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文一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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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평(文一平, 1888~1939)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민족주의 사학자로, 호는 호암(湖岩)이다.[1] 교육 활동과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고서적, 역사에 대한 연구 등을 하였다. 그는 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역사학자이다.

생애[편집]

1905년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교직에 있다가 1911년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학업을 중단한 채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 중국인 신문사에서 일을 하였다. 이 즈음 일본에서는 안재홍이 역시 정치를 공부하고 있어서 사귈 수 있었고, 중국에서는 박은식·신채호·정인보 등의 역사가나 김규식·조소앙·신규식·홍명희 등의 독립운동자들이 있어서 동지가 되었다.[1]

귀국 후에는 민족사학의 여러 인사들과 더욱 깊은 유대를 맺는 가운데 중동·중앙·배재·송도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30년 대에는 조선일보에서 역사연구와 민중계몽에 전념하였다.[1]

그의 연구물은 대개 이때 신문을 통해서 발표되었고, 《호암전집(湖岩全集)》으로서 집대성되었다. 그의 역사연구는 민족사학의 역사인식의 입장에서 행해졌으며, 민족사학의 한국 역사 체계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서 수행되었다. 그의 역사의식이나 역사학은 신채호의 주장에서 출발하고 단재사학이 제시한 문제의 한 끝을 구체적인 작업으로서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역사연구의 기본 목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우리의 처지, 사회내부의 모순관계를 반역아를 통해서 찾아봄으로써 사회 발전의 계기를 찾으려 한 것, 아(我)의 생장 발달 상태를 사상·문화·예술·풍속 속에서 찾고 거기에서 민족문화 또는 민족정신을 소생시키려 한 세 가지 점에 압축되고 있다.[1]

그는 '조선심(朝鮮心)' 또는 '조선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조선글은 조선심에서 생겨난 결정인 동시에 조선학을 길러주는 비료라 하려니와 조선글이 된 이래 9세기 동안에 조선의 사상계는 지는 듯 조는 듯 조선학 수립에 대하여 각별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차차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새 사상의 자극을 받게 된 조선인은 조선을 재인식할 때가 왔다.

 

 

출처; 문일평(文一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문일평(文一平)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중퇴하고 태극학회 일어 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1년 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주요 활동

1906년 말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에 「자유론」 등을 발표하였다. 1909년 2월 메이지학원 보통과 4학년 시절 교내 연설회에서 ‘청년과 신세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0년 2학기 평안북도 의주 양실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로 전근하였고,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토요강습소에서 대중 강연 활동을 하였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안재홍(安在鴻) · 김성수(金性洙) · 장덕수(張德秀) · 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학계보』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고, 같은 해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13년 1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租界)주1에서 생활하였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대공화일보(大共和日報)』사에 취직하여 논설을 쓰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동제사에서는 청년 유학생과 독립운동가 육성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이 설립되자 박은식 · 신채호 · 홍명희 · 조소앙 등과 함께 지도교수로 활동하였다.

1914년 4월 중국에서 귀국하였고, 1918년 박승빈(朴勝彬) · 오세창(吳世昌)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힘쓰고자 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여 3월 12일 종로 보신각주2에서 이른바 독립선언사의 일종인 「애원서(哀願書)」를 낭독하였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1월 6일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조선노동대회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 1월 잡지 『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 잡지 『 개벽』 1월호에 「갑자 이후 육십 년간의 조선」을 발표하였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 명의로 「전조선민중운동대회 개최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1924년부터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 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세 번째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역사 서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인 중 1명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2월 신간회 경성본부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기관지 『자활』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외일보사 논설부 기자 및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직하였다.

1928년 5월 잡지 『 별건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을 발표하여 ‘조선심(朝鮮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31년 조선일보사를 사직할 때까지 『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잡지 『 신민』, 『 신생』, 『 문예공론』 등에 조선 문화와 한글, 조선사에 관한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중앙고등보통학교 조선사 담당 교사로 전근하여 학생 · 청년의 역사 교육에 힘썼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1934년 5월에는 조선 문화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정다산의 위적 – 99년기에 제하야」를 발표하여 정약용의 업적과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1935년 7월 16일 다산 정약용 서거 백 주년 기념회를 개최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한글과 조선사에 관한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7년 7월 16일에는 조선방송협회 라디오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성 부근의 탐승에 취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 16일에는 신조선사에서 『 여유당전서』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3일 자택에서 급성 단독(丹毒)주3으로 사망하여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학문과 저술, 사상과 작품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주로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정신적 · 내면적 침략이 갈수록 심해져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주4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근원적 연구보다는 역사성의 부여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 논술이 지니는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분야의 다양성이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가 지닌 궁극적 목적이 역사 지식의 보급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자연 · 사적 · 예술 · 풍속 등 남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은 민족의 장점을 발견해 민족의 미래 개척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논술의 제목 자체가 서술성을 지니고 있다. 「한양조(漢陽朝)의 정치가 군상」, 「사상(史上)의 기인」, 「사(史)의 도(都) 강화(江華), 시(詩)의 도(都) 강화(江華)」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목을 취하였다.

셋째, 발표하는 글은 대부분 단문으로 이루어졌다. 「대미관계 50년사」 등 몇 편은 예외이기는 하나, 대부분 문일평의 글은 단문이다.

넷째, 평이한 문체이다. 문일평의 사풍(史風)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소화해 이를 쉽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지극히 객관적인 논조 위에서 민족적 긍지를 고양하였다. 이는 민족사를 우선 반성적으로 고찰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민족사 중에서도 대외관계사, 특히 근세 외교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적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사에 나타난 파쟁주5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성리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에 결부하여 식민사학자들의 당파성 문제와는 궤를 달리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사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반면, 문일평은 민족사의 성찰과 반성에 역점을 두었다.

다른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역사 연구의 최종 결집으로 일원적 정신을 제시하였다. ‘조선심(朝鮮心)’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심’은 추상적인 관념론에서 벗어나 다분히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심’의 결정(結晶)을 한글로 보았고, ‘조선심’은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또, 실학의 실사구시(實事求是)주6 정신을 자아(自我)의 재검토 · 재수립으로 보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조선심’은 우리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한 민중도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중 우선, 실리 우선의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외교 자세를 타산성과 실리를 우선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문일평의 사학 정신은 순수성보다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다.

구사(舊史) 비판을 통한 독특한 사론(史論)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실(史實)을 흥미롭게 재구성해 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 민족사에 대한 반성과 민족혼의 발굴을 궁극적 목표로 하면서도, 과대(誇大)주7와 부회(附會)주8, 독단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안재홍(安在鴻)

출처; 안재홍(安在鴻)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 · 사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호민세(民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남성
출생 연도1891년(고종 28)
사망 연도1965년
본관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출생지경기도 평택
내용 요약음성 재생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 · 사학자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일제 식민지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고대사 연구에 몰두,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 · 남궁억(南宮檍) · 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 · 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 · 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 · 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같은 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 · 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주1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 · 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 동안 복역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년∼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 · 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앙위원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10월 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6년 한성일보(漢城日報)의 사장 · 비상국민회의 의원 · 민주의원 의원 · 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황의돈(黃義敦)

출처; 황의돈(黃義敦)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출생 연도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1964년
출생지충청남도 서천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접기/펼치기개설

호는 해원(海圓). 충청남도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75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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