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35) 최태영(崔泰永) 한국 상고사 입문(1989년) 본문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증받은 뒤, 194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 겸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1947년 12월 16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겸 학장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8년까지는 청주대학 교수 겸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술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상사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술로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수표법》을 집필하였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77년에 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 1989년에는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이병도와 공저한 것이라 주장하였으나 정작 해당 책에는 이병도가 저술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90세 이상의 고령일 때도 활발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1)
■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1>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2.28. 17:10:00
사람이 1백세를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백세를 넘긴 나이에 연구와 저술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 그런 인물이 있다. 최태영(崔泰永) 선생이 그 분이다.
최태영 선생은 1900년 3월 28일(음력)생으로 올해 1백3세이다. 우리 나이론 1백4살이다. 일본 유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최태영 선생은 24세때인 1924년 보성전문(현 고려대) 교수가 됐고 해방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해방 후에는 부산대, 서울대 출범에 참여했으며 75세까지 강단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있을 때에는 법학을, 대학을 떠난 다음에는 우리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나이 77세때 쓴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고, 1백2세때인 지난 해 10월에는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는 신저를 펴냈다.
그러나 최태영 선생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같은 학문적 성과에 앞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지식인으로서의 올곧은 삶이다.
선생은 반일 '투사'는 아니었으나 친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도, 일본어 상용도 거부했다. 조선학생들에게 정신대나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연설도 한 적이 없다.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미국에 빌붙지 않았다. 이승만 이후 역대 정권에도 부닐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법학자이면서도 헌법 제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 탄핵' 조항 삽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물러난 후 상고사 연구에 몰두한 것은 후손에게 바른 우리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일한 생존자이다. 삼일운동 당시 그는 고향인 황해도 장련(長連)에서 장날 3천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연설했다. 이 때문에 해주감옥으로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맹국'이자 '외세'이기도 한 미국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삼일절을 앞두고 일제와 미 군정, 독재정권을 거치며 1세기 동안 지식인의 지조를 지켜온 최태영 선생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지난 1999년부터 최태영 선생이 두 권의 한국상고사 관련 책을 저술하는 일을 도와온 언론인 김유경씨(전 경향신문 문화부장)가 쓴 것으로 4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법학과 역사의 지성**
법학자이며 한국사 연구자인 최태영(崔泰永; 학술원 회원) 선생은 아마 우리 근현대사의 전모를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하는 분일 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 이전의 상황을 증언할 수 있고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일한 생존자이며. 지금까지의 사회변천을 최고 지식인의 입장에서 겪어왔다. 한국 근대 법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고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몰두해 1백세를 넘긴 나이에 '인간 단군을 찾아서'(2000년)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년) 등 2권의 저서를 펴내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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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00년 황해도 은률군 장련(長連)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최계준의 결단으로 개신교를 통한 신교육을 받아들인 지주집안에서 성장해 김구 선생에게서 배웠고 구월산 종산학교와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서 영미법철학을 전공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 태영이 머리가 뛰어나고 책을 많이 보는 것을 알고는 평생 그가 돈걱정 없이 책을 얼마든지 사보고 신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재산을 만들어 놓았었다. 이 재산은 공산당이 나오기 전까지 유효했다.
보성전문 법과의 정교수가 되어 상법 민법 행정법 등을 가르치고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법대 학장, 청주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최초의 대학학술지인 보전논집(普專論集)의 편집인이었으며 보전교수와 겸직한 경신학교의 교장, 영어교사, 설립자로 중등교육을 육성했다. 언더우드 부자(父子), 모펫, 게일, 쿤스 등 선교사들과의 교분으로 한국 개신교의 초기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어만 써야한다는 식민지 어문정책에 공식적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일본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친일 행적이 없는 한국학자의 면모를 지켰다. 건국 대한민국의 법전편찬위원, 고시전형위원이 되어 헌법을 제외한 대한민국 법과 고시령을 제정했다. 그가 관여한 상법 중의 유가증권법은 세계통일법을 취하고 민법 중의 불법행위는 영국법을 참작하도록 했다. 김병로, 이인 등과 함께 그가 헌법 제정에 나서지 않은 것은 대통령 탄핵조항을 없앤 이승만 주도의 헌법작성을 거부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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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관련 저작으로는 1930년대에 우리말로 발표한 '바빌로니아 함무라비법' '유가증권 세계통일법해설' 논문을 필두로 1952년 우리나라의 상법관련 최초 저작인 '현행 어음 수표법'을 냈다. 1954년 학술원 창립이래 법학분과 회원으로 199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법철학의 역사적 배경', '동서양 법사상의 유사점과 차이점, '중국의 法家 - 商子의 법치주의' 등을 냈다. 1977년에는 법학관련 명저로 꼽히는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 나왔다. 지금까지 가치가 변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원고지 1만 4천장 분량의 이 책은 서양법철학의 사전 같은 것인데 '카드 한 장 없이 여러 십년 머리 속에서 정리해 쓴 것'이라고 했다. 이 책으로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다.
***"구월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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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역사연구에 뛰어든 것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이 사라진 한국 사학계가 광복 이후에도 일제가 단군의 고조선 건국사를 신화라며 부인하던 그대로 교육하는 것을 보고 '아무도 없다면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 사학의 거두 이병도 서울대 교수가 종래의 사관을 바꿔 단군이 고조선의 실제 건국자인 조상임을 확신하는 글을 발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의 여러 판본 기록중 석유환국(昔有桓國;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으로 왜곡되었음을 동경대와 조선연구회 발행본 등 여러 삼국유사 책을 찾아내 밝혀냈다. 1988년에는 일본의 후지 미야시다(富士宮下)문서를 한국학자로서 유일하게 답방, 확인하였고 고대 일본 법령집 延喜式을 통해 일본 대궐에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간 조상신을 제사지내는 기록을 찾아냈다.
정인보와 함께 한국사의 출발을 실존 인물 단군의 고조선 개국에서 보는 그는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기 보다는 수천년 동안 교육돼 온 단군의 고조선 개국 역사가 일제이후 신화로 부인된 데 반박하고 그러한 주장의 허구와 배경을 학문적인 입장에서 논했다.
'고조선 개국자 단군 이야기에 환인은 없다'는 것을 삼국유사의 여러 소장본을 통해 밝혀낸 데 이어 고조선이 요동을 중심으로 한 광역국가였음을 동이족을 기반으로 한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 또한 중국 한족(漢族)의 역사서 춘추를 쓴 공자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를 비판했다. 여러 학자의 단군 연구를 밝히고 정인보와 자신의 '한사군론'을 소개하고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단군관을 소개한다. 그 자신은 단군의 홍익인간이념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라는 현대적 법개념으로 해설했다. 1백3세에 이르도록 학자로만 지낸 지식인이 역사왜곡에 대항해 밝히는 학문적 진실의 총체들이다.
선생은 "구월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라고 자평했다.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난 구월산 밑의 장련은 동네에 솟대백이가 있고 구월산 속엔 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좀 떨어진 송관이란 데는 단군사당과 아사달 나루가 있었다. 사당안에는 구리로 만든 말이 몇 마리나 있었다. 일제의 교육령으로 다니던 광진학교가 폐쇄되었으나 공립학교엔 가지 않고 종산학교에 가기 전까지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웠다. 여기서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해에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후일 그가 단군을 연구하게 됐을 때 중요한 기억으로 살아나게 된다. 장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부터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조선'에 나온 농촌경제생활 묘사와 비교해서까지 이야기 들었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언급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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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장미, 철쭉이 만발하구 버들이 푸르구 냇물이 맑구 유명한 은구어두 거기서 잡히구. 그때 세월에 중요한 산물인 솜과 밀, 쌀, 생선, 과일이 많이 나서 장날이면 힘센 황소가 끄는 우마차가 이들을 실어내. 여름이면 원두막이 70곳, 큰 사과농장이 30곳이나 있던 곳, 여름방학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가는 여래냇물에선 생선들이 와서 톡톡 부딪치며 헤엄쳤는데. 산속의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연못엔 이름 모르는 물고기들이 멋있게 헤엄치는 것 보기 유쾌해."
서울과 동경에 유학하던 시절에도 방학때 귀향하면 큰 트렁크 두 개에 책을 가득 담아 지우고 봉황산 넘어 할머니, 고모댁이 있는 피아골(稷田里의 우리말) 산막에 가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할아버지가 이곳의 나무에서 나는 소출을 그의 공부자금으로 쳐둔 곳이기도 했다. 바다에 면해 있어서 고운 세모래가 깔린 해변에 해당화가 붉게 피고 물이 맑았다. 산막에서는 맞은 편 진남포 항구의 전등불빛이 보이고 공장 굴뚝의 연기가 오르는 것도 보였다. 책을 읽다가 싫증나면 바닷가의 해당화 핀 모래밭을 산책하였다. 도회지에서 찾아오는 수영객들이 있었다. 이곳에 살던 고모 카타리나는 가톨릭을 믿었다.
이 때 산에 살면서 가끔 장련 마을로 내려오곤 하던 시라소니(이빨없는 늙은 호랑이를 말함)가 한 마리 있었다. 늙어서 사람을 해치지는 못하고 기껏 닭을 훔치거나 사람들 궁둥이나 할퀴는 시라소니는 반갑지는 않지만 별로 무서운 존재도 아니란 걸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시라소니는 짝도 없이 봉황산을 넘어오는 길목 한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산너머 할머니 산막에 가던 어느 저녁 시라소니가 눈을 화등잔처럼 번쩍이고 나무 사이에 서서 지나가는 그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태영소년만이 아니라 카타리나 고모도 다른 사람들도 장련에 오갈 때 시라소니를 보았을 것이다.
얼마전 한 인사가 이 지방의 가톨릭사를 말하면서 '산넘어 살던 최카타리나는 카톨릭 신앙이 대단한 성녀라서 그녀가 장련에 올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길 안내를 하였고 그녀가 길들여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게 바보 시라소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그리고 최박사에게서 아무 것도 보탬없이 사실대로만 이야기 들었던 것이 매우 즐거웠다.
선생은 "하하 말이 몇 단계 건너가 그렇게 맹랑해졌군. 길들여가지고 다닌다는 게 뭐야. 미쳤어. 산 지나갈 때 어디쯤 사는 것 사람들 다 알았는데."라고 했다. 그 뒤에 시라소니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일본식 공립학교를 피해 11세때 구월산 종산학교로 가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는 한일합방이 되고 한참 된 때였는데도 애국가를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불렀는데 아무도 이를 밀고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구월산 안팎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보았다. 구월산의 집들은 호랑이가 못 들어오도록 모두 ㅁ자형으로 마당을 가운데 끼고 있었다.
구월산에는 패엽사 아래 단군의 조상을 받드는 삼성사가 있었고 종달에는 문화(文化_ 유(柳)씨의 오래된 묘들이 있었다. 나중에 세종실록에서 문화 유씨 출신의 한성부사 유관과 유사눌이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에 삼성사(三聖祠)를 언급하고 계속 단군을 제사지내 받들 것을 말한 것을 알게 되면서 유관과 유사눌이 그때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사는 원래 패엽사보다 높은데 있었다.
구월산에는 그밖에도 여러 절이 있었는데 흥률사 이야기에는 팔구손이네가 등장한다. 어떤 김가가 구월산에 들어와 아들 여덟을 낳고 그 아들이 각각 아들 아홉씩을 낳아 팔구 칠십이명이 되어 배우자까지 백수십명이 세력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이 흥률사 땅을 빼앗으려고 스님들을 못살게 굴고 싸우다 피리부는 형국이던 지세의 피리구멍 자리에 인조산을 쌓아 절을 망하게 만들었다. 중들은 팔구손네 묘자리 산발에다 암자를 지어 팔구손네를 망하게 했다. 절이 폐사되어 부처가 땅에 나둥그러진 절터가 남아있었다. 망한 팔구손네도 뿔뿔이 흩어졌다.(2)
■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2> 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1. 08:36:00
***상경**
13세때 서울에 와 영어시험을 치르고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언더우드가 세운 이 학교는 시설이 서울의 여느 학교보다 좋아서 학생 1인당 현미경이 한 대씩 있었고 계단식 교실에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장지영 선생에게서 국사를 배웠다. 장 선생은 '기자조선은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끌어다 접목한 허구요, 고려사는 조선왕조에서 왜곡한 거짓이 많다'고 누누이 말했다. 또 유득공의 발해고를 통해 '신라가 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것이 아니라 남조(南朝)인 통일신라와 북조(北朝)인 발해국이 병립하여 있었는데 고려가 그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학과 물리에 뛰어나 김형배선생(후일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사랑을 받았다. 체육광이었고 소년신사의 명예인 체육부장을 했다. 정답고 경우에 밝지만 비적극적인 서울아이들은 그와 씨름을 하게 되면 지레 겁을 먹고 '곱게 메쳐라'했다. '오냐' 하고 메쳤다.
음악에도 뛰어나 피리연주를 듣고 악보로 옮기고 성악과 바이올린을 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서 그만두었다. 오래 전부터 음악을 듣지도 않지만 그의 인생에 관련된 중요한 일의 설명에는 반드시 음악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나던 해 군악대가 설치됐고 광진학교 폐쇄때 노래가사를 담장 안에 감춘 음악설명이 그러하다. 그가 결혼하여 새색시가 된 김겸량과 함께 집으로 오던 날 동구밖에서 이들을 맞아들이며 국악패가 연주한 곡목은 후일 그가 학술원에서 저술상을 받을 때 들은 경축음악과 같은 것이었음을 회상하였다. 향가연구에서 그가 기억하는 것들이나 '한국의 고대 가무사' 논문을 만들어 놓은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도일**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에 유학하기로 했다. 미국유학을 하고 온 사람들은 취직도 어렵고 별 활동을 못했다. 부친은 태영에게 영미법학을 배워오라고 명했다. 1918년 메이지(明治)대 법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이때 한문학의 사사가와(笹川臨風) 박사를 알게 되었다. 쇼와(昭和)황태자의 스승으로 일본 대궐 안에서 얼마든지 책을 읽었던 사사가와는 그에게 일본 고대사서인 上記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했던 사람이다.
<사진 1>
철학과 영어, 법학을 좋은 스승들로부터 배웠다. 철학은 근대일본의 제2세대 학자인 다카시에게 배웠는데 '철학은 과학의 과학이다'라고 쓴 답안을 보면서 최태영에게 '넌 더 쓸 것 없다'고 했다. 상법 중에 뉴욕의 유가증권법을 배웠다. 후일 보성전문에 와서 학생들에게 시의 적절하게 가르치고 세계통일법이 나왔을 때 이를 해설했다.
동경제대 미노베 법학교수는 그때 '일본의 천황은 신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다'라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같은 주장을 편 메이지대학의 법학자 소에지마 교수는 가르친 데가 사립대학이었던 만큼 안 쫓겨나고 무사했다.
국제법논문으로 국제연맹에 대해 '이들은 싸움이나 하고 별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썼는데 '국제연맹이면 모든 일이 다된다'고 하늘같이 믿던 국제법의 이즈미는 성을 내고 80점을 주었다. 선생은 '다카시라면 내 논문을 알아보고 좋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기히라, 하세가와처럼 한국사를 폄하하고 반한감정을 고취하던 선생들도 있었다. 이들과는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심리학과 독일어를 가르치던 하야미즈(速水)는 1924년 서울에 경성제대가 설립되자 총장으로, 국제법의 제국주의자 이즈미는 법학부장이 되어 왔다.
조선에 그때까지 대학이 없었다. 당시 동경에는 1천명의 조선학생이 유학해 있었는데 불과 10명 남짓이 경쟁이 치열한 입학시험을 거쳐 예과 본과 과정에서 공부했다. 대부분은 입학이 어려울 것 없던 전문부 학생들이었다. 동경제대 교토제대 등에는 도지사의 추천을 얻어 특권층의 자제들이 거저 들어가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애정행각**
장련에서는 10여명의 학생이 이 때 동경유학을 했다. 그중 손두환이 있었다. 대단히 잘생기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장련에서 언풍(言風)놀이할때 '오리'를 주제어로 내면 '십리 절반 제 이름' 하고 나왔다. 언제나 그의 글이 제일 좋았다. 일제의 고등문관고시에 패스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을 코 아래로 보고 찬송가는 전부 처녀 총각 연애하는 것으로 바꿔 부르든지 '며칠후 둘러메칠후...' 하는 식이고 사방으로 외도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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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소설 쓰는 이광수의 빈번한 연애행각이 화제였다. 최태영은 그것을 잡스럽게 여겼다. 그가 또 한 여성을 짝사랑하고 호소하는 'P에게' 라는 글을 썼는데 끝에 가서 'P는 남자다'라고 덧붙였다. 최태영과 손두환은 '여성인 줄 뻔히 아는걸 끝에 가서 남자라고 뒤집으니 세상을 놀리는 더러운 남색이야기냐. 연애에 그처럼 모랄이 없느냐'고 공박하는 글을 썼다. P는 이광수같은 사람을 쳐다도 보지 않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이우창(고시원장, 대구대학장을 지냄)이가 보고 재밌다 하고 잡지하는 최남선에게 보냈는데 묵살돼 버렸다.
손두환은 독일어를 하다가 공산주의가 내렸다. 독립운동 한다고 상해 임정에 갔다가 월북하여 건설부 차관을 지냈다. 나중에 김구에게 손두환 일을 물으면 '아이고 그놈 때문에 얼마나 골이 아펐는지 말도 마라'고 했다. 잘나고 뛰어났던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애석했다. '어리석다'고 선생은 평했다.
***윤심덕과 최태영**
1918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할 때 그는 전 유학생중 유일한 미혼이었다. 여성은 이보배, 김필례, 나혜석 자매, 허영숙, 윤심덕, 황신덕, 박순천 등 20여명이 있었다. 도쿄음악학교에 다니던 윤심덕은 아주 활달한 여성이었다.
어느날 백남훈 선생이 윤심덕이 그를 찾는다는 전갈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은 한번 알게 된 남자라도 사람 많은데서 너, 아무개야 그렇게 부르니 조심해라'고 했다. 그는 백남훈 선생 댁에 온 윤심덕을 보게 되었다. 아랫방에 앉아 웃방에 앉은 그녀를 보고 '날 찾으셨소?' 했다. 그랬더니 첫마디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멀찍이 떨어져 점잔빼고 앉은 그를 아주 같잖아 했다. 심덕은 자기 기숙사 사감한테 가서 그날 유학생 체육회 준비로 기숙사에 못 들어간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런 일은 물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윤심덕은 그다지 미성은 아니었지만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남겼고 김우진과 연극판을 벌이곤 했다. 두사람이 현해탄에서 사라졌다 할때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점잖고 바이올린을 잘 하던 김우진과 어딘가에 도피해서 사는 줄 알았다. 이혼풍조가 들어와 조강지처를 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절 양서점 마루젠과 고서점 간다에서 많은 책들을 사다 읽었다. 양서점에서는 신간이 들어오면 그에게 가져다 줄 정도였다. 고서점에는 어떤 책이 어느 선반에 있는지도 알았다.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도 공부'라고 했는데 금전적으로나 공부를 위해서나 유학시절 그렇게 많은 책을 사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니시다(西田)의 '善의 연구'등 근대일본 1세대 학자들의 저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말해주는 골동적 가치를 지닌다.
***삼일만세운동**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때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삼일만세운동이 나자 그는 장련에서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부친 최상륜이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내려왔다. 미리 장련, 안악에 까지 알려두고 여러 동지가 모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장날 3천명의 군중에게 나눠주며 연설했다. 이 때문에 해주감옥으로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장련 박명식(朴命植) 순사의 큰 도움을 받았다.
동경유학생들은 이 해에 동맹휴학을 하여 천여명의 유학생 대부분이 1년 유급으로 저항했다. 다음해 1920년 동경에서는 조선 YMCA가 주동하여 삼일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강행했다. 붙잡혀갔다 나온 최태영에게 대학의 일본인 동급생들이 물었다.
"너도 졸업하고 조선독립운동 할 테냐?"
"물론이다. 그러니까 될수록 사진같은 것도 안 찍어 내 모습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무력으로 항일한 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맹세를 후일 친일하지 않은 것으로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1924년 영법학과를 최우등 졸업했다. 영어로 시험쳐 입학하고 영어로 진행된 경제학과목 등에 우등을 하면 주어지는 영어교원자격을 가진 유일한 졸업생이기도 했다. 총장은 그를 경성법전 교수로 추천했다. YMCA가 이때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조선 유학생 졸업 환송연을 열었다. 그는 여기서 '조선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후일 역사연구를 한 것도 '그때 말한 것처럼 내가 아니면 안될 일이니 했어'라고 말했다.
***보성전문 교수로**
귀국한 그는 관립인 경성법전을 마다하고 사립인 보성전문 교수로 갔다. 김병로(대법원장)가 권한 일이었다. 동시에 경신학교 부교장, 교장, 2차 설립자, 영어교사를 겸직했다. 이때부터 해방이후까지 지식인으로 친일과 공산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살아남는 험난한 시기를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일제 강점기간중의 배일(排日)행적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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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25세에 경신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한 첫 연설은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일본인 선생에게 기울어 있던 친일적 분위기는 며칠만에 바뀌었다. 최 교장은 신중하고 유하여 그런 일을 표나지 않게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간 중 교육책임자로 있으면서 한 번도 일본 왕에게 절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경신학교는 사이토 총독이 와서 영어 연설을 하던 교육기관이었기에 역사가들은 그가 어떻게 신사참배를 피했는지 놀라움을 표한다.
"그럴 수도 있었다. 일본인을 대신 보내고 내가 반대 입장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고…"
일본경찰의 앞잡이 격이던 조선인 형사들이 그를 감싸 준 것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들과도 진정을 갖고 통했다. 고향 장련이나 동대문서는 내가 참배 않는 것을 알고도 문제삼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못 잊어 하는 친구 하나가 바로 장련 경찰서의 박명식(朴命植) 순사부장이다. 방학 때 귀향하면 붙어 다니며 모든 얘기를 나누던 그를 통해 일본 경찰이 정보 수집한 각국 독립운동 비밀보고서도 보았다. 그걸 보다 잉크를 엎질러 큰일났다 했는데 박부장이 "무슨 걱정이냐. 내가 쏟았다고 하면 되지" 하고 덮어주었다.
***신사참배**
1937년 선교사 모펫 등이 평양에서 신사참배 반대안을 결의할 때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최태영이었다. 기독교적 이유를 내세워 조선인으로서 일본 신사참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앞서 다섯명의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의논하는 비밀회의에 참석하여 선교사들에게 신사의 본질을 설명했다. 일인들이 알았다면 목숨이 날아갈 사안이었다. 그때 같이 옵서버로 참여했던 김모 박사는 회의 내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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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공인 법지식을 활용한 반일 행적은 특히 흥미롭다. 경신학교가 세금납부의 예외가 된다는 항목을 알고는 일본 대장성에다 총유(總有)등록을 함으로써 일제에 세금 내는 일을 아니한 것이다. 조선의 법원에서는 이 법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 많은 학교들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고 관립이 되었지만 그가 교장으로 버틴 경신학교는 일본인들이 뺏어가지 못했다. 학교이름을 '사꾸라' 같은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위협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수가 옆에서 '그러다 죽을라. 말을 듣는게 어떻냐'고 했을 정도였다.
***학병**
조선학생들에게 정신대나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연설도 한 적이 없다. 이 점은 특히 인상에 남는다. 윤치호 이광수 장덕수 김활란 등 많은 지식인들이 반민족적인 이런 연설을 행할 때, 그는 보전 정교수의 자리에서 스스로 강사직으로 내려 앉아 연설자로 지목되는 데서(전임강사 이상의 교수들에게 연설이 요청되었다) 소리없이 비켜서는 무서운 결단력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총독부에 직접 교섭하여 실탄을 가져다가 일제 치하의 학생들에게 실탄 총기훈련을 시키고 청나라 말을 가르쳤다. 이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갈 때 "나갈 수밖에 없다 해도 총 잘 쏘고 청어(淸語)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고 하면 학생들은"알겠습니다" 하고 떠났다. 총을 잘 쏘아 만주군과의 접전 지대에 배치된 조선 학생은 그날로 만주 중국군 부대로 탈출해 살아났다. 그의 휘하 학생들은 거의 모두 살아서 귀환했다. 이런 스승을 잊지 못하던 보전의 제자들이 많았다.
보전논집은 1934년 김성수와의 밀약으로 어떻게 해서든 조선말로 씌어진 논문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총독부 검열이 삼엄해졌다. 이때의 검열관은 대궐말을 쓰며 광무황제 고종의 통역을 하던 일인이었는데 '황공하옵나이다. 이것은 빼겠나이다.' '이 논문은 고치겠나이다' 하면서 제 마음대로 뽑아내 삭제해 버렸다. 나이도 많은 이 '하옵나이다'(필자 주: 최태영선생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는데 순종비 윤황후의 조카 윤건로씨의 증언에 따르면 田中德太郞일 것으로 짐작된다.)와 매일같이 양보 못하는 부분들을 갖고 싸웠다. 그러나 3집을 내고 난 1937년 이후에는 더 낼 수가 없었다.
***일본어 상용**
1945년에는 총독부 회의에서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언제 어디서나 쓰라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반대했다. 그 회의에 같이 참석한 세 명의 조선인 교장이 '조선말을 하면 엄벌을 하자, 고급하고 아름다운 일본말을 쓰게 하자, 꿈도 일본어로 꾸게 하자'며 일어 상용(常用)에 찬성한 것을 뒤집는 그의 반대 연설은 강점기간 중의 역사에 남을 명연설이다.
"4천년이 넘게 써온 조선말이다. 조부모는 일본어를 못한다. 우리 부모세대도 일본어를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어를 상용하라는 것인가. 저희 나라 말을 저희 집에서 하는걸 가지고 엄벌을 하자는 말은, 말이 그렇지 실제로 벌을 주지 못한다. 또 아름답고 고급한 일본말을 쓰게 하자는 게 무엇이냐. 보통사람은 보통말만 하려 해도 죽을 지경인데 무슨 고급 상등 일본말을 쓰게 한단 말이냐. 꿈도 일본어로 꾸자는 게 무슨 소리냐. 생시에도 안 되는걸 어떻게 꿈에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도 일본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듣겠다니까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우선 생각하고 이를 생각해 가며 힘들여 일본어로 옮기려니 분주하기 짝이 없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이 회의를 파하고 나가면서 우린 당장 조선말로 이야기 나눌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하면 반감만 생겨날 것이다."
가정에서까지 일본말을 쓰게 하려는 일본어 상용정책을 공개석상에서, 그것도 총독부 고관들 앞에서 반대한다는 것은 목을 내어 논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간 중 일본어 상용을 공식 반대한 것은 최태영이 유일한 기록으로 꼽힌다.
식은땀 나는 회의가 끝나고 나올 때 뜻밖에 후루데라(古寺) 경성시장과 시오자와(鹽澤) 학무국장(교육부장관)이 따라나와 절을 하며 개인적인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죽을 일이 뻔했다. 사람 보는 데서는 깍듯이 그를 받들던 일인 학무과장 기무라는 그와 단둘이 되자 "너 이 자식(오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장덕수의 형 장덕준도 그렇게 죽었다.
도청에서 나와 경신학교를 발칵 뒤집어 일본어 상용을 어긴 자료를 수색해 갔다. 그러나 최교장을 살리려고 든 총독부의 조선인 장학사가 뒤이어 수색에 나와 그의 교육자적 입장을 살린 자료를 찾아내 일본인의 음모로부터 그를 구해냈다. 며칠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조선은 광복을 맞아 그는 살아났다.(3)
■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3> 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3. 09:25:00
***해방과 미 군정**
일인들이 쫓겨가 이젠 일을 한국인 뜻대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둔한 미 군정은 한국인을 전혀 신임하지도 알지도 못했다. 패전 일인들한테서 학교를 접수하는 자리에 한국인 아닌 미국이 내세운 일인들이 와서 접수하는 것을 보고 그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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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 군정때 미국의 본심을 금방 알았어. 미국이 나선 것은 한국을 믿고 위해서라기보다 저희들한테 꼼짝못하도록 우릴 묶어 두려는 야심이 만만한거야. 그건 일찍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쯔라 밀약때부터 알 수 있는 것이요. 우리는 미국이 반대해서 핵도 못 갖게 됐지. 그러니 북에 쩔쩔매게 됐잖아. 미국은 판단을 잘못했어요. 우릴 보다 신임했어야 해요. 일본은 그새 우리 덕에 저렇게 부흥했는데"
***이승만과 헌법제정**
그는 건국 후 정권에도 부닐지 않았다. 학자로서의 길만을 고집했고,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헌법을 내가 작성했다면 이승만과 싸웠을 것이고 그럼 죽었을 것‘ 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끝까지 휘하에 끌어들이고 싶어했으나 그는 끝까지 자유인으로 남아 대법관도 장관, 주일대사도 마다했다. 이런 그를 무서워하고 싫어해 어떻게든 제거하려던 친일파들의 중상이 없지 않았다.
책만 보겠다는 게 목표였지만 대학교육 경험이 가장 많은 그에게 여러 군데의 대학을 건설하는 일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기다렸다. 좌우익 혼란기 그에게 닥쳤던 위기는 테러와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부산대 인문대학장으로 벡커 총장과 함께 부산대를 건설했다.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가르치던 벡커 총장이 '최태영이 같이 가주어야겠다' 하고 유억겸 문교장관이 권유하여 된 일이었다. 여기서 6개월째 동맹휴학 중이던 좌파 학생들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벌였다. 학생들은 밤마다 공산당 선배한테 가 ‘학습’하고 와서 그와의 토론에 나서곤 했다. 긴 설전 끝에 학생들이 ‘졌다’고 하면 강의실로 들어가 공부하게 하여 동맹휴학을 풀었다.
스탈린 혁명 초기부터의 공산주의를 알고 유물론의 본질적 허점까지 파악했던 학자로서 가능했던 일이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토론이었다. 공산당양성소가 들어 있던 국유건물을 무력으로 되찾아 인문과학대학 건물로 마련했다.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쫓겨난 뒤 강의할 사람이 없던 수산대 학생들에게 강의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그때 건물을 뺏기고 동맹휴학도 깨진 공산당들이 최학장을 죽이려 들었으나 미리 알고 피해 테러를 면했다. 그가 묵고 있던 부산호텔 옆방에서 공산당들이 하는 모의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로 서울집으로 왔지만 부산진 경찰서장이 이들에게 피살됐다. 부산대 건설은 목숨을 걸었던 일이었다.
***"서울대보다는 성균관대가 국립이 됐어야"**
이어서 서울대를 건설하는 중차대한 일에 참여했다. 이춘호 총장이 최태영과 서광설 변호사에게 서울대 평의원(이사 같은 것)을 맡기고 건설부문 총책을 위임했다. 이에 청량리에 있던 법학연구소와 사간동 의과대 부속건물을 모두 서울대 건물로 하여 청량리 건물을 팔아서 새 건물을 세울 것과 사간동 건물을 서울대 제2병원으로 할 것을 예정해 놓았다. 그러나 당시 문교장관이 청량리 건물은 안기부로, 사간동 건물은 육군에 내주어 현재의 기무사, 육군병원이 들어섬으로써 계획이 모두 틀어져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당시 음악대학은 남산 일본 신사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법대는 학장실도 강의실도 없었다. 결국 공과대학을 태능으로 내보내고 음대, 미대, 법대를 동숭동 캠퍼스에 모아 놓았다.
그러나 서울대는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하던 경성제대를 거부하는 오기도 없이, 어떤 못난이들은 이를 자랑으로까지 받들며 국립대학으로 경성제대를 이어받았다. 사실은 전통이 긴 성균관이 국립으로 됐어야 옳고, 서울대는 건국의 기풍에 맞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진작했어야 됐을 것이라고 그는 비판했다.
서울법대 교수겸 학장 재직 중에도 좌파의 테러가 심각했으나 장택상 경찰청장이 서울대에 파견한 형사들의 도움으로 살아 남았다. 그를 죽이려 한 3인조 테러단은 돈암동에서 애매한 사람을 죽이며 테러연습을 하고 있다가 붙잡혔다.
공산당으로부터의 위협은 끈질긴 것이었다. 6.25 때 납북 대상자가 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잡혀갔을 때 생각을 바꿔 '석방자 줄에 가서 재주껏 나가시오'라는 말로 그를 놓아 주었던 빨갱이 청년은 정권이 바뀌어 좌파들을 처형할 때 이번에는 그가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다.
그는 이때 역사학자 정인보가 납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정인보만 살았어도 역사가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것이다. 그와 정인보는 서로 잘 알아 김성수의 계동집 사랑에서 온갖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보통 다방에서 많이 만났지만 부자들은 집의 사랑에서 교분을 나눴다. 이때 사랑채의 손님접대는 화장실 대신 요강 50개를 내오는 백상규 보전교수 같은 집도 있었다.
***김구**
임정 주석이던 김구의 여러 면모도 최태영의 회고로 드러난다. 군정때 하지 중장의 고문이던 언더우드(원한경)가 김구를 만나고 싶어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최태영이 그의 집에서 이들을 만나게 했는데 김구는 미국 측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충돌하니 사람들은 두 정치인과 가까운 허정과 최태영에게 ‘당신네 들이 각각 말을 잘해서 두 사람이 잘되게 하라’하여 허정·최태영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우정을 맺었다. 그러나 두 정치인은 끝내 화합이 안됐다.
김구에게 임정요인이라고 같이 귀국한 인물 중 ‘유능치 못한 인물들을 많은 돈을 위자료로 줄테니 떼어내라’고 당시 미두(米豆)재벌이던 강익하가 제안했지만 김구는 ‘같이 호떡먹고 고생하던 동지라 안되겠다’고 했다. 최태영은 이를 김구의 또다른 실패라고 보았다.
그래도 장련의 어린 시절부터 김구선생과 가까웠던 최태영에게서 듣는 김구의 소박한 일화가 많다. 안명근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나온 김구는 잔치를 벌였는데 기생들도 와서 뚱땅거리고 놀았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너 감옥 있는 동안 네 처가 뒷바라지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기생을 불러 노느냐’하고 종아리를 때렸다. 김구는 그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김구선생은 떡보이기도 해서 그를 대접할 때는 떡을 해드렸다.
***단군, 환인, 환국**
역사에 대한 그의 역할은 해방후 본격화되었다. 건국 이후 고시령에 국사가 들어간 것은 그의 국사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가르쳐진 국사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크게 놀랐다.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부터 다시 읽으며 역사연구에 들어갔다. 해박한 한문과 일어를 통한 방대한 독서가 그의 연구를 다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부인 김겸량여사는 1975년 작고했다. "충격이었지만 나는 계속 학문에 정진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백살이 되었다"고 선생은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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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분이 역사 연구에 이것저것 깊이 들여다보고 학문적 직감이 길을 찾아 동하는 것을 주목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석유환국이 진본이고 석유환인은 날조된 것이다’ 는 말을 듣고 교보문고에 나와있는 10여종의 삼국유사를 보았다. 환국으로 분명하게 기재된 3,4종의 책 말고는 다 환인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의 책은 1판에 환국이라고 했다가 2판에 가서 다른 역자가 ‘불교용어가 틀려서 바로잡는다’는 머리말과 함께 환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떤 삼국유사는 한글번역은 환인인데 사진판으로 소개된 원본에는 환국이었다. 판본을 밝히지도 않았다. 서울대에는 석유환국이라고 적힌 진본 삼국유사가 소장돼 있는데도, 많은 학자들의 논문이 실린 단군책은 아무 의문도 제기함 없이 환인이라고 기정사실화하여 연구를 개진하고 있었다. 북한 학자들의 것도 교보문고에서 본 책에는 다 환인으로 표기돼 있었다.
환국이라고 표기된 책자는 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 발행한 서울대본 삼국유사와 최남선 본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교감연구, 그리고 동경대 발행본임을 밝히지도 않고 갖다 쓴 어떤 책 정도를 보았다. 학계의 삼국유사 연구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병도선생이 1956년에 국역한 삼국유사는 석유환인으로 되어있는데 1973년 그가 ‘최선을 다한 교감이다’ 라고 감수한 민족문화추진회 발행 삼국유사는 서울대 소장본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석유환국으로 되어있다. 이병도도 환인 아닌 환국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이병도가 환국을 인정하게 된 것은 거저 된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환인과 환국의 차이에 대한 이병도 선생의 설명이 없어 못내 궁금하다. 그리고 대세에 휩쓸림 없이 석유환국으로 기재된 판본 구하기에 열올리고 환국이 환인으로 변조된 것을 1979년 자신의 법학논문에서 설명한 최태영 선생의 학문적 자세를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시라소니 얘기보다 더 사실적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자로만 지내오면서 시대를 통찰하는 역사학자의 자질 같은 것을 생각게 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는 고조선 및 한일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선생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회에서 ‘환인이란 환국이 변조된 것’임을 폭로한 최남선을 상기시키며 ‘동경대 발행 삼국유사를 최남선이두 그때 볼 수 없었나봐.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라고 했다.(4)
■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4ㆍ끝>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김유경 언론인 | 기사입력 2003.03.04. 08:48:00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초 박창암 장군을(박창암 장군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연재 '김지하 회고록 146회 참조: 편집자) 따라 세뱃길에 동행하면서부터였다. 최태영 박사는 박 장군이 장도빈 선생과 더불어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때 노(老) 지식인의 맑은 기상과 서가의 오래된 책들, 그리고 두분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아 나는 '기사로 써야할 것 같다'는 직감으로 주섬주섬 기록했었다.
<사진 1> 최태영 선생은 근영
본격적인 협업이 시작된 것은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의 책을 본 선생이 편역자인 내게 '코벨의 책을 만들 수 있었으면 (코벨과 사관이 많이 같은) 나의 역사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생이 발표한 역사서를 재편집하고 새로운 연구를 덧붙이면서 이후 4년에 걸쳐 선생을 도와 두 책의 원고를 정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리자가 보아야 할 자료와 책 등을 집밖으로 최박사가 싸들고 나와 전했다.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이 노장학자는 눈도 깜짝 않고 "정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나 혼자서라두 해야지" 하고 조용히 오래된 자료들을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선생의 신당동 거처에서 강의와 여러 이야기들을 들은 대로 기록하고 분류하고 자료를 찾았다. 구월산이나 이병도 선생과의 일 등은 그의 역사 연구에 접하는 열쇠였다. 선생이 후지 미야시다(富士宮下) 문서를 보게 된 전후의 상황을 직접 들어 알지 못했던들 학술원 통신지에 간단히 기록된 답사기를 읽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작업이 정교해지며 칼럼형식의 글이 만들어졌다.
선생으로부터 보고 들은 일들은 역사연구에만 한정되진 않았다. 지난 1백년 동안의 사회사가 눈앞에 펼쳐지고 근대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 김구, 정인보, 최남선, 장지영, 김성수 등과 교분에 얽힌 일화를 들었다. 일제와 좌우익 혼란기, 해방 후의 학계에서 지식인으로 처신해온 면모가 주목되고 역사를 보는 안목 같은 것은 지성의 본질을 생각케 하였다.
심각한 내용만 전해들은 것도 아니었다. 우스운 일도 많고 유머가 있었다. 동경 유학시절 음악도 윤심덕과 나눈 이야기, 장련의 시라소니, 구월산 팔구손이, 대궐말을 쓰며 조선어 논문을 검열하던 일본인 통역, 친일을 어떻게 피하고 공산주의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등을 알게 되면서 그의 인생과 학문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장련의 눈 덮인 산 넘어 '동몽선습' 책을 들고 걷던 11세 소년의 모습이 그림같이 떠오른다. 이 책은 바로 단군 연구의 시발이 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역사관은 '단군이 요동에 고조선을 개국한 조상'이라는, 조선사람 수천년 간의 교육 내용이자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전 세대의 사관에서 출발했다.
"단군의 자손이란 우리가 혈연상 단군의 피를 받았다는게 아니고 단군이 개국한 나라 백성의 자손이란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단군 할아버지라니 우리가 어떻게 단군의 (피를 받은) 자손이냐고, 따라서 단군은 없다'고 하니 우습다. 단군이 있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일찍 각성했다는 긍지를 갖게 된다."고 선생은 말했다.
***친일, 친공, 친미, 종교, 금전이나 어떤 권력에도 휘거나 편중되지 않아**
두 권의 책을 만드는 동안 선생과의 협업이 귀중하게 생각된 것은 학자로서의 강한 신념에 힘이 느껴지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껏 선생의 일상은 "책을 읽으면 거기서 발전할 게 하나둘 나와요. 아주 좋아."라고 표현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순수한 학문의 길이다. 책을 읽으면서 늘 요점을 메모해 놓았고 그렇게 해서 그 많은 책의 어느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히 제시하였다.
<사진 2> <인간 단군을 찾아서> 프레시안
<사진 3>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프레시안
"오늘도 책 하나 읽다 보니 부여, 고구려 초기에도 단군으로 왕의 칭호를 삼았음을 알 수 있어. 최남선이 개아지(해의 아들의 뜻) 조선이라 한 것은 고조선 단군에서 부여 단군, 고구려 단군으로 이어져 갔다고 바꿔 설명하는게 좋겠소. 신라는 차차웅, 거서간, 마립간이라 했는데 다 뜻은 같아. 그런데 백제는 임금을 어라하(於羅瑕)라 불렀다는 거야. 이능화 책을 보면 그렇게 설명하는 것 알게 돼.
그런데 최동(崔棟; 전 세브란스병원장. 의학박사, 문학박사. 『조선상고민족사』라는 국·영문 저작을 남겼다)이 아주 재밌어. 그 사람이 책 이것저것 많이도 봤어. 그렇지만 환인을 설명하면서 엉뚱하게 기독교적 해석을 빗댔는데 어라하는 또 어떻게 쑤셔냈는지 재미있단 말야. 혼자 싫컨 웃었어. 그 의사양반도 나처럼 무당 굿하는 책 많이 본 것 같아. 어라하는 무당들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나 경기민요의 '어라 만슈(萬壽)'라는 대목과 통해요. 어라 만수는 임금 만세라는 뜻이 확실한 거거든.
라이샤워가 쓴 일본사의 한일 고대사부분은 헛소리이고, 신채호의 역사서는 역사는 볼 것이 많은데 전통사상이나 법이념엔 언급이 없어요."
젊어서는 책을 무지하게 빨리 읽었다. 지금은 돋보기에 확대경을 대고 눈을 까박까박 애써 가면서 하는 독서이다. 거의 전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도 책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만 103세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선생의 기억력은 선명하고 판단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확인할 내용이 생기면 몇 시간이 걸리든 찾아서 제시하고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쉽게 풀어 설명하는 총기가 살아있었기에 만년의 두 역사연구서 정리가 가능했다.
***"세계화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 역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컴퓨터를 직접 쓸 수 있었다면 그의 연구활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세 개의 인터넷 사이트에 그의 본의와는 다른 역사 이야기가 그의 이름을 내세워 나돌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는 만류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이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선생의 연구는 이제까지는 오직 책으로 발간된 것뿐임을 선생의 청으로 이에 명확히 밝혀 둔다.
선생은 젊은 시절 「화엄경」에 나오는 '부동지(不動地)'란 말을 좋아했다. 부처로 성불하기 전의 수행단계로 어떤 일을 자기 판단에 맞게 하면 큰 과오없이 옳은 방향으로 처리되는 경지를 말하는데, 그 경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보다 거기까지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가 사회사와 법학, 역사를 보는 눈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두려움이 없으며 친일, 친공, 친미, 종교, 금전이나 어떤 권력에도 휘거나 편중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영문학자 김주현 박사는 선생을 두고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의 학문은 '역사를 훑어 찾아낸, 순수한 코리아놀로지(한국학)의 정립을 위한 연구'라고 황윤주(黃胤周) 전 상명대 대학원장은 말했다. 선생을 이 시대 지성의 한 표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 같다'고도 표현했다.
<사진 4>
"내가 하는 역사는 국수주의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내 주장은 밝힐 건 밝히고 옛 역사는 그것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중국한테 매어 살았다거나 일본한테 쩔쩔맸다는 식의 밑지는 생각을 가지면 용기도 자신감도 없어져 앞으로도 잘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 요임금, 순임금이 우리 족속이고 우리는 일찍이 요동에서 활동하던 조상과 고조선이라는 근원을 가졌다. 중국과 맞서 겨뤄 이겼으며 우리 족속이 일본에 건너가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사대주의 때문에 망쳐 놓은 게 많아요. 세계화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 역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역사를 한다는 것은 사상의 유행을 따라 아는 지식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외다"고 선생은 말했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이후 2년여에 걸쳐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원고가 정리됐다. 선생은 "순하게 됐다"고 했다. 그동안 최박사의 책을 국내외 도서관 등에 보내주곤 하던 김영경(金榮經) UTI 사장 등 많은 분들이 고령인 선생의 안위를 염려하며 책 쓰는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했다. 최박사가 건강하게 이 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선생이 집필해 놓은 '조선시대 법철학 연구', '중국 법철학 연구', '고대 가무사', '장보고' 등의 원고가 출판되지 않은 채 파묻혀 있다. 선생의 인생에서 중요한 동반자였던 장서들은 역사 연구가 끝나면 서울대 법대 도서관에 일부 기증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최태영 선생은...**
최태영 선생은 현재 노인들을 위한 시설의 신당동 거처에서 24시간 간병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언제든 의료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방문객을 맞기에 편해 선생 스스로 아들 딸 곁을 떠나 수년전 옮겨온 곳이다. 이 건물 내에는 선생같은 분들이 많다.
지난 가을 책을 낼 때까지만 해도 운동실에 가서 왱왱거리는 벨트를 5분간 등에 걸고 있거나 움직이는 발판 위에 서 있다 오는 '기계체조'를 했다. 최근에는 방문 앞의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걸음마'가 외출의 전부이고 기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신은 맑다.
제자들이 들러서 선생을 붙들고 창 밖을 보며 걸음마산책을 같이 한다. 그럴때면 중요한 문답도 나오고 1백미터 밖에 안되는 복도에 '머나먼 길, 꽝(하고 넘어질라)!'하는 한탄도 나온다. 가장 최근에는 선생에게 와서 세배하겠다고 떼쓰고 역사이야기를 묻던 고등학교 1학년생 소년 친구가 생겼다. 오래 전의 법조계 이야기를 들으려는 젊은 법조인, 역사왜곡에 대해 묻는 관리 등도 왔다. 어렵사리 만족할 만한 대담이 이루어진다. 민관식 전 장관은 가족보다 자주 오는 손님이다.
방에는 자주 보는 책들만 수백책 갖다놓았다. 학문하는 분들이 서로 별말없이 저서와 편지를 주고 받는 일들이 보이곤 한다. 최근에는 일본서 미야시다문서를 같이 가본 분이 저작을 보내주어 읽었다. 아직도 새 책이 오면 그 자리에서 읽어내고 밤중에 깨어 책을 찾아 읽지만 잔 글자를 보는 일이 점점 힘들다고 호소한다.
사탕과 초콜릿을 잘 드셔서 방문객들이 온갖 초콜릿을 갖다 드리는데 밤중에 서랍에서 꺼내다가 주변에 잔뜩 흘려놓기 일쑤다. 매일 새벽 새 날의 시작으로 떼어낸 일력 종이를 오려 백지를 만든다.
선생은 보통사람이라면 못 참고 홧병 날 만한 사안에도 전혀 흥분하는 일이 없다. 절대로 성급한 결정을 내리거나 교묘한 술수에 속아넘어가는 법도 없고 우울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어느 한 면 어린애같은 선생을 보면 초인의 어떤 상이 느껴지기도 한다.(5)
<자료출처>
(1) 최태영 (법학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pressian.com) 김유경 언론인 2003.02.28.
(3) 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pressian.com) 김유경 언론인 2003.03.01.
(4) 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pressian.com) 김유경 언론인 200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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