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봉우(桂奉瑀)

출처;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사방자(四方子), 뒤바보, 북우(北愚)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1959년
출생지함경남도 영흥
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은 사방자(四方子)·뒤바보·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韓人部) 5두제(五頭制)의 1인이 되는 등 노령 지역 한인사회주의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동휘계의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문창범(文昌範)을 영수로 하는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치열한 반목 관계에 있었다.

1921년 4월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도착, 제2차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이르쿠츠크 집단에 반대하는 사할린 의용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박애, 장도정, 김진 등과 함께 1921년 5월경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5년, 제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외교 활동에 힘입어 1921년 12월 출옥하였다.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계봉우 역시 이거,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만년을 보냈다. 계봉우의 무덤도 홍범도(洪範圖)의 묘소가 있는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있다.

저술활동

저술로는 최초의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종합적 서술이라 할 수 있는 「의병전(義兵傳)」이 있으며, 또한 노령 지역에서의 한인들의 생활상,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북간도(北墾島)」·「아령실기(俄領實記)」·「김알렉산드라」 등이 있다.

이 글들은 1920년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연재했던 것들로 독립운동사연구에서 자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조선역사(朝鮮歷史)』 등 역사 저술물도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장도빈(張道斌)

출처; 장도빈(張道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해방 이후 민중일보를 창간한 언론인. 국사학자.
이칭
호산운(汕耘)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888년(고종 25)
사망 연도1963년
본관결성(結城)
출생지평안남도 중화
 
정의
해방 이후 민중일보를 창간한 언론인. 국사학자.
 
개설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맞서 투쟁을 벌였으며, 한편으로 안창호(安昌浩)의 신민회(新民會) 비밀회원으로 가담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다니면서(4회 졸업) 국사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910∼1912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1913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가까운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崔在亨)·홍범도(洪範圖)·이동휘(李東輝)·이상설(李相卨)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李鍾浩)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썼다.

1916∼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하여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를 발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조만식(曺晩植)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하고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많은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1945년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일제 말에는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한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의 반론은 유명하다.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언론과 대항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해 대표가 되었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만나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尹潽善)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그동안 언론활동과 병행하여 1947년한국대학(韓國大學)을 설립하였고, 1948년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내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편찬위원과 고등고시위원을 지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8F%84%EB%B9%88

 

장도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도빈(張道斌, 1888년 10월 22일 ~ 1963년 9월 12일)은 한민족의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이다. 광복후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결성(結城)이고 아호(雅號)는 산운(汕耘)이다. 평안남도 중화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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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6)항일 논객 장도빈 주필 | 서울신문 (seoul.co.kr)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6)항일 논객 장도빈 주필

입력 :2004-07-15 00:00ㅣ 수정 : 2004-07-15 00:00 
 
장도빈 선생은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천년 가까이 잠자고 있던 발해(699∼926)를 처음으로 찾아낸 역사학자이다.

▲ 러시아 극동대학 송지나 교수가 우수리스크 지역에 남아 있는 발해시대 성곽 터의 축성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성곽은 다 허물어져 높이 3m,길이 10m 정도만 남아 있다.
우수리스크 이언탁 특파원 utl@seoul.co.kr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한 1908년 약관의 나이에 박은식 선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발탁됐고 와병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였다.그의 글로 알려진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후 신보가 일제에 의해 문을 닫기 전까지 3년 동안 단재와 ‘친동기 이상’의 친분을 쌓았고 그의 영향으로 역사에 눈을 떴다.양기탁 선생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밀리에 신민회에 가입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신한촌 여관방에서 단재와 동고동락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라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로 스며들었다.회고록에서 “신한촌에서 단재 선생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동고동락했다.”고 적고 있다.단재 선생이 주필로 있던 권업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물 설고 낯선 땅이었지만 1910년대 연해주 신한촌에는 선생을 비롯,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주역 5명중 배설(1909년 서거) 선생을 제외한 전원이 엇비슷한 시기에 드나들며 몸을 의탁했었다.마치 대한매일신보사를 연해주로 옮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천년 동안 잠자던 발해를 깨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 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양대 성지로 꼽힌다.

선생은 이곳의 옛 지명이 쌍성자(雙城子)였던 사실에 주목,틈 날 때마다 답사했다.당시 한인들은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쌍성자(우수리스크),수청(水淸·빨치산스크),추풍(秋風·수이푼),연추(延秋·크라스키노),동개터(나홋카),지신허(地新墟·치진헤)처럼 러시아 지명을 쓰지 않고 고구려,발해 때부터 전해내려 오던 한국지명을 썼다.

선생이 성벽,해자,절터 등 유적을 찾아내 발해의 동경성터로 추정했던 곳은 현재의 크라스노야르 성이다.성안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잡고 있어 크기와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성밖에는 토성이 남아 있었다.성을 감싸고 흐르는 수이푼강은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해자였다.성은 지명 그대로 남성(南城)과 서성(西城) 등 2개의 성(雙城)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쪽 성은 시가지에 편입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지만 남쪽 성의 절터에 방치돼 있는 4개의 현무암 주춧돌과 발해식 축성법을 보여주는 토성 일부는 아직 남아 발해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지난 1995년 우수리스크 일대를 발굴한 러시아 극동고고학연구소는 성내부의 경사면에 위치한 집터에서 온돌구조를 찾아냈다.9세기 당백자(唐白磁) 도편도 출토돼 발해시대 문화층 존재가능성이 확인됐다.

극동대학엔 장도빈기념관이 우뚝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아데우스카야 56번지에 위치한 극동대학 동양학부는 1899년에 세워진 동양학의 산실이다.무려 10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학 건물 옆에 한국학대학이 서있다.건물 이름은 ‘장도빈 기념관’이다.선생의 아들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이 사재를 들여 지었다.

선생의 ‘고토(古土)’ 발해에 대한 집착이 연해주를 대표하는 극동대학의 건물 이름으로 현재화한 것이다.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틀)=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이춘규 특파원

●중국 및 러시아(상하이,다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노주석 이언탁 박지윤 특파원˝
 
 
 

손진태(孫晋泰)

출처;  손진태(孫晋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 · 역사학자, 교육 관료.
이칭
호남창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900년 12월 28일
사망 연도미상
본관밀양(密陽)
출생지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주요 저서『조선민족문화의 연구』|『조선민족사개론(상)』
 
내용 요약음성 재생

손진태(孫晋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 · 역사학자, 교육 관료.
 
인적사항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는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남창 마을에서 손수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구포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는 큰어머니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1년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대학 부설 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다. 삼 년의 수학 과정을 마치고 1924년 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해 1927년에 졸업했다. 이어 제도(帝都) 도쿄에 거주하며 조선민속학의 전문가로 활약했다. 1932년 말에 세계 굴지의 동양학 전문도서관인 동양문고에 사서로 취임해 일 년 남짓 근무했다.

1934년 봄, 동양문고를 퇴직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했다. 다음 학기부터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문명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37년에 동교(同校)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도서관장을 맡았다.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았다. 이듬해인 1949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 1950년에 사범대 학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덧붙여, 1932년 연영화와 결혼해 슬하에 장남 손대인과 차녀 손경수를 두었다.

 
주요활동

우선 도일(渡日)주2 직후의 문예 활동이 돋보인다.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시 동인지 『금성(金星)』의 핵심 멤버로 『어린이』와 『금성』에 ‘역사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 등을 다수 발표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과 함께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며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 · 산촌으로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수집한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였다. 이에 혼합민족설을 전제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한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와 같은 학술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귀국 직후의 창립 총회에서 손진태는 김태준,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조윤재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줄곧 회무(會務)주3를 관장한다.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조선민속학의 성과들을 매만져 단행본을 상재한다. 그리고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집성하고 역사 교과서를 저술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편수국장과 차관을 겸직하며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한다.

 
학문과 저술 및 사상

손진태의 학문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민속학과 광복 후의 신민족주의사학으로 대별된다. 전자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신가유편』(1930)과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조선민족문화의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18편의 주요 논문을 수정하고 첨삭한 것으로, 신민족주의의 세례로 거듭난 ‘민족문화학’의 성과로 주목된다. 손진태는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서문에서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추구한 민속학이란 학문의 명칭을 ‘민족문화학’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또 이 책에 수록한 주요한 18편의 저본(底本)주4을 동학들에게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방법론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과거의 논문은 전면적으로 일단 폐기하려는 의도라고 그 까닭을 밝히기도 한다.

후자의 대표적 성과는 『조선민족사개론(상)』(1948)과 『국사대요』(1949)이다. 제목과 같이 우리 민족사를 개설하고 국사의 대강령을 논술한 내용이다.

손진태를 둘러싼 사상적 쟁점은 위의 두 개설서에서 강조된 신민족주의의 정치성으로 수렴되는데 그 요점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즉 반(反)식민주의 사관으로서의 신민족주의와 해방 공간의 중도적 정치 이념으로서 신민족주의, 이 양자의 당부(當否)가 핵심적인 논점이다. 종래의 손진태 연구에서 일반화한 이 두 가지 통설에서 실증적인 고찰로 여러 이견(異見)이 제기된 바 있다. 가령 1920, 1930년대에 펼쳐진 손진태의 민족문화론을 일제 만선사학(滿鮮史學)과의 관계 속에서 재고함으로써 타율 사관을 추수해 버린 그의 부끄러운 과거가 광복 후 신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문화학’에서 어찌 조만동조론(朝滿同朝論)으로 소거되는지를 천착한 성과, 그리고 신민족주의를 좌우합작 계열이 아닌 정통 우파나 극우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성과 등이다.

 

 

장도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도빈(張道斌, 1888년 10월 22일 ~ 1963년 9월 12일)은 한민족의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이다. 광복후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결성(結城)이고 아호(雅號)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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