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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8) 대야발(大野勃) 단기고사(檀奇古史)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8) 대야발(大野勃) 단기고사(檀奇古史)

대야발 2025. 3. 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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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탈고한 것으로 전해지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서. 연대기.

원문은 발해문이었다고 하며 약 300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 하나,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도 오늘에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으며, 다른 상고사서와 비교하여볼 때 그 기본틀이 다르지 않아, 면밀한 분석과 재평가가 요망되고 있는 사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의 중간서(重刊序)와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가 부록되어 있다.

 

특히, 신채호는 ≪단기고사≫를 단기(檀奇) 2000년사의 실사(實史)라 찬양하였다. 또, 출판인 김해암(金海菴) · 이화사(李華史)의 출간경로(出刊經路)는 이 책을 한말에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롯하여, 마침내 광복 후기에 출판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1)

 

 

 

 

대야발(大野勃, ?~?)은 고구려 사람이자 발해의 왕족으로, 걸걸중상과 시씨의 아들이며 고왕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이다.

 

발해 건국에 공을 세웠다는 것 외에 자세한 생애와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시호 역시 미상이다. 협계 태씨영순 태씨밀양 대씨 세계상 2세이다. 그의 증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이 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작위와 시호, 역임 관직 모두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 고왕 대조영의 아우이나 친아우인지, 이복 동생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선왕 대인수가 그의 4세손이라 하며, 일설에는 그의 현손이라는 설이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그는 《환단고기》의 참조가 되는 서적 중 하나인 《단기고사》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전되었다.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인 점을 미뤄보면 그가 단기고사를 썼을 가능성은 적은 편이다.(2)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우 반안군왕(般安郡王) 대야발이 8세기경에 편찬했다고 주장되는 역사서이다.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과 1990년에 복원된 한문초략본(백산본)이 확인되고 있다. 그 내용이 각 시대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로 평가한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옛 역사’라는 의미로, ‘전단군조선(前檀君朝鮮)’과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으로 나뉜 47대 단군의 재위 기간과 각 시대의 주요 기록, 약 2천여 년에 걸친 역사와, 전단군조선보다 늦게 시작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42대 1천여 년의 일을 시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출간 경로 및 유래

〈저자의 말〉과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단기고사》는 72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및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로 원판과 간행본이 소실되었으며, 1949년 간행본을 다시 한문본으로 복원했고,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국한문본으로 복원하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이 복원본이다. 1990년에 국한문 번역본이 실제 내용과 다름을 지적하여 기억을 되살려 복원하였다는 한문초략본이 공개되었다.

 

내용

1959년 국한문본의 구성

1959년에 출간된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출간 및 책 내용과 관련된 자료
    • 보충 자료 - 역대총계표, 각종 기사, 역대약기, 전단제. 후단제. 기자조선 지도.
    • 단기고사중간사(김재형), 단기고사중간서(정해박), 본사출간경로(김재형, 정해박, 이종국) 등 출간 정보.
    • 보충 자료 - 국조단군칙어, 원본국가, 천부경
    • 단기고사재편서(발해국 대야발)
    • 단기고사중간서(이경직), 단기고사중간서(신채호)
  • 본문
    • 제1편 전단군조선
    • 제2편 후단군조선
    • 제3편 기자조선

 

국한문본의 내용

국한문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문초략본은 47대 1168년간으로 기록되어 《규원사화》와 비슷하다.)

  1.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B.C.2512)
  2.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1. 3년, 도량형 통일 (B.C.2416)
    2. 58년, 일식.
  3.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1. 2년,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選)
  4.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1. 7년 배 만드는 곳을 살수 상류에 설치.
  5.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1. 13년, 혼천기(渾天機)를 제조. 태양 등 항성, 혹성, 중성의 원리와 9개 행성, 지동설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역서 제작
  6.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7.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8. 우서한(于西翰)단군 : 재위 8년
    1.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대궐에 들어왔는데, 날개 너비가 석 자였다.
  9.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1. 원년 두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10. 노을(魯乙)단군 : 재위 58년
    1. 16년, 장백산의 누운 돌이 일어나고, 발해에 용귀(龍龜)가 나타나고, 흑수(黑水) 강가에 금괴가 노출되니 수량이 열한섬이나 되었다.
  11. 도해(道奚)단군 : 재위 58년
    1. 48년,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 양수기, 자행윤선차, 경기구, 자발전차, 천문경, 소금천리상응기, 진천뢰, 어풍승천기, 흡기잠수선, 측우기, 측한계, 측서계, 량우계, 측풍계, 사진계 등 제조
  12.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1.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창해역사 여홍성은 비석을 지나며 시를 읊었다.
  13. 흘달(屹達)단군 : 재위 61년
    1. 16년, 지방자치제 실시.
    2. 20년, 법정학교(法政學校) 설립
    3. 태양의 원리 및 빛이 7개로 나뉘어 있고 흡수하면 검은 색이, 반사하면 흰색이 된다는 것을 검증.
    4.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14.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1.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어 호구조사. 총계 1억 8000만 명.
  15. 벌음(伐音)단군 : 재위 51년
  16.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1. 28년 만국의 제후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회의.
  17.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1. 20년, 일식.
  18.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19. 종년(縱年)단군 : 재위 55년
  20.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1. 40년 공을홀이 천하의 지도(세계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21.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22.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23. 아홀(阿忽)단군 : 재위 75년
  24.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1. 10년, 정치원론 저술
  25. 솔나(率那)단군 : 재위 89년
    1. 39년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김(후 단군조선), 서여가 기자조선 건국 (B.C.1291)
  26.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27.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28.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1. 11년 태풍이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니, 천하의 육지에 고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29.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1. 8년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다.
    2. 9년 가을에 남해(南海)의 조수가 석자(三尺)나 물러났다.
  30. 내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31.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32.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1. 13년, 3월 일식.
  33.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34.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1. 10년, 두 해(兩日)가 함께 떠오르듯 왕무(黃霧)가 사방을 덮었다.
  35.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1. 6년, 황충의 피해와 홍수.
    2. 8년, 일식.
  36.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1.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B.C.855)
    2. 30년, 성리학, 심리학 저술
    3.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4. 50년, 의학화학 저술
  37.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38.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39.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1. 21년 일식.
  40.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41.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1. 4년, 종교론 저술
  42.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1. 5년, 지리학, 광물학 저술
  43. 물리(勿理)단군 : 재위 25년
    1. 8년, 논리학원본설 저술
  44. 구물(丘勿)단군 : 재위 40년
    1. 3년, 일식.
    2. 5년, 동물 및 식물학 저술
    3. 16년, 백과서 저술
  45.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1. 28년, 의학대방 저술
    2. 40년, 자본론 저술
  46.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47.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1. 22년, 건축학 저술
    2. 25년, 종수학(種樹學) 저술
    3. 기자조선 멸망, 위만조선 건국 (B.C.194)
  • 고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512년 ~ 기원전 416년에 해당되며, 47대 2096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44년 7개월이다. 기록상 전단조선의 치세 기간은 1214년간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계산하면 1222년간이다.
  • 기자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1291년 ~ 기원전 194년에 해당되며, 42대 1097년간 지속되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26년이다.
  • 국한문본 《단기고사》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그 연대는 서로 다르나 왕의 명칭 및 재위 기간은 거의 일치하는 50여 건의 유사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 국한문본 《단기고사》〈기자조선〉의 기록은 《환단고기》의 〈번한세가〉의 내용과 왕의 명칭과 업적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진위 논란

단기고사에는 근대 용어의 등장이나 당시 시대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록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모순으로 역사적인 자료로 인해 그 어떤 학계에서도 채택되지 않는다.

 

천문 기록의 연구

국한문본 《단기고사》에 기록된 10여 건의 천문 관련 기록의 실현 여부를 연구한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문의 내용과 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장 - 오성취합은 250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나는데, 기록과 실제 현상은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썰물 기록도 200년 사이에 가장 큰 썰물이 4년의 오차로 기록되었다. 이는 매우 적은 확률이며, 따라서 기록이 임의로 조작된 것일 확률도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 반론 - 논문은 국한문본 《단기고사》가 위작일 경우 막연하게 꾸며내었을 것을 가정하고 있지만, 동양 천문학의 지식이 있다면, 특히 천체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게 된 조선 세종시대 이후라면 옛 천문현상을 예측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연구의 기준으로 쓰인 연대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음을 가정한 것이며, 《환단고기》의 연대를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단기고사》의 연대로 같은 작업을 실행할 경우 200년 가까이 오차가 생기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오성취합은 20년에 한 번 일어나는 현상으로 1년의 오차를 생각한다면 1/6 정도의 아주 높은 확률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구

단군조선을 47대의 왕조로서 기록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지나치게 긴 재위 연대에는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채택하지 않고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근대 이후에 사용된 용어 등 많은 부분이 후대에 위조 가필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단기고사》 초략본(백산본)을 별도로 주목하였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의 기록과 나머지 기록들은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조선·후조선의 시대 구분만을 채택하였다.

 

내용상의 모순

  • 서지 사항(출간 연도와 원본)
    • 국한문본 《단기고사》는 한문 원본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1949년 간행본에 대한 기록도 알 수 없고, 1959년의 국한문 번역본 이전의 것도 없다. 1990년에 공개된 한문초략본은 국한문본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 일부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1907년에 공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김교헌이나 신채호의 글에 《단기고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국한문본에서 1907년에 씌여진 이경직의 서문에 1910년 이후부터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가 등장한다.
    •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씌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은 ‘인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 및 어휘(정체 불명의 기계)
  • 재위 연도의 모순
    • 단기고사에는 고조선이 2096년에 모두 47대로, 기자조선이 1097년에 42대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수는 비슷한데 다스린 연수가 무려 2배의 차이가 난다. 단기고사에 기록된 왕들의 평균 재위 연대는 45년 가까이 되어 상식과 어긋난다(후반부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된 기자조선은 41대 1052년으로 기록되어 평균 재위 연대가 26년으로 계산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계에서는 이 점을 들어 단기고사의 기록이 전부 날조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단기고사》에 따르면, 기자조선이 전단조선 19세 단군 종년(규원사화는 구모소 임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1097년간 계속되었다. 위만조선의 시작 연대를 일반적인 기원전 194년으로 가정하면, 전단조선의 시작 연대는 기원전 2512년이 된다. 일반적인 기원전 2333년과는 179년의 차이가 난다. 《환단고기》〈단군세기〉는 기원전 2333년이 고조선의 시작 연도로 기록되어 있다.
    • 박병섭의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환단고기》의 역사성 검토〉에서는 후단조선과 기자조선의 동일 내용에 대한 심각한 시대 불일치로 자체의 기간 정합성이 없음이 지적되었다.(3)
 

 

 

 

■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30)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입력 2022.08.30 13:51 수정 2022.08.30 15:55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지난 제13회 연재에서 기자(箕子) 동래(東來)의 허구성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에서 쟁점이 되는 한사군(漢四郡)과 이부(二府), 그리고 위만(衛滿)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후 출현한 『단기고사』와 『부도지』 최근에 출현한 『화랑세기』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8) 후기 고조선 멸망과 고구려 건국 사이의 여러 나라, 그리고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다.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심정적으로는 나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가 모두가 진본(珍本)이었으면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와 판단력은 이러한 나의 심정적인 소망을 거스른다. 이 책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고양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본질을 몽환적으로 왜곡하여 흔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책들로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1) 『단기고사』에 대하여

『단기고사(檀奇古史)』는 719년(무왕 1) 3월 3일 발해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탈고한 것으로 주장하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연대기이다.

 

원문은 발해문이었는데, 약 300년 뒤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며, 「저자의 말」과 「중간서(重刊序)」, 「출간경로」에 따르면, 『단기고사』는 718년 대야발이 흩어진 사료를 모아 발해어로 지었으며, 830년경에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구한말 학자인 유응두가 중국에서 발견하여 수십 권 등사하였고, 이관구 및 김두화, 이시영이 국한문으로 번역·교열하여 간행하였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고 하지만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과 유응두의 등사본도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의 중간서(重刊序)와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가 부록되어 있으나, 이것이 진짜 서문인지 조차도 의심된다. 특히, 신채호가 『단기고사』를 단기(檀奇) 2000년사의 실사(實史)라 찬양하였다던가. 또한 출판인 김해암(金海菴) 이화사(李華史)의 출간경로(出刊經路)는 이 책을 한말에 출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롯하여, 마침내 광복 후기에 출판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며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해방후에 만들어진 주장으로 보인다. 정작 신채호나 이경직은 『단기고사』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1월 11일 경북대학교 김주현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는 ‘한국문학언어학회 동계학술발표대회’에서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 문제'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해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단재 신채호로 알려졌지만, 중간서의 내용·형식·문체 등을 고려할 때 신채호와 광복회 활동을 같이한 화사 이관구(華史 李觀求. 1885~1952)가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김 교수는 “중간서 마지막 부분에 글 쓴 시점을 임자중춘(壬子仲春, 1912년 음력 2월)으로 밝히고, ‘단기고사를 이 당시 중국 안동현에서 보았다’라고 적고 있으나, 단재는 1911년 12월 중순부터 1912년 5월5일까지 신문발간 사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1907년에 이경직이 썼다는 서문에 1909년에 단군교로 창교(創敎)하여 1910년에 이름을 바꾸어 사용한 명칭인 ‘대종교(大倧敎)’가 등장하며, 또한 대야발의 서문은 천통 31년에 쓰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大祚榮)은 재위 기간이 20년이었으며, 뒤이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재위: 719년~737년)는 ‘인안(仁安)’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이것도 맞지 않는다. 이외에도 내용에는 미술관, 지구성, 원심력, 만국박람회 등의 근대에 등장한 용어를 사용하였고, 황당하게도 기구와 전화, 엑스레이와 잠수선, 비행기, 사진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필자는 이관구이던, 아니면 다른 누구이던, 『단기고사』는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김광의 『대동사강(大東史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해방 직후에 저술된 것으로 판단한다.(4)

 

 

 

 

아리랑연합회는 ‘아라리’를 같은 한자로 표기한 동시대 문헌 2건을 최초로 발굴했다. ‘아라리’를 한자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들이다. 의미없는 후렴구로 여겨졌던 ‘아라리’가 고대부터 ‘노래’, ‘소리’를 이르는 뜻을 가진 어휘임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간 학계에서 어원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아리랑’ 3음절이 아닌 ‘아라리’라는 용어에서부터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 왼쪽부터 아라리를 한자로 표기한 삼도탐요 일부. 붉은 색 원 안에 아라리 한자 표기가 선명하다. ‘음아어이오’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부분 일부. 아라리를 설명하는 한시가 실린 책 ‘해동죽지’ 표지.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주년

‘아라리’ 한자 표기 최초 발견
아리랑 유래·어원 연구 전환점
“후렴 아닌 곡명 정착 가능성
정선아리랑 정통성 확보 강화”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을 맞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아리랑 유래 연구의 실마리를 풀 문헌이 새로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40여년간 아리랑을 연구해 온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은 “아라리를 한자로 표기한 자료는 이들 문헌이 최초로 아리랑 역사에서 획기적 발굴”이라며 “19세기 말∼20세기 초 같은 시기에 활동한 두 지식인이 ‘아라리’를 같은 한자로 표기하고 있는만큼 이 시기 이전부터 뜻을 가진 어휘로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두 문헌은 대종교를 세운 하상역(1859-1916)이 1912년 펴낸 ‘삼도탐요(三道探要)’와 1921년 조선말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 최영년(1856-1935)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다.

먼저 ‘해동죽지’는 최영년이 역사적 사건과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세시풍속 등을 시로 표현한 책이다.

아라리. 이 책에 나오는 시의 제목이다. 번역하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이 노래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퍼져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소리가 슬픈 원망조이고, 뜻이 음란하고 가락은 낮고 슬프며 여운이 없다. 이 음악은 대개 말세의 음악으로 지금도 불리는데 ‘아라리타령’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아라리’를 구체적인 곡명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아라리’가 ‘아리랑’이라는 말이 조어되기 이전의 용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다른 문헌 ‘삼도탐요’는 대종교의 영가무도(詠歌舞跳)를 대중화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김일부에게 이어받은 정역사상과 영가무도(詠歌舞跳) 대중화에 힘쓴 하상역이 썼다.

 

책의 첫 표제부터 ‘아라리’로 삼아 영가무도의 ‘음악’과 ‘노래’를 설명하고 있다. 영가무도 음악에서는 우리나라 5음을 상징하는 ‘음아어이오’가 현대 아리랑의 ‘아라리’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다.



단군조선·기자조선의 연대기 ‘단기고사’에도 “노인은 영가(詠歌)하고 아이는 무도(舞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가무도’가 고대의 전통 심신수련법이라는 무용계 연구 등을 고려하면 당시 고대 음악의 후렴구인 ‘음아어이오’가 ‘아라리’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라리’가 유래 깊은 고어(古語)임을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 ‘벙어리’, ‘옹알이(옹+아리), ‘메아리’의 단어에서도 ‘아리’‘소리’, ‘노래’, ‘말’이라는 뜻을 가진 고어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에 대해서는 개인적 노래에서 17세기 집단 노동요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ㅇ’이 첨가되며 나온 용어라고 설명, “이 3음이 원래의 어원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문헌에 나온 ‘아라리’ 기록을 종합하면 ‘아라리’는 노래나 소리의 뜻을 가진 의미있는 어휘라는 점, 후렴 뿐 아니라 곡명으로 정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어르신들이 그냥 하는 말, 강원도 방언 정도로 치부했던 ‘아라리’라는 말이 실제로는 영가무도를 비롯한 고대 음악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며 “정선지역 분들이 아라리를 이어온만큼 정선이 명실상부 유서깊은 아리랑의 고향이라는 정통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리랑연구회는 오는 23일 서울에서 ‘아리랑의 역사, 그리고 어원’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고 이번 문헌 발굴의 의미를 심층 분석한다.(5)

 

강원도민일보, 김여진, “‘아라리’ 의미 없는 후렴구 아니다… ‘소리’의 고어”, 2022. 12. 5. 

 

 

 

 

 

단재 신채호 전집에 실려있는 '단기고사(檀奇古史)' 번역본의 중간서(重刊序.중간서문)는 단재가 쓴 것이 아니라 단기고사의 역자이기도 한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1885-1953)가 직접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주현 경북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단기고사 중간서의 저자 문제'에서 중간서의 내용과 문체, 형식 등을 분석해 이같이 주장했다.

 

 

단기고사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 썼다고 전해지는 단군조선ㆍ기자조선의 연대기로 1949년 화사와 해암 김두화가 낸 번역본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단기고사는 단군신화를 담은 '환단고기' 등과 함께 진위 논란에 휩싸여 왔는데 서문 마지막에 '단재 신채호 식(識)'이라고 적혀 있는 중간서는 단기고사가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핵심 근거 중 하나가 돼왔다.

 

단재는 중간서에서 책을 접한 동기를 소개하면서 "책 모양은 비록 오래돼 헐었으나 진본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그 유래를 물었다"고 적고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중간서에서 단재는 임자년(1912년) 중국 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화사의 부탁으로 중간서를 쓰게 됐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러 기록들을 나타난 단재의 행적을 볼 때 이 시기에 단재가 안동현에 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형식과 문체면에서도 ▲한문본인 단기고사에 국한문체로 서문을 쓴 점 ▲직접 번역 능력이 있는 단재가 '후인(後人)이 번역해 속간'하길 바란다는 구절을 쓴 점 ▲'주인공'이라는 표현과 일본어식 표현 등 여타 단재의 글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사용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와 함께 단재가 1914-1915년 쓴 '대동제국사선언'에서 단군사가 전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과 1916년 쓴 '꿈하늘'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구려사 등을 언급하면서도 단기고사를 언급하지 않은 점은 단재가 1912년 단기고사를 접했다는 점을 의심케 한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진(眞)애국자론 등 중간사의 내용은 화사의 '의용실기'의 내용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화사는 사료 선택에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였던 단재를 끌어들임으로써 단기고사의 신뢰성을 높이려했던 것"이라며 "그러나 정작 단재의 문체나 사상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고 또 단재가 자신의 글에서 단군사가 전하지 않는다고 직접 기록해놓음으로써 결국 위작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전에도 중간서가 단재의 글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은 제기됐으나 정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못했다"며 "단재와 화사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화사가 단재의 이름으로 중간사를 쓴 것은 단재 사후의 일로, 단재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6)

 

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檀奇古史' 중간서 저자는 단재 아닌 이관구, 김주현 경북대 교수 논문서 주장, 2008. 1. 13. 

 

 

 

https://youtu.be/SjA5Mkpmb94

 

 

 

 

 

 

<자료출처>

 

(1) 단기고사(檀奇古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2) 대야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 단기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4) 『단기고사』부터 『화랑세기』까지 <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 통일뉴스 (tongilnews.com)2022.08.30 

 

 

(5) “‘아라리’ 의미 없는 후렴구 아니다… ‘소리’의 고어” (daum.net) 2022. 12. 5.

 

 

(6) '檀奇古史' 중간서 저자는 단재 아닌 이관구 (daum.net)2008. 1. 13.

 

 

 

<참고자료>

 

 

대야발(大野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非정통 역사서 환단고기-단기고사 재조명을" (daum.net)2014.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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