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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나주 복암리고분군전시관에는 복암리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3호분이 실제와 같은 크기로 재현돼 있습니다. 한 변이 42m에 이르는 네모꼴의 고분 바깥에서 시작해 고분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독널무덤(옹관묘)부터 돌방무덤(석실묘)까지 3호분 내 41기의 무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영산강 물이 돌아 들어와 ‘회진’(回津)으로 불렸던 나주 복암리 고분군 일대는 고대부터 해상 교역로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나주 =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 ‘역사문화권 정비사업’ 현장 가보니…400년 백제묘장문화 양식 담겨3호분에만 석실묘 등 41기 발견금동관·금동신발 등 잇단 출토유산청, 121억 들여 유지·보수잠애산성·정촌고분 등 재단..
2022년 9월 28일 평양에 낙랑 박물관을 준공했다는 KBS [요즘 북한은] 낙랑 박물관 준공.."평양이 고조선 중심" 기사입니다. ■ [요즘 북한은] 낙랑 박물관 준공.."평양이 고조선 중심" [앵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설화를 담은 북한의 만화입니다.낙랑은 역사서 에도 나오는데요.그런데 북한은 이 낙랑국이 중국 한나라가 세운 게 아니라,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웠다고 주장합니다.최근 평양에 박물관까지 만들어 문을 열었는데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같은 무력 증강에 열을 올리는 북한이 한편으론 역사 문제에 공을 들이는데 그 이유와 의도가 있습니다., 첫 소식 입니다. https://tv.kakao.com/v/432574192 [리포트]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

함보가 신라의 선진문명을 가지고 여진 지역으로 가서 추대를 받아 수령에 취임했고, 그 후손이 여러 여진족을 통일하여 세운 게 금나라입니다. 당연히 신라인이 세운 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면 여진족 중에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보와 그 후손 아골타는 신라인이라는 것이 청나라 이전 중국문헌에 보이는 공통된 견해입니다.” 중원 대륙에서 발견되는 삼한시대 관련 유적 -낙랑군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많겠지만, 지난번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다루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주제를 ‘삼국시대’로 옮기겠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삼한(三韓: 마한ㆍ변한ㆍ진한)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 발해만에서 시작되는 중원 대륙이었다면..

“우리 국사교과서는 우리 민족이 광대한 중원 대륙에서 중국 한족(漢族)과 투쟁하며 전개해온 자랑스러운 실제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안에서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ㆍ조작된 엉터리 역사를 배우다 보니 우리 국민은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아무런 자긍심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자기들의 위대했던 역사를 축소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자기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엉터리 역사를 배우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심백강 원장은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20여 년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앞선 중국측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발해만에서 동북쪽 일대가 활동 영역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강역(疆域) 문제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서 우리 고대사는 그 뿌리인 출발부터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우리 상고사(上古史)가 이처럼 부실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사료(史料) 부족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후반 일연(一然) 스님이 쓴 (三國遺事)이며, 그나마 책 한 장 분량에 그친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는 우리 고대사를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일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미로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 사학계(史學界)는 일제가 연구해 놓은(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해 놓은) 고대사(고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고구려 건국 후 영토 확장 과정에서 ‘제2 송화강’ 부근의 ‘속말말갈’이 영토를 지키려고 581~600년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했다. 대부분 고구려에 항복해 고구려 신민이 되었으나, 궐계부(厥稽部)의 ‘만돌’과 그의 동생 ‘돌지계’는 항복을 거부하고 수나라로 피신했다. 수나라는 이들을 요서의 대릉하 부근에 두었는데, 동생 ‘돌지계’는 수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형 ‘만돌’과 그 기마부대는 탈출하여 중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요서 지방으로 이동한 유일한 말갈족 기병부대이다(『隋書』, 『太平寰宇記』, 『北史』).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동일 예족인 마자르족을 찾아가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파드의 지휘 아래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분지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헝가리 기록화. 기병대는 부여·고구려·말갈족..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

“낙랑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강단사학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는 대동강 부근이 되고, 다른 곳에 있었다면 그곳이 발상지가 되기 때문이죠.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의 하북성 동남쪽, 요령성(遼寧省)의 서쪽, 즉 요서 지역에 있었어요.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그곳에 있었던 거죠.” [INTERVIEW]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한 획 그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고조선, 중국 하북성 동남쪽 요서까지 지배했다” 중국 고대문헌에서 찾아낸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활동 무대가 중국 하북성(河北省) 동남쪽 요서(遼西) 지역까지 이르렀음은 물론 삼한, 부여, 고구려, 백제 또한 요서를 지배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