에서 단군 관련 기록을 찾아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11년에 펴낸 ‘단조사고’는 단군에 대한 자취의 처음과 끝, 문화적 흔적을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은 민족주의 사관의 밑거름이 되었고, 해외의 독립군들에게 무장투쟁의 이념을 제공하였다. 김교헌은 다시 연구에 몰두하여 1914년에 ‘신단민사’와 ‘신단실기’를 완성하였다. ‘신단민사’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광대한 영토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책이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를 침략한 원수의 나라라고 배웠던 요, 금, 원, 청나라 역시 단군민족의 후손의 나라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김교헌은 단군을 만나고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김교헌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서일은 러시아까지 가서 체코군으로부터 기관총과 박격포∙소총 1천200정을 구입했다.

■ 무장투쟁을 위해 교단을 만주로 옮기고 망명하다

나철은 1911년에는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에 속속 입교하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12월부터 포교활동을 전면금지하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몰리자 1916년 8월, 제자 여섯과 함께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간 나철은 9일이 지난 15일,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름이 지난 9월1일, 김교헌은 나철의 유명에 따라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올랐다.

1917년 3월, 김교헌은 서울 집과 땅을 팔아 마련한 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했다. 총본사를 만주에 세운 그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종교 전파에 전력을 쏟았다. ‘신단민사’를 비롯한 역사책도 보급하였다. 그가 저술한 ‘신단민사’는 동포들이 성경처럼 여기며 읽고 또 읽었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학생을 비롯한 총명한 청년들은 책의 내용을 전부 외울 정도였다.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신규식, 이동녕, 조성환 같은 이들도 대종교를 받아들였다. 김교헌은 이동녕과 함께 만주 전역에 46개에 달하는 시교당을 건립하였다. 시교당은 만주에 흩어져 살고 있던 100만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9년 12월 김교헌은 대종교 교인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총재에 교단의 지도자인 서일, 사령관에 김좌진을 임명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불렀던 군가에는 결전의 의지가 충만하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는 일본군.

이듬 해 9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일본군 정규군 1천3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다. 독립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한국인 대토벌 작전을 벌여 대종교인을 포함한 1만여 동포들을 학살했다. 김교헌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동만주 화룡현에 있던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921년 8월 하순, 동지 서일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밀산의 독립군 여럿이 희생되자 27일 산에 올라가 정좌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을 이은 서일의 자결은 김교헌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열린 열강의 국제회의에 참관원을 파견하여 독립승인을 제의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기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8명을 외교대표원으로 선발 파견하였다. 이때 김교헌은 서재필(미국) 등과 함께 외교대표원으로 영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 승인은 의제에도 상정되지 않았다.

불꽃처럼 후반생을 치열하게 살던 김교헌의 심신도 지쳐갔다. 동포들과 동지들이 일제의 총칼에 무참히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으며 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1923년 12월25일, 길림성 영고탑에서 고단한 그의 육신은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단군을 중심에 둔 역사관을 정립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만주 무장투쟁의 숨은 공로자였던 김교헌의 위대한 삶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찬란한 빛이다. 또 하나,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10만의 대종교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출처;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민족주체 역사관 정립···민족을 사랑한 김교헌 - 시사저널e - 온라인 저널리즘의 미래 (sisajournal-e.com)

[임정100년과 독립운동가] 민족주체 역사관 정립···민족을 사랑한 김교헌
  •  이준영 기자(lovehope@sisajournal-e.com)
  •  승인 2019.10.12 08:50

‘신단실기’, ‘신단민사’ 저술 통해 민족사 정통성 체계화···항일 무장투쟁 통해 청산리 대첩 승리도 지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교헌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교헌 선생은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저술을 통해 민족주체 역사관을 정립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화했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으로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일제에 나라는 빼앗겼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와 민족사, 민족 고유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선생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조선광문회 등에도 참여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기도 했다.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지도했다.

김교헌 선생은 1867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부친 김창희(金昌熙)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원(茂園)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후 이름을 외자 헌(獻)으로 바꾸었다.

선생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선생의 7대조 김주신(金柱臣)은 숙종의 장인이었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자택은 영조 때 왕자궁으로 쓰였던 340칸 대저택을 하사 받았다. 김교헌은 훗날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산을 처분했다.

선생은 18세인 1885년 정시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그 후 권지부정학(權知副正學)·예조참의(禮曹參議)·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을 지냈다.

◇ 독립운동에 뛰어들어···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조선광문회 이끌다

김교헌 선생은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중계몽운동을 했다.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됐다. 이 후 선생은 대표위원으로 선정돼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03년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 편집위원이 됐다. 이 때 선생은 다양한 책을 접하고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이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선생은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했다. 선생이 항일의식을 갖게 된 때가 이 즈음으로 여겨진다. 선생은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의 모함으로 해직됐다.

선생은 해직된 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을 시작했다.

◇ 대종교 입교···저술 통해 민족주체 사관 정립

단군교는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敎名)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집중했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로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투쟁에 적극 뛰어들었다.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도 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신규식(申圭植)·김두봉(金枓奉)·박찬익(朴贊翊)·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이범석(李範奭)·홍범도(洪範圖)·이상설(李相卨)·안희제(安熙濟) 등 대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김교헌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다. 선생은 대종교에서 1914년 남도본사 전리(南道本司典理),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南道本司都講師) 및 전강(典講) 등 중책을 맡으면서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썼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으로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일제에 나라는 빼앗겼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가 있고 민족사가 있으며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종교서였다.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서였다.

김교헌 선생은 신단민사의 시대 구분에서의 목차 중 근고(近古)에서 요금(遼金)도 포함시켰다. 만주를 지난날의 역사에서 우리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선생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체계화했다.

보훈처는 “이 두 저서는 우리의 건국 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규명했다. 이는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을 없애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며 “김교헌 선생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의 민족사학(民族史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김교헌 선생의 서적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선생은 1916년 9월 1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에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제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발포(發布)하고 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선생은 나철이 순교한 다음해인 1917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망명 후 선생은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을 주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추진했다. 교단 하부조직인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고 민족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 대한독립선언서 선포하다···민주공화제·한일합방 무효 선언

1919년 2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 등 39인은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다.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가 언급돼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 총본사인 것으로 미뤄 대종교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이세영(李世永)·한흥(韓興)·최병학(崔炳學)·이승만(李承晩)·김약연(金躍淵)·이대위(李大爲)·황상규(黃尙奎)·안창호(安昌浩)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종교 중심 인사들이었다. 선생은 대한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며 중심 역할을 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라고 밝혔다.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외세의 지배를 절대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세계 각국에 대해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강조했다.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안도현 덕수동 자신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도와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운동 대책을 논의했다.

◇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이끌다···청산리대첩 승리 지도

1919년 10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졌다. 김교헌 선생은 1920년 10월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지도했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한 후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했다. 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대적인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줄이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서일이 순국했다.

김교헌 선생은 1922년 청산리대첩 이후 흩어졌던 대종교도들을 모아 본부를 밀산에서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 대한군정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당시에 희생 당한 대종교도들만 수만 명에 달했다. 김교헌 선생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을 통한 구국투쟁에 노력했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해 민족 의식을 북돋았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약화됐다. 선생은 서일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18일 영안현 남관(南關)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尹世復)에게 도사교(교주)의 지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4일 ‘무원 김교헌선생(茂園金敎獻先生)’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선생은 무언(無言)한 애국자였섯다. 그가 말이 없으나 조선과 조선인을 어떻게 깊이 사랑하였던 것은 그의 일생 생활이 증명한다. 선생은 가위(可謂) 문한가(文翰家)의 예(裔)로 한학에 자못 조예가 깊었음은 지인이 모두 경앙(敬仰)하여 하는 바이어니와 그에게는 한학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그의 사랑하는 조선민족의 역사와 사상과 문학을 탐구하고 표창한 만이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조선의 역사에 관한 것이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수집하였고, 조선인의 저작이라 하면 편언척구(片言隻句)라도 등한히 아니하여 그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과 정신을 찾으려하였다. 그가 빈한하여 의식을 구하기에 분망한 동안에도 조선광문회의 조선고서 간행에 수년간 편찬과 교정의 격무(激務)를 사향치 아니함도 실로 이 '무언(無言)의 민족애(民族愛)'에서 나온 것이다.

대세가 변(變)하고 민심이 날로 부박(浮薄)하여져서 조종(祖宗)의 정신을 잊으려함을 볼 때에 그의 통심(痛心)함이 얼마나 하였스랴. 그는 조선을 가장 잘 연구한 학자요,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애국자이기 때문에 '조선정신'의 미점(美點)도 가장 잘 포착(捕捉)하고 애착(愛着)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조선정신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귀의찬앙(歸依讚仰)의 종교적 열정으로 화(化)한 것이다. 전교도의 숭앙(崇仰)을 받던 선생의 장서(長逝)에 대하여 대종교의 애도하여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애국자요, 다시 구하기 어려운 국학자를 잃은 것에 대하여는 전민족적 손실로 애도의 뜻을 표할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애도할 만한 '참된 조선 사람'이었다.”

 

 

출처; '8월의 독립운동가'에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선생 | 연합뉴스 (yna.co.kr)

'8월의 독립운동가'에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선생

송고시간2018-07-31 08:27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국가보훈처는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고, 1916년 나철에 이어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했다.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해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19년 2월 대종교 주요 인사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 인사 중심으로 조직된 북로군정서에 참여했고, 이듬해 10월에는 홍범도·김좌진 장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하던 선생은 1923년 만주에 있던 대종교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hojun@yna.co.kr

 

 

출처; 김교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김교헌(金敎獻, 개명(改名)은 김헌(金獻), 1868년 ~ 1923년)은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이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백유(伯猷), 호(號)는 무원(茂園)이다.

생애[편집]

김교헌은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부모를 따라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1885년에는 문과에 급제,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만민공동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9년 이후로 대종교에 가입하였고,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 1910년에는 가선대부를 지냈으며, 1916년 나철에 이어 대종교 교주가 되었다.

1918년 12월에는 대종교인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1920년의 청산리 전투에 기여하였다. 앞서 1919년 2월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졌고, 1923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구국운동[편집]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책으로 1909년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동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는데 1914년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대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간도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대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북간도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1]

사후[편집]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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